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문제와 더불어 한 달 동안 진주에서 교육을 받느라 당분간 카페 활동을 보류하겠다고 광고를 드렸는데 전화로 안부를 묻는 분들이 많아서 가끔은 설교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어느 빌딩의 엘리베이터 안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이고 두 번째 만남은 인연이고 세 번째 만남은 필연입니다.>
사람의 만남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복되게 살수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만나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서 행복한 인생이 보장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11살난 웨슬리 파커라는 영국 소년이 당뇨병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이 소년은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만 생명을 연장시킬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 있던 그의 부모가 담당 의사를 만나서 자기 아들의 병을 신앙으로 고치겠다고 하면서 의사에게 퇴원 시켜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의사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들 부부는 막무가내로 치료를 거부하고 아이를 퇴원 시켰습니다. 그 아이는 퇴원한지 삼일째 되는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나중에 대법원은 파커씨 부부에게 아이를 죽인 고살죄로 15년형과, 아동 학대죄로 10년형을 선고하여 두 사람은 25년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 갔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부모 때문에 아들은 죽고 부모는 감옥에서 일생을 살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가진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부모의 축복기도를 받고 자람으로 은혜안에 살게 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도의 힘과 기도의 능력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뉴욕에서 모범 경찰 표창을 받은 죤 하워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된 것은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24년 전에 제가 열 다섯 살 때 저는 추운 겨울날 한 빌딩에 올라가서 자살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가 늘 집에서 난동을 부리기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고 얼마 후에는 아버지까지 나가 버렸습니다.
가난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저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높은 빌딩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래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때 한 남자가 다가 오더니 저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야 왜 죽으려고 하는거냐? 아직도 창창한 나이에 왜 뛰어내리려고 하는거야?"
그래서 저는 "나는 살기가 싫어 졌어요 엄마도 나가고 아빠도 나가고 아무도 나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자 그 사람이 "얘야 오늘부터 내가 네 아빠가 되어 줄테니 죽지마라 오늘부터는 내가 네 아빠다" 그분이 자상하고 친절하게 아빠가 되어 주겠다는 말에 저는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그만두고 그분을 따라 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은 빌딩 청소부 였는데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분은 정성과 사랑으로 저를 돌보아 주셨고 매 주일마다 저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후에 저는 나같이 고난 당하는 소년들을 돌보아 주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수 많은 아이들을 위경에서 구해 주었고 이렇게 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양아버지를 만난 그는 인생이 달라 졌습니다.
전에 고봉례집사님이 아들이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을때 고봉례집사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신것을 지금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기도를 가장 잘 들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사람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선생님과 지내게 됩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제자들은 그 스승의 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에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 갑니다.
설리반선생님은 귀머거리요, 소경이요, 벙어리였던 헬렌 켈러를 극진한 사랑으로 가르쳐서 위대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설리반선생님은 헬렌켈러에게 점자로 ABCD를 가르쳤고 그렇게 시작한 글공부로 나중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후에는 시각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대학을 졸업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래서 헬렌켈러는 하버드대학을 나와서 세계 최초의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구원”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헬렌켈러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부상병을 돕는 구제운동을 했는데 그때 많은 돈을 모아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데 기여 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에도 방문해서 많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준바 있습니다. 이 모든일은 앤 설리반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는 앤 설리반 선생님을 만남으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은 짐승과 다름없이 살던 나를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살인 사건의 주인공인 지존파의 행동대장 김 기훈은 그와 정 반대의 사건으로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지존파의 대장 김 기훈은 살인 공장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무작위로 잡아다가 죽이고 인육을 먹으면서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악랄한 사람이 된 결정적인 동기는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에 체육수업 시간에, 그 때 나는 너무나 가난해서 체육복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체육복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때 체육 선생님은 체육복을 가져오지 못한 나를 일어나라고 하더니 따귀를 몇대 후려 갈기면서“다음 시간에는 훔쳐서라도 체육복을 가져와”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시간에 다른반에 가서 체육복을 훔쳐왔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필요한 것을 도둑질로 해결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수퍼마켓에서 그리고 백화점에서 닥치는 대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고 다시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또다시 절도에 강도짓을 하다가 결국 이렇게 살인범이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김 기훈은 비인격적인 스승의 잘못된 한 마디에 인생을 망치고 결국 살인범이 되어 형장이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참된 스승을 만나야만 그 인생이 바른 길로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친구를 잘 만나야 인생이 행복 합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의 뒷골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뒷골목에서 장사를 했기에 뒷골목이 그의 출생지요 놀이터 였습니다. 그는 죄의 온상인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를 목도 하면서 자랐기에 거기서 보고 배운대로 청소년 시절에 이미 온갖 방탕과 타락을 경험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고3때 한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신실한 크리스챤 이었습니다. 그는 여자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갔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술집일도 그만두고 여자친구의 권면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팸부록 칼리지에 근로 장학생으로 입학을 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학교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번의 의미있는 만남을 통해서 인생역전이 전개 됩니다. 그가 여자친구를 만나서 예수를 믿더니 이번에는 기숙사에서 경건한 목사의 아들 요한 웨슬레를 만나서 친구로 사귀게 된 것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요한 웨슬레가 얼마나 진실하고 경건하게 지내면서 사랑을 베푸는지 조지 휫필드가 그에게 반해서“나도 기왕이면 저런 신앙인이 되어보자”하고는 그가 요한 웨슬레를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나중에는 영국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신앙 지도자가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영국과 세계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조지 휫필드는 영국에서 가장 은혜스럽게 설교를 잘 하는 설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설교를 하면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조차 다들 은혜를 받아서 예수를 영접 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성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더욱 감동을 받아서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잘 만난 조지 휫필드는 많은 사람들의 영성을 일깨우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네번째는 부부가 잘 만나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가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만남 입니다. 성경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위대한 모세 부부는 서로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도 헤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욥의 부부는 완전히 이별을 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늘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을 섬겼고 아낌없는 헌신으로 교회를 섬겼고 주의 종 바울사도를 생명처럼 아끼고 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신약시대 최고의 모범부부로 소개하고 그들을 복된 부부로 칭찬하셨습니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욕심이 가득하고 교만이 가득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임으로 두사람이 한날 한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같이죽어 서 지옥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부부도 잘 만나야 하고 믿음생활도 서로가 다 잘해야 복을 받게 됩니다.
다섯번째로 모름지기 사람은 교회를 잘 만나야 합니다. 교회를 잘 만나야 영육간에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요 우리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사람은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의 육체가 세끼 밥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 하듯이 사람은 영의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이 건강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말씀 하셨습니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영이 흐린 교회가 있습니다. 골치아픈 교회가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기도 응답도 없고 은혜도 없는 그런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면 모든게 망가지고 되는일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해야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됩니다.
여섯 번째로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의료 선교를 하던 하디 선교사가 있습니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의 토론토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는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던 게일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토론토 YMCA의 후원으로 1890년 9월달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부산과 원산에서 최선을 다해 의료선교와 전도활동을 펼쳤지만 이렇다 할 구원의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특히 1901년부터 강원도 통천의 지경대교회에서 3년간 의료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전도를 했는데 한사람도 전도를 못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선교에 실패한 이유는 한국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그의 사랑부족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신자들은 주일예배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도 방종했고 교회의 공금을 횡령하는 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모습에 회의를 느낀 그는 한국교인들에게 책망과 함께 회개를 촉구 했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역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하디선교사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먼저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때마침 화이트와 맥컬리 선교사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일주일 동안 원산 지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성경사경회를 열었는데 강사로 하디선교사를 초대 했습니다. 그때 하디선교사가 요한일서를 강해 했는데 집회 기간 동안에 성령께서 하디에게 임해서“네 죄를 고백하고 지금까지 실패한 모든일을 간증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부끄럽고 수치 스러웠지만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자기가 실패한 선교사역의 이야기들을 간증 했습니다. 간증하는 동안에 그는 자기가 왜 실패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 했습니다.
“나는 백인이라는 인종적 우월감과, 캐나다 최고의 대학을 나온 의사라는 교만함에 빠져서 한국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역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앞에서 제 잘못을 회개 합니다. 사랑도 없고 긍휼도 없고 오직 교만과 비판만 가득했던 제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 합니다”
기도회 중에 선교사들 앞에서 이와같이 공개적으로 회개한 그는 다시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원산 조선 감리교회에서 다시한번 자기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디 선교사의 공적인 회개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교회에도 큰 은혜가 임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원산 부흥운동이 시작 되었고 이 사건은 급기야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평양 대 부흥운동은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는 교회에서 "나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이 말은“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주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비슷하게 살아 갑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옥스퍼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로 일을 했지만 1738년 5월 24일날 회심하기 전 까지는 그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도 중국에 가서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좌절하여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만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열심히 전도하거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수 많은 예배당과 신학교와 기독교 단체들이 있고, 성도들도 많지만,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의 위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행하는 많은 일들을 다른 종교나 다른 단체들도 하고 있습니다.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일은 오직 크리스챤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14:12)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바울 사도는 증거 합니다.(고후3:3) 즉 우리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보는 것 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디 선교사는 조선에서 전도의 열매가 없는 이유가 당시 조선 교회와 조선 사람들 탓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조선 사람들이 하디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인데도 그는 남탓만 했습니다. 만약에 하디선교사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행했으면 5년 동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는 한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지도 못한것을 깨닳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가 회개하여 고꾸라진 것입니다. 그래서“교회에 부흥이 없고 진정한 회심자가 없는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라고 애통하면서 그는 회개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나는 포도나무 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 처럼 한 몸으로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님을 드러낼수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었다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나도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어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조카와 싸웠으면 화해 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나는 죽어도 용서 못합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그런 권사님은 예수 믿는것이 아니라 예수 안믿는 권사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기를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비난을 하거나 내 잘못을 지적할 때 화를 내지 말아야 정상입니다. “말할 수 없는 죄인”이 어찌 그리 화를 낼수가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믿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원망 불평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임하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다툼이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세상 사람들과 다퉈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데 어떻게 세상 사람과 다투고 부부 싸움을 하고 교인들 사이에 서로 다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믿으면 은밀한 죄도 지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오셨다고 하면서 은밀한 죄를 짓고 산다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음란물과 술, 담배, 도박, 게임에 빠지면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은 고난도 축복이요 죽음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되는 것 보다 예수님이 더 좋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우리 모두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되고 또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가 회개 했을때 원산에 큰 부흥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하디 선교사가 단순히 회개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디 선교사가 변해서 그에게서 예수님이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 하디 선교사는 본성이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의사 였다고 합니다.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면서도 너무나 냉정하고 차갑게 대해서 진료를 받으면서도 그가 시무한 교회에는 사람들이 절대로 안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받고 거듭나서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서 선교사역을 시작 했을때 그때부터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 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에게 냉냉했던 하디가 따뜻한 마음으로 치료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면서 병이 들어도 하디에게 치료 받기를 거절했던 환자들이 하디가 은혜를 받고 사랑으로 진료하자 하디가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께 내 마음을 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그저 우리 안에 계시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 합니다.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은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마음을 열어야 들어오십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제 안에 오세요.” 하면 마음을 연 줄 압니다.
아닙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마음을 열어 보았습니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내 마음에 임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섬기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입니다. 내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마음을 연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이 마음을 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다고 믿기만 한다고 바른 믿음을 가진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자신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포로가 되는것이 예수님을 모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왕이시니 주님뜻대로 사는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용서 하라고 하셨으면 용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죽어도 용서 못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신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 하셨으면 오늘 먹고 죽어도 이웃을 사랑해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오늘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수 밖에 없는데도 주님이 음식을 만들어 내라 하면 내야 합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라고 말씀 하셨으면 그대로 지켜야 정말 예수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까? 십자가 구원을 믿으면서도 원수 사랑은 안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천국을 선물로 받았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주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믿으면서도 은밀한 죄는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으면서도 고난이 축복임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내 마음을 진정으로 열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왕으로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시간? 직업? 결혼? 생명?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것들은 하나님 마음대로 나에게 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마음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된 후에는 우리 마음속에 왕이 없어졌습니다. 어렸을때는 부모가 왕이었고 젊을때는 애인이 왕이었고 직장에 다닐때는 상사와 돈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왕 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왕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삶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집에 내가 존경하는 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살거나 또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을 모시고 살거나 또는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함게 모시고 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모님만 모시고 살아도 또는 사위나 며느리와 함께 살아도 아니면 집에 자녀나 손자가 생겨도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님! 나를 영원한 천국에 들여보내주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사는데 어찌 삶이 바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산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구원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가면서 이런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예수님, 왜 이러세요?. 왜 따라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교회에 계세요! 저의 집으로 따라오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전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어요”
이런 자세로 예수님을 믿으니까 삶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통치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의 주인은 당연히 마귀가 주인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 성도와 불륜에 빠진 목사가 나오고,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감옥에 구속된 장로가 나오고, 뇌물을 받고 퇴직하는 권사가 나오고, 먹고 살기 어렵다고 술집에 나가는 여집사들이 나오고, 일이 바쁘다고 교회에서 준 직분과 사명을 내려놓고 세상일에 분요한 교인이 생기고, 헌금이 줄었다고 선교사 후원을 줄이기로 결의하는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유혹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마음의 왕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마귀에게 빼앗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이 쓰신“마음을 붙잡아 주십시오”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여, 글쎄 이를 어찌 하나요/ 마음을 결심의 띠로 꽁꽁 묶어/ 주님의 제단에 바치고 정성스레 들어올리노라면/ 어느덧 묶였던 띠가 끊어지고/ 모았던 마음이 산산이 풀어져/ 이 바람 저 바람에 날리고 마니/ 글쎄 이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얼마 후에는 /또 흩어진 마음을 집어 모으느라고/ 눈물을 짜면서 애를 박박 쓰곤 하니, 주님의 제단에 한 번도 알뜰한 제물을 바쳐보지는 못하고/ 밤낮 이 짓만 하다가 /서산에 해가 떨어져 버리고 말면/ 어찌합니까, 주님이시여!
많은 성도들이 이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보지도 못하고 마귀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랑방탕한 죄 보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죄가 더 큽니다.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닳은 하디 선교사가 그렇게 통렬하게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은 가장 큰 복은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깨닳은 것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왕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왕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결코 왕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 조차 주님께 복종할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내리치려고 할때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아 이제야 내가 너를 알겠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깨닳은 최고의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만을 원한 사람입니다.“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러한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그런 사람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 보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통치 아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예배드릴 때는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진리가 다 밝혀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벅차겠습니까?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흥분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볼 때는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지금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도 감동하고 감사한 일이 있다면, 모든 족속과 민족이 천국에 모여서 영광중에 함께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우리가 지금 마음에 임하신 예수님을 통하여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가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볼 그 때에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우리가 꼭 하나님 앞에 가야만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섬기기만 한다면 지금 여기서도 그 영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염려스런 일이 많고 답답한 일도 있고 미래는 불투명해도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내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나머지는 다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때에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붙어서 많은 축복의 열매들을 맺으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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