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고난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아울러 고난주간이 사작되는 주일을 종려주일 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 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하고 찬송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 했기에 종려주일 이라고도 부릅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전 500년 전에 메시야 구세주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 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께서 말(馬)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전쟁하러 나갈 때는 말을 타고 나갔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귀를 타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하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은 유월절 명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천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명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모였고, 이스라엘 전역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었기에 예루살렘은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짤라서 길에 펴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행렬의 앞에서와 뒤에서 동행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 21:9)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호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 문제 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구세주가 오시면 자기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고난 당하는 자기 민족과 자기나라를 회복할 구세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왕으로 오셨지만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거나 이스라엘만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혁명가나 지도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죽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생명을 구하는것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삼아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울러 대 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씩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로는 사람의 죄를 영구히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짐승 제사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 이하에 보면, 구약의 속죄 제사와 예수님께서 드려주신 십자가 제사의 차이점을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렸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사람의 죽은 양심과 죽은 행실을 살리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안찬호선교사는 본래 탄광의 광부 였습니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 케냐 35만명의 마사이 부족 전체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가 되었습니다. 그가 “들어쓰심”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기 인생을 소개 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강원도 도계에 있는 탄광촌의 광부였습니다. 광부였던 아버지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서 방학 때마다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그는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처럼 광부가 되었습니다. 고된 광부 일을 하던 그는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탄광속에 함께 갇힌 한 광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자네, 예수를 믿나?” 안찬호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갱이 무너져 당장 죽게 생겼는데 갑자기 왠 예수 타령이야?” 하는 생각에 “저는 예수 안 믿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이든 그 광부가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인생 경험으로 볼때 우리는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지도 몰라!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죽어서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곳으로 간다면 자네는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천국에 갈 자신이 있나?
자네가 지금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그건 엄청난 고난과 영원한 형벌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나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닳았기에 내가 자네에게 이런말을 하는거야! 이보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네! 자네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 믿으면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네! 기왕에 이렇게 된거 어차피 죽는다면 예수 믿는것이 낫지 않겠나? 지옥보다는 천국에 가는게 낫지 않겠냐?”
그 중년나이의 광부가 진지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찬호군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찬호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 하다가 어차피 죽게 되었는데 저 광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믿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광부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광부가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그 광부가 영접기도를 한 후에 찬호군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는데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해 주었는지 찬호군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 급기야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산소가 부족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 나이든 광부는 “정신을 차리고 소망을 가지게”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깨어나서 보니까 자기가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급히 산소를 공급하고 장비를 동원해서 부지런히 갱도를 파내서 구조하는 바람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시켜준 그 광부는 나이가 들어서 그랬는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찬호군은 병상에서 그분을 생각 했습니다. 그분이 기도할 때 가슴이 뜨거워진것을 생각 했습니다.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는데 결국 돌아 가셨구나”“그분이 기도해 줄때 이상한 체험을 했는데..” 하면서 그분을 생각 하다가 “내가 병원에서 나가면 예수믿고 교회에 다녀야지!”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한 후에 찬호군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십자가 보혈의 공로와 구원의 진리를 깨닳은 후에는 그 은혜가 감사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후에 결심하고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그가 케냐에 가서 지금까지 22년째 선교사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케냐 사람들조차 두려워하는 마사이족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한 끝에 부족마다 찾아 다니면서 전도한 끝에 스물 네 개의 교회를 세우고 마흔네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세우고, 세 개의 중,고등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한개의 신학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마사이족은 그의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을 인정하고 그를 명예 추장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런 성공적인 선교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하기를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에게 한 광부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고 특별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저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닳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종교가 있어서 저마다 구원의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서 도를 깨우쳐서 부처가 되어야 자기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어떤 종교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향하여 수없이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종교는 고행과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제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 14장 12절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한편 사도행전 4장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나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자들에게 뺨을 맞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욕설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서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워서 머리와 이마가 찢어지고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옷은 벌거벗김을 당하셨고 손과 발에는 대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히브리 글자와 헬라 글자와 로마 글자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자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지나가면서 자기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조롱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라고 비난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까지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디한번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해 봐라 그러면 나도 너를 믿겠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 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악한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의 뺨을 치고 침을 뱉고 욕하고 비웃었습니다.
게다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십자가형으로 처형 했으니 이 보다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오후 세시까지 여섯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손가락에 아주작은 가시가 하나만 박혀도 아파서 견디질 못해서 바늘로 가시를 빼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고 그 십자가를 바로세워 놓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한편 온 세상 모든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홀로 받게 된 고통이기에 더욱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했다는 진리를 깨닳을때 사람은 비로소 변화 됩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 綾子)의 저서 “양치는 언덕” 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스토리 입니다.
목사의 딸인 나오미가 어느날 료오이찌라는 남자를 사귀어서 그와 동거 하면서 지냅니다. 그런데 료오이찌가 나오미와 동거하다가 다른 여자를 사귀면서 서로 갈등이 생기고 생활도 점점 힘들어지자 목사의 딸인 나오미가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느날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서 실직하고 여자친구도 떠나고 오갈데가 없어지자 료오이찌는 다시 옛 애인인 목사님딸 나오미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료오이찌를 받아주지 않고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그래서 료오이찌가 절망한채로 나오미 집의 문간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목사님 부부가 들어옵니다.
목사님 부부는 딸 나오미를 불러서 그를 돌봐 주라고 권면을 합니다. 나오미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사귄 그가 미웠지만 부모님의 설득에 마음을 돌이키고 그를 받아 드립니다. 그래서 폐인이 된 료오이찌를 다락방에 서 지내게 하고 그를 돌봐 줍니다.
나오미의 부모는 료오이찌에게 전도해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크리스챤이 되게 해 줍니다.
료오이찌가 요양을 하는 동안에 료오이찌는 나오미에게 줄 선물로 다락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늘 하얀 천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드디어 6개월만에 그림이 완성 되었는데 그림이 완성되던날 전에 사귀던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료오이찌는 그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가서 그녀를 만납니다. 그녀는 료오이찌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 싶어 했지만 료오이찌가 거절하고 그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않고 술 한잔만 마시자고 하면서 술집으로 데려가서 몰래 료오이찌에게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시게 합니다.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신 료오이찌는 이제 그만 집으로 가야 겠다고 하면서 술집을 나섰지만 돌아오는길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길에서 잠이 들어 얼어죽고 맙니다.
나오미는 료오이찌가 길에서 동사한 것을 알고 부모와 함께 그를 데려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나오미가 집에 돌아와서 료오이찌가 거하던 다락방에 올라갔는데 그림이 하얀천에 덮여 있길래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보려고 천을 벗겼는데 그 그림에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못박힌 십자가 아래에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슬피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는 그 사람의 손 등과 팔에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흥건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료오이찌 였습니다.
료오이찌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고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비록 옛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지만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고 비록 얼어 죽었을 망정 그는 끝내 예수님을 따랐기에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자 징표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크게 소리를 지르셨는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절규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모든 인간을 대신한 절규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 하실 때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다고”(눅23:45) 성경은 증거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라고 증거 합니다.
성전의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은 우리가 광은 기도원의 성막성전에 가서 실제로 본 것처럼 천의 두께가 5센티나 되는 엄청난 두께의 천입니다.
그런데 그런 천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십자가 보혈의 제사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담을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과 희생의 댓가로 우리가 마음껏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19절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두 조각이 된것은 우리를 위해서 열어놓은 산 길이요 그 휘장이 바로 예수님의 육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일반 백성은 평생에 단 한 번도 지성소는 물론 성소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도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이 특권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축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일을 만홀히 여기면 축복이 오지 않습니다.
강남교회의 신준식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은혜의 보좌인 예배시간에 늘 늦게 와서 설교만 듣고 축도할 때 일찍 빠져나가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고의 유익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는 생각 하기를 “내가 매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주일예배는 드리니까 분명히 천국에는 갈 수 있을 것이고, 끝나기 전에 빨리 가니까 사람들을 안만나서 좋고, 돌아가는 길도 복잡하지도 않아서 좋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종합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가망이 없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차도가 없습니다. 그는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원망불평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제가 주일날 안빠지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저에게 이런 죽을병이 들게 하시는 겁니까? 왜 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왜 제 병을 치료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어느날 그렇게 탄식 하면서 원망불평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항상 예배당에 늦게 왔다가 얼굴만 살짝 비치고 일찍 나가지 않았느냐? 그래서 나도 너의 병실에 가서 살짝 얼굴만 비치고 나왔느니라! 너는 항상 예배당에 늦게오고 바쁘다는 핑계로 일찍 도망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나도 바빠서 너에게 안수할 시간이 없었고 너에게 줄 은혜도 없었고 나도 갈데가 많아서 그냥 너에게 잠깐 갔다가 얼굴만 비치고 나왔느니라!”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에서 깼습니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믿음생활을 잘못 했구나! 이제보니 내가 엉터리 신앙을 가지고 살았구나!”
그가 자기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기적적으로 치료를 받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퇴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전심을 다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은혜를 사모하면서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좋은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는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으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많은 사람을 고치고 변화시키고 살려 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주는 소망의 싸인이요 구원의 싸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율법의 정죄와 마귀의 정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끝없이 우리를 물고 늘어 집니다. “너 과거에 이런일을 했지?” ‘너같은 죄인이 무슨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냐?“ 하면서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고 정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습니다. 그 어떤 정죄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1절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선언 합니다.
조선시대에 태종 임금은 대궐 문루에 큰 북을 달아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원통한 일이 있을때마다 북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 북을 신문고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신문고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 받은 백성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잘못 쳤다가는 왕을 힘들고 피곤하게 했다고 죽도록 곤장을 맞거나 오히려 감옥에 같혀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절대 군왕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아량을 과시하려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해서 도움을 받을수 있는 국민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당당하게 나아가서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자상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 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이맘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던 우리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데려오고 일으켜주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손을 가져야 합니다.
데이비드 시맨즈(David A. Seamands)의 글에 보면 한 사람이 심장 절개 수술을 받을때 사건이 소개 됩니다.
내가 수술을 받기 전날 간호원이 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내 손을 꽉 잡더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실텐데 수술을 받는 동안에 당신의 심장은 오직 기계의 도움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됩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때 비로소 당신의 심장은 다시 정상으로 움직이고 그후에 당신은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심장 수술을 받고있는 6시간 동안에 당신은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당신의 의식은 살아 있어서 의사가 수술하는 것도 느낄수 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하는 말도 다 듣게되고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다 알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수술을 받는 동안에 당신 옆에서 당신의 반응상태를 살피는 간호원입니다. 나는 당신의 수술이 끝날때까지 그리고 마취가 깨어서 정신이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무슨일이 벌어져도 아무 염려하지 말고 수술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 옆에서 당신을 위해서 기도 하겠습니다”
그는 수술을 하는 동안에 간호원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고 그녀가 기도하는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간호사는 수술실에 들어가서 수술을 하는 환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간호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고 죄인들을 불러서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화목케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서나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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