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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년6월8일 주일낮 사도행전3장1-10 성령강림주일에 성령강림을 기대합시다

그리운시냇가 2014. 6. 9. 00: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도는 성령충만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을 기대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를 안고 살아갑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기대가 채워질 때 부모들은 몹시 기뻐합니다. 나의 자녀가 기대 이상으로 공부를 잘 한다거나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성취를 이루거나 또는 성품이 착하고 믿음이 좋은 자녀가 되면 더 바랄것이 없이 마음이 행복해 집니다.

 

한 5년 전에 류금련권사님께서 도마에 사는 아들집에서 심방예배를 좀 드려 달라고 해서 아들, 며느리집에 가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심방간 이야기를 전에 간증을 했는데 오늘 한번 더 하겠습니다.

 

권사님 아들과 며느리 집에 갔더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 하은이와 손주 애국이가 얼마나 또랑 또랑하고 예쁜지 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며느리 이임순집사님도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충성된 신앙으로 사는 믿음좋은 젊은 엄마 였습니다.

 

류금련권사님께서 미리 연락을 해 놓아서 모든 식구들이 다 집에 있었습니다. 류금련권사님은 아들도 며느리도 손주 손녀들도 예배중에 말씀과 성령을 받아서 자녀들이 새롭게 살기를 기대 했기에 저를 아들집으로 초대해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내는데 권사님의 아들이 거실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가길래 제가 권사님 아들에게“오늘 심방예배를 드릴건데 같이 예배좀 드립시다”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저를 쳐다 보는데 험상궂은 얼굴로 저를 째려보고 서 있었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너 까불지 마라? 목사 주제에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냐?" 라는 뉘앙스의 인상이었습니다. 저는 나가다 말고 저를 째려보고 서 있는 아드님에게“어머니도 모시고 왔는데 잠간 들어오시죠? 예배좀 같이 드립시다!”하고 다시 권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현관문 앞에 서서 한 2분동안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고 계속해서 저를 째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 이임순집사님이“우리끼리 예배 드려요!”하고는 아들을 밖으로 밀어 내고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자기 어머니가 와도 인사도 안하고, 그리고 목사는 마치 상종할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안하무인식으로 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아들 때문에 류금련권사님이 얼마나 애가 탈까?” 하면서 그 후 부터는 권사님의 아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종종 저에게 "목사님 이제 저는 아들만 돌아오면 됩니다. 아들이 기도제목입니다" 라고 말씀을 하셨기에 새벽마다 권사님의 아드님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권사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아들의 회심과 변화 였습니다. 권사님은 평생동안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한달에 여러장의 주차위반 티켓과 속도위반 티켓을 받았는데 그 벌금 고지서가 권사님댁으로 날아 옵니다. 그러면 권사님이 그 돈을 다 내 주십니다. 권사님은 매년 소를 길러서 판 돈을 아들집에 주시고 며느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농사 지어서 모은돈과 자식들이 용돈준것 모아서 다 며느리에게 주셨습니다.

 

권사님은 눈도 안보이는데도 소를 기르고 농사지어서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제가 류금련권사님을 모시러 가면 권사님은“우리 아들 용강에 있던가요?”하고 묻곤 하셨습니다.

 

권사님께서 종종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 위험한 떼드리 골짜기를 지팡이를 짚고 용강 호수 쪽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권사님 아들이 용강저수지 옆에 컨테이너로 집을 짓고 남해에서 공사가 있을때마다 그곳에 와서 자고 가는데 종종 아들이 거기서 자고 가는것을 아신 권사님께서 아들이 보고 싶으면 지팡이를 집고 그 위험한 떼드리 길로 해서 용강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어쩌다가 아들이 집에 있어서 어머니를 만나면 아들이 권사님에게 “여긴 왜 오셨어요?”하고는 그냥 밖으로 달아나 버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험한 길을 더듬어서 올라 갔는데, 기왕에 만났으면 어머니를 좀 차에 태워서 집에 모셔다 드리고 가면 좋은데 그냥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아들을 만난 기쁨을 안고 강아지에게 밥을주고 다시 내려 옵니다. 권사님은 그저 자나 깨나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을 사모하면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권사님은 아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내새끼, 보고싶은 내새끼이기에 보고싶어서 찾아가고 아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류금련권사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2년전에 권사님의 아들과 며느리 이임순집사님이 아이들과 함께 진주로 이사를 갔는데 아들이 작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 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올해에는 마늘을 캐는 기간에 아들이 와서 권사님의 마늘을 차에 실어서 집까지 날라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내멋대로 살던 아들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고 그리고 어느날 마음이 변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선거 날에는 권사님댁에와서 권사님이 불러 주는대로 선거인 투표지에 표시를 해 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변화가 기적인 것입니다.

 

그 기적은 류금련권사님과 이임순집사님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아무리 바위돌에 계란 던지기 같이 생각되는 일도 꾸준히 믿음으로 기도하면 언젠가는 다 해결이 됩니다.

 

죽을병에 걸려도 사필귀정의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전에 한번 소개한 백기현 교수님은 1951년도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는데 두살때 8살된 사촌누나의 등에 업혀 있다가 그만 누나의 등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대학다닐때에는 척추 화농 수술을 받기 위해서 피를 수혈 받았는데 그때 B형, C형 간염이 전염이 되어서 오랬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잘하고 음악을 잘해서 서울대학교 음대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다시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 음악대로 가서 유학공부를 하고 다시 이탈리아의 아르츠 아카데미에서 유학공부를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는 곱추라는 장애를 딛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여교수를 만나서 결혼도 합니다. 음악가의 명성도 점점 유명해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대학 교수에 음악계에서 유명인사로 성장했지만 속으로는 곱사등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이루 말할수 없는 분노와 상처를 않고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성실한척 근면한 척 하면서 교수의 품위를 가지고 태연하게 살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병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지만 그는 예배를 드리러 갈때마다 늘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된 후에는 자기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오페라단을 만들어서 전국으로, 해외로 공연을 다니면서 오페라를 우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오페라가 잘되자 더욱 크게, 더욱 멋지게 만들려고 판을 크게 벌렸다가 그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행복했던 가정도 혈기로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고 비참한 심경으로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강사 목사님께서“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고 상처도 죄도 깨끗이 씻겨 주십니다. 주님께는 못고칠 병이 없습니다!”하시더니 목사님께서“따라 하세요!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그때 백기현교수는 마음문이 열리면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 하다가 갑자기 자기의 죄가 회개가 되어 지면서 눈물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울면서 회개를 하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시더니 자기몸을 만지시는데 팔, 다리, 목, 어깨, 등, 허리가 꺾이기 시작하더니 그때부터 시작된 성령의 역사가 이틀에 걸쳐서 계속 되면서 평생동안 굽어있던 곱사등이가 펴졌습니다.

 

그러더니 하나님께서“내가 너의 굽은 등을 다 폈느니라”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내가 너의 간염도 다 고쳤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백기현교수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기도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기현 교수는 며칠동안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면서“이제부터 내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증하리라”라로 작정하고 그때부터 수많은 교회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치유의 은혜와 온갖 축복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성령강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기대가 무너질때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교회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일일 수련회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끝나면 다시 공부방에 가서 저녁 8시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30분입니다. 연중에나 방학때나 아이들이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학교와 공부방을 오가면서 지냅니다. 그래서 중고등부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수련회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국가 공휴일에 일일 수련회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도 보여주고 피자도 사주면서 일일 수련회를 했는데 점심시간에 피자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모두 모여있는 모습을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여자아이가 사진 찍는것을 못마땅해 하면서 저에게“에이 씨”하면서 아주 기분 나쁘다는 듯이 욕 비슷하게 말을 하면서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 아이가 주일날 아침에 데리러 가면 차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툭하면 욕을 합니다.“좃나 기분나빠! 좃나 성질 더러워”하면서, 자기 성질 더러운건 모르고 선생님도 욕하고 선배 후배 가릴것 없이 툭하면 욕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시간에“예수 믿는 사람은 욕을 해서는 안된다! 욕은 저주니까 하지 말아라!”라고 타이르는데도 욕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더니 급기야 저에게도“에이 씨”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길래 제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말투가 거칠고 험한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자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이중에 한사람이라도 제대로된 믿음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고생한 보람은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섬겨 왔는데 막상 제자에게 그런말을 들으니까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를 마치고 아이들을 데려다 준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저도 인생을 살면서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온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부모님과 형제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준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하 이 일도 하나님께서 깨닳으라고 허락하신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로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낙담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에 한 성도집에 심방을 갔더니 그 성도님이 하는 말이 “우리교회의 어떤 성도가 나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바람에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가기가 싫어 졌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은 말로 복을 받기도 하고 말로 저주를 불러 오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상대방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서 실족하는 수가 있습니다.

 

전두환대통령이야기를 여러번 간증을 했습니다. 전두환대통령도 초등학교 다닐때에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하루는 공과공부 시간에 떠드니까 선생님이 화가나서 골밤을 때리면서“너같은 놈은 교회 오지마라”하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를 떠났고 교회와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충현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전두환대통령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저게 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경호실장이“예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더니 “교회를 저렇게 크게 지을 필요가 있나?”하고 전두환대통령이 한마디 하는 바람에 충현교회는 졸지에 건축을 중단하게 됩니다. 충현교회는 전두환대통령의 괘씸죄에 걸려서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성전건축을 완성하게 됩니다.

 

교회학교 교사의 한마디 책망이 전두환대통령을 지옥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일은 하나님의 기대를 망친 일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말 한마디로 교회에서 쫓아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중에는 예수님을 팔아먹는가 하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제자도 생겨 났습니다.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랑을 베풀고 진리를 가르치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고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고 그리고 천국백성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사랑을 베푸셨는데 어떤 제자는 끝내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 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기도와 말씀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기도와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일년에 52번을 드립니다. 10년이면 520번을 드립니다.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리면서 살았다면 이제 예배에는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린지 5년이나 10년이 넘었다면 이제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이전보다 달라져야 합니다. 더욱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응답이요 감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올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강림을 기대하면서 나아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성령께서 강림하셔서 내 인생이 변화되고 내 삶이 변화되고 내 가정이 변화되고 내 자녀들이 변화되고 내 나라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오면 은혜와 축복도 없습니다.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거나 또는 대통령이 만나자고 했을때 옆집 아저씨 만나러 가듯이 집에서 입던 후줄구레한 옷을 그대로 입고 대통령을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그래도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대통령을 만날 것입니다. 대통령을 만나면 대통령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고 기대를 가지고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면서 집에서 신던 쓰레빠를 신고 양말도 안신고 머리는 까치 머리에 세수도 안하고 오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다리를 앞자리에 올려놓고 팔장을끼고 늘 졸다가 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성도에게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예배는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요 온갖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영혼의 만족과 육체의 건강과 인생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올 때에는 기대와 소망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생수는 성령을 말합니다.

 

예배중에 성령을 받으면 죄사함의 은총이 임합니다. 그러면 백기현교수님처럼 못고칠 고질병도 치료받고 성령을 받아서 사명도 감당하게 되고 많은 성령의 열매도 맺게 됩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은, 본래 몽골의 선교사 이셨습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하고 계시지만 2005년도에 몽골 의 이레교회에서 선교사로 계실 때“벌러르”라는 한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예배당에 들어오더랍니다.

 

그녀는 몇 달 전에 이용규선교사님의 기도를 통해서 듣지 못하던 귀가 들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후부터 그녀가 매 주일마다 예배에 동참 했는데 그날은 예배를 드리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소를 포기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예배당으로 뛰어온 것입니다.

 

그때 이용규선교사님이 그 자매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다니다가 소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왔으니 하나님을 선택한 그 믿음이 부끄럽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가 보니까 집을 나간 소가 다시 집으로 돌아 와 있더랍니다. 몽골은 한번 소가 집을 나가면 거의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가 제 발로 다시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택한 그녀에게 예배와 소라는 두 가지 기쁨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예배는 이론이 아닙니다. 예배는 기대감을 갖는 성도에게 영적인 축복이 임하는 실존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도 하나님께 가까이 왔다가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만한 자리에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40년 동안 구걸을 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침 9시, 낮 12시, 그리고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갈 때 앉은뱅이 거지는 언제나 하던대로 그들에게 구걸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거지에게 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거지의 손을 잡고“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선포하면서 그 거지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때 앉은뱅이가 갑자기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더니 일어나 걷고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앉은뱅이는 기대 이상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앉은뱅이는 단지 돈 몇 푼을 요구했는데 졸지에 일어나서 걷고 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그 거지의 나이가 40세쯤 되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고 4장 2절은 증거 합니다. 그는 40년간 앉은뱅이로 살다가 하루 아침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앉아서 살던 사람이 걷고 뛰면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거지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도 큰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기도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소문이 나기 시작 하면서 나중에는 5000명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부흥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것 보다 훨씬 더 엄청난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축복은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올라 갔기에 이런 축복이 임했습니다. 거지도 날마다 성전에 올라와서 앉아 있었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날마다 구걸한 자리가 시장 바닥이었으면 이런 기적은 기대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철에서 구걸했어도 이런 기적을 맛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있었던 자리는 성전 미문 앞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었는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놀아도 기적의 자리에서 놀아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이트클럽에서 평생을 놀면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꾸준히 올라오면 온갖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올라 가다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막11:17)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다가 성령 받았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윷놀이를 하다가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자전거 타다가, 볼링을 치다가, 댄스를 하다가, 운동을 하다가, 성령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배를 드리다가 또는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 성전이나 기도원에 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인생이 달라 집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천국도 알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성령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붙들고 외친 말 중에 성령의 기적을 체험한 비결이 있습니다.“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아무리 꾸준하게 예배당 앞에 와서 40년간 앉아 있었다 할지라도,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있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백기현교수님도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라고 선포하신 강사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곱사등이가 낫는 기적을 체험 했습니다. 모든 기적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성령체험과 기적의 핵심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수천억 원을 드려서 공장을 지었는데 공장이 가동되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원 스위치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기가 들어오자 비로소 공장이 가동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은 기적의 원동력 입니다.

 

어느 분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요즘 교회들은 은과 금은 있는 데 예수님의 이름은 없다.”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이름권세를 믿었습니다. 우리도 은과 금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하고 믿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앉은뱅이도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도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왕의 특사가 왕의 옥새가 찍힌 명령문을 가지고 가면 모든 사람이 그 앞에 엎드려야 하고 그 명령문은 그대로 실행 됩니다.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에 예수님의 이름권세는 우주만물이 순종하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8장 18절로 20절에서“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다”라고 말씀 하셨고 시편8편6절로 8절에 보면“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라고 증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권세를 제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장 12절에 보면”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증거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권세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역사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암병도 낫게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적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축복이요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 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채워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스틴목사님은“ 기대하지 않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늘 똑같은 생각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입니다. 세속적인 소원도 간절하면 이루어지는데 하물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한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나아오면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을때만 나와서 예배 드리고, 시간이 없으면 안나오는것은 엉터리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직분과 일들은 우리의 부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명령대로 사는것이 우리의 본업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직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신 것입니다. 본업과 부업이 바뀌면 인생이 부끄러워집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일을 하면서 내가 시간 나면 하고 형편이 안되면 안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을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 태어나개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사람이 있고 영광과 존귀를 받으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인생을 산 사람은 하나님이 크게 환영하면서 영접해 주시고 금면류관을 씌워 주시고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천국집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 있을때만 와서 예배 드리고 시간 있을때만 봉사하고 시간 있을때만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왕이 아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시찰을 하다가 다리 밑에서 아주 똑똑한 거지 소년을 만났는데 대화를 해 보니까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왕은 그 거지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데리고 왕궁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만조 백관들 앞에서“이 아이를 내가 나의 양자로 삼겠노라"

 

그 날부터 이 소년은 거지가 아니라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잘 시간이 되자 이 아이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녀들이 쫓아갑니다. "왕자님, 왕자님, 이밤에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아, 내가 자는곳은 저 다리 밑에 있어요" 그러자 시녀들이 말립니다. "아니예요, 왕자님, 이제부터 왕자님은 궁궐에서 자야 해요"

 

그래서 왕궁에서 잔 아이가 다음날 아침에 또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녀들이 쫓아갑니다. "왕자님, 왕자님, 어디에 가세요?"

 

"아, 내가 아침에 세수하는 곳은 개울이거든요"그러자 시녀들이 또 말립니다. "아니예요, 왕자님, 왕자님이 세수하는 곳은 여기에 있어요"

 

왕자가 된 아이가 왕자다운 행동을 하려면 거지라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왕자다“ 라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합니다. 왕자라는 생각이 들어야 왕자다운 행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는 본래 거지였어“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자꾸만 거지처럼 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졸지에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아직도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큰일납니다. 의인이라는 개념이나 성도라는 개념은 같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과거에 무슨 행동을 했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신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나는 의인이다“ 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의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으면 집사다운 삶을 살아야 하고 장로가 되었으면 장로다운 삶을 살아야 하고 권사가 되었으면 권사답게 살아야 합니다. 장로가 평신도때의 언행심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교회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장차 교회의 장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장로의 자격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권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권사의 자격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집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로 권사가 되기를 원하면서 새벽기도도 안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도 안한다면 그런 사람은 직분자가 될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누구나 직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직분만큼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복을 주십니다. 직분을 사모한다면 그 직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집사가 되어서도 평신도 같은 생활을 하면 잡사가 됩니다. 권사가 평신도 같은 생활을 하면 간사가 됩니다. 평신도도 예수믿고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면 병신도가 됩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고, 성도가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닳은 사람은 비록 달란트가 부족해도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슈바이처박사는 공부도 많이하고 천재적인 음악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말재주가 없어서 대학교수로 임용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느날 아프리카로 가서 거기서 평생을 헌신 했습니다.

 

어느날 그가 잠시 고국을 방문했을때 많은 기자들이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위대한 학자요,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왜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고 계십니까?"

 

그 말은 들은 슈바이처 박사는 "나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감동을 주려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어 주고 싶은데 말로는 잘하지 못하니까 그것을 아프리카에서 행동으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보람과 사명과 행복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창들이나 친구들 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말은 잘 못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았던 슈바이처에게 하나님은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무쪼록 이 성령강림 주일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뿐 아니라 예수이름 권세로 마귀를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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