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포도나무

[스크랩] 2014년3월23일 주일낮 눅12장13-21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운시냇가 2014. 3. 24. 17:54

 

서울 세광교회의 임환탁장로님께서 소고기 사골 20키로를 보내 주셨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때도 소고기5키로와 사골 15키로를 보내 주셔서 떡국을 끓여 먹으면서 잔치를 했는데 어제 장로님께서 또다시 귀한 먹거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크리스마스때 장로님과 통화를 했는데 임환탁장로님께서 "목사님! 저는 남해 세광교회가 참 좋습니다. 목사님도 너무나 좋아요”하셨습니다. 저는 통화를 하면서 장로님께서 우리 남해세광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

 

임환탁장로님은 저희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를 사랑하시고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시는 귀한 장로님입니다. 저희 교회가 세워질 때에 서울 세광교회의 당회를 통해서 앰프와 마이크등 가장 중요한 교회용품을 보내 주시는 일에도 임환탁장로님께서 일조를 하셨습니다. 금번에도 귀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임환탁장로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진주 경상문구사의 옥해광장로님께서 6개월분 컴퓨터 프린터 잉크와 A4용지 6개월분을 헌물해 주셨습니다. 옥해광장로님께서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 믿음과 사랑에 변함이 없이 오랜 세월동안 저의 목회사역에 큰 도움을 주시는 옥해광장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에 나창희집사님과 지영달성도님께서 제주도에 있는 아들집에 방문하시면서 레드향 한박스와 귤 한박스를 보내주셨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내 주셨는데 오늘 주일까지 두면 안될것 같아서 수요저녁예배에 나오신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나창희집사님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시간을 보면서 살아 갑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주에 시계를 잃어 버렸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호주머니에 시계를 넣었는데 나와서 옷을 입으면서 보니까 시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갑도 있고 돈도 있는데 시계만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왔습니다.

 

한가지 심증이 가는것은, 목욕을 마친후에 옷을 입는데, 옷장이 있는 복도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때 복도가 복잡해서 제가 제 옷장에서 조금 비켜서서 옷을 입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제 옷장에 걸린 바지 호주머니를 뒤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안보는 틈을 타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시계가 잡히니까 시계를 가져간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왼쪽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 버리지 않은것 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지갑을 잃어 버렸으면 기만원의 돈과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중과 주민등록증등을 다시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제가 10년전부터 가지고 다니는 어머니사진과 아내 사진도 잃어버려서 매우 섭섭했을 것입니다.

 

제가 잃어버린 시계는 10년전에 미국에서 올때 사온 시계인데 시간도 잘맞고 야광도 있어서 제가 참 좋아하던 시계였습니다. 시계를 잃어버리고 난 후에 Tickker시계를 사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Tickker시계는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count down해 주는 손목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사용자의 여생을 년•일•시간•분•초로 표시해서 보여줍니다. 먼저 암이나 당뇨병 같은 자신의 병력을 비롯해서 음주 흡연 여부와, 평소에 운동을 얼마나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력하면 Tickker시계에 정보를 입력한 사람의 예상 수명이 몇 년인지가 나타 납니다. 그 수치에서 내 나이를 빼면 내가 죽기 전 까지의 남은 시간이 시계에 표시가 됩니다. 그러면 시작 스윗치를 누르면 그때부터 나의 남은 수명의 시간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갑니다.

 

이 재미있는 시계는 스웨덴의“프레드릭 콜팅” (Fredrik Colting“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이런 시계를 발명한 이유는 그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 보면서 ”나는 나에게 남은 시간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겠다!“라는 생각에 이런 시계를 발명한 것입니다.

 

프레드릭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보람있고 소중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시계를 발명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Tikker시계를 죽을때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이기에 “죽음의 시계(Death watch)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프레드릭은 그 시계를 ”행복의 시계“(Happy watch)라고 불렀습니다. 시계의 가격은 $59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6만원정도 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나는 헛 살았어 잘못 살았어” 하면서 후회를 한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두고 두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제 아들녀석을 혼내 준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서울에서 살 때, 제 아들 아이가 여섯 살때 였습니다. 아들 아이가 뇌성마비로 태어나서 집중을 잘 못하는데다가, 말도 잘 안듣고, 하도 말썽을 부려서, 이녀석을 한번 혼을 내 주어야 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족들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아들 아이가 뒷자석에서 뗑강을 부리고 네 살 위인 누나를 때리면서 못된짓을 하기에 차를 세우고 차 문을 연 후에 아들녀석을 차에서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문을 닫고 저도 차를 탄 후에 그냥 내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들 녀석이 자기를 버리고 가는줄 알고 놀래서 울면서 달려 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한 200m 정도를 그냥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들 녀석이 차를 따라오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지자 마자 또 일어나서 죽어라고 차를 따라서 달려옵니다. 그 광경을 차안에서 백미러로 지켜 보다가 제가 차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아들녀석이 사필규정으로 울면서 달려 오더니 “아빠 잘못했어요! 아빠 잘못했어요!” 하면서 울면서 차를 탑니다.

 

저는 아들녀석에게“너! 또 다시 뗑깡 부리고 누나를 때리고 못된짓 하면 너를 길에다가 버리고 갈거다!”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들녀석의 못된 행동이 많이 좋아 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고 두고 그 생각만 하면 “아들녀석이 그때 얼마나 놀랬을까? 내가 너무했구나!” 라는 생각에 그생각만 하면 아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눈물이 핑 돌곤 합니다.

 

그 외에도 교사 시절에 제가 담임한 아이들과 더불어 수업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을 심하게 꾸중한 일이나 크리스챤 교사로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 외에도 부모님께 불효한 일을 생각해도 후회가 됩니다.

 

어제 새벽에 새벽기도 차량 운행을 하면서“ 어머니권사님께서 오늘 남해에 오시는데 어머니권사님이 남해에 오시면 잘 해 드려야지”하고 생각 하면서 그동안 잘해 드리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려서 이생각 저생각 하면서 용강고개를 넘어오다가 그만 용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쳐서 50미터 아래쪽의 버스 정류장쪽으로 들어 갔습니다. 집사님들이 “목사님! 지나쳐서 내려가셨죠!”하기에 예 딴생각 하다가 지나쳤습니다“하고 집사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역시 그것도 후회가 되곤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후회(後悔)는“이전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후회를 합니다. 첫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후회를 합니다. “그때 내가 좀더 열심히 공부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 오늘 이런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텐데...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줄 것을...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알았으면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었을 텐데... 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위해서 일하자고 권면했을 때 그때 순종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면서 기회를 놓친것 때문에 후회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했기 때문에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억울했더라도 그런 거친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유혹이 달콤했어도 그것만은 거절했어야 했는데…”이와같이 과거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오지 못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나가버린 세월과, 뱉어버린 말과, 놓쳐버린 기회”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님은(John Piper)“한 번뿐인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Don’t waste your life)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지나간 과거의 모든 일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나치게 과거에 매여 살면 오늘을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과거에 매여 살면 내일을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과거와 단절해야 합니다.“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두 번째로 하고 싶은 것을 오늘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나에게만 주어진 나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지나간 후에“해볼 껄”하면서 후회하지 말고 하나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해보고 싶은 것을 해 보는것이 중요 합니다. 여행도 해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드럼도 배워 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못다 마친 학업도 계속해 보고, 젊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담대하게 사랑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오늘 안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김명심집사님은 40이 넘은후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여러개의 자격증을 취득하셨습니다. 간호사, 사회복지사, 상담심리치료사등 쉽지 않은 자격증들을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셨습니다.

 

신앙생활도 후회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9절에서“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후회없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일에 전심해야 합니다. 단기 선교도 가고, 성지순례도 가고, 열심히 전도하고 베풀고 섬기면서 살고, 힘 닿는데까지 충성을 다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사에“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실까를?”생각하고 기도한 후에 행하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때로 잘못된 길을 걸었을때는 주님께 나아와서 진심으로 회개하면 주님은 지나간 모든 상처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주십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께 돌이킬 수 없는 후회 막심한 행동을 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우는 새벽에 회개 했기에 회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가롯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기에 아겔다마에서 목 매어 자살함으로 지옥불에 들어가고 맙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시계는 열심히 돌아 갑니다. 우리는 후회스런 인생을 살지말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감사와 찬양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문제가 생겼을때도 유머가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링컨의 자녀들이 싸움을 했는데 그 싸우는 소리가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로 대판 싸웠습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이 달려와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링컨은 미소를 지으면서“뭐, 염려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을 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웃사람이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다니요?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그러자 링컨은 “아 사실은 제가 아이들에게 쵸콜릿을 세 개를 주었는데 두 녀석이 서로 두 개씩 갖겠다고 다투면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게 다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지요”

 

나라끼리 전쟁을 하는 이유나 이웃끼리 서로 싸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더 많이 가지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링컨은 이 탐심을“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 됩니다. 13절로 15절에 보면“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유산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이 형제들 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동기가 됩니다. 의가 참 좋았던 형제들이 결혼한 후에 여자들 때문에 의가 나는가 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신후에 남겨둔 유산을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워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재산이 많은 삼성가문의 아들들이 이병철씨가 돌아가신지 30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지금까지 유산 상속문제로 법정싸움을 벌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얼굴에 얼마나 먹칠을 하는 것입니까? 가문에도 그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 한번 소개 했지만 다시 한번 소개 합니다.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농사가 다 끝나고 논과 밭에서 추수를 하면서 형이 생각합니다.“동생이 이제 갓 결혼을 했는데 집에 필요한 것이 많겠지?...형은 밤에 몰래 나와서 자기 논에 쌓아놓은 낫가리의 볏단을 짊어지고 열심히 동생 낫가리에다가 옮겨다가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두 식구밖에 없지만 형님은 자식들까지 딸렸으니 저것 가지고는 안 될 텐데?!..’그래서 동생은 야심한 늦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논에 나가서 자기 낫가리의 볏단을 열심히 형의 낫가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기분좋게 들판에 나와서 낫가리를 쳐다보던 형이 자기 낫가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하다 어제 내가 분명히 내 볏단을 동생쪽 낫가리로 옮겨 놓았는데 어떻게 낫가리가 하나도 줄질 않고 그대로 있지? 그런데 동생도 오후에 들에 나가서 낫가리를 쳐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아니 어떻게 된거야? 어제 많은 낫가리를 형님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낫가리가 그대로네?” 의아하게 생각한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이 되자 형이 다시 들로 나갔습니다. 어제처럼 다시 열심히 낫가리를 동생쪽으로 옮겼습니다. 한밤중에 동생이 다시 나와서 자기 낫가리를 형님쪽으로 열심히 옮겼습니다. 다음날 들에 나간 형과 동생이 또 놀랬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거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 다음날 또다시 밤이되자 형과 동생이 낫가리를 옮기기 위해서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는 달이 훤하게 밝았습니다. 서로 낫가리를 들고 옮기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다가 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간 형제는 비로소 서로를 알아보고 그제서야 왜 낫가리가 줄지 않았는지를 알고서 서로 부등켜 않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릴 때 읽었던 의좋은 형제라는 이 동화는 지금도 마음속 깊은곳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이런 형제사랑과 형제우애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유산 때문에 싸우는 젊은이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 오늘 본문에는 농삿꾼 아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농사일은 사람의 노력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를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알곡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고 때로는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서 한파가 온다든지, 태풍이 분다든지, 비가 계속 안오면 농작물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농부가 가을에 대 풍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농부도 수고를 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톨의 곡식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추수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추수 때에는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감사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부자는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자는 오직 자기 생각밖에 없습니다. 19절에 보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게 됩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도 몰랐고 이웃의 은혜도 몰랐습니다. 농사일이라는게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논을 갈아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모내기를 할 때도 많은 사람이 함께 모심기를 해야 합니다. 추수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달라 붙어야 합니다.

 

농사는 다른 사람들의 협조와 이웃의 협력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수 할 때에는 하나님께도 감사 예물을 드리고 그리고 이웃을 청하여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부자는 이웃의 은혜도 모르는 이기주의자 였습니다. 이웃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부자가 행한 가장 큰 실수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부자는 죽을줄도 모르고 열심히 자기 먹을것을 저장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짓고 곡식을 저장하는 일을 마친 그날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불러가셨습니다.

 

미국에서는 50세가 되면 장의사에서 묘지를 예약하라고 편지가 옵니다. 그래서 50대는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 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서 선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의 초청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그 나라 공주와 결혼하고, 남가군(南柯郡)이라는 나라의 태수가 되어 호강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인이 죽고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봄날에 선잠 자며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행복이 순식간에 끝나게 된다고 해서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시편 90편10절에도 보면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증거 합니다.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쌓아놓고 자기만 잘먹고 잘살려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 사람이 잘못한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한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재물을 모았으니 성실하기도 하고, 머리도 좋고, 또 운도 따랐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사업이 잘못될 수도 있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저축도 했으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식들이 사업을 하거나 시집 장가 보내려면 어느 정도 사업밑천도 장만해 주어야 하고 결혼을 위해서도 쌓아 놓아야 합니다. 그런 것마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어쩌면 이 부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부자에게“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를 악하다고 말씀 하지는 않으셨지만 어리석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말씀 같기는 한데 어딘가가 마음이 불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사람은 결국 죽을 테니까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미래를 준비하거나 풍족하게 사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라는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죽음을 무기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처럼”보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인 21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답이 나옵니다.“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곡간을 더 크게 짓겠다는 부자의 생각은 결국 자기만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부자는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도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것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돈을 벌어서 저축하고 재테크를 해서 재물을 늘려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당연한 삶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세속을 등진 수도자들이나 오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사실은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재물을 쌓아두는 일과,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사는것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만약에 이 부자가 소출의 반은 하나님께 바치고 반은 자기 곡간에 채웠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동기를 보면 문제가 풀립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유산 상속에 대해서 상담을 청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형제들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나는 너희의 이해타산을 해결해주는 재판관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생명과 소유의 관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재물이나 소유가 전혀 없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주 굶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함께 몸을 의탁할 집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늘 아침 이슬만 마시고, 구름만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양식과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소유가 넉넉해야만 행복하다”라는 고정관념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소유 지향적입니다. 자본주의는 소유 지향적인 삶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정신입니다. 대한민국은 늘 세계에서 경제 수준이 10위네, 11위네, 하면서 높은 경제수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020년에는 세계 5위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경제 부분만이 아니라 정치, 교육도 모두 이런 이념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경제와 재물로 인생과 나라를 가늠하는 이런 삶의 패턴은 복음이 아니라 바알 숭배입니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늘려야만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마귀가 이용하는 미혹의 방법입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불안 증세가 더 심해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 즉“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 비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주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그 무엇이든지 내거라고 생각하면서 소유하는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의 존재를 쉽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쥡니다. 주먹을 불끈쥐고 태어나서“한번 세상에서 내 소유를 마음껏 늘려보자”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에 태어 납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손바닥을 펴고 죽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결국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소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평생 소유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인생의 행복을 소유의 넉넉한 데서만 확인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가 문제 입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은 오직 소유의 넉넉함 만을 바라보고 살아 갑니다. 너나 나나 조금이라도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경쟁속에서 치열하게 살아 갑니다. 소유를 늘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죽어라고 일하고, 아이들에게도 죽어라고 교육을 시킵니다.

 

요즘 좀 괜찮은 유치원의 월 원비가 10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유치원이 끝난 뒤에 다시 몇 군데 더 학원을 다닙니다. 젊은 엄마들이 그런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동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죽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는 소유를 위한 경쟁력만을 절대 가치로 보는 신자유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게 다 소유의 넉넉한 데서만 생명을 유지할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삶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지면서 교양도 쌓고, 남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재물을 부지런히 모아서, 노후에 평안하게 살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 갑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생각이 나쁜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삶을 어리석은 삶이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는 인간으로서의 보람도, 인간의 본분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죽으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섭리를 알고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좆아서 살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재물도쓸때는 쓸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도 갚을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닳은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에게 기쁨으로 사례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알고나면 부모님을 극진히 섬깁니다. 백광영집사님은 정봉임집사님이 낳지 않은 아들인데도 정봉임집사님을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길러준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김상철성도님께서 교회 오신지 6개월 밖에 안되었을때 저와 제 집사람에게 200만원이 넘는 안마기를 사 주셨습니다. 제가 200만원을 모으려면 2년은 저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상철성도님께서 남해 세광교회에 와서 보니까 너무나 기쁘다고 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은 잘 몰라도 목사님이 너무나 좋아서 항상 마음이 기쁩니다" 하시면서 그 비싼 안마기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김상철성도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천국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더욱 귀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상철성도님께서 전도해서 모시고 온 분들이 열분이나 됩니다. 김상철성도님에게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 하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때부터 뜨거운 구령의 열정으로 그 누구보다도 전도에 전념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말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내가가진 모든 소유의 주인이 나라고 주장하고 사는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언제라도 다 놓고 가야 하는것이 인생입니다.

 

그동안 황사 때문에 운동을 못하고 지내다가 수개월 많에 어제 제 집사람과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저 위의 동산으로 지나 가는데 옥동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 집사람이 평토장 묘지들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인생인데 살아 생전에 하나님을 잘 믿고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서 살다가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저도 공동묘지를 지나 가면서 ”그동안 남해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검을 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기전에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준 분들도 많았지만, 한편 죽기전에 참 어리석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여럿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잘 살다가 잘 죽어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희는 너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지말고 하나님께 부요한 인생을 살아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거나 교회공동체에 동참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요한 인생을 살았다고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 부요한 삶입니까? 대답은 앞에서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선 소유의 넉넉함으로 만족하거나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 한가지는 소유냐? 존재냐? 라는 의식에서, 소유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입니다. 즉 다시말해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풀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까마귀와 백합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까마귀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기르신다“”까마귀보다 귀한 사람을 하나님이 당연히 보호해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질없는 세상 근심 염려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런 염려와 근심이 쓸데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너희들은 세상일로 늘 염려하고 걱정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더해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부요한 삶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그런 말 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먹을 게 있어야 염려를 하지 않을 게 아니냐! 그런 소리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하는 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염려와 근심은 근본적으로 죄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형편이 좋아져도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또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부요한 믿음의 사람들이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 낼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의 나라를 구하라”라고 했지“그의 나라를 만들어내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종말론적인 생명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천국과 영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여기서 영생은 새로운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은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받은 영생의 축복을 남에게도 나누어 주고싶고, 또 남이 구원 받는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심하게 됩니다.

 

정말 새생명을 얻은 사람은, 소유를 늘리는 일에만 치심해서 돈 버는 일에만 급급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과 영생을 나누어 줄까를 생각하면서 전도하고 선교하고 복음 전할까 하는 일에 전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건강과 재물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헌신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덕을 세우고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제일 처음으로 소래에 교회가 세워진 후에 평양이 신앙부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 좋은 여 성도가 평양에서 살다가 두 아들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평양에서 진남포까지는 40KM입니다. 100리길입니다. 진남포로 이사를 간 이 여 성도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고민을 하다가 토요일 날 달구지에 타고 출발해서 평양에 가서 친척집에서 자고 주일 날 예배드린후에 다시 진남포로 돌아 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두 아들과 함께 주일날 평양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달구지를 타고 돌아오는데 길바닥에 있던 막대기가 마차바퀴에 깔리면서 튕겨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막대기가 마침 말을 타고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가던 노인이 탄 말의 코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막대기에 찔린 말이 놀래서 뛰는 바람에 노인이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은 마차에 타고있던 두 아이가 막대기를 던진 줄 알고 오던길을 돌아서 아이들과 엄마를 진남포로 데리고 가서 경찰서에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장이 아이들에게“누가 나무를 던졌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열 여섯살난 큰 아들이 "제가 그랬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열 세 살난 동생이 "제가 그랬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과 동생이 서로 자기가 했다고 우기는 바람에 증인도 없고 규명할 길이 없자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이들의 어머니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누가 벌을 받아야 할것 같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꼭 벌을 받아야 한다면 작은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판사는 “왜 작은 아이가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저는 저 큰 아들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제가낳은 아이를 데리고 재가를 했습니다. 큰 아이는 전처의 소생이요 작은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입니다. 만약에 큰 아이가 벌을 받으면 그 아이 마음에 상처가 클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아이인 제 아들이 벌을 받으면 그래도 제 아들아이는 어미가 있기에 벌을 받아도 잘 참아낼 것입니다. 그러니 작은 아이에게 벌을 주십시오!

 

“ 판사가 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나서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판사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어서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어디를 다녀오다가 그런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예수믿는 사람인데 평양에서 살다가 진남포로 이사를 왔습니다.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교회를 다녀 오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판사가 "예수 믿으면 다 당신처럼 됩니까?”라고 하더니“이제 판결을 하겠습니다! 당신과 아이들을 보니, 당신의 아들들이 나쁜일을 할 것 같지는 않소! 당신의 아들들은 무죄요!”“그리고 당신은 재판이 끝난후에 나를 좀 보고 가시오!”

 

그래서 재판이 끝난후에 이 여인이 기다렸더니 판사가 이 여인에게 와서 하는 말이“나도 당신처럼 예수를 믿고싶소! 내가 이 진남포에 예배당을 세우겠소! 나도 당신처럼 교회를 다니고 내 아이들도 교회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더니 얼마후에 그 판사가 자기 재산을 헌물해서 진남포에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그후에 김구 선생이 진남포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면서 에버트 청년회를 만들어서 열심히 봉사를 했고 안중근의사도 진남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이와같이 진남포 교회는 신실한 한 여인의 덕망과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소유로 생명을 확인하는 삶을 강요하는 시대입니다. 소유가 많으냐 적으냐로 사람을 평가하고,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가진것으로 사람을 우대하고, 사람을 높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삶으로서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환대속에서 천국에 입성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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