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14년11월23일 주일낮 눅9장28-36 변화산의 영광과 수난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습니다. 그곳에 가신 이유는 따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해서 였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제자들에게 진리도 가르치시고 기도도 하시면서,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 수련회와 같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수련회 도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미 심장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고 축복을 선포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 한번 잘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일생 일대의 칭찬을 듣게 되고 천국의 열쇄를 받게 됩니다. 실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베드로를 칭찬하신 예수님은 비로소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과 사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16장 21절에 증거 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후에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항변하면서 “예수님!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이 붙잡혀 가서 고난을 받고 죽게되는 그런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강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얼마 전에 베드로를 극구 칭찬하시면서 엄청난 축복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돌변하셔서 “이런 사탄마귀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구나! 내 뒤로 물러가라! 저리 꺼져라!” 하고 무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조금전에는 나를 그렇게 칭찬 하더니, 이제는 또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야단을 치고 책망을 해? 무슨 스승이 저런 스승이 있어? 에라 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스승같으니! 나는 너같은 스승은 따를수가 없다” 하고 사람들에게 “저 선생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선생이니 틀렸습니다! 저 선생은 도무지 우리를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떠들어 댔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책망을 들었을 때 얼른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고 회개를 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이때에 책망을 듣고 화가나서 예수님을 떠나 갔다면 베드로는 은혜에서 멀어져서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즉시로 돌이키고 회개했기에, 예수님은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킨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 갑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엎드려서 회개한 베드로에게 큰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변화산은 방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받은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이라고도 하고 갈릴리의 다볼산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다볼산은 그 뜻이 “높은 산”입니다. 마태복음17장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높은 산에 올라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볼산은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명산입니다. A.D 5세기 경에 교부 제롬이 다볼산을 둘러보고 나서 “다볼산은 경이롭고 둥글고 아름답고 높은 산이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이 변화산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았습니다. 그리고 6세기경에는 베드로가 고백한대로 초막 셋을 상징하는 세 개의 거대한 예배당이 다볼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 예배당은 1924년에 다시 개축되었는데 이스라엘 성지에 지어진 예배당중에 가장 아름답게 지어 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 많은 순례자들이 예수님이 올라가셨던 다볼산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변화산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이기에 귀한 곳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그 산에 올라가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눅9:28) 라고 증거 합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안병욱(安秉煜) 교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 하는 분입니다. 그는 “산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산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생이 우울해질 때는 산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륙색을 짊어지고 조용한 산길을 친구와 같이 걸어가노라면 인생의 우울이 어느 새 안개처럼 사리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에는 산에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오를 때 생의 용기를 느끼고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산의 정기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Himalaya)에는 해발 8천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나 있습니다. 그 중에 잘 알려진 봉우리가 바로 안나 푸르나봉입니다. 이 산의 정상에 올랐던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는 그 산에 올랐다가 동상에 걸려서 열 손가락을 짤라내고 그리고 발 가락도 몇 개를 짤라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하기를 “그 산이야말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서 올라 갈 만한 보물이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산에 오릅니다. 높은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산에 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름답고 높은 산에 올라가신 이유는 안병욱교수처럼 건강상의 이유나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또는 모리스 에르조그처럼 높은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도가 뭡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만나서 훌륭한 사명을 감당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중에 상당수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방주를 지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받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곳은 호렙산입니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고 다시 사십 주야를 달려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도 감람산에서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게서 변화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시자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9장29절에 보면 “기도 하실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에게 임해서 나의 용모가 변화 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 올라가서 40일을 머물렀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대면한 후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온 모세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찾아 보기가 힘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근심과 염려 걱정 때문에 늘 어두운 표정으로 살아 갑니다.
요즘 여자들은 성형수술을 많이 합니다. 예뻐지기 위해서 수술을 합니다. 그러나 성형비를 안들이고 예뻐지는 방법이 바로 기도 입니다. 기도하면 얼굴이 밝게 빛이 납니다. 밝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은 분들은 기도하면 됩니다.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져야 얼굴이 빛이나고 아름다운 얼굴이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서 그 영광의 빛이 내 얼굴에 반사되어 얼굴이 아름답고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기도할 때 그 옷이 얼마나 빛이 났는지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희어 졌다고(막9:3) 증거했습니다. 세탁기나 표백제를 선전할 때 보면 빨래가 하얗게 반짝 반짝 빛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에는 그런것들로는 흉내도 못낼 정도로 옷이 빛이 났다고 마가는 증거 합니다. 기도하실 때 얼굴도 변하고, 입고 있었던 옷까지도 바뀐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증거하는 증거를 실제로 체험 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 한번 간증을 했지만 못들은 분들을 위해서 다시 소개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같은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모여서 연합 부흥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첫째날에 김만철씨를 모시고 간증집회를 했고 둘째날에는 김인식목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김만철씨는 북한의 청진의과대학 병원에서 40년 동안 의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망이 없는 북한 생활에 절망한 나머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북한을 탈출할 준비를 했습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장모·처남·처제까지 모두 11명을 청진호에 태우고 청진항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탈출한 그는 일본 영해인 대화퇴(大和堆:야마모토퇴) 근처에서 엔진 고장으로 수 일 동안 표류하다가 1월 20일 에야 일본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일본 에 도착한 김만철씨 일가를 한국으로 보내 줄 것을 일본에 공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의식해서 김만철씨를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들을 다시 공해상으로 추방하겠다는 입장을 시사했습니다.
한편 북한은 일본측에 김만철씨 가족을 북한으로 송환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그들을 공해상으로 추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은 공해상에 북한 경비정을 급파해서 김만철씨 가족을 데려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김만철씨 일가가 제3국으로의 망명을 희망함에 따라 일본은 그들을 타이완으로 보냈습니다. 2월 3일날 타이완에 도착한 김만철씨 일행은 우리 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드디어 2월 8일날 김포공항에 도착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25일만에 드디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가 북한을 탈출해서 우리나라까지 오는 동안에 기가막힌 여러번의 큰 위기를 만났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서 결국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만철씨는 우리나라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자기가 탈출했던 피말리는 25일동안의 사건들을 소개 했습니다.
김만철씨는 북한에서 탈출한 후에 폭풍우 속을 행해하다가 기관고장을 일으켜서 수일동안 동해바다와 일본해 바다를 표류하다가 일본땅에 도착했는데 그 모든 과정에 철저하게 하나님게서 개입 하셨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청진항을 탈출한 사실을 알게된 북한은 아침에 즉시로 비행기 수십대를 띄워서 그들이 탄 배를 폭격해 버리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전투 비행단이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기적이 벌어 졌습니다. 갑자기 아침부터 안개가 끼기 시작 하더니 짙은 안개가 땅과 하늘을 뒤덮었는데 그 안개가 하루종일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짙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자 폭격하려고 출동한 비행기들이 할 수 없이 다 북한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땅을 밟기까지 북한과 일본과 대만과 한국까지 네 나라가 외교문제로 인해서 긴장과 갈등속에서 김만철씨 가족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만약에 자기들이 다시 북한으로 끌려 갔다면 자기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김만철씨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김만철씨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하나님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제발 대한민국으로 가게 해 주세요 북한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게 해주세요”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김만철씨는 폭풍우 속에서 배가 곤두박질을 치면서 행해하던 세시간 동안에도 “하나님 한번만 저희를 살려 주세요 저희를 살려 주시면 저희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폭풍우는 벗어 났는데 배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서 수일동안 표류 하다가 결국 일본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김만철씨가 뒤늦게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그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자기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김만철씨가 그 기가막힌 과정을 두시간동안 간증을 하는데 지나온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했다는 고백을 하는 김만철씨의 얼굴이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해가 빛나는 것처럼 광채가 났습니다. 마치 “변화산의 예수님이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이와같이 얼굴에 은혜의 빛이 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과정을 간증하는 김만철씨의 얼굴이 마치 연극무대에서 강한 조명을 비추어서 주인공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것처럼 김만철씨의 얼굴이 해같이 빛이 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천국의 영광이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덧입고 환한 빛가운데 거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또하나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 내리셨습니다. 오늘본문 30절에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천국에서 불러 내려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 이래로 가장 큰 기적중에 기적사건 입니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내려온 엄청난 기적입니다. 이런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 당시로부터 1,5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죽은지가 1,500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따지면 모세는 죽은지 3500년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 당시로부터 1,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분명히 살아서 변화산에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부활하여 모세와 엘리야 같이 썩지 아니할 몸과, 영생하는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믿은 사랆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 내리셨습니까? 성경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기에 두사람을 불렀다고 증거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의 완성자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구원할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때까지 구속 역사의 과정을 대표하는 인물들 입니다. 먼저 모세는 일찌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한 사명자로서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그 백성을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 모세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구속사의 원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 맞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나라가 국가적으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킨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가 바로 엘리야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예수님은 세상에 다시온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
이와같이 모세와 엘리야는 인류의 구속역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감당한 두 사람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 내려서 그들과 구원사역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그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었입니까?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세사람은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면 “이제 성공했으니 어디한번 누려보자” 하고는 원없이 즐겁게 살면서 쾌락을 추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논의하셨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죽기로 작정하시고 자기의 죽음에 관해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 올라갔지만 기도는 하지않고 깊이 잠들었던 제자들이, 잠결에 두런 두런 하면서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에 문뜩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깨서 보니까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계셨고, 그 옆에는 자기들이 일평생 흠모하면서 존경했던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그 귀한 장면을, 졸며 잠을 자는 바람에 다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겨우 마지막 대화내용 한 부분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제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는 다시 하늘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황급하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장소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광채를 띄고 계시고 하늘나라에 있어야할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 감격해서 33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에 관해서 상의를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자기눈에 보여진 영광만을 보고서 “여기에 집을 짓고 우리 모두가 여기서 영광스럽게 한백년 살아 봅시다!” 하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사탄마귀는 언제든지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들을 미혹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시험에 들만한 약점을 파고들어서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해서 정작 감당 해야 할 사명을 포기하게 만들고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의 아니게 종종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엉뚱한 말이나 늘어놓게 된 것은 주님이 기도하는 시간에 잠만 자고 있었기에 그런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지하게 사명의 길을 가고 있는데 베드로는 자다가 깨어서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33절 하반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말은 자기도 알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말이었다고”기록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횡설 수설 하면서 여기에 세개의 집을 짓고 거기서 같이 살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영광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예수님도 영원한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정 반대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뜬금없이 내 뱉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에 베드로가 함부로 떠벌린 제안은 인류의 구속사를 위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예수님에게 큰 상처와 장탄식이 될만한 고백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무런 책망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5절에 보면 “구름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6·25사변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도에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영국 런던에서 큰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부흥회에 한 숙녀가 핸드백을 메고 성경 찬송을 들고서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숙녀의 뒤를 두명의 남자가 따라들어갔습니다. 그 숙녀가 앉은 자리 옆에 남자 둘이 앉았습니다.
빌리그레헴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숙녀 옆자리에 앉은 남자들이 설교가 끝나갈 즈음에 수근 수근 대면서 떠들어 댔습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설교를 마친 후에 초청을 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이나, 혹은 믿다가 낙심 중에 있었는데 오늘 이곳에 나오신 분들 중에 다시 예수 믿고 새롭게 출발하고싶은 분들이 계시면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십시오!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남자들 중에 한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그를 붙잡고 “너 왜 이래? 우리 밖으로 나가자!”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일어난 남자가 “나가려면 너 혼자 나가라! 나는 목사님이 계신곳으로 갈거다” 합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앞으로 나가기 전에 지갑을 꺼내더니 옆에 있는 아가씨에게 주면서 “미안합니다. 당신의 지갑을 훔쳤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더니 앞으로 나갔습니다.
알고보니 이 두사람은 도둑이었습니다. 멋진 숙녀가 돈푼이나 있겠다 싶어서 예배당 안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부흥회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당에는 예배드리는 사람만 오지 않습니다, 이단도 오고 노력질하는 이리도 오고 도둑놈도 옵니다. 큰 교회에서는 종종 가방을 도둑 맞습니다. 예배 시간에 그리고 식사 시간에 가방이 없어 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훔친 지갑을 숙녀에게 주고는 앞으로 나가서 “저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예수님만 믿겠습니다”하고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받은 그는 빌리그레함 목사님에게 섬길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제안했고 목사님은 그 제안을 받아드려서 그는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따라 다니면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서 수발했고 믿음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도 해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못했기에 여전히 죄악된 생활로 되돌아가 버렸지만 한사람은 말씀을 듣고 변화 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각의 변화, 생활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정의 변화, 신앙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제자들에게, 자기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기적에 넋이 나간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그 영광의 순간만을 바라보면서 그 영광만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늘의 영광을 맛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게되면 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신앙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에 새로운 힘을 얻는 기폭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영광만을 붙잡고 살 수는 없습니다. 신령한 체험을 하고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입신을 하고, 환상을 보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오는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삶을 통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천종호 판사님은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천종호판사님은 지지리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명의 식구들이 달동네 단칸방에서 처절한 가난을 경험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성공해서 우리 가족을 편하게 살도록 해야 겠다”라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한 친구가 그를 교회로 인도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법조계에 들어 서면서부터 출세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동료들과 상사들을 만났고 법조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밤마다 법조계 인사 정계인사 재계인사들을 만나서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문화는 술 문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나 많이 마십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절대로 취하도록 마시거나 인사 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법이 없습니다. 술을 마셔도 기분좋을 정도로 마시지 더 이상은 안마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차 2차 3차 계속해서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기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음주운전으로 대형사고를 내기도 하고 술김에 큰 일을 벌이기도 하고 술마시고 타락하거나 술 중독이 되거나 음란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천종호판사님도 술 때문에 인생이 타락하기 시작 했습니다. 인맥을 쌓는다는 핑계로 거의 10년동안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까 인맥은 좋아 졌는지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게 타락했고 형편없는 인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아내가 퇴근해서 들어온 남편에게 강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 이렇게 살려고 판사가 됐어요? 부와 명예가 그렇게 중요해요? 난 더 이상 이런식으로 사는 당신과는 못살겠어요!”
그런데 그 말이 천종호판사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아내가 강하게 말한 그 한마디가 그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는 그날 서재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라는 각성과 함께 마음을 돌이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동안 성공을 위해서 쌓아온 인맥과 술을 다 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한 판사가 되겠습니다”
당시에 천종호판사님은 부산 가정법원의 소년부 담당 부장판사님로 재직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소년부 재판을 담당할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재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년범의 문제는 처벌보다 사랑이 우선이고 가정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문제가 해결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천종호판사님은 재판정에 들어온 아이들의 죄목을 살펴본 후에 먼저 아이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호통을 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로 하여금 부모앞에 무릎을 꿇고 부모에게 용서를 빌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크게 열 번을 외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얘야 미안하다” 라고 이야기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끌어않고 울면서 화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재판을 했더니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끌어않고 울 때 방청객들도 울고 법정에서 재판하는 판사와 모든 직원들까지 함께 울었고 그래서 딱딱하고 근엄한 법정은 늘 화해와 눈물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천종호판사님은 재판을 받으러온 소년범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그 아이들에게 먹을 것도 사주고 용돈도 주면서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새사람이 되도록 지도 했습니다. 심지어 판사님은 큰 죄를 짓고 재판을 받으러와서 울면서 용서해 달라는 아이들에게 “아니다, 우리도 너희에게 미안하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히 2010년 부터는 소년원에서 나온 후에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기독교계와 사회 복지계를 찾아 다니면서 사법형 그룹홈을 만들었습니다, 천종호판사는 그룹홈을 만드는 일에 사비를 털어서 도와 주었습니다. 그래서 열곳의 그룹홈을 만들어서 그곳에 많은 소년 소녀들을 수용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교화 시켰습니다.
그런데 천종호판사님이 계획해서 세운 그룹홈에 사는 아이들이 놀랍게 변해서 천종호판사님과 함께 40일 새벽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세례도 받고 다시 학교에 복귀한 아이들은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있습니다. 일반 소년범의 재범률은 70%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종호판사님이 세운 그룹홈 출신 소년들의 재범률은 18%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천종호판사님은 고백하기를 “내가 탕자처럼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 왔을 때 나를 기꺼이 받아준 하나님 아버지처럼 나도 아버지의 심정으로 탕자같은 아이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비행 청소년들을 처벌이 아닌 사랑으로 인도함으로서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를 받아서 새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한 대한민국의 희망이 되기에 부족한 저도 그 귀한 사명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천종호판사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함으로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찬송하라면 찬송하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회개 하라면 회개하고 전도하라면 전도하고 충성하라면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요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밤낮 기도원이나 쫓아 다니면서 신비한 체험을 구하거나, 빤짝하는 은혜의 순간을 사모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선포하신 음성은 에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음성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축복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병낫는다, 잘된다”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복받고 병낫고 잘살고 부자되는 것 만이 복이 아닙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척척 응답받는다고 해서 그것만이 대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십자가의 쓴잔을 내가 마시지 않게 해 주십시요”라고 하나님께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를 하셨지만 그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고통중에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으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철절하게 돌아가신 그 순간이야말로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기도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 져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길이 열렸기에 예수님은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닳아야 합니다.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들은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하늘영광이요 우리 모두가 사모하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예수님이 본래부터 가지셨던 영광이고 또 다시 얻으실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누리려면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통과할 때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고난은 천종호 판사님처럼 소년범들을 섬기는 일이 될수도 있고, 이지선양처럼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었지만 그 모든 상황을 받아 드리고 온 세상에 다니면서 자기를 괴물처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간증하는 고난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광입니다. 그래서 병들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고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한 축복은,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들도 환란과 고난이 올때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게 하시려고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십자가 수난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알아듣지 못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왜 제자들이 못 알아 들었습니까? 아이큐가 낮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거절하거나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에 관한 설교를 하신후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서 이 설교는 마음에 안든다고 냉정하게 예수님을 떠나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말씀 하시는 내용과 제자들의 생각은 180도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말씀 하셔도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질 수도 있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신앙의 연조와 신앙의 질이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순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조가 길어지고 직분이 높아질수록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생각하지 말아야 될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좋고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관심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연조가 깊어지다 보면 하나님보다 자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교회에서 더 큰가? 누가 더 영향력이 큰 가?”를 생각하게 되고 “봉사를 하다보면 나를 좀 알아 달라고 하면서 교만해 집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왕이되면 자기들의 서열대로 권력과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종종 서열에 대해서 쟁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보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희생과 사랑과 섬김과 순종이 크리스챤의 미덕이라고 말씀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세상 영광만 붙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초막 셋이라도 지어서 그 영광을 땅에서 누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영광과 행복을 좋아 합니다. 부자가 되고싶어 합니다. 세상 부귀영화를 얻어야 성공한 신앙이고 복을 받은 신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고 베풀고 나누고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성공한 신앙인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다라가는 사람만이 천국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영광에 동참 하려면 주님처럼 낮아져서 끝까지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윌리암 쥬커만(William Zuckerman)은 “유대에서 온 망명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셨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망명을 해서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학문의 도시에서 철학자들을 제자로 삼아 권력의 기반을 닦은 후에 다시 적절한 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면 예수님은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추대를 받아서 틀림없이 유대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포기하고 갈보리에서 도망쳐 버렸다면 바울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요 그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망치지도 망명하지도 않으셨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만일 예수님이 도망치셨다면 사망권세가 왕노릇하고 사탄마귀가 판을 치기에 천국에 갈 사람도 없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갈보리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것이다.
이와같은 진리를 깨닳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고백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상처로부터 인생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제공하신 희생을 우리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과 영생에 동참하게 됩니다” 라고 증거 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기적과 행복과 부자되는 신앙만 좆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도 기꺼이 받아 드리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받으시고자 하는 영광이 있다면 힘들어도 견디고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도 주님이 뜻하신 일이 있음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에게 보여 주실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면서 우리도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희생을 가슴에 품고 주님만 따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