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로마총독의 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작정을 했지만 로마의 식민지 나라였던 당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형 시킬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해서 사형선도를 내려 달라고 청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시 살펴보면 놀라운 광경이 소개 됩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로마의 주권자요 이스라엘 나라의 총독인 빌라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고, 반면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모순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여러가지로 예수님을 고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국노도 아니요 반역자도 아니요 신성모독죄를 지은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잘못한 일이 전혀 없는 예수님을 대 제사장과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바람에 예수님은 사형을 언도받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광경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온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권세와 능력도 결국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한 권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면서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것 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도 사탄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아니라고 생각 했기에 예수님을 함부로 처형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때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을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들과 그 나라를 향하여 당장 선전포고를 하시고 전쟁을 시작하여 그들을 모조리 심판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악한 세상 나라와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독생자 아들의 죽음을 의의 제사로 받으시고 모든 악한일을 자행한 인간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십자가 사건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건의 전모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로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빌라도가 처음에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명한 이유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재판을 해 보니까 예수님의 죄가 십자가 처형으로 처형할 정도로 큰 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적당하게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줄 생각으로 채찍질 징계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에 다시 법정에 세우고 예수님을 고소한 유대인들 앞에서“내가 그에게서 아무죄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4절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은 6절과 같이“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재판합니다.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하는데도 대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하면서 처형을 요구하자(4절). 빌라도는 이내 생각을 바꿉니다.
빌라도는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심문 하면서 예수님이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반역으로 로마에 해를 끼칠 위인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적당하게 채찍질한 후에 무죄 방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무죄석방 하려고 하자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처음에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라고 생각하고 발을 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 정도로 판결하고 재판을 끝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서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데모를 했습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신성모독죄를 지었기에 이것은 우리의 종교법으로 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니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라고 호소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빌라도와 협상을 시도합니다. 예수를 죽여 달라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면 이번 유월절에 우리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게 넘어가겠지만 만약에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국가적인 소요를 일으키겠다고 은근히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당시에 빌라도는 원하던 원치않던 자기 생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구원받을 기회를 만났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공의로운 재판을 하지않고 불의한 재판을 함으로서 인류 역사에 불의의 재판장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당시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재판중에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9절)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하신 것은“이제 내가 너에게 할 말은 다 했다 그러니 이제는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라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예수님께 물었을때 예수님이 대답을 하지않자“내가 너를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위협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으리라(11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위에서 준다”라는 말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잠시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지금 빌라도가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권세와 더불어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의 권세나 지위나 재물도 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시 빌려주신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권세와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힘없는 예수님보다는 힘으로 밀어 부치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생각한 단 한가지는 ”예수를 살려주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아니면 예수를 죽이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종교적인 문제로 고소하던 유대인들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선도를 내리지 않고 계속 망설이자 이제는 이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약 시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만약에 당신이 예수를 풀어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라고 떠들어 대면서 ”예수와 로마황제 중에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요!“라고 하면서 또다시 억지를 쓰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합니다(12절)
그래서 빌라도는 고민에 빠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항의하자, ”예수 한사람을 처형하고 끝내는 것이 내가 안전하고 유리한 상황이 되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빌라도는 왜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문제를 로마의 권세와 무력으로 다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일 만큼은 무력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진리냐, 현실이냐!“ 를 따지는 문제였습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느냐?“의 문제 였습니다.
그런데 이런때에 그는 총독으로서의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가바다(박석) 라는 재판석으로 가서 거기에 앉았습니다(13절) 거기에 앉으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점점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소리를 질렀고(14절)“우리들의 왕은 가이사 한 분밖에 없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16절).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난동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사형을 판결한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로마 군병들에게 예수님을 넘겨 주었습니다(16절). 결국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고소와 난동으로 인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도를 내리고 십자가처형을 명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재판을 받으시고 억울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설천교회에 있을때 평생에 처음으로 고소를 당해서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법정에 가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고 재판할 때 판사에게 제출 해야 할 준비 서면도 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하나님께서 이 재판의 재판장이 되어 주시기만을 기도하면서 재판을 받으러 갔습니다.
재판날이 되어서 재판정에 갔는데 저를 고소한 장로님과 함께 재판정에 앉아서 판사의 질의에 대답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서로 나뉘어서 저를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재판정의 제 뒤쪽에 앉아 계셨고 장로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장로님 뒤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 되었는데 장로님이 제출한 고소장을 이미 다 읽어본 판사님이 고소를 당한 피고인인 저에게 질문을 하는것이 아니라 고소장을 낸 장로님에게 질문을 시작 했습니다. 그날 판사님은 고소를 당한 피고인인 저에게는 한마디도 질문을 하지않고 한시간 동안 장로님에게 묻고 따지면서 마치 장로님을 취조 하듯이, 책망 하듯이, 장로님에게 조목 조목 따지면서, 때로는 야단을 치듯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판사님은 교회의 대표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교회의 대표는 장로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판사님은 "어떻게 교회의 대표가 장로 입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내가 땅을 기증하고 내가 교회를 지었으니까 내가 교회의 대표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판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장로님에게 "교회의 대표가 누구인지 다시 알아보기 바랍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판사님은 장로님이 고소한 내용들을 하나 하나 지적하시면서 그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장로님은 저를 고소한 이유를 설명 했지만 판사님은 이런 내용들은 하나도 법적으로 고소할 내용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판사님은 이미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님은 입에 게거품을 품고 판사에게 대항 하듯이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 놓았습니다. 도무지 말이 안통한다는 사실을 직시한 판사님은 저에게“다음번에 올때에는 박복선장로가 고소한 내용에 대한 준비서면을 제출하세요”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변호사를 통해서 준비서면을 준비해서 제출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억울하게 고소를 당해서 법정에 갔지만 판사님의 공명정대한 처리와 공정한 재판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우리나라의 법정에서 일하는 사법기관의 법관들이 정의가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달후에 두 번째 재판을 받으러 갔을때 판사는 또다시 장로님에게 이것 저것을 따지면서 물었는데 장로님이 도무지 말이 안통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요 자기 주장만 반복하는 사람인것을 알고서 판사님이 저에게 몇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그만두면 갈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만약에 교회가 갈라진다면 당신을 따르는 성도들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교회가 갈라질때 재산 분배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교회가 갈라질때 재신 분배를 어떻게 하는지 한번 알아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판사님이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저에게“못받은 석달치 사례비와 적립금을 양보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는 판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즉시로 알아 챘습니다. 판사님은 그까짓 돈 몇백만원의 사례비보다 저를 따르는 진실한 성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저에게 암암리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까짓 돈 몇백만원 안주려고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일로 저를 고소한 저 악한 장로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재판자리에 나오지 말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저는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판사님의 제안을 수용 했습니다. 그래서 못받은 석달치 사례비와 적립금을 양보하기로 하고 재판을 마무리 했습니다.
저는 설천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에 고소를 당할만한 일을 한적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 그동안 목회를 해 오는 동안에 그 어느 교회에서보다도 설천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섬기고 사랑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장로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묵묵히 참고 인내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고소까지 당해서 재판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억울하게 고소를 당해서 재판을 받는 동안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억울한 재판 과정을 수용하신 예수님의 마음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판결이 끝나고 법정을 나오면서 하늘을 쳐다 보면서“하나님! 이 억울한 재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지켜 보셨죠? 이 억울한 고소를 인하여 저에게 복을 주시고 나를 고소한 사람이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회개하게 해 주세요!”라고 고백 하면서 돌아 왔습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여기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인지를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하나 분명히 목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당시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뿌린대로 그에 합당한 결과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같이 싸우고 소리 지르고 맞고소를 하면 똑 같은 사람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합니다. 그저 억울해도 참고 묵묵히 인내 할 때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다 공평한 판단으로 해결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끝난후에 장로와 더불어 몇몇 권사들이 동네 방네 다니면서“우리가 재판에 이겼다!”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목사 사례비와 적립금을 안주고 목사를 쫓아 낸것이 과연 이긴 것입니까? 나 같으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세상 법정에 고소한것이 부끄러워서 어디가서 말도 꺼내지 못할 일입니다. 성경은 성도간에 문제가 생겨도 절대로 세상 법정에 고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6장6-7)
그런데 장로가 재판에 이겼다고 그쪽에서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우리나라 교회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니까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도 싸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고 부패한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워진지 50년동안 교회가 한 일이라고는 목사 불러다가 하수인처럼 부려먹고 마음에 안들면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목사를 쫓아내는 일 밖에 한 일이 없으니까 교회가 동네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아직 사임을 하지도 않았는데 장로님이 어디서 목사를 한사람 데려다가 이사를 시키더니 그 목사 부부를 교육관에서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부부는 교육관에서 지내고 우리는 사택에서 수개월을 지냈습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장로가 이사를 오라니까, 시무하는 목사가 아직 사임도 안하고 예배를 집례 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덜렁 이삿짐을 싸들고 교육관으로 이사를 들어온 그 목사도 신앙과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한심한 목사이고, 목사가 아직 정식으로 사임을 하지도 않았는데, 후임목사를 강제로 데려다가 이사시킨 장로도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는 장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의 인격적이고 양심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마땅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양보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 일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인지를 살피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이런 한심한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이런 교회를 기뻐 하시겠습니까? 하나같이 모두가 위선의 탈을 쓰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남해 세광교회의 사명이 더욱 막중 합니다. 무너진 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몇배로 더 열심을 내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서 동네와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설천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갈라진 두 교회의 목사를 초대해서 화해와 화합의 장을 만들어 주셨지만 거기서도 사실 저는 소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을 다 잊고 서로 마음을 모아서 지역사회를 구원하고 섬기는데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서로가 만났는데 만날때부터 헤어질때까지 한마디 말도 안하는 것을 보고 제가 저으기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진실이 무엇이며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 한 장면을 다시한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방금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지막지한 로마 군병들로부터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질 했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우리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할 징계의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증거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지은 모든 죄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들입니다. 이 모든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주님이 대신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서 한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죽어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내가 과거에 지은 죄와 더불어 부끄러운 과거를 아무 스스럼없이 고백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죄를 씻었고 상처가 치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죄가 더 이상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아니라 과거의 죄가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표적이 되었기에 지나간 나의 죄를 담대하게 간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된 장소는”해골, 즉 골고다“라는 언덕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17절) 이 언덕의 이름이 해골이 라고 지어진 이유는 언덕 자체가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골고다 언덕에 세울때 다른 두 강도와 함께 세웠다고 18절은 증거 합니다. 이 강도들은 살인강도였고 테러범들 이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두 강도들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예수님도 죄인처럼 보이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강도라는 조연들을 등장시켜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데 완벽한 연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와 대제사장들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죄패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19절). 비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십자가위에 ”나사렛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써 붙였습니다.
빌라도가 정식으로 죄명을 쓴다면 빌라도입장에서는 당연히 ”반역자 예수“라고 써야 맞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런 반역의 혐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는 모든 유대인들이 반역의 혐의가 더욱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할때 모든 유대인들을 처형한다는 의미로 ”나사렛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는 죄패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자기들도 유대인 이기에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위에 써 붙인 죄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써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21절)
그러나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빌라도는 ”내가 쓸것을 썼다“라고 선언 합니다(22절)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이면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써 붙였다고 20절은 증거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라틴)어 이 세 언어는 그 당시에 로마가 지배했던 유럽과 아시아 지역 사람들 전체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언어는 만국의 언어입니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왕이라고 써 붙인 셈이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그런 명패를 써 붙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빌라도는 로마 사람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지른 자들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써 붙였습니다.
그것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써 붙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인 이 사건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공포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권세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의 구세주되심을 공표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는 과정의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눈 사건은 시편22편18절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실 때 예수님께서“내가 목마르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28절)
예수님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조차 없는 중동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 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이 갈증으로 목말라 하시던 그 모습을 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신앙적으로 좀 더 자랐을 때 예수님께서“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고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도 성경에 대한 성취였습니다(시 69:21).
그리고 그 고백은 누구나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고백이었습니다.“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55:1)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목말라하실 때 자기가 물을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왔지만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예언의 성취로서 선포된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고백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30절).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끝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다 이루셨다는 뜻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끝나게 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와 저주에서 해방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 고난주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과 구원을 이루기 위한 고난인지를 묵상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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