[스크랩] 2013년6월26일 수요저녁 요한계시록2장12-17 버가모교회에 주신말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은 일곱 교회중에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성좌산 기도원에 갔을때 집회가 끝나고 기도원을 나왔는데 한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통성명을 하고보니 그분은 남해가 고향이었습니다. 이름이 이상경집사님 이신데 부모님이 이동의 무림교회를 섬기고 계셨고 이상경집사님도 믿음이 좋은 집사님 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도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금요일 새벽예배시간에 이상경집사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이상경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상경집사님은 사업차 아프리카에 가서 지내셨는데 몸에 이상이 있어서 검진을 한 결과 대장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치료중에 기도원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상경집사님은 부모님이 걱정 하실까봐서 부모님께는 말도 안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해 세광교회를 통해서 많은 기적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암병에 걸린 분들이 우리 남해 세광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치유함을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상경집사님을 알게 하시고 그분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심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는 하나님께 더 빨리 상달 됩니다. 사심이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기에 응답이 빠른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상경집사님의 대장암이 낫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어제 류인종집사님이 오셔서 아드님 류강윤목사님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류강윤목사님이 캐나다에서 귀국하셔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달간 감암치료를 위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류강윤목사님을 위해서 날마다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류강윤목사님도 깨끗하게 치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에는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 나셨고 서머나교회에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 나셨고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모습으로 나타 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날선 검을 가지고 나타나셨다는 것은 지난번에 나타나신 두 교회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먼저 버가모 교회를 칭찬 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안다고”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미국에 살던지 땅끝마을 남해에 살던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를 자세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세워져 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당시의 버가모는 로마가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릴때 행정수도로 삼았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고 당시에 20만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한 최고의 도서관도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는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최고의 교육도시요 행정도시 였습니다. 게다가 버가모에는 최초로 살아있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세워졌고 차례로 하드리안황제와 트라얀황제의 신전까지 세워 지면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버가모에는 오래 전부터 길이 100m 폭 40m의 엄청난 신전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과 더불어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세라피스 신전, 데메데르 신전등 각종 신들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처처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데메테르 신전에는 그 유명한 바울사도가 설교중에 인용한 “알지못하는 신에게”라는 명문이 데메테르 신전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수많은 신전들을 건축하고 우상숭배에 찌든 버가모를 향하여 예수님은 버가모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도시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를 칭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라고 칭찬 하셨습니다.
어떤 핍박과 환란이 와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돈버는 것도 아니요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진리를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요14;6, 8:12)
진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교한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를 칭찬 하셨습니다. 13절 중반에 보면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 하였도다”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버가모교회의 감독인 안디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때에 진리를 지키다가 총독 앞에 송환되었습니다. 당시의 총독은 정치적인 지도자요 황제 숭배를 책임진 지도자입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황제의 동상 앞에 향을 피우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하면 안디바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동상앞에 끌려가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화가난 총독은 사람을 고문할 때 사용하는 큰 놋쇠로 만든 황소를 불에 시뻘겋게 달구게 하고 그 놋쇠 황소 위에 안디바를 올려 놓음으로서 안디바는 달궈진 놋쇠 황소 위에서 처참하게 타 죽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와같이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 였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 교회에는 책망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가나안땅의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그에게 많은 뇌물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발람이 이스라엘민족을 저주하려고 갔는데 이상하게 입만 열면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만 선포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선포 하시자 모압 왕 발락은 더 많은 금은보화를 발람에게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 하라고 거듭 부탁을 합니다. 그때 발람은 발락이 내 놓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꾀를 냅니다. 그래서 발람은 발락왕에게 우상숭배의 축제와 잔치를 벌이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대해서 모압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서 음란에 빠지게 하라고 발락에게 귀뜸해 줍니다.
발람 선지자는 발락왕이 주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꾀를 알려 주었습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기를 “이 백성은 사술이나 저주로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가지 저들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발락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방법이 뭐요? 가르쳐 주면 내가 많은 예물을 주겠소” 그래서 발람은 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이 지키고 계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매우 엄격한 분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해도 죄를 지으면 용서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게 만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죄만 짓게 하면 됩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숭배와 음란입니다. 음란과 우상 숭배로 저들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발락왕은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습니다. 발람이 떠난 후에, 발락은 발람의 꾀를 실천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주고 미디안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데려 왔습니다. 이 여자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여자들이었습니다.
발락은 그 여자들에게 “너희들은 이스라엘 진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족장들을 유혹하여 음행에 빠지게 하고, 그들을 데리고 우상 숭배에 참석하게 하라!” 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발락의 명령을 받은 미디안 여자들은 이스라엘 진으로 은밀하게 접근했고 곧 이스라엘 진영을 지키는 보초들에게 붙들렸습니다.
보초들은 이 여자들을 족장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스라엘 족장은 이 여자들을 문책했지만 여자들은 눈웃음을 치면서 족장들에게 애교를 부렸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광야 생활에 매우 지루하고 따분해 했습니다. 그래서 향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아름다운 미디안 여인들을 보자 그녀들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그 여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미디안 여자들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몸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장들이 그 여자들과 간음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장들과 간음한 여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진영을 드나들었고 나중에는 보초들도 미디안 여인들과 간음을 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에 빠져들었습니다.
미디안 여자들은 자기와 관계를 가지면서 친해진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기들의 축제와 제사에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미디안 여자들을 좇아가서 먹고 마시고, 음행에 빠졌고 나중에는 미디안 여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점점 미디안의 신인 바알브올을 섬기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 났습니다.
민수기25장1절로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 하니라 모압 여자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하매 이스라엘 백성이 가서 먹고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고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 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 하시니라”
결국 하나님이 진노 하셔서 이스라엘에는 염병이 발생했습니다. 그 염병으로 인해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자 아론의 증손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화가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 드리려고 창을 들고 진중으로 나가서 막사를 조사하다가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자와 함께 막사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가서 그 두사람이 포개져 있는것을 보고 두사람을 한꺼번에 창으로 꿰뚫어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염병이 그쳤다고 민수기 25장8절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버가모교회에 이 발람과 발락사건을 말씀 하시면서 너희중에 발람의 꾀에 미혹된 것처럼 정욕에 미혹되어서 음란에 빠진 자가 있다고 책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의 칼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음란은 세상을 타락시키고 성도를 타락 시키는 일등 공신입니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나이든 사람들도 음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의 종도 음란 때문에 귀한 사역을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 비재 합니다. 그래서 음란을 조심하고 음란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어서 버가모 교회에는 15절과 같이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 병행합니다. 발람은 돈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한 선지자였습니다. 겉으로는 번드르한 선지자처럼 행동 했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가식과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돈에 눈이 멀고 자기 영광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거스린 사람이 바로 발람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뒷전이고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일하는 종들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니골라당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에 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쓴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라는 책에 보면 무당과 크리스챤을 비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무
당을 찾아간 사람이 두 손을 비비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경건하고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증거합니다.
굿을 할때 용한 무당에게 희사하는 돈의 금액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보다 훨씬 더 많다고 증거 합니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부적을 훨씬 더 귀하게 다룬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당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저 사람은 훌륭한 신앙인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당을 찾아가고 점장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미신을 좇는 자 또는 우상숭배자”라고 말을 합니다. 미신과 진실한 신앙은 차이가 있습니다.
미신을 좆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이 돈이나 능력 혹은 인간의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 미신입니다. 미신을 믿고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자기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뇌물과 재물 또는 주술이나 제사등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신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이 미신의 특징입니다.
이에 반해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미신은 자기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돈으로 신을 사는것이 미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변화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열심을 품고 예배에 동참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돈으로 신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의 목적만을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을 가진 크리스챤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삶이 변화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내 자신은 변화되지 아니하고 복을 받기를 바라는 기복신앙이 니골라 당입니다. 당시에 니골라당은 교회 안에 사악한 교리를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라고 하는 교리를 주장 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짓는 자유다”라고 그들은 주장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를 계속 지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 하는 교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 논리는 우리에게 대단히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죄에 대하여 우리를 참 평안하게 만드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 엄청난 사랑을 만홀히 여기고 함부로 죄를 짓고 내멋대로 산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닳은 사람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니골라 당은 교묘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해서 크리스천의 삶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런 엉터리 사조가 팽배한 버가모 교회를 주님이 무섭게 질책하신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이런 모든 사람들이 마귀에게 미혹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 그림에 보면 마귀는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눈은 위로 무섭게 찢어진 모습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북한괴뢰를 그릴때에도 괴뢰군을 빨간 뿔 달린 여우와 늑대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다가오는 마귀는 이마에 “나는 사탄이다”라고 써 붙이고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착하고 아름답고 선대하는 모습으로 접근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이단들의 전략이 하나같이 이와 같습니다. 이단은 일단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합니다. 신천지가 그렇게 합니다. 간도 빼줄것처럼 섬기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천사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즘 목회자를 쓰러뜨리는 또하나의 방법이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한번 미혹되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진리로 가는 길은 좁은 문이라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말씀 합니다.
조선일보 위클리 비즈에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는 한 사례가 소게 되었습니다. 가구업계의 애플이라 불리는 “허먼밀러”사의 워커 회장이 말하기를 “소비자의 말을 듣지 말라”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기업들은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소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는데 그는 반대로 소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선언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비자는 자신들이 이미 알고있는 것들만 이야기 하기 때문에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팩시밀리를 처음 개발할 때 개발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문서를 즉시 보낼 수 있고, 편지도 즉시 받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 모두가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틀 정도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돈을 더 들여서 그런것을 만듭니까? 그리고 그런 기계가 없는 친구와는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으란 말입니까?” 대다수가 반대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듣는것은 새로운 기계나 상품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교회가 힘을 잃거나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타락하는 이유는 “진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세상사람에게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재철 목사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목사님이 가르쳐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설교를 들어도 그때 뿐이고 교회밖으로 나가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내 생각대로 내 감정 내키는 대로 사니까 힘을 잃은 크리스챤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아닌지를 묻고 사는 사람이” 크리스챤입니다. 답답해도 힘들어도 고난이 계속 되어도 안디바처럼 “이것만은 절대로 포기할수 없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어!” 라는 결단으로 주님을 좆아야 참된 크리스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내멋대로 사는 성도들을 향해서 주님은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오늘 본문 16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회개하라!”라는 말은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의 모습이었다고 사도요한은 증거 합니다. 히브리서 4장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심령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다”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서야 잘못된 이단들과,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하는 교리들과 내 자신을 미혹하는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끝으로 17절에는 이긴자들에게 축복의 말씀이 선포 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결산하는 심판의 때가 되면 두 가지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감추었던 만나를 받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는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온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만나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당하고, 환란을 당했어도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의 만나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흰돌을 주시는데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받은 사람은 세상의 유혹과 쾌락을 이겨낸 사람들로서 영원한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게 됩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쓴 큐티 365에 보면 간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영국의 한 기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사실상 성공할 가능성이 1%도 없는데, 어째서 이런 비폭력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고생을 계속 하십니까?”
그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면서 “반드시 성공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진리가 졌다는 기록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진리 편에 있는 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간디는 자기 자신을 진리 편에 세우는 것이 바로 승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정말 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받은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좆아서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믿음을 지킨것 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얼마 전에 Christian MBA과정에서 설교를 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의 특강을 보았습니다. 빛에 시달리던 이경숙총장은 두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만큼 빚에 시달렸습니다. 세금 고지서는 계속 날라오고,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 투쟁을 하고, 노조는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면서 최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경숙총장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시간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는데 “내가 지금 한심한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 무거운 짐을 자기가 혼자지고 고생하는 것이 한심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학교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후에 이경숙총장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젼과 꿈을 물을 때마다 두가지를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 보세요 그러면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겁니다!. 저는 제가 만난 좋으신 하나님을 당신도 만나고 모든 사람들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모습으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몸이 쪼개지는 아픔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끝까지 믿음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잘 유지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