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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년8월3일눅 20장9-18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

그리운시냇가 2014. 8. 10. 17:00

 

 

오늘 김기동성도님과 정심이가 예배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정심이는 고현에 있는 정보 고등학교 3학년 입니다. 지난주부터 실습을 나간다고 합니다. 정심이는 설천교회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나왔습니다. 어제 정심이가 아버지와 함께 장보러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에 제가 모셔다 드리면서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을 해서 정심이가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정심이를 데리러 갔더니 정심이 아버님이 세모의 느티나무에 나와서 같이 계시기에 제가 정심이 아버님도 같이 가자고 말씀 드려서 모시고 왔습니다. 우리 다같이 두분을 박수로 환영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2대를 이어온 만석꾼, 경주 최부자는 경상북도에서 유명한 부자 였습니다. 부자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자는 만인의 부러움을 사면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존경받는 부자도 간혹 있기는 있습니다. 빌 게이츠나 록펠러같은 갑부는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유일하게 부자 이면서 존경을 받은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부자입니다.

 

최부잣집에서 자자손손이 전해져 내려오는 가훈은 참다운 선비나 부자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흉년에는 절대로 땅을 사지 않는다.

둘째 장이 파장 할 때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셋째 1만석 이상의 재산은 반드시 사회에 환원한다.

넷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한다.

다섯째 내가 살고있는 집에서 100리 안에서 사는 사람은 절대로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

여섯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않는다.

일곱째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만 입는다.

여덟째 보릿고개 때는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는다

 

최부자는 죽을 때 자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면서 자기가 남긴 유언을 자자손손이 철저하게 지킬 것을 엄히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최부자가 남긴 가훈을 철저하게 지켰기에 그 가문은 망하지 않고 장장 12대에 걸쳐서 부자집안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부자는 12대나 부자로 그 명성을 이어 갔습니다. 그런데 더 위대한 일은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 옹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살면서 일제에 협조하지 않기 위하여 전 재산을 모두 다 팔아서 독립자금으로 내놓는 바람에 12대를 이어 온 부자의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최부잣집 가문의 사람들은 부를 취하되 부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당연히 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철저하게 실천 했습니다.

 

이런 정신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성경적인 재물관과도 일치하는 재물관입니다. 사람들은 내 재산과 내 재물은 내가 피땀흘려서 번 재물이니까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리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양심도 팔아먹고 도둑질도, 사기도,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모든 소유와 재물과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잠시동안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다 반납해야 합니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닳은 동방 최고의 부자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청지기관을 살펴보고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비결도 배우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강둘자성도님을 통해서 아들 김기준성도님이 대만으로 단기선교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년에 한번있는 휴가를 받아서 선교를 갔으니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이제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신혼부부인데 신부를 두고 혼자서 선교여행을 간 김기준성도님의 믿음입니다. 김기준성도님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신부를 혼자 두고 선교를 떠났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제 심방을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김기준성도님이 태권도 유단자라서 대만에 가서 태권도 시범도 보이고 가르치기도 하고 복음도 전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기준성도님이 선교단의 중심인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휴가를 받아서 대만으로 선교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김상철성도님이 아들 김기준성도에게 전화를 해서 ! 해외 선교도 좋지만 우리 남해세광교회에 와서 봉사좀 해라라고 충고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김상철성도님이 얼마나 우리 남해세광교회를 사랑하는지를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교 하는사람을 가장 기뻐 하십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기뻐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과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머물었는데 때가 되어서 포도원 소출에 대한 세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농부들이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아무것도 주지않고 주인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종을 보냈는데 역시 이번에도 농부들이 그 종을 능욕하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하자 포도원 주인이 이번에는 내 아들을 보내보자하고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아들은 상속자니 죽여 버리고 우리가 포도원을 차지하자하고는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화가난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욕심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선 선지자들과 종들을 괴롭히고 학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이 19절에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대 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 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낮에는 주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아침 일찍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 집니다. 먼저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들을때마다 가까이 나아와 귀를 기울여 말씀을 사모하면서 즐겨 들었던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 착하고 선한일만 하신 예수님을 어떻게든지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양과 염소로 갈리우고 한쪽편의 사람들은 천국에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되고 한쪽 편의 사람들은 지옥불에 들어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심파주 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영생과 복락이 주어 지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한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질투를 한 이유는 기존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 관리를 통해서 온갖 기득권과 이권을 챙겨왔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책망과 꾸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무슨 권세로 성전관리자인 우리를 꾸중하고 함부로 그런말을 하느냐?” 라고 따지면서 질문을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역공세에 밀려서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한번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 주시면서 너희가 바로 악한 농부요 내가 바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며 나를 죽인 너히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한 것임을 알게 된 대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면 즉시 회개해야 하는데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됩니다.

 

그들이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무리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작 인간의 언행심사와 모든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만을 두려워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체 하여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라고 증거 합니다.

 

그들은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니을 올무에 걸리게 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선량한 청중으로 위장하여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이 정탐꾼들의 정체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이라고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기들만이 가장 잘 믿는 신앙인으로 자부하는 그룹인데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 가량의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헤롯당은 헤롯 가문이 유대 지역에서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하여 로마 관리들과 교분을 가져온 그룹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헤롯당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배신한 간신배 같은 헤롯당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 하려는 일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은 아주 진실한 분이시고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선생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

 

이 말은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이 질문을 만들면서 드디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절호의 질문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yes 또는 no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라고 대답을 하셨다면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예수는 민족의 반역자다! 매국노다!” 라고 선동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입니다.

 

한편 만약에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에게는 세금을 바쳐서는 안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다면 이것이야 말로 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원했던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당장 로마 당국에 고소하여 예수님을 체포하여 재판을 해서 예수님을 죽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자들은 서기관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과, 위선과, 음모가 그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속셈을 아시고 지혜롭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달라고 하시면서 그 은동전 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형상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저 없이 로마 황제의 형상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티베리우스(Tiberius)가 황제로 즉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화폐인 은동전 데나리온 앞면에는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고 티베리우스 시이저, 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글이 둥그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동전의 뒷면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올림피아의 홀을 쥐고 왼손에는 감람나무 가지를 들고 신들의 보좌에 앉아서 하늘의 평화를 내려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주화는 티베리우스가 지배하는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동전입니다.

 

그래서 이 주화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로마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와 종교적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든 동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이 은동전을 로마황제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로마 당국에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 황제의 것은 가이사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은 절묘한 신적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라고 26절은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그의 예상치 않았던 답변에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 꼬투리를 잡으려던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는데 실패했고 아무말도 못하고 잠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그 후에도 예수님은 사두개인들과 부활논쟁을 하셨고, 율법사들과 율법논쟁을 벌이셨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이 지혜롭게 답변하셔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계교를 다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4)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종교의 천재들과 온갖 토론과 변론을 하셨지만 한번도 지신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지혜와 더불어 신적인 권위로 악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험한 세상을 살아 살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황제의 이름이 들어 있는 데나리온을 사용할 수 밖에 없으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이 말씀은 세금을 바치게 된 책임이 황제의 힘과 영향력을 막지 못한 유대인 지도부, 그리고 그들의 조상에게 있기에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세금고지서를 받을 때 마다 왠지 공연히 공돈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금이 없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절약하고 저축해서 십 수년 만에 힘겹게 집을 한 채 장만했는데 국가가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없었던 재산을 새롭게 얻었다 해서 취득세를 부과합니다. 열심히 저축한 돈도 마찬가지이고 월급을 받을 때에도 소득세를 이미 원천징수 한 후에 월급을 받습니다. 원금에 대한 이자의 경우에도 그에 대한 이자소득세가 이미 공제됩니다.

 

이미 세금을 다 지불한 돈으로 부동산을 샀는데도 다시 취득세를 내야 합니다. 남의 돈을 빌려서 산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세금이 억울하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요즘 컴퓨터의 수요가 많이 늘어나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컴퓨터 판매 광고가 심심찮게 실리고 있습니다. 판매 가격란을 보면 부가 가치세 별도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비자가 그 제품을 구입하려면 판매가격에다가 부가 가치세로 판매가의 10%를 더 지불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판매가가 100만원이면 세금이 10만원이고 200만원이면 20만원의 세금을 더해서 사야 합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이런 세금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탈세의 유혹을 받습니다. 전에 전국의 고속도로 통행료가 일제히 인상되었는데 제1 경인고속도로의 통행료도 기존의 800원에서 1,000원으로 인상이 되었습니다.

 

서울로 출퇴근 하는 인천시민들이, 자기들과 동일한 여건에 있는 분당의 경우를 들어서 자기들도 통행료를 500원으로 내려 주든지 아니면 기존 요금을 고수해 달라는 청원을 하면서 통행료 납부 거부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모호 합니다.

 

지금은 조용하지 전에 TV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KBS를 시청하지 않는데 시청료를 납부하라니 모순입니다. 그러니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첫째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당시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심적으로 로마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고 굴욕의 상징인 공세를 바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세금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데, 하물며 힘의 논리로 로마제국에게 점령을 당해서 그들이 강요하는 세금을 내야 하는 유대인들의 불만은 얼마나 더 많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로마에 세금을 바쳐라!” 라고 말씀 하신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기대하면서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향력은 급속히 식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처음에 말씀 드린대로 당장 반역죄로 로마당국에 체포되어 처형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데나리온 한 개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위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 은전을 거부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싫든 좋든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절묘한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사실 모든 질문이 꼭 흑백논리로 처리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 중 하나 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진위형에 익숙해져서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옳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이 문제를 훌륭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 정부를 인정하셨습니다.

 

후에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한 어조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세상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그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증거했습니다(13:1,2)

 

우리는 세금을 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 세금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는 혜택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만 오면 질퍽질퍽해지는 땅을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포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환히 밝혀주는 가로등도 개인이 세울수는 없습니다.

 

고속도로도 그렇고 집안에 수도시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원지에서부터 물을 끌어들여 정수하고 각 가정까지 보내는 시설은 국가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못합니다이런 모든 일들을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은 우리가 받는 혜택에 비해서 극히 미미한 돈을 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권세자와 국가를 통해서 생활이 편리해지고 치안이 유지되고 악행이 처벌됨으로서 우리가 평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세금을 내는 것은 권장되어야 마땅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37절에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마태복음 1724절로 27절에는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요구한 반 세겔은 성전 유지를 위해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성전세입니다(30:12-16; 대하24:6,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자기를 위하여 거두는 성전세를 거부하실 이유가 있었지만 그 성전세를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납세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17:27)

 

그래서 우리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요구하는 세금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금을 잘 내야 합니다. 탈세의 유혹도 과감히 뿌리쳐야 합니다.

 

지금 제 이름으로 등록한 차가 세대입니다. 제 이름으로 등록된 땅도 천평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매달 건강보험공단에서 날아오는 의료보험료가 15만원이나 됩니다. 그러나 저는 의료 보험료를 내면서 한번도 보험료가 아깝다고 생각한적이 없습니다. 내가 낸 의료 보험료가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 된다면 그것은 좋은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세금을 내야 나라가 유지되고 사회복지를 위한 섬김도 가능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세상 나라보다 더 귀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잠시동안 사는 것입니다. 잠시동안 사는 동안에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50:10-12)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8)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잠시동안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관리하고 사용하다가 천국으로 갈 뿐이지 소유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땅을 맡긴후에 세를 요구한 것은 농부가 땅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를 드린다는 것은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정부에 소득세를 내는 것과 같이 성도는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할 책임과 의무의 헌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요 우리가 세상에서 재물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후에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27:30)

 

십일조는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띠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국가에 낼 세금을 내지 않고 포탈하는 사람을 세도(稅盜) 세금도적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않는 사람도 도적이라고 증거 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3:8)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도적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제가 헌금설교를 잘 안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청년때 헌금 내라고 강요하는 목사님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헌금설교를 강요하는 목사만 보면 저질목사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금에 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종종 재물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간증은 해도 십일조를 드려라! 헌금을 드려라!” 라는 설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저는 오늘날까지 평생 목회를 하는 동안에 설교 시간에 헌금을 내라고 강요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3년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3년전에 허주 목사님께서 우리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하실 때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않는 목사는 가짜 목사요 삯꾼 목사다라고 강하게 비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물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십일조와 헌물인데 그 축복의 비결을 가르치지 않는 목사는 엉터리 목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설교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그게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방금 말씀 드린대로 청년때 헌금설교에 상처를 받아서 나는 목사가 되면 절대로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않겠다!” 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 후에 정말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않고 목회를 했습니다.

 

다만 록펠러나 빌 게이츠 또는 워너메이커나 김성수회장처럼 큰 복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잘 관리하고 선한일에 사용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신앙간증은 종종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지 인간의 감정으로 삭제 해야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허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 보니까 내가 헌금설교를 강조하지 않았기에 우리 성도들이 여태껏 재물의 축복을 못받은 거구나!” 라는 생각에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십일조를 드려서 복받은 사람들의 간증은 소개 했지만 십일조를 안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십일조를 하세요!” 라고 강조한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성도에게 쏟아부을곳이 없도록 축복을 부어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런 헌금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주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때 얼마나 강하게 책망을 하셨는지 십일조를 가르치지 않고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는 삯꾼목사요 가짜 목사입니다라고 비판하는 말씀을 듣고서 이제보니 내가 축복받는 비결을 유기하면서 가르치지 않은 삯꾼목사구나!”라는 생각에 그 당시에 제가 크게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은 반드시 물질의 축복을 받는 비결인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설교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헌금내라고 이런설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건축을 앞두고 헌금 하라고 이런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지난주에 수련회를 마친후에 은혜가 충만해서 수요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도 기쁨으로 은혜스러운 말씀을 준비하자하고 설교준비를 시작 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이 본문이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헌금과 관련이 있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부담감이 생기면서 이 설교는 성도들에게도 부담을 주는 설교인데 하나님께서 왜 이 본문이 생각나게 하시지?”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중에 이건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 것이니까 믿음으로 설교를 해야 겠구나라는 생각에 이 본문으로 설교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 하면서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라고 해서 부담스러운 설교는 안하고 듣기 좋은 설교만 한다면 나도 선지자의 사명을 외면한 삭꾼 목사와 다름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기도제목에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재물의 축복을 받으려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야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3:10)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십일조를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3:8-9)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 부어 주셔서 넘치도록 재물의 복을 주시지만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 않는 나라와 백성들에게는 저주가 임한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각종 재앙과 깜부기와 우박과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질병과 사고와 천재지변의 재앙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게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농사를 지어서 농산물을 거두게 하시고 또 직장에서 받는 월급이나 사업이나 자녀들의 용돈이나 어떤 수입이 있던지 그 수입에 대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내가 복을 받고 살게 하기 위해서 그런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띠어먹는 도둑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수입이든지 내가 번 돈과 농산물의 십일조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고 재앙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 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잘 통과해서 엄청난 축복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분의 구는 네가 사용하고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분의 일을 드리면 엄청난 축복으로 되돌려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대통령이 개인에게 공약을 하면 반드시 이루어 줍니다. 하물며 십일조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공약인데 그 공약이 안 이루어 지겠습니까?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고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쏟아부어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면 사고와 재앙을 막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내 생명을 지켜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시고 자식들을 지켜 주시고 범사에 재물의 복을 넘치도록 주셔서 나누어 주면서 살고 베풀면서 살고 꾸어주면서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십자가 보혈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에 나의 생사 화복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금생과 내세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먹고 살기도 하고 자식도 기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청지기의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맡겨준 것들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과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의 역할을 감당했던 요셉은 훌륭한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시간과, 재물과, 은사들을 잘 관리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다가 하나님이 쓰시겠다 할 때 언제든지 내어드릴 자세를 가진 사람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삶에는 많은 시험과 유혹이 따라옵니다. 청지기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나태와 교만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없을때에도 주인이 보고있는 듯한 자세로 생활의 성실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부당한 소득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과 뇌물과 각종 비리의 시험 앞에서 주인의 것을 잘 관리하고 유지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함부로 사용하거나 쾌락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양 내멋대로 허랑방탕하게 살면 반드시 쫓겨나서 슬피울며 이를갈게 됩니다.

 

성경은 재물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이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잘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재물을 얻는 것은 본능적으로 열심히 하지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유익을 줍니다.

 

교회 가니까 돈 이야기만 하더라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을 못만났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견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라고 증거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라고 웨슬리목사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를 보면 그사람의 신앙관과 가치관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내 삶과 내 재물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내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폐 일언하고 지금부터라도 온전한 십일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십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나 안주나 시험해 보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성경에서 우리에게 복을 받는지 안받는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신 말씀이 딱 두군데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에 한 번씩 나옵니다. 구약에서 나온 말씀이 바로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하늘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지 안주시는지 시험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군데는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에베소서510절에 보면 라고 증거 합니다. 너희가 한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큰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작년에 김안순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오후에 장을 보러 가는데 몸도 마음도 지치고 일은 생각대로 되지않고 생계는 점점 힘들어지고 모든일이 뒤틀리고 꼬여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그런데 가다 보니까 한 할머니가 보따리 몇 개를 가지고 머리에 이고 들고 땅에도 보따리가 있는데 그 할머니를 도와주고 싶은데 자기가 몸이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 있었기에 도와주고 싶지만 몸이 말을 안들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래도 신앙양심에 지나칠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어디 가시냐고 태워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린후에 그 할머니를 모셔다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더니 나중에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그 할머니가 사천 공단에서 비행기 만드는 회사에서 수십년간 배달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안순집사님집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김안순집사님이 식당을 경영 했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고 지금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가 경영하는 밥집을 인수 인계해 주고 그리고 그 옆의 비행기 만드는 회사까지 소개시켜 주는 바람에 졸지에 김안순집사님이 대박이 났습니다.

 

그동안 사천에서 남해까지 매일 왕복 두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기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도 했지만 피곤하고 지쳐 있는데도 크리스챤의 양심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선한일을 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 하시고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전에 김막순권사님 딸 윤영희성도님이 우리 사모님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모님이 자랑하길래 보니까 진주가 열개 달린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선물해 주셨는데 족히 기백만원의 갑어치가 나가는 선물 이었습니다. 사모님이 고향에 와서 고생한다고 귀한 선물로 위로한 것입니다. 저는 그 선물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윤영희성도님을 위해서 간절히 축복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100배의 축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14억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아낌없이 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성경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이웃을 기쁘게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그 언행심사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언행심사로 준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누리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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