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설교를 들어보면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는 멧세지들이 많이 증거 됩니다. 시대적으로 교회가 해야할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6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기도원과 기독교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교회와 직장교회까지 합하면 7만개의 교회와 일천 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와서 120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이처럼 큰 부흥을 이룬 것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양적인 부흥에 발맞추어서 질적 부흥이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점도 많습니다.
바닷물속에 녹아있는 소금은 약 3.5% 라고 합니다. 아주 소량의 소금이 바닷물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3.5%밖에 안되는 소금 때문에 바닷물은 항상 짠맛을 유지하면서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오염 물질을 정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 세상은 부패하지 않고,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끝없는 사건사고와 부정과 부패가 계속 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맞서서 싸웠습니다. 당시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죽기를 마다하고 애국심을 발휘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 땅의 희망과 등불 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교회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존경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도 전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일어난 운동입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선봉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당시에 기독교 인구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 가운데 2%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야말로 민족의 미래였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서구의 발전된 교육과 의료, 음악과 체육, 문화가 소개 되었습니다. 한국 근대화 초기에 우리나라의 모든 의사들과, 음악인들, 그리고 사회 문화발전에 기여한 분들의 90% 이상이 예수믿는 성도들 이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을때 교회는 해방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배출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외국에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국정과 교육과 문화와 경제를 책임 졌습니다. 초기 첫 제헌국회는 국회를 열자마자 하나님앞에 기도를 드리고 국회를 시작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회는 환란당한 민족의 유일한 피난처요 위로처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교회는 민족 재건의 보루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에 경기도 광주에서 김용기 장로님이 운영하던 기독교 공동체인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한 후에 거기서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받은 감동으로 전국에 새마을 운동을 하라고 지시를 해서 그후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함께 우리는 세계 경제순위, 10위 라고 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인구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우리나라 인구의 2% 밖에 안 될 때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원천 이었는데 기독교인이 천만명이 넘는 오는날에는 우리가 역설적인 상황 앞에 직면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더 이상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가 아니라 비방과 조롱거리로 전락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세상을 이끌어 가고,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데, 교회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니까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역설적인 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기독교를 욕하고 폄하하는 내용이 줄을 잇고있고 마침내 기독교를 폄하하는 용어가 생겨 났는데,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독교”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다니요!” 기독교를 이렇게 부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러나 한편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도록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 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도 우리가 붙인 말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 이라는 뜻에서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처음부터 좋은 이미지로 사용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쟁이들! 예수 밖에 모르는 것들” 이라는 비난조로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점점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서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칭은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면 "훌륭한 사람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 이라는 호칭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 처럼 세상에서 칭찬받는 기독교인들이 된다면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를 가리켜서 “개독교” 라고 부른 이미지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개독교”의 뜻이 이렇게 바뀔 것입니다.
개:개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독:독특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모인
교:교인들의 공동체.
교회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거리와 조롱거리로 전락한 이유는 교회에 사람들은 많은데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것입니다.
우리 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세계적인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와 같이 부끄러운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은 많지않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사람도 때려보고 저사람도 때려보는 동네북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 가운데는 진실한 신자도 있고 형식적인 신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었다고 해서 다 천국에 가는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고 천국에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로운 자들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믿는것이 마치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과 같은 것임을 증거 합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은 단지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사망과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교회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알곡은 모아서 천국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사도도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고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내멋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요즘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먼저 “백일몽 성도”가 있다고 합니다. 설교 시간에 생각이 멀리 출장 간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을 생각은 안하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성도가 “백일몽 성도” 입니다.
그런가 하면 설교시간만 되면 꾸벅 꾸벅 조는 “병든닭 성도”가 있습니다. 텔레비전 볼때는 눈이 초롱 초롱해서 졸기는 커녕 울었다 웃었다 하면서 미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예배시간만 되면 조는 이런 성도가 바로 “병든닭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지면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안절부절 성도”가 있고, 찬송 부를 때에 입만 벙긋벙긋 하는 “붕어파 성도”가 있는가 하면, 예배 시간에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는 “경비파 성도도 있고, 설교를 마치고 목사님이 기도할 때 도망가는 “조퇴 성도”도 있다고 합니다.
“후진국형 성도”도 있는데 일찍 와도 앞으로 안오고 뒷자리를 좋아하는 성도를 “후진국형 성도”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귀가 준비형” 성도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만 마치면 빨리 집에 가야지 하고 집에 갈 생각만 하는 성도가 “귀가 준비형” 성도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훌륭한 성도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순정파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고 그분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려면 선택할 것을 선택하고 거절할 것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 라고 증거 합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거절하고” 라는 단어입니다. 거절할것을 거절할줄 아는 성도가 행함이 있는 성도입니다.
모세는 바로왕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가 애굽사람이 아니라 히브리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예를 단호하게 거절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그냥 애굽사람으로 살면 이집트의 왕자로서 모든 권력과 명예를 차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는 부귀영화와 명예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에서 왕자로 계속 살았다가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명예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명예를 얻는것은 선한 야망입니다. 성경은 명예심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요셉이나 다니엘 또는 다윗이나 솔로몬도 한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추구하는 명예심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신앙 인격을 타락시키는 명예라면 그런 명예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말씀 합니다. 모세가 명예를 거절한 것이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동족을 돕는, 보다 낳은 가치를 위해서 왕이 될수 있는 명예를 거절한 것입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에 형들의 손에 팔려서 애굽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려가서 종살이를 합니다. 요셉이 그 집에 팔려가서 나중에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 했습니다. 그런데 그집 주인 보디발은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이 출타하면 같이 출타하고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왕과 함께 동거 동락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남편이 없을 때 늠름한 청년인 요셉을 유혹 했습니다. 사실 요셉은 어머니의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고, 애굽에서는 더더욱 혼자서 외롭게 지내 왔습니다. 게다가 이제 요셉도 어느덧 건장한 청년이 되었기에 여인의 사랑이 그리워질 나이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눈 딱 감고 그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면, 즐길수도 있고 그리고 그 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세도를 부리면서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은 해서는 안돼!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하고 그녀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 했습니다. 그래서 화가난 그 여인이 요셉을 모함해서 요셉을 감옥에 보냅니다.
그녀의 요구를 거절한 결과로 요셉은 수 년 동안을 감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모든 일들을 다 보고 계시다가 때가차매 신실한 요셉을 감옥에서 끌어 내시고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온갖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요셉이 그때 그녀의 청을 받아 들이고 범죄 했다면 요셉은 평생 노예로 살았던지 아니면 그녀의 간교함에 빠져서 아무도 모르게 암살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알았기에 요셉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가장 복받은 사람이 되어 별과같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음죄를 범한 다윗에게, 네가 범죄한 대로 네 아내가 백주에 겁탈을 당할 것이요 네 자녀들도 똑같이 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어느 교회성장 세미나의 강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들, 설교 시간에 듣기에 거북한 내용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부담과 괴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목사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때로는 죄를 지적해야 하고 회개를 촉구 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은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속을 다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까 이 청년이 돈에 대한 욕심이 대단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 부자청년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셨습니까? 만약에 이 청년이 돈을 잘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일에 사용 하면서 지냈다면 예수님이 그 많은 돈을 다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돈은 우상이었습니다. 꿍쳐놓은 돈은 많은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하나도 헌신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돈이 이 청년의 신앙과 인격을 팔아먹고 그 청년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그 청년은 그 돈 때문에 지옥에 갈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가진 돈을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와라” 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나의 삶 속에서 거절할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반복하는 죄가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끊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거절하는 믿음”은 소극적인 믿음이고 “선택하는 믿음”은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하지 아니하는 것을 거절 했으면, 그 다음에는 옳은것과 좋은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버릴것을 버리고난 후에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 했습니다. 비록 고난스러워도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예술종합학교에 미모와 연기력이 뛰어난 여학생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콜린 타운센드”와 “마릴린 먼로” 였습니다. 그들의 외모와 연기력은 당시에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두사람은 헐리우드(Holywood)에 진출 했습니다. 그들은 워낙 빼어난 미모와 훌륭한 연기력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헐리우드에서는, 종종 배우들이 모여서 조찬을 함께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명사를 초청해서 간단한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어느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절세 미인, 콜린 타운젠드가 스피커로 추대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에 미국의 유명 주간지인 “라이프지(Life)에 의해서 세계 10대 미녀중에 한 사람으로 뽑혔고 당대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 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서 충격적인 인사말을 시작 했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환호성이 나오고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서 박수가 터지더니, 한 사람이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가 누구입니까?” 그러자 그녀는 “나는 드디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회중들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나는 헐리우드의 배우직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제 일생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만 따라갈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녀는 젊은 목사님과 결혼해서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한번은 빌리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런던에서 그들 부부와 함께 조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콜린씨, 당신이 선택한 그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때 그녀는 “나는 지금의 내 위치를 헐리우드의 그 어떤 영광스러운 배우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영국 여왕의 자리와도, 미 합중국 대통령의 자리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콜린 타운센드는 헐리우드에서 지내는 동안에 그곳이 겉으로는 화려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엄청난 시기질투와, 모함과, 방탕과, 죄가 만연한 곳인지를 깨닳았습니다. 그녀는 그곳이 온갖 죄악의 온상이요,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곳임을 알고 그곳을 거절하기로 작정 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던 그녀가 연기를 그만 둔다고 발표하자 모든 언론과 그녀의 팬들이 콜린 타운센드를 비난 하면서 그녀를 우매무지한 여자라고 폄하 했습니다. 마릴린 먼로 역시 가장 친한 친구요 쟁쟁한 경쟁 상대였던 콜린 타운센드가 떠날 때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그녀는 교만한 바보입니다!”친구조차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콜린 타운젠드는 미련없이 헐리우드를 거절하고 남편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가는 선교사의 길을 선택 했습니다.
콜린 타운센드가 배우를 그만두고 선교지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때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배우가 되어 미국의 저명인사들과 사귀는가 하면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날 자살로 인생을 끝냈습니다.
마릴린 먼로가 자살하기 직전에, 친구인 콜린 타운센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네가 떠날 때 너를 비웃었어! 나는 사실 내 경쟁 상대인 네가 없어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지! 그리고 그때는 떠나는 네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정말 부럽구나! 네가 나보다 선택을 잘했다는 것을 이제는 내가 인정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을때 유서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여자다!”
콜린 타운젠드는 거절해야 할때 거절했고 선택해야 할때 올바른 것을 선택 했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산 사람의 대명사로 남았지만, 마릴린 먼로는 쾌락과 세상 명예를 선택 했기에 결국 비참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콜린 타운젠드는 예수를 믿은후에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좋은 집과 좋은차 그리고 명예와 인기와 아름다운 옷과 화장품, 향수같은 사치품들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모세는 영화로운 바로의 궁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믿은 후에 잃어버린 것이 많았습니다. 공주의 아들이었기에 장차 일국의 왕이 될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부귀영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으나 그것도 잃었습니다.
모세가 이와같이 결단하고 세상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가 26절에 나옵니다. 그 비밀은 “그리스도께서 상 주심을 믿고 주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난의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잠시 누리다가 소멸되는 그런 상이 아니라 영원을 통해 기억될 영과의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위대한 결단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그의 선택을 비웃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상급으로 모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25절과 같이 행동하게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더 좋아하고” 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고난을 선택한것이 마지 못해서 한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을 세상 즐거움보다 더 좋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보람이 있지만 세상 즐거움을 따라가면 죄책감 밖에는 얻을것이 없습니다.
탤런트 김동현 장로와 가수 혜은이 권사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가수 혜은이는 “당신은 모르실거야” “감수광”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분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은 찬양 사역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녀는 뿌리깊은 신앙집안에서 성장 했습니다. 그러나 유명가수가 되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사람이 승승 장구하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친정 어머니가 사고로 죽고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기의 명성을 믿고 계속해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혜은이는 자궁 적출 수술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죽음의 문턱에 도달 했습니다. 이런 환란이 계속되자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마치 바로가 당한 열가지 재앙 같은 재앙이 계속해서 닥쳐온 것입니다. 혜은이와 김동현씨는 비로소 자기들이 신앙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을 떠난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기도회를 부부가 같이 다니면서 믿음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두 부부에게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다시 하나 회복시켜 주시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큰 축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때로 고난도 주십니다. 고난이 올때는 내려놓을 것을 빨리 내려놓고 포기할 것을 빨리 포기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그 만큼 인생이 황폐화되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도 잃어버리고 재앙만 계속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주의 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버릴 것 빨리 버리고 정리할 것도 빨리 정리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로의 신하가 바로왕에게 “어느 때까지 고집을 부리실 것입니까? 그 고집과 버리지 못한 그것이 우리의 함정이 되게 할 것입니까?” 라고 말한 것처럼 버려야 할것을 제거하면 복이 되지만 그러나 버릴것을 버리지 못하면 그것이 큰 재앙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덩이에 빠지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죄악의 덫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모든 교만과 우상과 죄악된 것들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은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탄식 했습니다. 내가 지금 망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죄를 향해서 불나비처럼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결단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함정은 내가 빠지지 않고 아예 없애야 복이 됩니다.
그런데 26절을 자세히 보면 아주 흥미있는 내용이 소개 됩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라고 증거 합니다.
모세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죽은지 1500년 후에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예수님을 위해서 당하는 수모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작년 5월달에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북 문경에서 한 택시 운전사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자기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자살한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대가리가 없는 대못을 박아놓고 드릴로 손에 구멍을 내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혼자서 그런식으로 자살을 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다” 라는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잘 아는 목사님이 그 택시 기사를 제일먼저 발견 했는데 사실 내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는데 다시 나를 못박으면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고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 했다는 말은 모세가 하나님을 경외 하면서 택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긴 일이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여러분이 구역장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을 모시고 차량을 운행하고, 교회 청소를 하고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이웃을 구원하는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농번기에 나도 힘들고 바쁜데 남을 도와주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토요일 새벽기도가 끝나고 가는데 정봉임집사님이 차안에서 성도님들과 대화하는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지금 한창 농번기가 되어서 논 밭 간다고 힘들고 어려운 때인데 정해순성도님의 아들이 시금치 장사를 하면서 어머니집에 시금치를 100키로를, 큰 푸대로 열푸대를 가져와서 묶으라고 내려 놓았답니다.
박해순성도님이 이제는 나이도 많고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니까 정봉임집사님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일이 없는 때 같으면 기꺼이 도와 드리겠지만 이제는 일손이 모자랄 때 입니다. 그런데 정봉임집사님이 가서 보니까 마당에다가 시금치를 풀어 놓았는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고 해서 남편과 함께 그 시금치를 자기집 창고로 다 옮겨서 자기집 창고에서 그 시금치를 가려 주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백주열집사님은 다리가 불편해서 잘 걷지도 못하시는데 김목수님의 어머니 정금순집사님이 밭을 못갈아서 애를 태운다는 말을 듣고 당장 갈아 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두애 권사님은 길 청소를 하러 다니십니다. 한달에 20만원을 벌려고 그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길청소 하러 가서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김재민성도님을 만났는데 다시 교회에 나오라고 10만원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한달에 20만원 받아서 그 절반을 뚝 떼어서 선뜻 남에세 주는것이 쉬운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권사님이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땀과 수고가 담긴 10만원을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누군가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때 힘들고 어렵지만 기꺼이 달려가서 도와주고 섬기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충성을 다해서 섬기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분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증거 합니다. 이 언약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상급이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만 잘먹고 잘 살려고 생각 했다면 미국이 전 세계에 그렇게 많은 선교사를 보내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2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미국은 12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한사람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활동 하려면 매달 3000불의 선교비를 보내야 하고 교회를 짓거나 병원을 설립 하거나 학교를 설립 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200년 동안 꾸준히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수혜국중에 하나가 우리나라입니다. 미국의 선교와 후원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에도 교회와 학교와 병원과 양로원 고아원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 선교후원을 발판으로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 주기 위한 헌신입니다.
우리가 노인 요양원을 짓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뜻에서 노인 요양원을 짓는 것입니다.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모셔다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인 요양원을 짓는 것입니다.
노인 요양원을 지으면 성도들이 와서 봉사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날 제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역예배가 끝난후에 저는 새벽기도를 준비하기 위해서 사무실로 들어 왔습니다. 식당에 남아서 함께 설거지를 한 김안순집사님과 나창희 집사님이 저희 집사람과 대화를 했는데 김안순집사님이 고백 하기를, 우리 남해 세광교회에서 노인 요양원을 지으면 자기가 와서 노인들 소 대변을 다 치우면서 봉사를 하겠다고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똥 오줌 치우는것 개의치 않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신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나중에 늙어서 기동을 못해서 요양원에 들어 오시면 자기가 어머니처럼 다 모실 것이고 노인 요양원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도 자기가 다 섬기겠다고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방에서 늘 봉사 하시는 이용분집사님도 칭찬을 하셨지만, 나창희집사님이 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면서 김안순집사님을 두고 하는 말이 “어디서 저런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조정숙권사님이 왕지에 이사와서 우리 교회에 나오실 때 왕지 권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고 말씀들을 하셨는데 성도님들이 또 다시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는 말들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너나 할것없이 복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나도 복을 받고 남에게 복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감동 시키는 사람은 하나님도 감동 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도는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영자집사님이 예수믿은 후에 그렇게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하면서 주의 종을 선대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들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제가 누누이 귀가 따갑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인정받는 권사님이나 집사님은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제가 처음에 소금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양적으로 엄청나게 부흥을 했지만 그러나 2% 였을때보다 20%인 지금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동네에서 조롱거리, 비난거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장본인 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근 10년동안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한 주제가 있습니다. 예수믿은 성도는 무슨일이 있어도 절대로 동네 사람과 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권문제나 땅문제나 사적인 문제나 어떤 문제로도 싸우면 복음전파의 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구원의 문이 막힙니다.
구원의 길을 막은 그런 사람은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는것이 낫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동네 사람과 싸우면서 어떻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명함을 내밀고 다니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삭처럼 무조건 양보하고 억울해도 바울처럼 참고 돌을 던지면 스데반처럼 순교하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소리 지른다고 같이 소리 지르고 달겨 든다고 같이 달겨들어서 싸우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때가되면 주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 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왕이면 알곡으로 살다가 주님이 영접 하실 때 영광중에 천국에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목적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기적을 체험 하면서 주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중에도 “너희는 나와 상관없는 자들이라고” 주님의 책망을 받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것이 없고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 보지도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에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라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41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않고 이웃을 도와 준적도 없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쌀 한 말도 준적이 없고 십일조도 띠어먹고 오직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산 사람은 지옥에 들어 간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왕에 믿음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과 같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는 말씀처럼 예수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상 주실것을 믿고 이땅에서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믿음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참된 믿음은 거절할 것을 거절하고, 선택할 것을 선택하며, 바라볼 것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기왕에 예수 믿었으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고 주님을 섬기면 주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온갖 복을 주시고 내세에는 영광의 면류관과 축복의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주님께 충성을 다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언약을 누리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
,
,
'포도나무 > 겨자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0) | 2012.04.28 |
---|---|
[스크랩]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0) | 2012.04.28 |
시편 23편 (0) | 2012.04.08 |
[스크랩] 새로운 유명인들 기독교 명언 모음 (0) | 2012.04.03 |
[스크랩] CCM 악보 / 오 거룩한 밤.............성탄악보(프린트용) (0) | 2012.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