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식일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고창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고창 병은 수종 병 이라고도 하는데, 신장이나 간장에 필요 이상의 물이 차서 고생하는 병자를 말합니다. 이 병자는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병자인데도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창병 환자를 보시면서 이미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사람들을 “엿보는 사람들”과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소개 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예의주시 하면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이 초대의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일행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시험받을 사람들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된 고창병자입니다.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대하여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잔치자리에 식사초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은 저명인사입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 열심이 워낙 유별난 사람들입니다.“바리새”라는 말 자체가“보통 사람과 구별된다.”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에 맨 꼭대기에 있었던 상류층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귈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장애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난히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사회종교적인 특권층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리새인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방금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을 초대 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은 고창병자를 데려다 놓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를 살펴 보려고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에 자기를 시험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에 초대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예수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자 자신들의 계획과 생각을 들켜버린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고창병자를 고쳐 주시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아들이나 소가 안식일에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아들이나 소를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그러자 그들중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언데 어디서나 사랑이 우선입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안식일이라도 기꺼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1955년 미국 오레곤주에 있는 유게네 마을회관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를 하자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그날 상영된 영화 내용은 6.25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는 영화 였고 고아들을 돌볼 손길을 찾는다는 광고도 병행 되었습니다. 그 영화는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추운 겨울인데도 아이들이 신발도 못신고, 옷도 없이 떨고 있는 불쌍한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소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영화를 지켜본 많은 농부들은 전쟁고아를 돕는 일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부부가 그 영화를 보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둘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그 영화에 등장한 아이들이 자꾸만 클로즈업이 되어서 떠올랐습니다. 그날부터 그 부부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중에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결국 농장의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한국으로 건너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여 자기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수년후에 두 부부가 여덟명의 한국 고아들을 키운다는 사실이 신문에 기사화되자 그 신문을 본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도 전쟁 고아들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에게 고아를 입양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해리 홀트(Harry Holt) 부부입니다.
그들로 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홀트 아동복지회입니다. 홀트 아동복지회는“사랑을 행동으로”(Love in Action)를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이 있는 순종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을 품었으면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때 진정한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고창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잔칫상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잔칫상이 차려져 있는데 그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귀빈이 앉는 높은 상석에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주인인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잔치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7절로 11절인데 여기서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12절로 14절인데 여기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이 어떤 자세로 손님을 초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대를 받아서 잔칫자리의 상석에 몰려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 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가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으면 높은 자리에 가서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아라! 네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너보다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너와 그를 청한자가 와서 너에게 말하기를 지금 들어온 이 사람에게 네 자리를 내 주어라 라고 말하면 너는 네 자리에서 쫓겨나서 말석에 가서 앉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수치를 당하여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네가 초대를 받았을때 말석에 앉아 있는데 청한자가 너에게 와서 벗이여 이리와서 높은 자리에 나와 함께 앉으라 라고 말한다면 그곳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네가 크게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가 보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높임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회갑이나 칠순 또는 팔순이나 아니면 내가 기관장이 되거나 어떤 모임의 지도자가 되면 식사자리에서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합니다. 그런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아야 마땅하고 또 리더가 되거나 기관장이 되면 역시 상석에 앉아서 모임을 주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높임을 받되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무슨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상석에 앉아야지! 앉아서 대접을 받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상석에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여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여 사람들이 칭찬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 높아지는 그런 사람을 기뻐 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11절에서“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2절에서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에게, 사람들을 초대할 때 초대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할때 초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 네 부류와 초대해야 할 사람 네 부류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잔치를 하면서 초대하지 말아야 손님들 네 부류는 벗, 즉 친구와 형제와, 친척과, 부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이 다시 나를 초대하여 갚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대접하려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값없이 은혜로 베푸는 선물로 대접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대접했으니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나도 대접 받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베풀려면 전적인 은혜로 아무 값없이 베풀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초대해서 잘 대접해놓고, 다시 그만큼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면 내가 대접한 은공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로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상거래 행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이 잔치자리에 꼭 초대하라고 권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벌이려거든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그리고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최 하층민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방으로 밀려난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진자와 높은자가 대접받는 사회에서 이와 같이 흠 있는 사람들은 초대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잔치를 배설해서 손님을 초대하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라고 권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그들은 다시 갚을 아무런 여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받은 것은 말 그대로 은혜의 선물로서의 대접이 됩니다.
이와같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대접하면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려면 하나님만 아시도록 은밀하게 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지도자에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을 가질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하늘나라 잔치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초대의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사람과 영광을 받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이하에 나오는 큰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깨끗한 사람, 건강한 사람만 찾아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무명한 사람, 못난 사람, 더러운 사람, 마음과 몸에 장애가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도 와야 합니다. 이유여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오는곳이 교회요 그런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잔치에 들어가서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하늘나라 초대의 자리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더 상세하게 기록한 마태복음22장 1절로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 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한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예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예복은 예수님의 피뿌린 옷입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시록19:13)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진 세마포를 말합니다. 즉 보혈의 옷을 입은 자만이 천국잔치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마포 즉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7-8)
이와같이 천국잔치에 초대받아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예수님의 보혈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옷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교훈 하셨습니다. 그 진리가 11절에 소개 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성도는 겸손한 자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영국 여왕이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아프리카의 추장 여러 명을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지만 추장 한 사람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있던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하는데 여왕은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갑자기 손으로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모든 만찬객들도 할 수 없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추장들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습니다. 자기들의 마음을 이해한 여왕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왕이 추장들에게 무례하다고 책망을 했다면 영국은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줄 아는 모습이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약점을 담당 한다는 말은 믿음이 약한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 진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신 분입니다. 넉넉하게 이해해주는 것이 바로 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고 슬픔을 대신 담당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애게 건강을 주셨다면 그 건강으로 연약한 자의 약함을 도와주고 보완하라고 건강을 주신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았다면 사치하고 낭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물질로 생명을 살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녀의 형통함을 주셨다면 그것은 자녀들을 통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사명입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 하신다고 성경은 누누이 증거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는 많은 축복의 약속들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겸손“ 하면 성 프랜시스가 생각 납니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환상 중에 천국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가서 보니까 보좌가 양쪽으로 쭉 놓여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으리으리하고 아름다운 보좌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의 제자는 천국의 안내천사에게 “이 보좌는 누구의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게 될 보좌이니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란시스의 제자는 아무리 스승이지만은 너무나 화려하고 높은 보좌를 보는 순간에 은근히 질투가 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후에 어느날 제자가 스승인 프란시스에게 물었습니다.“선 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는 강도, 살인, 도적질 등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세. 나는 본래 참으로 악한 사람이었다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나에게 임해서 내가 그 은혜로 이렇게 착한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거라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걸세”
프란시스는 자기가 이렇게 선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는 비로소 프란시스를 시기질투 하는 마음을 버리고 프란시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겸손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잠언18장 12절에 보면“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사야57장 15절에보면“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한 자와 동행하시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해 주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내 영혼이 소성하고 잘되고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독일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황제의 비서실장을 맡아서 일하던 공작이 있었습니다. 공작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총리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작은 교회를 발견한 그는 들어가 기도를 하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에 빛과 함께 3이란 숫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남겨진 날이 3일 밖에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남겨진 3일 동안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총리로서 황제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났으나 죽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3일이 아니라 3개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3개월을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점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천국처럼 변했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3년이라고 생각하고 3년을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3년이 지나는 동안에 황제가 감동을 받고 그리고 신하들과 국민들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이 총리를 다음 황제로 세우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때 신하들과 국민들도 다 기뻐하면서 황제의 유언을 받들었습니다. 3년이 되는 날 그는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314년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제후들에 의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된 루드비히(Ludwig) 황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을 바로 알고 살면 신앙의 결산에서 흑자를 낼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의 흐름을 보면서 남겨진 날이 얼마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사명을 찾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5장6절에서“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릴 영원한 삶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의 상석에 앉아서 하나님과 가까운 상석에서 먹고 마시며 영생복락을 누리려면 이땅에서 겸손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결정은 내 자신의 몫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현명한 선택으로 영원한 기쁨의 삶을 예비하며,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영원한 삶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생활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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