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영락교회를 담임하셨던 임영수 목사님께서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셔서 교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해에는 주님의 교회를 담임하시던 이재철 목사님께서도 교회를 사임하셔서 또한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떠날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에 여러번 여러분에게 강조한 말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모든면에서 안정의 기조위에 설 때 제 역할은 끝난 것으로 알고 이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임
영수 목사님이나 이재철 목사님은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과감하게 교회를 그만두셨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목회 하던 목회지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는데 교회를 떠나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서울 교회를 담임하셨던 홍정길 목사님도 20여년동안 목회했던 남서울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장애인 선교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홍정길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새로운 비전과 꿈을 위해서 20년동안 정들었던 남서울 교회를 사임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더 이상 그레데 교회에 머물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세계를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젼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맡겨주셨던 사역지를 떠났습니다.
바울사도가 그레데교회를 떠나면서 함께 동역했던 영적인 믿음의 아들 디도를 그레데 섬에있는 그레데교회에 남겨놓았습니다. 바울사도가 디도를 그레데교회에 남겨둔 이유는 그레데 교회의 성도들을 지속적으로 양육시키고 그들을 믿음위에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떠난 후에 그레데 교회에 큰 환란과 시험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레데 교회에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 소식을 접한 바울사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디도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서신이 바로 디도서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레데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을 보면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라고 권면 합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때 그레데 교회의 위기는 분쟁과 이단의 침투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교회에서 목회자를 대적하는 세력이 나타나서 분쟁을 야기 시켰고 이단이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이단 때문에 난리 입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의 이단은 외부에서 침투한 이단이 아니라 교인중에서 이단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밖에서 침투하는 이단세력에 대해서는 대비를 잘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몇몇사람들의 신앙이 변질되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세력을 규합해서 자기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런 문제는 극복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에 이런 어려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걷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것 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이루려 하는 사람들이 규합해서 주의 종을 흔들고 성도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교회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가?”하는 일에 전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일에는 관심이 없고 따지고 비판하고 정죄 하면서 주의 종에게 대들거나, 아니면 자기 세력을 확장하면서 사람들 비유나 맞추고 성도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부하면서 뇌물공세와 더불어 은근히 담임목사를 깍아 내리면서 파벌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기면 교회가 큰 시험에 듭니다.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파벌이 생겨서는 안됩니다. 교회 내에서는 지역갈등도 있어서는 안되고 유유상종도 안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그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만 전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목회자와의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디도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먼저 유익한 일을 행하되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여, 그들이 새로워지고 또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하게하고 매사에 성숙된 삶을 살게 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관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과 더불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한 삶으로 성장하는데 있습니다. 이런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본질적인 목표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일때마다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 합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욕심만 구하는 사람은 퇴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단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라고 명령 합니다. 이단은 훈계의 대상이지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에 찾아오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만나거나 대화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은 교회에 잘 다니다가 교회에 불만을 품거나 만족하지 못해서 방황하다가 미혹을 당해서 다른 지도자를 따라간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단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아입니다.
사도요한도 요한 2서에서 이 부분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성경은 이단과 이단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아주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깨끗한 음식만 먹던 사람은 음식이 조금만 부패하거나 변질되어도 쉽게 분별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늘 진리를 가까이 하고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은 굳이 이단을 연구하지 않아도 사람을 만나보면 그 사람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제일먼저 발견한 사람은 나창희집사님입니다. 나창희집사님이 참 센스가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가만히 하는 행동을 보니까 "이건 아니다" 라는 지혜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비 정상적인 행태를 저에게 고했고 그때부터 저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리 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것을 발견한 사람은 김안순집사님입니다. 그 이상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명절에 차 트렁크에 선물 보따리를 잔뜩 싣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김안순집사님은 그분들이 당연히 목사님에게도 선물을 드렸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김안순집사님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목사님에게는 안드린것을 알고서 “저 사람들이 문제가 있구나!” 라는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 하는짓이 영 아니올시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상한 본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하고 담임목사님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뺏고 미혹하려고 오랬동안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단은 절대로 담임목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담임목사를 빼돌리고 자기뜰끼리 사람들을 만나서 규합합니다. 이단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규합해서 교회를 갈라 나가서 다른 교회를 세우고 거기서 왕노릇합니다. 이단은 백이면 백 그런 수순을 밟아갑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상황에 빠져서 고민하는 디도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리 가운데서 생활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5절에서 선언합니다.
즉 선행은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강조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서 “그러면 법을 준수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의 문제를 문화적인 차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평가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기준이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내적인 동기와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속을 들여다 보신다면 주님 앞에서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율법을 지키는 공력과 행위를 가지고는 절대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갈2:16).
따라서 자기의 의를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갈2:21).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이라고 강조 합니다.
전에 “노자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김용옥 교수의 강의가 교육방송을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표현력이 돋보인 강의였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의 강의는 하나님을 모독했을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처만 남겼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새벽기도를 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도 김용옥씨는 자기 어머니의 신앙을 비하 하면서 어머니가 합당치 않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질타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아무리 노자를 강의하면서 외형적인 효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주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강의의 마지막 결론이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은 허무주의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결과가 허무주의라면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현세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영적인 내세의 문제까지 다룹니다. A.P.깁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철학을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내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께 로 돌아왔다!”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의 진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회심(回心)의 여부에 있습니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비밀번호 즉 패스워드(Password)가 없이는 결코 천국(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인간의 선행은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4절)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6절).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주심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치유의 영이시며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14:1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깨닫게 해 주지 못하는 영적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또한 거룩한 영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영이신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령과 옛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붙드신다면 어떤 악령도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사41:10).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7절).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프리즘으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상속받는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후사(後嗣/heir)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마25:34).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우리는 8절과 같이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과 화합하며 남을 격려하는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일에 힘쓰면서 사는 이유는 크리스챤은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라면, 적어도 크리스챤이라면 세상속에서 정말 빛이 되어야하고, 사회의 소금 되어서 세상이 더 이상 썩어가지 못하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크리스챤은 정직하고, 검소했으면 좋겠다! 믿을 수 있고, 신용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챤들일거야!”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는, 건강 하려고, 돈벌려고, 출세하려고, 대학 입학하려고, 승진하려고, 뭐 이런 목적으로 무당을 찾습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고, 좋은 일을 하려고, 사회에 봉사하려고,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무당을 찾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는 것은 바로 이런 기대감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한번 착하게 살아봐야지, 좋은 일을 하면서 한번 살아봐야지”, 이런 마음 때문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줄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믿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 가면서 그들의 기대치에 못미치게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서 실망할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 “교회나 세상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네! 나나 너희나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데 내가 왜 교회를 가냐?”하고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그만큼 멀어지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얻은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디도에게 오늘 본문 1절에서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라고 증거 합니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입니다. 관료들을 말합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고, 그리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속에서도 인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법질서는 어떤 법질서를 말합니까? 그 법질서가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 있을 때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관리들이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강요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어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관리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사람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면서 그 관원들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만약에 직장에서 상관이나, 또는 부모가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정상적인 질서나, 상식적인 법들은 우리가 마땅히 지키고 순종 해야합니다. 그런 질서나 법을 세상사람들도 다 지키는데, 우리 성도가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사회적인 질서나 교통법규나 법을 안지키고 요리조리 빠져 나가고 있을 때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 법들을 정직하게 지킨다면, 그럴 때 세상사람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바라 보면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은 이 사회가 그렇게 썩은 것은 아니구나! 크리스챤들은 다르구나!” 하면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자요 속은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는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즉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도 죄악으로 점철된 죄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지시고 피흘려 돌아가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죄가 씻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반복 하지만 5절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으로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마태복음18장에 보면 일만달란트 빛진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주인은 빚진자를 불러서 빨리 빚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돈이 없으면 몸을 팔고, 처도 팔고 자식도 팔고, 모든 살림을 다 팔아서도 빨리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러자 빚진자가 제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그때 그 주인이 갑자기 자기 앞에 엎드려서 처량하게 빌고 있는 그 사람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서 그 빚을 다 탕감해줍니다. 그 엄청난 빚을 안갚아도 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큰 은혜를 입고 나오다가 마침 한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그사람을 보자 마자 쫓아가서 멱살을 잡고 내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자기는 방금전에 일만 달란트 즉 1조원의 빚을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백만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다가 결국에는 그를 감옥에 쳐 넣은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해준 그 주인에게 가서 그사람이 행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이 “그놈은 은혜를 모르는 놈이니 잡아와라”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잡아 왔더니 “저놈이 일만 달란트를 다 갚기까지 옥에 집어 넣어라”하고 명령을 합니다. 결국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평생 죽을때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결론으로 마태복음18장 35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모름지기 예수믿은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그 감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감격과 기쁨이 식지 않아야 겸손하게 살 수 있고 남을 용서하면서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디도서에서는 예수님을 믿은 우리가 왜 복종하면서 살고, 순종하면서 살고, 선한일을 행하면서 살고, 다투지 않고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방금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용서 받을 수 없었던 우리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았기 때문에 사랑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이 휼륭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일입니다. 5절에 보면 중생의 씻음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중생의 씻음이 있어야 합니다. 건성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절대로 그냥 거듭나지 않습니다. 교회출석이 구원의 방편은 되지만, 교회 다닌다고 다 거듭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의 집이지 교회에 다니고, 세례를 받고, 착한 일을 하고, 기독교 문화속에서 산다고해서 그것이 곧 중생은 아닙니다.
중생은 신적인 변화(Divine change) 입니다.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곧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중생은 신비로운 변화(Mysterious change)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이 틀림 없다고 믿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5) 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당시에 학식이 풍부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난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바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6-8)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의 실체를 느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로 이 바람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중생)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듭난 생명의 실체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결과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내적인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하고,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이 오고, 성경이 이해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새생명을 주시면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생명이 자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말하기를 “내가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지만 믿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학벌이 높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나, 돈이 많아 온 세계를 여행하면서 폭넓은 식견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이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바울사도는 8절에서 그 사실을 설명 합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참으로 믿을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디도에게 이 말씀을 담대하게 말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이 모든 것을 믿어지게 하시고, 천국백성이 되개 해 주신 이유는 우리가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는 것”때문이라고 바울사도는 증거 합니다.
우리는 한 때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리석어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탄마귀에게 속아서 각색 정욕과 쾌락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리고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감정을 품고 늘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살던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고 배신감을 주고 시기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씻음,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런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증거는 첫째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선한 행위가 보여져야 합니다. 예수 믿은 사람에게서 이 세가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중생은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잘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주위에도 신비로운 것이 너무나 많아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삽니다.
전기의 신비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전기를 알고 신뢰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얀 쌀밥을 먹는데도 어떤 사람은 검은 머리가 나고 어떤 사람은 하얀 머리가 납니다. 설명이 안됩니다.
햇빛이 어떻게 썩은 흙에 쪼여서 장미꽃을 피게하는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장미꽃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이것들을 다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어두운 가슴에 사랑의 빛을 비추고, 죄를 물리치고, 진리와 의의 꽃을 피우시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생의 변화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중생은 절대적인 변화(Adsoulte change)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증거 합니다.
중생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쁨을 갖게 됩니다. 한 때 사랑하던 것을 지금 미워하게 되고,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이제는 분토와 같이 여기게 됩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교회를 싫어했는데 이제는 세상의 어떤 기관보다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한 때는 빈정거리면서 하나님도 우습게 알고 무시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어느 것보다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이름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 즉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중생할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전도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슬픈 일이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심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닳아 진 사람은 중생이 가까운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회개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해 주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영혼이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부모나 형제나 이웃이 전도하고 그래서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그런것들은 다 과정과 도구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주셔야 중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지만 한편 인간 편에서도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구원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 인간은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거듭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증거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증거 합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거듭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삼위일체의 제3격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죄를 이길 능력도 없었고, 신령한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거듭날 때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매일 우리와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증거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친구처럼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부자요 죄인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후에 인생이 190도 변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자원하여 고백을 했습니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중생했다고 하면서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중생한것이 아닙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정말로 거듭나서 심령이 바로 서게 되면, 그 은혜가 감사해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해서 선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세상나라들은 볼 수 있어도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의 아름다운 곳은 볼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세상의 좋은 집에서는 살 수 있어도, 천국의 아름다운 집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천국백성이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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