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와는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생 전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게 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전과 전혀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성령께서 인생을 인도해 주시고 삶을 변화 시켜 주시기에 인생 전체가 180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한 사탄마귀의 영에 사로잡혀서 살기에 늘 불안하고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한쪽은 빛과 소망과 천국의 길이요 한쪽은 어두움과 절망과 지옥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한쪽은 사랑과 은혜의 세력에 인도함을 받지만 한쪽은 미움과 시기질투와 살인과 사망의 세력에 인도함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서 그 사람의 정신이 온전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속에 귀신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어떤 정신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야! 이놈아 조용히 해라! 오래 살다보니 별 미친놈 다 보겠네,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정신병자가 아니라도 오늘날에는 미친것 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물에 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권력에 미친 사람도 있고 어떤 남자는 여자에 미쳐서 살고 어떤 여자는 도박에 미쳐서 삽니다. 그러나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합니다. 부질없는 일에 미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학생은 공부에 미쳐야 하고 목회자는 목회에 미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5장13절에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미친 이유는 하나님이 감당할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너희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증거 합니다.
사랑에 미치면 눈에 보이는것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 사랑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일에 미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사랑에 미친 사람임을 알리고 드러내는 일에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11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라고 증거 합니다. 여기서 “알리어지다”라는 말은 자기의 정체가 하나님 앞에 드러난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앞에서도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미쳐서 복음을 전하고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것이 바로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는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고대 희랍의 시인 핀다로스“Pindaros”는 “본래의 진실한 너 자신이 되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믿는 크리스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퇴출을 당하게 됩니다. 연탄재 만도 못한 인생이 됩니다.
어제 신년 축복대 심방예배를 드리러 다니는데 감암의 나창희집사님댁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연탄 난로 옆에서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뜨뜻한 난로 옆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참 좋았습니다. 김차엽성도님댁에서는 전기장판을 뜨뜻하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사모님이 피곤해서 눈이 가물 가물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기황후를 볼때는 눈이 초롱 초롱해서 하나도 안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덕신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연탄재를 밭에다가 잔뜩 버려 놓았습니다. 그 연탄재를 보는 순간에 문득 안도현시인의 시가 생각 났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라는 시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던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은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의미있는 시입니다. 연탄재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는 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성도는 적어도 불신자들 보다는 나아야 합니다. 불자들도 깨닳은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각 스님은 미국사람인데 정말 미남입니다. 그는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서 예일대와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나온 명문대 출신입니다. 그는 한국 불교인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불자가 되었습니다.
992년도에 그가 한국에 왔는데 그를 본 불교 신도들이 가는 곳마다 “와 하버드 출신 미남스님 오셨네” 하면서 사진좀 같이 찍자고 몰려드는 바람에 그는 결국 화를 내면서 “이 못생긴 미국 상놈 봐서 뭐해요 거울에 비친 참 나를 봐야지!” 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자기의 명성과 외모 때문에 한국에 와서 수행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갔다면서 "참된 수행자는 사람들이 그 수행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겉모습이 사람들에게 유혹이 되고 있으니 더 이상 한국에 있으면 안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한국을 떠났습니다.
현각스님은 “나는 중입니다! 나의 책임과 의무는 내가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불자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인데 그 일을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일본에도 미모가 빼어난 여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함께 기거하는 중들과 더불어 절을 찾아온 남자들이 그 여승을 보기만 하면 미모에 홀려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서 찾아오고 또 그녀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남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 여승은 칼로 자기의 얼굴을 그어 버렸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불심을 심어주지는 못할망정 시험거리가 된다면 나는 불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여인이기에 얼굴을 칼로 그어서라도 불자의 길을 가려고 그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언론이 그녀를 진짜 스님이라고 칭송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비슷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목자들 중에도 거짓 목자가 있고 성도들 중에도 알곡과 가리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거짓 선지자나 이단들은 철자하게 자기를 속이고 양의 탈을 쓰고 사람에게 접근 합니다. 속에는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악한 본성이 있는데도 그것을 숨기고 선한 양처럼 다가와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잘 지내고있는 순한 양을 미혹해서 멸망의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진짜 목자는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고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양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다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사명을 끝가지 감당합니다. 거짓이나 사심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 갑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목자와 진실한 성도를 기뻐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세례요한은 딱 잘라서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럼 너는 누구냐?”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이다”(요1:23)
바울사도도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 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나도 그러하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다”(고후11:22-25).
무엇보다도 정확한 바울의 정체는 예수님께 생명을 바친 사람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사람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만 존귀케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미친 자가 온전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미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3절)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재판정에서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재판정에서 베스도와 아그립바왕에게 다메섹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하자 재판장인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바울사도는 “베스도 총독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바울사도가 함께 동석한 아그립바 왕에게도 “아그립바 왕이시여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라고 증거하자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구나?”라고 하면서 아그립바 역시 바울사도를 미친사람 취급합니다.
그러자 바울사도는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고백 했습니다(행26:24-29절)
사람들은 바울사도를 보고 다들 미쳤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진짜 미친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미친사람들입니다.
요즘 무분별한 장난전화와, 무분별한 고소고발이 난무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독이 묻은 화살을 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잠언 26장18절로 19절에 보면 “횃불을 던지며 독이 묻은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장난삼아 희롱하였노라 했을 뿐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어제 심방하고 늦게 들어왔는데 제 집사람이 기황후를 보려고 티비를 틀었는데 마침 기황후에 나오는 왕이 독화살을 맞아서 고통중에 부축을 받고 가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악한 자들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과 기황후를 죽이려고 발악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탄마귀는 그 악한자들처럼 예수믿는 성도들과 교회에 독화살과 불화살을 쏘아 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도 세상이 악하니까 선한 사람들도 실족해서 나쁜물이 들어갑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말씀대로 선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탄마귀가 하도 미혹하고 시험에 들게 하니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나온 것입니다.
1850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 Stevenson)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 스티븐슨은 신학과 법학을 전공한 귀재입니다. 그런데 낮에는 성자 같은 자기가 밤만 되면 유혹당하여 악마 같은 인간으로 변할수도 있다는 살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속에 이중적인 인격이 있는것을 안 스티븐슨은 훌륭한 신앙인 이면서 속에는 늑대와 야수같은 본성이 함께 있는 자기 자신을 토대로 인간의 양면성을 주제로한 소설로 쓰게 됩니다. 그 소설이 바로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베스트 셀러입니다.
지킬박사는 대학교수요, 선한 사람입니다. 지킬박사는 낮에는 대학교수로써 덕망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지킬박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낮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점잖은 대학교수이지만 밤만 되면 밤거리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 방황하면서 온갖 추한일을 합니다.
대학교수인 지킬박사 안에 방탕아 같은 하이드라는 타락한 사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훌륭한 인격자로 지내고 밤만 되면 세상에 나가서 온갖 추한일
을 행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와같이 이중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중성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돌아선 사람이 바울사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7장 9절로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도 바울사도의 고백과 같이 이런 이중성에서 헤매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성자처럼 주님앞에 나아 옵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에서 내멋대로 살아 갑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부부간에 서로 사랑할 때는 천하에 아름다운 부부처럼 사랑을 하면서 지내지만 어쩌다가 일년에 한 두번 부부싸움을 할 때는 “우리가 정말 목사 부부인가?” 하고 놀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예배드릴 때는 순한 양이 되지만 교회 밖에 나가서 살아가다 보면 염소처럼 들이받고 욕하기도 하면서 추한 모습을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 한구석에 히틀러를 숨겨두고 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히틀러가 얼마나 미치광이 입니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자기 욕심을 위해서는 무슨짓이든지 하는 무자비한 냉혈인간입니다. 유대인이 자기 민족보다 우월하니까 시기 질투가 나서 600만명의 유대인을 잡아다가 비참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런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지배욕과 정욕과 욕심과 사람을 죽이려는 악마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악마적인 감정이 폭발하고 그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누구나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26장 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육신은 하나인데도 마음과 육신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마음은 예수를 닮아가려하는데 육신은 악마적인 근성을 못 버리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갑니다.
마음이 죄를 따라가면서 헤멥니다. 그래서 몸은 늘 죄를 따라가고 마음은 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나서 마음으로는 “싸운 사람과 화해하고 사과해야지” 하고 다짐하고는 싸운 사람을 찾아가서 화해하려고 찾아 갔다가 다시 더 크게 대판 싸우고 오는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육신이 건강하고 마음도 평안할수 있습니다. 마음이 타락하면 육신도 타락합니다. 육신이 타락해도 마음이 타락합니다. 마음과 육체는 같이 갑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늘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은 늘 기도하자고 하는데, 육신은 “지금은 피곤하니 내일 하자”라고 유혹합니다.
세상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분별한 장난전화로 112와 119에 전화를 해서 거짓신고를 하고, 생명의 전화나 상담전화사 들에게 전화를 해서 음란한 이야기들을 하는가 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기도 합니다.
사고가 났다고 거짓으로 신고전화를 하거나 장난전화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합니다. 불이 났다고 거짓 전화를 하면 소방차가 출동합니다. 강도가 들었다고 거짓전화를 하면 경찰이 출동합니다. 112와 119 거짓신고가 한해에 10만건이 넘는다고 하니 엄청난 손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일본과 비교할 때 거짓신고가 171배나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고소 고발은 더욱 심각합니다. 게다가 반대를 위한 반대시위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 39회의 각종 데모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매일 평균 9200명이 데모집회에 참가하고 있고 매일 열 다섯명이 불법집회와 폭력으로 인해서 사법처리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불법집회 나라인 것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평가한 법 질서 지수는 한국이 30개국 중 27위였습니다.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법보다 떼로 몰려서 데모하는 법이 더 통하는 나라입니다. 정당한 절차에 의한 의사 표시보다도 도로를 점거하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투쟁하는 시위문화가 정착되어 버렸습니다.
화염병도 모자라서 민노총 시위 현장에는 죽창이 등장하고, 쌍용차 불법 파업때는 살상무기에 해당하는 쇠구슬새총과 쇠파편 공기총이 동원되었습니다. 광우병 불법집회때는 나라를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미국산 소고기를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라고 우기면서 중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선동해서 데모를 하게하고,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자 그때를 기회로 삼은 친북좌파들이 정권타도를 외치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공권력이 무력화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서 이명박정권때 근 100일 동안이나 나라가 마비되었습니다. 그 손해액만 무려 5조원에 달한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데모와 집회 시위를 절제한다면, 최소한 OECD 평균 법질서 수준만 유지해도 연평균 1% 가량의 엄청난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게다가 불법 폭력시위대를 온정주의로 풀어주는 사법부도 문제입니다. 나라를 파괴하고 경제를 마비시키며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사람들과 야만적인 폭력시위자들을 처벌하지 아니하고 그냥 풀어 주니까 계속해서 불법 폭력시위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들여다 보면 다들 자기 영욕에 미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죄와 욕심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자와 병든자와 약자들을 사랑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9:16) 라고 고백한 바울사도처럼 이 악한 세상사람들을 구원해 내는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과 조롱이 쏟아집니다. 예수에 미쳤다고 조롱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이요 무능한 교인입니다. 교회도 전도와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 가치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제 정신이면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섹스와 재물에 미쳐 갑니다. 제가 여러번 소개한 세계적인 미녀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증과 육체의 갈증을 메꾸려고 7번이나 이혼을 하고 8번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남성편력과 사생활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재산도 6000억원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더더욱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고백하기를 고백하기를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옷과 보석에 둘러싸여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나에게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이 필요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음이 불행합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한편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울사도입니다. 로마의 옥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6-7)
사도 바울은 이제 며칠 후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그리고 정말 죽음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서신에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딤후 4:7,8)
사도 바울은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죽을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소망중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이라는 말은 “꽉 붙잡는다”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아주 꽉 잡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나를 꽉 잡으셨기에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대로 끌려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자하시면 가고, 머물자 하시면 머무는 것 뿐, 나의 의지는 다 그분께 맡겨 드렸습니다. 주님사랑의 포로가 되어 살아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환란과 고난중에도 감사하면서 행복한 이유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자기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고 자신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런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같은 사랑으로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본문 13절을 다시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증거 합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것처럼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간증을 듣다가 “네 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행26:24) 라고 고백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바울사도를 대적하던 사람들이, 바울이 미쳤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이때에도 바울사도는 “당신들의 말처럼 나는 미쳤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하는 말처럼 잘못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똑바로 미쳤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았습니다. 바알세불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제대로 믿어 보려고 하는 성도들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누가 미쳤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사명과 영생을 위하여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안개같은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다가 지옥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미친사람입니까?
잠깐 후면 시들어 버릴 젊음을 조금 더 연장시켜 보려고 뱀과 곰쓸개와 발바닥을 먹으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비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서 인생을 건 사람들이나 자기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날마다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작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 그사람이 가장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믿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살면 가족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감동을 줄수가 업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인도 사람들에게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달에 간디는 한 미치광이에거 피살을 당합니다. 간디가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무려 20만 명이이었습니다. 그때는 정확하게 숫자를 산정하지 못할 때이라서 경찰 통계로 20만명이지, 실제로는 100만명이 간디를 따라서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라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수십만 명이 생명을 바쳤다면 하물며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내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도 얼마나 많은 사랑과 헌신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지옥불에 들어갈 불쌍한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제대로 미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야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하고 주님이 주신 천국의 기쁨에도 동참하여 늘 행복하게 살수가 있습니다.
미국 관광단이 나환자촌을 방문했습니다. 선교사로 파송된 한 간호사가 나병환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어 주는 광경을 지켜보단 관광단중에 한 여자가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백만불을 준다 해도 저런 일은 못해”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이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면 약한 몸으로 세계 선교의 사역을 감당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위대한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은 그 사랑에 힘입어 자기 인생을 아낌없이 주님께드렸습니다.
우리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도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의미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감동적인 예화들은 다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가 쓴 “양 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이 책의 여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목사님의 딸입니다. 나오미가 어느날 “료오이찌”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서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나오미가 이년동안 그 남자와 살았는데 이 남자가 술버릇이 나쁘고 바람 끼도 있어서 툭하면 술을 마시고 집에 안들어 오니까 나오미는 도저히 이 남자와 함께 살수가 없어서 도망쳐서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서 다 죽게되자 나오미를 찾아 옵니다. 나오미는 그에게 더 이상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가라고 냉정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와서 그러지 말라고 딸을 타이르면서 그 남자를 집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대접합니다.
그런데가 병들어 오갈데가 없다고 고백하자 목사님 부부는 딸을 설득해서 병이 낳을때까지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하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친정 부모의 권면으로 인해서 결국 나오미는 그 남자를 받아 줍니다.
처갓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료오이찌는 장인 장모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건강도 회복하게 됩니다. 료오이찌는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 매일같이 제일 꼭대기층에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그림을 그립니다. 료오이치는 나오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고 수개월동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하얀 천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오미가 나간 사이에 전화가 왔는데 료오이치가 나오미의 집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료오이치의 옛날 여자친구가 전화를 했습니다. 그 전화를 료오이치가 받았는데 그녀는 료오이치에게 제발 한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마음이 약한 료오이치는 결국 그녀를 만나러 나갑니다.
그 여자는 료오이치에게 술을 권했지만 료오이치는 사양했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을 만났기에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집요하게 료오이치를 물고 늘어져서 결국 료오이치는 그녀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계속해서 같이 자자고 유혹하지만 료오이치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되자 료오이치는 집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일어나자 그 여자는 몰래 술에다가 수면제를 타서 가져와서는 이 술 한 잔만 마시면 보내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료오이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 술을 받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신 료오이찌는 점점 졸음이 밀려 오기 시작 합니다. 료오이치는 잠이 쏟아지는데도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그녀의 집을 나섭니다. 그녀는 아무리 말려도 료오이치가 집을 나서자 결국 붙잡지 못하고 맙니다. 료오이치는 집으로 가려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졸음을 참지 못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나가다가 쓰러져서 잠이 들고 맙니다. 길바닥에서 잠이든 료오이치는 결국 얼어죽고 맙니다.
다음날 료오이치가 동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오미가 달려와서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나오미는 또다시 배신당한 슬픔에 억울하고 분했지만 장례식을 마친후에 료오이치가 그림을 그리던 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보니까 그림 하나가 이젤에 걸려 있는데 흰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천을 열어 봅니다. 그 천을 열었더니 거기에 그림이 나오는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로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그 그림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료오이치가 새사람이 된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가 그림을 바라보고 내려왔는데 한 여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료오이치를 죽게한 여자입니다. 료오이치는 끝내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료오이치가 제 청을 들어주지 않아서 제가 술에 수면제를 타서 먹였습니다. 그런데 료오이치는 그 술을 마시자 마자 집에 간다면서 저의 집을 나섰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얼어죽은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지나간 죄를 청산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부모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삶의 모든 것들을 육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되는 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애쓰게 되고 신령한 세계에 눈을뜨고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않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께 내 자신을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이상한 미신을 믿는 종족이 있습니다. 어느날 열병에 걸리면 그들은 무조건 앞을 보고 전력을 다해서 뛴다고 합니다. 열병이 떠나가도록 열병을 떼어 내 버리려고 뛰는 것입니다. 무지하니까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열심히 뛰다보면 병이 낫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일도 못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거절당할 수 있고 망신도 당할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전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받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모험입니다. 모험 없이 변화 없고, 모험 없이 성장 없고, 모험 없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모험을 감행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거는 사람에게 영광이 주어 집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는 보람있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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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는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고백하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15절에서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자기가 기록한 모든 성경에서 누누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일본 원전사고로 인해서 방사능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갑상선암이나 온갖 암에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당대에 무서운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다가 죽고 불임이나 기형아를 낳게 되기도 합니다.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이후에 유럽을 비롯한 주변 나라에서 갑자기 암 발병율이 급상승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방사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우리안에 들어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병들게 합니다. 병들게 할 뿐 아니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죄는 우리를 영원한 저주의 현장인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한 사람 즉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라고 증거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 죄가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를 기억도 안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점도 없고 흠도없고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 드립니다. 한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잘 훈련된 그는 최고의 기량으로 연주를 했습니다. 모든 청중은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연주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우뢰와 같은 박수로 그를 치하 했습니다.
그런데 맨 앞 줄에 앉은 나이가 지긋이 든 한 중년 신사는 무덤덤하게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 피아니스트는 연주가 끝난후에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무대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무대감독이 무대 뒤에서 그의 연주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저는 연주를 잘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무대감독은 “저 청중들을 보세요, 한 중년신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일어서서 지금까지 당신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당신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연주자는 침통한 모습으로 “저 중년신사가 바로 저의 피아노 스승 이십니다. 제 스승님이 일어나서 박수를 쳐 주셨다면 저는 성공한 것이지만 선생님이 말없이 앉아 계신다는 것은 제가 연주를 잘 못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젊고 유능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갈망했던 것은 수 많은 청중들의 환호가 아니라 한사람 스승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연주가 다 끝난후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데도 조용히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연주자는 스승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연주가 시원치 않았다는 것을 깨닳은 것입니다. 그래서 풀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희망이 보이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하는지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 연주자는 겉으로만 번지르르 하게 연주해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좋아하는 연주가가 되기 보다는 진정으로 심오한 연주를 통해서 스승에게 인정받는 연주자가 되기를 원했기에 소망이 있는 연주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자기 스승의 칭찬을 갈망했던 것처럼 우리도 사람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판단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때 우리는 진정한 크리스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몸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결론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바울사도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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