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농번기에 추수 하고 마늘 심고 시금치밭 갈고 씨 뿌린다고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농번기에 수고 많이 하셨다고 조내원성도님과 강소애성도님이 별식으로 오늘 20만원 어치의 족발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오늘은 유익한 선택을 합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B와 D사이에는 C가 있습니다. B가 Birth 출생을 의미하고 D가 Death 곧 죽음을 의미한다면 B와 D사이에 있는 C는 Choice 즉 선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곧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 곧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직업 선택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직업을 선택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 전체가 달라 집니다.
그러나 결혼이나 직업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의 선택입니다. 신앙을 제대로 선택 하는것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신앙의 선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 진정한 선택이 시작 됩니다.
내가 이제부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에 따라서 행복해 지기도 하고 갈등과 번민의 삶을 살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의 진가는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 했기에 마지막에는 영광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믿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고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뜨거운 지옥불이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도 귀하게 보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죽기 전에 동영상으로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 장례식을 진행할 때 목사님이 유언으로 남기신 그 동영상을 전 교인들 앞에서 틀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그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용식 장로님, 그 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제가 목회를 잘 하도록 도와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김용식 장로님 설교 시간에 하품 좀 하지 마세요!” 그 순간 조용하던 장례식장이 ‘와’ 하고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시는 말씀이
“최영림 권사님,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늘 맛있는것 사주시고 대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권사님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권사님도 설교 시간에 눈 감고 설교를 듣는데 그건 목사인 내가 보기 싫어서 그런것은 아니겠지요? 설교 시간에는 반드시 목사를 쳐다 보면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권사님! 이제부터 꼭 설교 시간에 눈을 크게 뜨고 목사님을 쳐다 보면서 예배를 드리세요!
그리고 김영달집사님! 교회 나올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가대에서 봉사 하시니 고맙습니다. 김집사님이 성가대에서 이상한 소리 내는거 내가 다 압니다. 저도 옛날에 집사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때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성가대 계속 하셔서 훌륭한 성가대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장례식 치르느라 이곳에 모인 모든 조객들에게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나 먼저 갑니다. 부디 열심히 신앙 생활하시다가 이다음에 천국에서 기쁘게 만납시다” 그러고는 목사님께서 손을 흔드셨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마지막 모습 입니까? 해학도 있고, 여유도 있고, 거기에 어떤 의미있는 교훈과 더불어 소망적인 메시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목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우울해 했는데 목사님의 동영상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신앙인의 멋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하용조목사님이 돌아 가셨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4인방 중에 한분인 하용조목사님이 돌아 가셨을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 했지만 그러나 장례예배때 설교를 맡은 하용조목사님의 친구 이동원목사님은 장례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용조목사님은 죽는 그날까지 선교에 관계된 일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수 많은 일들을 하면서 인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이 장례예배 설교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천국에 가신 하용조목사님은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 앞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쏟아 내면서 “예수님 천국에서는 이러 이런 일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천국에서도 분명이 이런 저런 일을 하자고 예수님께 말씀하셨을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하용조 목사님에게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자네는 좀 푹 쉬게나!” 하고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장례예배를 드리던 모든 교인들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동원목사님이 몇 년전에 옥한흠목사님과 하용조목사님 그리고 홍정길목사님과 함께 북한을 도우려고 계획을 했는데 일단 중국에 들어가서 비자를 받으려고 한 주간 호텔에서 머무셨다고 합니다. 그때 자기는 절대로 하용조목사님과 함께 방을 쓰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용조목사님과 한 방을 쓰면 하용조목사님은 어디를 가든지 잠을 안자고 밤새도록 “선교는 어떻게 할까? 목회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하면서 계속 말을 시키고 묻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바람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동원목사님이 자기는 홍정길목사님과 함께 방을 쓰고 옥한흠목사님이 하용조목사님과 함께 방을 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내내 하용조목사님과 옥한흠목사님이 눈이 빨갛더랍니다. 하용조목사님이 잠을 안자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니까 옥한흠목사님도 같이 밤을 지새면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두 목사님이 일주일동안 눈이 빨개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동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때 저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교회 일에 너무나 신경을 쓰니까 빨리 죽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성도들이 또 한번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옥한흠목사님이 작년에 돌아 가시고 하용조목사님도 올해 돌아 가셨기에 이동원목사님이 그런 조크를 한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도 웃을수 있고, 찬송도 부를 수 있고, 그리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떠나가는 사람을 보낼 수 있는것은 우리 기독교 만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카네기 공과대학(C.I.T UNIV)에서 인생살이에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을 표본조사해서 성공한 이유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연구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사람이 학벌이나 지식 또는 기술이 부족하거나 혹은 무능해서 실패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전문적 기술과 지식이 결여되어서 실패한 사람은 15%밖에 안되고 85%가 인간관계에서 실패 했기에 인생에 실패 했다고 조사발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왜 실패를 했는가를 또 연구해 보니까 실패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생각과 언행심사가 부정적이었습니다. 입만열면 원망불평이 나왔습니다. 매사에 입만열면 원망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고 좋은 말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언제나 양면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 아니면 미움, 긍정 아니면 부정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갈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원망불평하는 사람은 늘 원망불평할 일만 생기고 감사하면서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감사할 일과 좋은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수고해도 성공할 기미가 안보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할까 비판하는 말을 할까, 그 선택에 따라서 내 인격과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입만열면 원망 불평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과 똑 같이 기쁨이 소멸되고 딱딱하고 굳어버린 마음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고 감사가 넘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믿음이 좋아지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강오심권사님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새벽예배에 나오시니까 봉우 성도님들이 똑같이 따라서 나오십니다. 고봉례집사님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오시더니 팔순이 넘으신 박양순성도님도 거의 한번도 안 빠지고 새벽예배에 나오시는데 이번에는 마늘 심는 기간 동안에 그 넓은 밭에서 근 일주일동안 죽도록 고생을 하고 이틀 동안은 정말 마늘 심느라 뼈가 빠지게 고생을 했는데도 하루도 안빠지고 새벽예배에 나오는 것을 보고서 지난 구역예배때에 강오심권사님이 “박양순성도님! 참 대단합니다!” 하면서 극구 칭찬을 하셨습니다.
초신자가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일을 하면서도, 그것도 팔순이 넘으셨는데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새벽예배에 나오셨으니 강오심권사님이 보시기에도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워서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멘토 되는 구역장이 그렇게 모본을 보이니까 봉우 분들이 그렇게 다들 열심히 새벽제단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금요일에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정춘자집사님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요즘 자기집에 도우미로 와서 일하는 분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수발을 하고 헌신을 하는지, 늘 자기 집에 올 때 마다 정성껏 음식을 해서 가져오고, 집도 깨끗하게 관리를 잘 해 주고 하여튼 자기가 해 달라는 대로 부족함이 없이 도우미 일을 너무나 잘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우미 일을 하시는 요양 보호사님에게 “금요일날 우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립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요양 보호사님이 “구역예배 드리면 손님들을 대접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요?” 하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있는대로 하면 됩니다!” 했더니 이분이 금요일날 아침에 집에서 정성껏 김밥을 싸가지고 가져와서 “금요 구역예배 드린후에 성도님들하고 드세요!” 하고는 김밥을 잔뜩 싸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금요 구역예배를 드린후에 모든 구역 식구들이 그 요양보호사님이 준비해 오신 김밥 파티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 요양 보호사님을 칭찬을 하면서 고마워 했습니다.
도우미 일을 해도 그렇게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도우미로 헌신 하니까 그런 분은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 집니다.
제가 전에 한번 소개 했는데 새신자들을 위해서 한번 더 소개 합니다. 한 부잣집에서 하인을 두사람 고용 했습니다. 그래서 근 10년간 일을 했는데 하루는 집 주인이 두 하인을 불러서 “이제 내일이면 일을 그만두고 나가서 새 일자리를 찾아 보게!” 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일 내가 아주 가느다란 새끼줄이 필요 하니까 오늘 밤에 광에가서 가느다란 새끼줄을 꼬아 놓게!” 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두 하인은 그날 밤에 광에 가서 가는 새끼를 꼬기 시작 했습니다. 한 하인은 원망 불평을 하면서 “에이 더러워서 못살겠네! 가는 날까지 우리를 부려 먹어? 더러운 영감태기 같으니!” 하면서 화가 나서 대충 몇 미터 꼬다가 그냥 잠을 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하인은 “그래도 이 어려운 때에 주인님 집에서 10년간 잘 먹고 잘 지냈으니 그것 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동안 주인님에게 받은 은혜나 갚자!” 하고는 밤 늦게까지 새끼를 꼬다가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주인이 아침에 두 하인을 부르더니 “너희들이 그동안 우리 집에서 수고를 많이 했으니 내가 그 수고한 댓가를 주겠다 지금 너희는 광에 가서 어제밤에 꼰 가느다란 새끼줄을 가지고 나를 따라와라” 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두 하인이 새끼줄을 가지고 왔는데, 원망 불평하던 하인은 2-3미터 밖에 안되는 새끼줄을 가져왔고 마지막까지 주인의 은혜를 갚겠다던 하인은 한타래나 되는 50미터나 되는 새끼줄을 꼬아서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갔더니 안채의 창고로 가더니 그 창고의 자물통을 여니까 그곳에 엽전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동안 수고 많았다! 너희들이 어제 꼰 새끼줄에 이 동전을 꿰어서 가지고 가거라!” 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2-3미터의 새끼줄을 꼰 하인은 수백냥의 동전을 꿰어서 가지고 갔고 50미터의 새끼줄을 꼰 하인은 수만냥의 동전을 꿰어서 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수만냥을 가지고 나간 하인은 집도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서 부모님을 모셔다가 호강을 시켜 드리면서 잘 살았고 수백냥의 동전을 가지고 나간 하인은 억울하고 분해서 그길로 그 돈을 들고 주막에 가서 몇 날 며칠을 술을 퍼먹고 결국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감사하는 사람과 원망 불평하는 사람의 종국이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잘 가르쳐준 예화 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 때문에 인생의 향방이 달라 집니다. 한번 잘못 선택한 일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를 하면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인생 살이가 감옥살이가 되기도 하고 한번의 올바른 선택과 결단으로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2002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최고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아이돌(Idol star) 가수중에 유승준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이 믿음도 좋고 인물도 아주 잘 생기고 배에는 왕(王)자 복근에 건강미가 넘치는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유승준군이 팬들에게 틈만나면 “나는 당당하게 군대에 가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는데 2002년 군 입대를 앞두고 영장이 나왔는데 갑자기 군대를 안가고 미국에 가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받아가지고 한국에 돌아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의적 병역 기피죄”로 유승준군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쫓아 냈습니다. 그래서 유승준군은 우리나라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입국을 거부 당한채 공항에서 다시 미국으로 쫓겨 갔습니다.
유승준군은 그 이후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절정의 가수생활을 하던 유승준군은 그후로 후회 막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러나 팬들은 이미 고개를 돌렸고 사랑이 변하여 증오가 되어서 인터넷에는 “배신자! 저주받아라! 영원히 한국땅에 오지마라! 오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 더러운 매국노! 쓰레기 같은 인간!”등 이루 말할수 없는 악플이 계속되고, 7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유승준군을 매국노에 배신자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승준군은 7년동안 한국땅을 밟지 못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중국에 가서 가수와 연예인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승준군의 입장 에서는 이 사건이 억울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승준군은 당시에 시민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잘 몰랐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승준군이 병역을 기피하려고 그런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정말 군에 입대하려고 작정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군대에 간다!” 라고 평소에도 큰소리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4급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라는 병무청의 영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2002년도에 공익 근무요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입소하기 바로 3개월 전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에 가서 시민권을 취득한 것입니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건강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승준군은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다가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는데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 군대 입소 날짜가 다가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앨범을 내기로 소속사와 합의를 하고 뮤직 비디오를 찍고 있었는데, 만약에 군대에 입대 하기전에 앨범을 내지 못하면 그 모든 손해 배상을 자기가 소속한 연예 기획사에서 모두 물어 주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승준군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승준군이 미국에서 지낼때 시민권을 신청해서 시민권이 나왔는데 자기는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그리고 한국에서 군대에 가려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 하겠다는 서류를 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수 생활을 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시민권을 포기한 서류가 허락이 안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미국에서 미국 시민권을 받으라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군대를 가면 뮤직 비디오를 찍지 못하기에 자기의 소속사가 엄청난 돈을 물어 내야하는 답답함이 있고 그렇다고 군대에 안갈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을 하던차에 마침 시민권이 나오는 바람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단 시민권을 받으면 군대를 안가니까 건강도 다시 회복할 수 있고 그리고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도 찍을수 가 있으니까 소속사가 손해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부모님들도 아들 승준군이 건강이 악화된 것을 알고서 시민권을 받으라고 승준 군에게 극구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승준군이 한국에서 군대 가는것을 포기하고 미국에 가서 시민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가겠다던 군대를 안가고 미국에 가서 미국 시민권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한국에 돌아오는 순간, 유승준군은 매국노에 죽어 마땅한 배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승준군이 미국 시민권을 받고 한국에 돌아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에서는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난리가 났습니다.
어쩔수 없는 속 사정이 있어서 건강상의 문제와 소속사의 배상 책임 문제 때문에 시민권을 받아 가지고 돌아 온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승준군을 사랑했던 팬들은 분노에 가득차서 그에게 돌을 던지면서 “매국노! 더러운놈! 우리나라를 떠나라!” 하면서 난리를 쳤고 결국 병무청과 검찰은 그에게 “고의적 병역 기피죄”를 적용해서 미국으로 돌아 가라고 지시를 하는 바람에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땅도 못밟고 공항에서 다시 미국으로 쫓겨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승준군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후로 크게 실망해서 두문불출하고 오랜 시간동안 교회에서 찬양 사역자로 지내다가 3년 전부터 중국에 가서 두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중국 연예계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성룡이 소속한 JC 엔터테인먼트 기업과 전속계약을 맺고 영화 출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나는 피치못할 상황이 되어서 불가불 그런 선택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런것을 인정해 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유승준군은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있다가 하루 아침에 죄인이 되어서 온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서 인생을 살아야 하는 형편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었다면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연예인 으로서 그런 고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승준군은 믿음이 좋은 청년입니다. 그는 고백 하기를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제 인생이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제 인생의 마지막 목표는 한국에서 직접 용서를 비는 것 뿐입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증오와 미움과 원망으로 계속해서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미워하고 마음을 풀지 못하고 계속 증오하게 하는것은 마귀의 궤계요 마귀의 속성 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로 모든 사람을 구원 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도 인간 이기에 때로는 미음과 증오를 가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좆아 사랑의 길로 은혜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름지기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유승준군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군대문제를 공약대로 실천 했어야만 합니다.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군대에 입대를 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끈다고 성급하게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지금까지도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된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나도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내고 있습니다. 절망을 선택하지 않고 지금도 주님 안에서 기도 하면서 희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희망 마저도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버림받은 청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선택을 잘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귀감이 된 바울 사도의 모습이 소개 됩니다. 3차 선교 여행을 마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거기서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악의에 찬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함으로 인해서 바울 사도는 그로부터 2년 동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후에 바울 사도는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송 되었고, 로마에서도 다시 2년 이상을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최소한 4년 정도를 감옥에서 생활 한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던 바울 사도는 하루 아침에 죄수로 감옥에 갇혀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감옥은 모든 소망이 좌절되는 장소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사도가 하루 아침에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함으로 쥐와 바퀴벌레와 거미와 지네가 돌아 다니는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지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이와같이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죄수로 있으면서 쓴 성경입니다. 그런데 절망에 빠진 바울사도에게 한가지 큰 위로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세운 개척교회인 빌립보 교회 때문 입니다. 바울사도가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은 후원금을 거두어서 그 돈을 에바브로디도에게 주어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에게 전달을 했습니다.(빌4:18).
그런데 그 후원금을 가지고 로마로 간 에바브로디도가 중병에 걸려서 죽을뻔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사도가 로마감옥에 갇힌지 1년쯤 되었을 때 로마에 도착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낸 후원금을 받은 바울사도는 엄청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당시에 빌립보 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빌립보교회에 율법주의와 비도덕주의 그리고 이단사상 때문에 빌립보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를 위해서 서신을 쓰게 되었는데 그 서신이 바로 빌립보서 성경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빌립보서에서 기뻐한다는 말을 무려 16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처해있는 현실은 절대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13절 14절 17절에서 “나는 매여있다” 라고 고백 합니다.
여기서 매여있다는 헬라어는 “사슬이나 착고에 결박 당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사슬에 매이고 착고에 채여 있는 바울사도가 “나는 지금 너무나 기쁘고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있다”라고 고백 하면서 “내가 이렇게 결박되어 수감되어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었다” 라고 21절에서 고백 합니다. 그 유익은 12절과 같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대의 정통종교인 유대교를 외면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라고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을수 있다고 전도하는 바울 사도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를 죽이기로 결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거기서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체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당시에 바울사도가 체포 되지않고 그냥 있었더라면 바울사도는 폭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거나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병에게 체포가 되는 바람에 로마 군병들의 보호때문에 살았습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의 꿈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마침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서 로마 군인들의 보호 속에서 로마로 호송이 되었기에 바울 사도는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로마에 가고 싶은 꿈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비록 자기가 체포되어 로마 감옥에 갇혔지만 그러나 그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12절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날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정춘자집사님이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 제목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내가 중풍 때문에 잘 걷지 못하고 기동이 불편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구원을 받고 진짜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실 누구라도 몸을 잘 못쓰는 장애자가 되면 그런 고백을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이 육체에 장애가 생기면 좌절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하고 많은 사람중에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살고 싶은 소망도 사라지고 매사에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어지고 사람들이 나를 볼까봐 사람들을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춘자집사님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루종일 하나님과 동행 합니다. 식사하기 전마다 성경을 읽는데 알고 보니까 세장을 읽는게 아니라 삼시 삼때마다 식사전에 한시간씩 하루 세 번 세시간이나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구역예배때 대표 기도를 시켰더니 교회를 십년 다닌 분보다 훨씬 더 기도를 잘합니다.
그리고 정춘자집사님은 무엇 보다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심으로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정춘자집사님은 교회에서 크고 작은 애경사가 있거나 성도가 상을 당하거나 어떤 일이 있으면 절대로 그냥 안넘어 가고 적어도 꼭 부주를 하고 물질로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하십니다.
더불어서 정춘자집사님은 아무리 속상하는 일이 생기고 가슴아픈 일이 생겨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설천교회에서 주일날 아침에 장로님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제가 정춘자집사님을 모셔와서 교회에 들어가시게 하고 저는 다시 다른분을 모시러 갔는데 정춘자집사님이 지팡이를 집고 교회 본당의 문턱을 들어 서다가 그만 말을 잘 안듣는 한 쪽 발이 문지방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정춘자집사님이 “나좀 도와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장로나, 본당 뒷자리에 앉아서 성경공부에 동참한 권사나 집사들은, 정춘자집사님이 “나좀 도와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질 않았습니다. 앞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장로도 그 광경을 빤히 쳐다 보면서 나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계속 성경만 가르치고 있고, 뒤에 앉은 뚱뚱한 권사는 고개를 휙 돌려서 쳐다 보더니 상관도 하지않고 외면하고, 한 남자 집사님도 쳐다 보더니 안 도와주고 그냥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들 힐끗 쳐다만 보고 자기를 외면하는 바람에 정춘자집사님은 그 순간 너무나 분하고 괴로워서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권옥란권사님이 들어오면서 도와주는 바람에 넘어져서 다칠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면 누구라도 그런 교회에는 다시는 발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정춘자집사님은 그날 “내가 죽어도 교회 안다닌다 !” 라고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처절한 슬픔과 괴로움을 겪었기에 안 다니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저는 예배가 끝난후에 정춘자집사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면서 그날 있었던 사건의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집사님을 모시고 집사님 댁에 들어가서 집사님에게 무릎을 꿇고 교회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저는 집사님에게 “집사님!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곳이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엉터리 직분자와 엉터리 신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나몰라라 하는 그런 가라지같은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모습에 실족하지 말고,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교회를 대표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테니까 절대로 구원의 길을 포기 해서는 안됩니다!” 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그런 무식하고 가식적인 성도가 되지말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알곡같은 성도가 되도록 하자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 상처를 주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정춘자집사님이 평생에 지울수 없는 그런 상처를 받고도 그 상처를 다 뒤로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 후에도 정춘자집사님은 지금까지 교회를 떠날만한 어려운 일들을 여러번 당했는데도 정춘자집사님은 끝까지 참고 인내 하면서 믿음을 키워 오심으로, 이제는 우리 남해 세광교회에서 믿음좋은 집사님으로 당당하게 세움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남해 세광교회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귀한 집사님이 되셨습니다.
한가지만 더 고백 할까요? 심지어 어떤 나이많은 집사님은 예배가 끝난후에 정춘자집사님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서 나가니까 교회 맨 뒤의 의자에 앉아서 한다는 소리가 “저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 교회를 오는건가? 차라리 그냥 집에 있지!”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게 수십년동안 믿었다는 집사가 할 소리 입니까? 그분이 적어도 교회를 20년 이상 다닌 집사님입니다.
도대체 교회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수십년간 교회에서 밤낮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배웠는데 도대체 뭘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온 장애자를 향해서 “저런 몸으로 뭐할라고 교회를 오냐고요? 그게 집사가 할 소리입니까?”
성경공부 가르치면서, 장애자가 교회에 들어오다가 문턱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런데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도와 줄 생각도 안하고 계속 성경을 가르치는 장로나, “저런 몸으로 뭐하러 교회에 오냐고!” 떠드는 그런 한심한 말을 지껄이는 집사나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비 인격적인 위선자들이 교회에 드글 드글 하니까, 세상이 온통 교회를 욕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당연히 조롱과 비방을 받아 쌉니다. 이런 교회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자, 병든자, 소외된자, 장애자,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신 주님 이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고 섬기라고 세상에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새신자가 왕이요, 장애자가 대접을 받는 곳이요,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는 곳이 교회 입니다. 정춘자집사님이 교회에서 여러번 이런 저런 고난과 시험을 당했습니다. 누구라도 그쯤되면 “에라 썅!” 하고 실족해서 교회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춘자집사님은 끝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춘자집사님은 그후로 제가 심방을 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날마다 집 앞에서 운동을 하면서 “하나님! 내가 죄가 많아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거지요? 내가 교만하고 나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았기에 회개 하라고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거지요? 하면서 날마다 하루종일 회개를 하면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분나쁜 일만 있으면 “나 교회 안갈랍니더! 나 이러 이러해서 기분 나빠서 교회 안갈랍니더!” 하고 툭하면 삐져서 교회 안간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런 성도도 있는데 정춘자 집사님은 지금도 기도만 하면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 하면서 늘 회개 기도와 감사 기도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고난중에 회개할줄 아는 성도는 진리를 다 배운 성도요, 깨닳은 성도 입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의식이 없고 아무런 회개도 없고 반성도 없는 성도는 백날가도 은혜 받기는 틀린 성도입니다.
정춘자집사님은 마귀의 시험을 잘 이겨내고 회개 했기에 하나님께서 높은 수준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춘자집사님은 “내가 몸이 아파서 이렇게 된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몸이 이렇게 되었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훌륭한 신앙고백으로 모든 고난과 장애를 이긴 집사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고백으로 사시는 정춘자 집사님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분들의 이름은 다 잊어 버려도 날마다 새벽마다 정춘자집사님은 절대로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춘자집사님이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고 우리 남해 세광교회를 위해서 귀하게 헌신하는 충성된 일꾼이 될 줄 믿습니다.
정춘자집사님이 이렇게 귀한 집사님 이기에 제가 매주일마다 정춘자집사님과 함께 같이 앉아서 점심식사도 같이하는 것입니다. 제가 2년동안 정춘자집사님과 함께 마주 앉아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강사 목사님이 목사님이 사모님과 같이 안안고 집사님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 어떻게 하냐고 이야기를 하시는 바람에 그 다음 부터는 집사님이 제 옆쪽에 앉고 사모가 제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 사도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으로 보면 차디찬 지하 감옥에 같혀서 비참한 모습으로 절망에 빠져 있어야 할 바울 사도가 낙심하지 않고 감옥 안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바울사도는 시위대 안에서 군인들에게 전도를 한 것을 알게 됩니다. 시위대는 로마 황제를 지키는 군인 들이요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부대입니다. 또한 황제 직속 부대였기에 상당한 권세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여섯시간씩 4교대로 죄수들을 지켰는데 바울사도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감옥전도는 목사님이나 신앙좋은 간수가 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때 한달에 한번씩 카운티 감옥에 가서 감옥 전도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면 미국인 죄수들이 방마다 즐비 합니다. 그들은 모두들 증오와 살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거나 아니면 낙심한 모습으로 인생을 체념한 모습으로 공허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는 영등포 교도소에 가서 매달 전도를 했습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모습으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 또는 사명을 받은 장로님이나 사회에서 중생한 분들 중에서 믿음이 좋은 분들이 가서 전도를 합니다. 죄수가 간수에게 전도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같혀있는 죄수의 신분인데도 자기를 지키는 간수들과 로마 군병 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감옥의 간수들은 로마시민이요 로마 군병은 황제를 경호하는 경호부대의 장교들과 병사들이기에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바울사도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바울사도가 하찮은 식민지 나라의 한 유대인 죄수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그들이 바울 사도의 전도에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한 일로 인해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다”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자료들도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힌 이후로 로마 황제의 측근들 중에 예수믿는 신자들이 많아 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삼촌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어머니와 딸, 그리고 고급 관리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시위대 안에 갇혀있는 2년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한 결과로 나타난 복음의 진보 였습니다.
게다가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히자, 많은 성도들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다가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 연로한 바울사도가 복음전파를 위하여 저토록 애를 쓰는데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깨닳음으로 더욱 열심히 전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즉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힌 틈을타서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사도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로마뿐 아니라 멀리 있는 성도들로부터까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크게 질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순전하지 못한 의도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을 다 알게된 바울 사도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8절에 보면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라고 바울사도는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됐건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했든 나쁜 뜻으로 복음을 전했든 간에 주님의 복음이 전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것도 그리스도니 죽는것도 유익한 일이라”라고 21절에서 바울 사도는 증거 합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죽는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사도의 삶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바울사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떤 형편에 처했던지 “그리스도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 아니냐” 였습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 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다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가 예수님께 영광이 되도록 살아 가는것!” 그것이 바로 믿는 성도가 선택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살다 보니까 이웃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 졌습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때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면 내가 잘못한것 보다 저쪽이 잘못한게 더 많다 하더라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에 참고, 지고, 양보하고, 용서하고,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에, 싸우지 않고 참고 용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때 강퍅한 마음으로 악에 바쳐서 똑같이 싸운다면, 그것은 믿는 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닙니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피난을 가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므이가 따라 오면서 다윗을 저주 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이하에 보면 시므이가 도망가는 다윗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처 하였느니라”
환란과 고난을 당하여 도망가는 다윗 왕에게 시므이가 저주를 퍼 붓습니다. 그러자 군대장관 아비새가 9절에서 “저 죽은 개같은 자를 당장 쫓아가서 머리를 베어 버릴까요?” 라고 화가나서 다윗왕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가만 두어라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저주하라 하심이니 저로 저주하게 가만 두라” 라고 대답을 합니다.
참 대단한 고백입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개같은 시므이를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냥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따라야 할 모습입니다. 싸울것 다 싸우고 저주할것 다 저주하면 나에게 복이 오질 않습니다. 다윗이 이런 수모까지 다 참고 인내 하니까 하나님이 다시 모든 영광을 돌려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억울한 일도 당하고 기분나쁜일 자존심 상하는일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모든 시험을 참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다윗과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죽는 그날까지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는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분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내리는 결정이 그리스도에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최 우선 원칙으로 삼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시고 보상이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축복을 누리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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