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동안 부산 양문교회의 청소년부에서 저희 교회로 동계 수련회를 왔습니다. 박지홍선생님으로부터 일행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남양회관에 마중을 나갔는데 큰 대형버스가 들어 오길래 양문교회의 사찰집사님이나 차량운행을 하는 집사님이 운전을 하고 오셨나보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는데 차량운행을 하신분이 장로님이시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가 허연, 나이든 장로님이 대형차를 운전 하시면서 이곳까지 차량봉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큰 교회의 장로님 정도 되면, 게다가 그 나이정도면 이제는 편히 앉아서 대접 받을 연세이신데도 학생회 수련회를 위해서 몸소 대형차를 운전해서 이곳까지 오신것을 보고 "부산 양문교회가 복된 교회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보면 성가대에 머리가 흰 백발의 장로님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초심을 잃지않고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장로님이 계신 교회는 좋은교회요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장로님을 뵙고도 감동을 받았는데 더 감동을 받은것은 장로님의 부인인 최순옥권사님 때문에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직장 때문에 퇴근한 후에 후발대로 저녁시간에 오시느라 학생들 점심식사 준비를 위해서 최순옥권사님이 동행 하셨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교회에 그릇을 빌리러 왔다가 제 집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권사님이 남해에 오면서 제일 큰 걱정거리가 “어디가서 새벽기도를 하나?” 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서울이나 부산이나 또는 딸집이나 아들 집에 혹은 친척집에 가면 “어디가서 새벽기도를 하나?”하고 새벽기도 때문에 걱정을 하시는분이 계십니까? “새벽기도를 어디가서 하나?” 하는 문제로 걱정하시는 분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분이요 크게 복받을 분입니다. 최순옥권사님은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권사님이셨습니다.
제 집사람이 들어와서 그 권사님 이야기를 하면서 “남해에 가면 어디서 새벽기도를 하나?” 하고 걱정을 하고 왔는데 도착하고 보니 숙소인 남양회관 바로 옆에 교회가 있는것을 보고 너무나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권사님이 계신 교회는 정말 권사님도 복을 받고 교회도 복을 받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금번에도 수련회 저녁집회에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저녁시간에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새벽이슬같은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안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까 참 감사하고 소망이 넘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증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반가운 분은 김윤화집사님 이었습니다. 김인석성도님의 딸 김윤화집사님이 부산 양문교회 교회학교의 선생님이신데, 김윤화집사님의 소개로 부산 양문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김윤화집사님이 교회학교 수련회를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같이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얼마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겠습니까? 마음은 당장 용강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느라 고향에서 수련회를 하는데도 부모님도 못 만나고 가셨습니다.
김윤화집사님이 오시면서 롤케익 4개들이 두상자를 사오셨습니다. 그래서 세 개는 오늘 점심식사후에 함께 나누어 드시라고 준비해 놓고, 한 개는 김윤화집사님 어머니 정협순성도님께 드리려고 따로 싸서 포장해 놓았습니다.
김윤화집사님께서 매달 5만원씩 아버지 김인석성도님을 위해서 헌금을 보내 주시는데 어제 오셔서 또 헌금을 해 주셨습니다. 부산 양문교회에서도 10만원의 헌금을 해 주셨습니다. 대형버스 차량운행을 해주신 김규대장로남과 최순옥권사님부부께서도 5만원의 헌금을 해 주셨습니다. 귀한 사랑으로 섬겨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소개 됩니다. 이삭은 2대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세대이고, 이삭은 2세대입니다. 그리고 3세대는 야곱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 출신인데 지금의 이라크 남쪽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 즉 이스라엘 땅까지 수천리 먼곳까지 이민을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24장 35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라고 증거 합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롯과 갈라서야만 할 정도로 엄청난 거부 였습니다.(창13:2) 그런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창세기 25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라고 증거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나고 자기가 살던 땅에는 흉년이 들어서 불가불 이삭은 다른 곳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물려준 땅을 다 포기하고 블레셋의 그랄 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농사하면서 사는 모습이 오늘 본문 창세기 26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라고 증거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독립한 이삭이 타향으로 이민을 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의 소출을 얻었다면 이건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 경제가 몹시 어려워서 사업하는 분들이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업의 평균 수익성은 제조업이 10%에 못 미치고, 유통업은 2,30%정도이고 예금이자는 4,5%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업하는 분이 월30%의 수익률을 올리면 1년에 360%의 수익이 됩니다.
그것도 투자액 전체에 대한 수익률이 아니고 매상액에 대한 수익률이기 때문에 실제 수익률은 낮아지겠지만 계산하기 쉽게 1억×360%=3억6천만원의 수익이 됩니다. 이정도면 굉장한 수익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삭이 거둔 수익률은 얼마입니까? 100배입니다. 100%가 아니라 백배 이니까 10000%의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은 엄청난 거부가 됩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었습니까? 농사를 지었는데 어디서 농사를 지었습니까? “그 땅에서”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그 땅은 이삭의 땅이 아닙니다. 이삭이 농사한 땅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물려준 땅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땅에 왔을때 자기 소유의 땅은 한 평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굉장한 부자였지만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들인 땅이라고는 가족묘지로 쓰기위한 막벨라 굴과 거기 에 딸린 밭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삭은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의 땅에 이민가서 거기서 빌붙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지금처럼 땅에 대한 소유 개념이 확고한 시절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인 없는 땅에가서 자기가 필요한 만큼 개간해서 농사를 지을수 있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서 타향에 가서 아무도 쓰지 않는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거기서 씨를 뿌리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첫 해에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소출을 거둬들이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의 원인이 12절에 소개 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여기에 축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자기들 땅에 들어와 살면서 자기들보다 더 잘 살게 되는것을 보고 시기질투가 났습니다. 자기들도 똑같이 농사를 짓고 사는데 굴러온 돌이 좋은 땅을 차지한 자기들보다 더 농사를 잘지어서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는 것이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을 시기질투 하면서 이삭을 핍박합니다.
그들은 이삭이 사용하는 우물을 막고 메워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삭이 농사짓던 땅을 빼앗고 이삭을 그땅에서 쫓아냈습니다. 이삭은 다른나라에서 살았기에 텃세를 하는 그들에게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가 일군 모든 땅과 우물을 다 빼앗긴채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삭의 우물을 메워 버리고 땅을 빼앗고 나면 이삭이 다시는 재기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제는 농사지을 땅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골짜기로 옮겨 갑니다. 더 이상 좋은 평지에서 농사를 짓지않고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산 골짜기로 들어간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했다”라고 증거 합니다.
한 해에 백 배의 수학을 거둘 수 있는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겼다는 것은 큰 좌절이 아닐수 없습니다. 당장 많은 식구들과 수많은 가축들이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절박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낙심하지 않고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서 거기서 다시 우물을 파고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을 시작합니다.
당시에 땅도 땅이지만 우물은 더 소중한 재산목록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강우량이 많지 않고 우기, 건기가 뚜렷하기에 몇 달씩 비가 안오는 때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아브라함 시절부터 주요 생업이 목축업이기에 많은 양떼와 소떼, 그리고 낙타와 나귀와 짐승들을 제대로 유지 하려면 반드시 우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번 우물을 파려면 팔레스틴은 모래사막 이기에 지름 10미터에 깊이 10미터까지 파내려가야 하는 엄청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물 하나를 파려면 보름 때로는 한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물을 팠는데 물이 안나오면 다시 파야 합니다. 우물 하나 파는데 대단한 노동력과 시간이 소요 됩니다. 그래서 우물을 확보 했다는 것은 생명줄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힘들게 파놓은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메꾸고 훼방을 하는 바람에 쫓겨났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우물을 빼앗기고 멀리 골짜기로 가축을 이끌고 쫓겨갈 때 이삭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쫓겨간 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다행히 거기서 물을 얻게 됩니다. 이삭은 드디어 살길이 열렸구나 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랄지방에 사는 목자들이 찾아와서 그 우물은 이전에 자기들이 파 놓은 것이라고 우기면서 우물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면서 달겨들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삭은 이때에도 항의 한 번 못하고 또다시 그 우물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이사를 갑니다.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옯겨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물이 나오자 그들이 또 쫓아와서 그것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씁니다. 이삭은 이때에도 자기가 판 우물을 그들에게 내주고 또 쫓겨 갑니다. 이삭은 자기가 애써서 고생해서 이루어 놓은 우물과 개간한 땅들을 다 뺏기고 맙니다. 그러니 땅을 빼앗겼으니 농사도 지을수 없고 우물도 빼앗겼으니 짐승을 기르는 일도 어려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많은 재물을 물려 주었지만 이삭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유약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후에 이삭은 또다시 쫓겨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다른 사람은 평생에 우물 하나 파기도 어려운데 이삭은 벌써 일곱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이번에도 좋은 물을 얻었습니다. 더 감사한 일은 이번에는 그렇게도 시기하고 미워하던 블레셋과 그랄 사람들이 더 이상 이삭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비록 다 빼앗기고 쫓겨나서 살기도 힘든 시골 구석박지의 골짜기로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넓은 장소로 이끌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질투와, 그랄 목자들의 생떼와, 그들의 악함을 인해서 쫓겨 다녔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가 일궈놓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새출발을 하게 된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더 넓은 장소로, 더 큰 축복의 현장으로 이끄시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22절에서 이삭이 고백한 이 고백을 묵상하면서 이 고백속에는 이삭의 속깊은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땅도 아니요 우물도 아니요 하나님의 선하신 이끄심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악한자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겸손하게 물러선 그것이 참된 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이런 정황은 26절 이하에도 잘 나타납니다. 26절 이하에 보면 그랄지방과 블레셋 지역의 우두머리인 아비멜렉왕이 이삭을 찾아오는 광경이 소개 됩니다. 28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아비멜렉은 자기가 이삭을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데도, 이삭이 망하기는 커녕 점점 더 잘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구나! 우리가 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해를 입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이삭을 찾아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희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비멜렉은 29절에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라고 선언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비멜렉도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삭은 어떤 것을 보여 주었기에 그땅의 주인이요 강대한 군사를 가진 아비멜렉왕이 찾아와서 두려워 떨면서 “과연 너는 복을 받은 자로다”라고 고백하면서 화친조약을 맺자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까?
사실 아비멜렉은 얼마든지 이삭을 추방할수 있었고 자기들의 군사를 동원해서 이삭을 죽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이삭을 건드릴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24절에 나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축복을 이삭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 선포 됩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가는 데마다 실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를 가든지 그 누구도 아브라함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건드린 사람은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자기가 죽기전에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을 물려주기로 작정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준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에게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땅을 물려준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물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삭이 그 언약을 믿었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하고 그랄 사람들이 훼방하고 협박할 때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 포기하고 버리고 이사를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가만히 보니까 이삭이 살아가면서 되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아무래도 나에게 큰 문제가 생기겠구나” 라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먼저 이삭을 찾아와서 화친하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계획입니까? 무엇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땅입니까? 돈입니까 그것들을 물려주면 자녀들이 자손 대대로 복을 받고 살거라고 생각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대에 이르는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이나 돈을 물려줄게 아니라 예수믿는 믿음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물려 줄 수 있습니까? 죽기 전에 땅 문서 내놓듯이, 예금통장 내놓듯이 그렇게 믿음을 물려줄수 있습니까? 믿음은 그렇게 통장 넘겨 주듯이 주지 못합니다.
우선 지금 내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자녀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내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고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과 믿음과 기도 생활의 응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나의 헌신과 봉사와 충성된 믿음이 열매맺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아야 합니다. 내가 신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생활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무슨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복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확신과 증거입니다.
제가 전에 루이자 (Louisa M. R. Stead) 라는 여인에 대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났는데 신실한 크리스챤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테드라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딸을 낳아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여름날 루이자는 남편과 함께 4살 난 딸을 데리고 뉴욕의 롱아일랜드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물에 빠졌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루이자의 남편은 수영을 잘했기에 소년을 구하러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역류 현상이 일어 나면서 남편은 소년과 함께 파도에 휩쓸려서 익사해 죽고 말았습니다. 루이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에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 왔는데, 어떻게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겁니까? 왜 사랑하는 남편을 데려가신 것입니까? 저는 이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루이사는 울부짖으면서 목이 쉬도록 울었습니다.
루이사가 지쳐 쓰러져 혼미한 상태에 있을때 주님께서 루이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는 나의 일을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그 말씀을 들은 그녀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남편을 데려가신 데에도 뭔가 뜻이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수 없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때 성령께서 그녀를 감동 하셨고 그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마음을 추스르고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이 바로 340장입니다. 다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것은 받은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일일세
주를 믿는 나의 맘을 그의 피에 적시네
예수 예수 믿는것은 받은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벗어 버리네
안위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예수 예수 믿는것은 받은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구주예수 의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무궁 지나도록 함께 지나리로다
예수 예수 믿는것은 받은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그 후 그녀는 신학을 공부한 후에 딸을 데리고 1917년 남아프리카의 남부 로디지아로 가서 선교사로 귀한 사역을 감당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의지할 데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더 귀한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닳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때에도 함께 하시지만 슬플 때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15장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있나 보라" 라고 말씀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후손을 저 별과 같이 많아지게 해 주리라”라는 언약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그 밤은 심히 고독하고 외로운 밤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뿐인 조카 롯의 목자들과 자기의 목자들이 다투는 바람에 조카 롯과 더 이상 이런 갈등이 없게 하자고 상의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조카 롯은 본래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브라함이 데려다가 어려서부터 키웠습니다. 그런데 조카 롯과 헤어지면서 땅을 나누어 가졌는데 조카 롯이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롯에게 다 양보하고 자기는 척박한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헤어진 후에 롯이 그돌라오멜왕에게 사로잡혀 갑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318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롯을구해 옵니다. 그렇게 못된 롯을 구원해 주었는데 롯은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고맙다는 말한마디 없이 다시 소돔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니 이것 저것을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프고 쓸쓸하고 처량한 밤입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이 롯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런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를 배신하고 좋은땅을 차지하여 떠날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큰 일을 당할때마다 은혜를 모르는 롯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아서 상처를 입는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때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외로운 밤에, 다 떠나가고 아무도 남지않은 그 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하기를, 성공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신다고 믿지만, 실패할 때에나 절망스러운 일이 생길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 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의 고독한 밤에도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갖혀서 괴로워 하던 깊은 밤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을 체험 했습니다. 밤 중에 지진이 나고 옥 문이 다 열리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배를 타고 가다가 14일 동안이나 태풍과 풍랑에 표류하면서 살 소망이 다 끊어진 그때에,“너희 중에 한 사람도 죽지 않으리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을 가질때에 비로소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움과 허전함에 쓸쓸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는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로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은 내 눈으로 그 열매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대동강에서 첫 순교의 피를 흘린 토마스 선교사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칼을 맞았습니다. 토마스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와서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또 단 한 사람에게 세례도 베풀지 못하고, 대동강변에서 박춘권이라는 포졸에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선교도 해보기 전에 죽었으니 어찌보면 토마스목사님의 선교는 실패한 선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27세의 토마스 선교사님의 피는 대동강에 그대로 흘러갔지만, 그의 순교의 피는 오늘날 천만 성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것 같은 절망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웨슬레 형제를 위해서 세워진 기념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웨슬레목사님이 남긴 세 마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첫째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땅에 묻으시나 당신은 계속 일하신다”
셋째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세 번째 말은 웨슬레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고 강조하던 말 입니다. 그는 임종을 맞아 죽기 직전에도 손을 위로 향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실패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는 사람이 행복의 찬양을 부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시간 거리에 여수 애양원이 있습니다. 나환자촌이 있었던 그곳에 제가 우리 성도님들도 모시고 갔고, 교회학교 아이들도 데리고 가서 돌아 보았습니다. 애양원 교회는 한국 교회에 많은 감동을 남겨놓았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이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실때 어떤 성도님이 애양원 교회를 방문 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성기도 시간에 자기 옆에서 한 남자가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면서 감사제목들을 아뢰면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애양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는 "도대체 이사람은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저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울면서 감사기도를 하는걸까?" 하고 궁굼해서 기도를 하다말고 그 남자를 돌아 보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쳐다본 이 성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문둥병 환자 였는데 한쪽 눈은 없어졌고, 귀와 코는 문드러져서 형체도 없고 입은 돌아갔고 손가락은 다 없어져서 뭉뚝한 두 팔뚝만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짤라진 팔뚝으로 예배당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하나님 감사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 궁금해서 기도가 다 끝난후에 그 나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그렇게 울면서 감사기도를 하는 겁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내가 문둥병에 걸리고 나니까 제일 먼저 아내가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형제들도 나를 외면했습니다! 나중에는 나만보면 눈물 지으면서 울던 부모님마저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어 버리려고 작정을 했는데 그때, 한 음성 나환자가 구걸을 하러 왔다가 저를 보고는 여수의 애양원으로 가보라고 충고를 하기에 그사람 말을 듣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이곳 애양원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곳까지 오게 하셔서 저를 만나 주셨고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내도 형제도 부모도 다 나를 버렸는데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저를 반겨 주셨고, 성경을 펼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마다 때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시니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예배를 드릴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목청을 높여서 하나님께 말로 다 할 수없는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상처와 아픔과 인생의 고뇌가 다 사라지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무슨일이 벌어져도 감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성해지고 형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선포하신 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이런 축복의 약속은 좀 시시해 보입니다.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열심히 전도하면 부자가 되도록 해 주겠다던가 전도하면 출세를 보장해 주던가 아니면 열심히 전도하면 자식이 잘되도록 해 주겠다”라는 약속을 주셨으면 좋겠는데 고작해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 하셨으니 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약속은 최고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이삭을 보고 축복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보고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이 받은 축복은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약속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아들 이삭에게도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생활을 하게 된 데에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한말 시대에, 일제시대에, 6.25때,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불철주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평안과 축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 개척을 해서 빠른 시간에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짧은 시간에 많이 부흥하셨네요?” 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짧은 게 아닙니다. 저는 3대째 목회자 집안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개척 교회를 하시면서 고생하셨고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교회 개척을 위해서 오랜 세월 기도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코 빠른 게 아닙니다”
시편 37편 25절로 26절에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터를 잘 다져놓으면 우리 자녀나 우리 자녀 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보상하시는 분입니다.
잠언 22장 4절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대로 이삭에게 보상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복을 받은 첫 번째 이유가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순종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었을때 이삭은 가뭄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던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머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그랄에 머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머물려면 먼저 그랄 사람들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랄도 흉년이기 때문에 물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한정된 그랄에서 이삭이 소떼와 양떼를 데리고 식솔들과 함께 머물면 그랄 사람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삭의 식솔들의 반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적으로나 상황으로 볼 때 그랄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서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에 머물렀던 이삭에게 축복으로 보상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순종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이용효 목사님의 설교에 나온 예화입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 온 초기에 미국의 선교사님 사택에서 일하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외출하시면서 머슴에게 “비가 올 것 같으니 감나무 밑에 있는 장작을 처마 밑으로 옮겨 놓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슴은 선교사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장작을 처마 밑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선교사님은 머슴을 불러서 “여보게 아무래도 저 장작을 창고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라고 말했습니다. 머슴은 “예”라고 하더니 두 말 없이 그 많은 장작을 창고로 다 옮겨 놓았습니다.
오후에 선교사님이 머슴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내가 잘못 판단 한 것 같아 장작은 역시 감나무 밑에서 말려야 하겠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머슴은 “예”라고 하더니 그 날 오후 내내 땀을 흘리며 그 많은 장작을 감나무 밑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선교사님이 순회전도를 떠나기에 앞서 머슴에게 “그래도 비를 맞으면 안 될 것 같으니 다시 처마 밑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도 머슴은 “예”하고 대답하더니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런일을 계속 일주일 동안 반복한 선교사님이 미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순종 잘 하는 머슴을 찾았습니다! 머슴처럼 순종을 잘하는 이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겠습니다!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서 조선의 크리스챤 지도자로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후에 선교 본부에서는 그 머슴을 보내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그 머슴을 미국으로 보냈고 미국의 선교본부에서는 그를 유학 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새롭게 설립한 총회 신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많은 기적들이 순종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이나,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일이나,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은 일이나, 실로암물에 눈을씻어 눈을 뜬 소경이나, 한 편 손 마른 자도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축복을 약속받은 자녀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산을 쓰거나 건물 안에 들어가서 비를 피할 수는 있어도 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축복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일곱인 재앙과, 일곱나팔 재앙과, 일곱대접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들과 자유인이 굴과 바위틈에 숨어서 산들과 바위에게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은 반드시 임하고 그들은 크고 흰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자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주시기로 작정하시니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흉년도 막을 수 없었고, 그랄의 왕 아비멜렉도 막을 수 없었고, 그랄의 악한 목자들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랄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100배나 얻었습니다. 1천만원을 투자해서 10억을 거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부모의 충성된 신앙이 자녀에게 복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2014년 한해동안 우리도 충성된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와 내 자녀들이 복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고 백배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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