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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3년1월13일 욥기23장1-10 고난의 의미

그리운시냇가 2013. 1. 13. 22:33

 

 

 

오늘은 욥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욥은 모든 세상사람들이 소원하는 복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가정을 보면 아내와 아들 일곱에 딸 셋등, 10남매가 있었고, 자녀 중에 속 썩이는 자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욥의 가정은 잔치를 하고난 후에는 욥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자녀들을 다 모아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욥이 믿음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은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양이 7천 마리, 약대가 3천 마리, 소가 천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였습니다. 이정도면 당시에 최고의 거부 였습니다.

 

대개 이렇게 재산이 많으면 신앙생활에는 게으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산이 많고 축복을 많이 받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서 증거 하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욥이 이렇게 축복받은 상태로 평안히 지내다가 천국에 가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욥에게 고난이 임했습니다. 

 

제일 먼저 재산을 거둬가셨습니다. 강도가 와서 가축을 빼앗아가고, 천둥 번개가 내려서 모든 재산이 불탔습니다.

 

그뿐 아니라 10남매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는데, 강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일순간에 10남매를 다 잃었습니다.

 

대개 이쯤되면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슬퍼하다가 실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상황 속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욥기1장20절 이하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라고 증거 합니다.

 

욥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알몸으로 왔으니 그동안 내가 누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셔서 누린 것이요 이제 하나님이 다시 거두어 가셨으니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라고 고백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욥은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의 때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모든 것이 다 잘 될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고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올려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열배 백배 더 기뻐하시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이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더 큰 고난이 찾아 옵니다. 이런 고난을 만난 욥의 아내는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고난의 때에 위로해 주어야 할 아내가 오히려 저주를 한 후에 집을 나갔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덥친 격으로 욥은 몸에 중병까지 들어서 고난이 극에 달합니다. 온몸에 독한 창질과 종기가 생겼는데 너무나 가렵고 괴로워서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온몸을 긁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살이 썩어서 몸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피부가 터졌습니다. 욥기 7장 5절에 보면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다 욥을 멀리하고 떠나 갔습니다.

 

욥기 19장 13절로 15절에 보면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났으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8절로 20절에 보면 “어린 아이들까지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라고 증거 합니다.

 

욥이 얼마나 삐쩍 말랐는지 잇몸 밖에는 남은 살이 없고 얼굴도 해골 같아서 그 끔찍한 모습을 사람들이 싫어서 외면 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욥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받게 되었습니다. 명예, 권세, 이름, 건강, 가족, 친구,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중에 가장 큰 고통은 “왜 이런 고난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 모든 고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 합니다.

 

욥기 13장 22절로 23절에 보면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고백 합니다.

 

이 말은 “도대체 저의 죄가 얼마나 크기에 이런 고난이 옵니까? 저의 고난의 이유를 말씀해주세요!”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욥은 고난중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러나 “하고 많은 사람중에 하필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억울해 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괴로워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내가 언제까지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때문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짧다면 그나마 견뎌 보겠지만 문제는 너무나 막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이 오랜시간 계속되자 나중에는 욥도 믿음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면서 부모와 하나님을 향해서 슬픔과 원망의 말을 쏟아 놓았습니다.

 

욥기 3장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나를 낳을 때에 내가 죽어서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욥기 13장 24절에도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고백 합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또 한가지 고통이 가중 됩니다. 그것은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이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준 것입니다.

 

욥기서의 3분의 2가 욥과 욥의 친구들간에 벌어진 변론과 쟁론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네가 죄를 지어서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라고 노골적으로 욥을 책망 했습니다.

 

욥기 20장 27절에 보면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숨겨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찾아내셔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원인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처럼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 찾아와서 욥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때 욥은 그런 친구들의 정죄에 맞서서 항변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고 범죄한 일이 없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친구들과 변론을 하면서 점점 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만 주장하다가 이 모든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게 됩니다.

 

욥은 결국 사탄의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 당하는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함정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건가? 설령 내가 죄를 지었다 하자! 내 죄가 이렇게 내 일생을 망칠 정도로 큰 죄인가? 내 죄가 내 자녀들의 운명까지 끝내게 만들만큼 큰 죄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면서 항변하기 시작하면 원망불평이 끝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긍휼의 기회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욥은 사탄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듭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와같이 항변하는 욥에게 “그럼 어디 한번 네가 대답해 봐라?” 하시면서 욥에게 이것 저것을 물으시는데, 욥은 그 물음에 한 마디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32장에 보면 하나님은 욥에게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내가 물의 근원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네가 아느냐? 얼음이 뉘게서 났는지 아느냐? 일월성신의 조화를 네가 아느냐? 산의 염소가 언제 새끼를 낳는지 너는 아느냐? 눈에 보이는 이런 현실 세계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높은 하늘의 세계를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힐문 하시면서 “그러므로 내가 너의 고난을 설명해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욥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내용은, “고난은 해석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고난이 왔는지 그것을 해석하려고 하면 반드시 믿음이 식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고난은 결코 해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받아 드리고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에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것을 수렴하지 못하면 신앙이 좌절됩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나는 아이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도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고난들을 끝까지 해명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속담에 “오리를 줄 세워서 데리고 갈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은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해명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에 떨어집니다. 불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설명이 안 되니까 결국 믿음을 파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단순 방정식이 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섭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온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 고난을 내가 겪어야 하는 것 이라면 주님 안에서 이 고난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믿을 수 있게 해주시고, 내가 볼 수 없다면, 눈을 감고 수용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이 언제 하나님 앞에 열려서 은혜를 받았습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아니면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경험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만사가 잘 되고, 자신감이 넘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서 힘이 빠졌을 때, 너무 슬퍼서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절망과 좌절속에서 괴로워 할때, 그때가 오히려 귀가 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오고 가슴에 저미도록 마음속에 스며들어 옵니다.

 

그래서 신학자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말하기를 “고난은 귀머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신비한 확성기다”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고난당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사람과 교제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중에 있는 사람은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조용히 묵상할 때 하나님이 깨닳음을 주시고 음성을 주십니다.

 

그것은 책망의 음성일 수도 있고 위로의 음성일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기도 하고 예비된 축복을 선물로 주시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선하게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비판하는 친구들에게, 자기의 의를 해명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정력낭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온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고난을 쳐다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고난당한 욥이 잘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중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로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에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를 정죄하고 비판한 친구들을 용서 했다는 것입니다.

 

욥은 논쟁을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욥이 놀라운 진리를 발견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중에 있는 자기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을 준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닳은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본문 욥기23장 10절 소개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이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자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단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나를 단련 하고 계신데, 이 연단을 잘 인내하고 극복하면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다” 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지선”이라는 여대생을 기억합니다. 교통사고 후에 온몸에 55%나 되는 화상을 입고 일곱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십번 수술을 받았습니다. 얼굴이 다 녹아내리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그녀는 하루 아침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서 얼굴이 일그러진 그녀는, “내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1968년도에 스웨덴에서는 두 팔이 없고 다리가 하나 없는 장애아가 태어 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레나 마리아”라는 여인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장애자 딸을 정상인과 똑같이 키우면서 그녀에게 깊은 신앙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녀는 기도하면서 노력한 끝에 세계 장애인 수영 대회에서 네차례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CCM가수로 활약하면서 행복한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꿈꾸는 토루소맨 더스틴 이야기”에 등장한 더스틴은 다섯살 때 박테리아가 감염이 되어서 두 다리를 절단했고 다시 두 팔도 팔꿈치까지 절단 했습니다.

 

그런데도 더스틴은 레슬링을 배워서 오하이오주 힐스브로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일반 학생선수들과 레슬링 경기를 해서 42승 4패의 경이로운 전적을 세웠습니다.

 

더스틴은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한적이 없고 항상 감사와 행복이 넘쳤습니다. 어느 기자가 “당신은 다시 손과 발을 갖기를 원합니까”라고 묻자 “아니요 이대로가 좋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오늘날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게 된것은 내가 장애인이라고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놀이공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청룡열차라고 하는 롤러 코스터를 탑니다. 청룡열차를 타면 어지럽고 무섭고 간이 콩알만해 져서 비명을 지르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런데 청룡열차가 왜 인기입니까? 그것이 왜 스릴 만점입니까?

 

미친듯이 돌아가지만 얼마 안가서 그 열차가 멈춰 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청룡열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린다면 청룡열차를 타는 것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나 시련에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고난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한 후에 비로소 고난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금같이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선용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욥기서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욥기 42장 10절에 보면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증거 합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회복 한 후에 욥은 자기를 정죄하여 자기를 엄청난 고통 속에 몰아 넣은 구들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욥은 아직 자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친구들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용서와 사랑의 축복 기도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성도간에 주고받은 상처 때문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 속에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라는 다리를 건너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축복의 하나님께 건너갈 수 있는 용서라는 다리를 내 손으로 자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교회 공동체가 살고 나라가 살고 내 운명을 고치는 길은 용서하고 축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유 없이 욥을 괴롭혔습니다. 욥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불의한 말로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벗어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은 원망을 그치고, 용서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내 인생에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죽어도 그 사람은 용서못해!” 하면서 가슴속에 미움을 숨겨두고 계십니까?

 

용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대인을 숨겨준 일이 화근이 되어서 일가족 모두가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독일군은 코리 텐 붐 여사와 그의 언니에게 여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악랄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언니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 여사는 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녀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공황 속에 놓인 독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독일에서 집회를 열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코리 텐 붐 여사와 악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집회가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다가오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코리 텐 붐 여사는 피가 거꾸로 용솟음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바로 수용소에서 자기와 언니를 가혹하고 잔인하게 고문 했던 그 간수였던 것입니다.

 

그 간수는 코리 텐 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간수를 똑똑히 알아 보았습니다. 그녀는 도저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마음 속에 “그를 용서해라. 나는 그 사람까지도 구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노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코리 텐 붐 여사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손을 내밀었고 그 간수를 끌어안았습니다.

 

그순간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욥이 용서의 기도를 하자 하나님이 그에게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서 보듯이 욥의 건강과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축복기도를 한 직후입니다.

 

사실 “용서는 기적”입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는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축복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욥은 아내도 용서하고 자기를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했습니다.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려고 하면 내가 당했던 아픔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상처의 쓴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용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기적인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욥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한 후에 욥이 받은 축복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둘째, 재산이 갑절로 늘었습니다.

셋째, 인간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넷째, 자녀와 더불어 장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과 회복의 기적은 결코 욥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욥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어느 때나 자기 자녀들을 다루시는 원리는 같습니다.

 

구약시대에 욥을 다루시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다루실 때에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욥이 절망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 크신 팔로 안아주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찾아 오셔서 고난당한 나를 품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힘들게한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큰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욥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환난과 고난도 이겨나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런 좋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욥이 행한대로 행하여 욥이 받은 축복을 누리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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