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도를 해주신 강오심권사님에게는 특별한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변함없는 신앙고백입니다. 권사님을 만난지 올해로 10년째 입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시종일관 변함없는 고백으로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은데 대해서 후회가 없이 늘 감사하고 계시고 두번째는 남해 세광교회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고 계시고 세번째는 주의 종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선대 하시고 좋아 하시는 마음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성도들에게 상처를 줄때가 있고 실망스런 모습을 보일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오심권사님은 무슨일이 생겨도 늘 주의 종을 칭찬하고 선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달 심방을 못가거나 주의 종이 오랜 시간동안 관심을 가져드리지 못해도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시고 주의 종에 대해서 늘 선한 평가와 칭찬으로 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도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행하시는 강오심권사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어제 제 집사람의 위장과 대장 내시경검사를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의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내시경실에서 원장님 방으로 사진이 전송이 안되는 바람에 원장님이 저희들을 불러서 어머니권사님과 제가 직접 내시경실에 들어가서 검사하는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의 내장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훤히 들여다 볼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 신기 했습니다. 내시경으로 몸속을 구석 구석 샅샅이 살펴서 이상이 생긴 부분을 찾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대장에서 2미리정도 되는 아주 작은 동종 세 개를 떼어 내셨습니다.
검사가 다 끝난후에 앞으로 5년 동안은 아무 염려 말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주에서 내시경이 끝난후에 밀양으로 가서 김명옥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조옥환집사님과 김명옥집사님께서 드럼셋트를 저희 교회에 선물해 주셨기에 드럼셋트를 가지러 밀양으로 간 것입니다.
제가 밀양은 평생에 처음 가 보았습니다. 밀양은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 였습니다. 시내를 벗어나서 시외로 해서 집사님 집을 찾아 갔는데 김명옥집사님댁에 가서 보니까 집사님댁은 밀양 시내에서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있었는데 조용하고 넓은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계셨습니다.
도착해서 보니까 집사님 내외분이 드럼셋트를 밖에 내 놓으셨는데 그 드럼은 교회에서 사용하던 드럼인데 집사님 내외분이 구입해서 집에서 사용 해 왔다고 합니다.
저도 전에 교회에서 기타반을 운영하면서 드럼도 가르치고 싶어서 교회에 비치 하려고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 보았습니다. 중고 드럼 풀셋이 중국산은 80만원정도에 살 수 있고 좋은 것은 중고라도 200만원에서 500만원대까지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애지중지 아끼던 드럼을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기증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남해세광교회에 헌물해 주신 류금련권사님 사위 조옥환집사님과 권사님 딸 김명옥집사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조옥환집사님과 김명옥집사님은 추석때 드럼셋트를 차에 싣고 오시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금번 추석에도 집사님 가족이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가져와서 특송을 하기로 했는데 제 생각에 좁은 차안에 드럼셋트까지 싣고 오려면 아무래도 무리겠다 싶어서 우리가 진주에 가는길에 밀양까지 가서 가져오기로 하고 다녀온 것입니다.
집사님 내외분이 이사를 한 후에 교회를 옮기셨는데 교회를 옮긴지 얼마 못되어서 담임목사님께서 김명옥집사님을 교회의 얼굴인 안내자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에서 안내를 맡은분은 그 교회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권사님이나 집사님이 안내를 맡게 됩니다. 교회의 첫 인상과 교회의 이미지가 안내하시는 분에게 달려 있기에 목사님들이 교회의 안내봉사는, 신앙과, 인격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밝은 미소를 겸비한 분을 추천해서 안내자로 세웁니다.
그런데 김명옥집사님이 그 교회에 가자마자 안내봉사자로 선정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집사님의 인격과 신앙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저희가 드럼을 가지러 갔을때에도 김명옥집사님은 시종일관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저희를 대접해 주시고 섬겨 주시는지 드럼셋트를 싣고 다과를 대접받은 후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의 어머니권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 저 집사님은 어쩌면 저렇게 친절하고 상냥한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걸 보니까 목사님이 안내로 세울만 하구나!”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명옥집사님이 자기 텃밭에서 땃다고 하면서 산딸기 한상자를 주셨습니다. 두 상자를 보여 주시면서 추석때 어머니 드린다고 한상자를 넣어놓고 나머지 한상자를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집사님은 저희에게도 산딸기를 갈아서 우유에 타 주셨습니다. 집사님이 일터에서 일을 하다말고 잠시 외출을 나오셔서 저희들을 맞이해 주셨는데 마음이 바쁠텐데도 지극정성으로 음료를 준비해 주시고 산딸기 선물까지 주시면서 선대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집사님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두 딸이 다 착하고 성실하게 잘 자라서 큰 딸 미진양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해외 영업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해외 영업부에서 일을 하면서 스스로 공부를 더해야 겠다는 생각에 지난달에 직장을 그만두고 올 12월달에 영국 옆의 아일랜드로 유학을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첫째딸은 학비도 부모님께 전혀 도움을 받지않고 그동안 자기가 직장을 다니면서 벌어놓은 돈으로 유학을 간다고 합니다. 참 훌륭한 딸입니다.
그리고 둘째딸 유진양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부모님을 생각해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대학을 접고 국립대학인 부산대학교로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두 딸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해서 속한 번 안썩이고 잘 커주었다고 하면서 김명옥집사님이 자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면서 저는 “이 가정에서 누리는 모든 축복의 시작은 류금련권사님의 기도로부터 시작된 축복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열심히 기도를 한 분들의 기도가 3대째에 가장 큰 결실과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3대들이 이렇게 잘되는 축복을 받은 것은 바로 류금련권사님의 기도가 열매를 맺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류금련권사님의 자녀들과 손주 손녀들은 하나같이 믿음이 좋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남해 세광교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 가정이 바로 류금련권사님의 가정입니다. 류이제 마지막 기도제목인 아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성실한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류금련권사님은 아홉 살에 두 눈이 멀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평생을 소경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금련권사님은 오직 하나님과 동행 하면서 살아 오셨습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지팡이 하나를 의지해서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살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권사님의 중심을 보시고 모든 자녀들에게 믿음의 복을 주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시는지를 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권사님 가정과 자녀들에게 큰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의심 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소경이었던 크로스비가 지은 이 찬양이 바로 류금련권사님을 두고 만든 찬양 같습니다.
매년 명절때마다 권사님 자녀들의 가족들의 악기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정말 복받은 가정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들이 이와같이 영육간에 복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증거의 십자가를 지고 고군분투 하다가 순교의 십자가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류금련권사님께서도 앞이 안보는 가운데에서도,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일평생을 자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셨기에 권사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고 교회가 은혜스럽고 나라가 평안하려면 누군가가 자기십자가를 지고 희생을 감수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대통령만 잘하면 나라가 잘 될 텐데” 라고 말을 하는가 하면 “저 인간이 제대로 해야 우리 집안이 잘 될 텐데”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저 사람이 일을 저렇게 하니까 우리 부서가 이렇지?”라고 말을 하면서 다른사람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닳아야 합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남의 책임을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댓가를 지불하는 삶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그러자 화가난 사람이 쇼펜하우어에게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앞도 보지 않고 다니는 거요?”하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는 “내가 누구냐고요? 나도 그걸 생각하느라 앞을 살피지 못해서 당신과 부딪혔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고 행복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하면 항상 자기 잘난척만 하고 남을 무시하고 내멋대로 행동 하다가 패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학자 버나드는 “항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항상 내가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버나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대관령 두매 산골의 작은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새 목사님이 부임을 했는데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에, 예배시간보다 훨씬 일찍 오신 한 할머니집사님이 허리춤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계란 한 개와 감 한 개를 새로 부임하신 젊은 목사님께 꺼내 놓으면서 “목사님 식기전에 드세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집사님이 가져오신 계란을 까 먹으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집사님! 교회까지 오시는데 얼마나 걸리세요?” 그러자 할머니집사님이 숨을 몰아쉬면서 “집에서 교회까지 오는데 산을 두 개나 엄어야 한답니다. 한시간 정도 걸리지요!”
그 순간 젊은 목사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자기는 사택에서 교회까지 일분도 안 걸리는데도 밖에 나오기만 하면 춥다고 귀찮아했는데, 그 연세에 한 시간씩이나 걸어서 교회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숙연해 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목사님은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승합차를 한대 구입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장로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도 “정말 차가 필요한 곳은 도시가 아니라, 바로 이곳입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들 흔쾌히 동조했습니다.
재정이 얼마 안 되는 교회인지라 할부 구입을 계획했는데,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일단 불입금을 내고 월부로 차를 구입했습니다. 차가 생기자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또 차가 생기자 산골 사람들도 차타는 재미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 났습니다.
그런데 차를 산지 한달쯤 후에 서울에 일이 있어서 목사님이 장로님과 같이 그 차로 상경을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각자 친척집에서 자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목사님이 차를 가지고 친척집에서 잠을 잔 후에 다음날 아침에 나와 보니까 차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누군가가 차를 훔쳐간 것입니다.
목사님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 차가 어떤 차인데! 온 교인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차를 잃어버리다니!...” 목사님은 기가 막혔습니다. 아침에 장로님을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간 목사님은 사색이 되어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장로님을 바라보고 머뭇 머뭇 거렸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목사님을 보고서 “무슨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면서 차를 잃어 버렸다고 고백을 한 후에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어휴, 괜찮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차야 다시 사면 되지요! 걱정 마시고 아침식사나 하러 갑시다!”
뜻밖의 위로의 말에 젊은 목사님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왔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목회지에서 만난 장로님의 넒은 아량에 목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속으로 “나도 교회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던지 저 장로님처럼 행동해야 겠구나!”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경찰서에 차량 도난신고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마음이 넓어서 그렇다 치고 교인들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이제 버스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서 수요저녁예배를 마치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게 참담한 심정으로 되어진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못해서 이런일이 생겼습니다!”라고 하면서 젊은 목사님이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다 들은후에 한 남자 집사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목사님, 아닙니다! 이건 목사님 잘못이 아니라, 저희 잘못입니다!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서 출타 하시면 저희가 당연히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에 이런일이 생겼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은 우리잘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수십년을 걸어 다녔는데 전처럼 그냥 걸어 다니면 되지 뭐가 걱정입니까? 목사님 염려 마십시요! 우리가 다시 걸어 다니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목사님 괜찮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무사히 돌아 오셨으니 우리는 아무 염려 없습니다! 차야 나중에 다시 사면 됩니다!” 하면서 모두들 염려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종일 걱정과 근심어린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 왔다가 교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좋은 교회, 이렇게 좋은 교인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이런 좋은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에서 차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차량도적이 잡힌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큰 불화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장로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교인들이 너나 할것없이 “이 모든 것은 제 책임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를 구했기에 교회의 생명인 화평이 유지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차를 다시 찾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교회가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어도 흔들리지 않고 화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장로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목사님과 모든 성도들이 하나같이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내 십자가를 지려고 애썼기 때문에 큰 시험을 면하고 차까지 도로 찾게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혹독하게 꾸중하시고 책망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혹독하게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하는 예수님을 베드로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결사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베드로가 한가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고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제자들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했던 문제 였습니다. 당시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이 당하셔야만 했던 메시아의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기에 그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도 십자가는 수치와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 처형은 아주 극악한 정치범에게 내리는 로마 형법 최후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십자가가 극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이었기에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수도 없었고 이해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붙잡혀 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다뇨?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면서 말린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는, 엘리야처럼 초능력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 구세주는 주변의 모든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세울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지금은 자기들이 로마의 권세에 눌려서 식민지가 되어서 초라한 신세로 지내고 있지만,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들의 신세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힘있는 메시야 구세주에 대한 희망으로 수백년을 버텨 왔습니다.
이런 정치적 메시야니즘은 단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 되어온 일입니다. 예컨대 히틀러는 1930년대에 독일 사람들의 메시야였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가 1차 세계 대전때 패망하여 주눅이 들어 있는 독일의 기를 살려 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극악한 일을 자행했어도 아무도 말리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도 역시 이런 메시야니즘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도 그런 위대한 정치가들을 기대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누군가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대한민국을 일등 국가로 끌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기업가 CEO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우리도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기업가를 대통령으로 뽑기도 하고,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 성공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우리도 성공할 거라고 믿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판사출신의 법조인을 대통령으로 뽑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당시에 강력한 정치적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베드로가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라고 하면서 결사적으로 말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가야할 길을 막아서면서 안된다고 말리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시면서 크게 책망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사람의 길을 막아서는 사람은 사탄마귀입니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교회에서 있었던 차량 도난사고 사건도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책임지고 물러나십시오”라고 하면서 정죄와 비판으로 끝냈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시험에 들고 교회는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장로님은 차를 잃어버린 목사님을 쫓아 냈을 것이고, 목사님은 평생 장로님을 미워하면서 목회를 했을 것이고, 성도들은 목사를 불신하고 장로님도 불신하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정죄 하는 마음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첫 단추를 잘 끼었기에, 그 교회는 은혜를 회복하고 더욱 성령이 충만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인류 구원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 깊은 뜻을 몰랐기에 “그러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면서 만류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만류는 베드로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 일 수가 있느냐는 생각들이 모두의 생각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 되셨을 때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에 포함된 많은 사람들도 이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다! 아니다!” 하면서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메시야 구세주의 십자가 고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 장사는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바다를 건너서 광야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롭게 다가온 광야의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로 돌변 했는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실 물과 먹을 양식, 그리고 입맛을 당겨주는 가마솥의 고기가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이끌어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애굽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원망 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광야의 고난 앞에서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한 초기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메시야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고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이 “나는 잡혀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가 반대하자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23절)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단순히 베드로만을 향한 게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한 책망이었습니다. 메시야 구세주의 고난을 거부하는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이요 사탄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메시아의 고난을 부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야 승리주의에 매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승리만을 모든 삶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승리를 거둬야 하고, 자신들에게도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오늘날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도 가지고 있는 승리주의 정신 일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는 복음 자체요 만왕의 왕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신앙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메시야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바울사도가 정확하게 증거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메시야면 실제로 인류를 구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사람을 구출하러 온 사람이 갑자기 사고로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을 구원자로 인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죽어야만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은 죽으면 안된다고 결사적으로 말렸습니다. 그래서 조금전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잘해서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혹독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은 잘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고백을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로 26절에서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일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25절) 그러니까 고난을 원치않고 죽지 않고 내 살길만 찾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권세와 명예와 재물을 쌓는 길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온 천하”를 얻는 일과 동일한 일입니다.(26절)
이것은 아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일입니다. 돈과 부귀영화가 있어야 교육도 잘 받고 의료혜택도 잘 받고 세상 만사가 형통합니다. 돈만 많다면 무상급식뿐이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까지 모든일을 다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얻는 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죽어라고 사람의 일만 하는 사람은 결국 목숨을 잃게되고, 죽어라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 절대화, 즉 자기 숭배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산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게 됩니다.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인자는 종말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산 사람들이 영원한 축복의 생명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갖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먼 훗날에 천국에서 주어질 축복 보다는, 지금 오늘 잘먹고 잘살려는 생각으로 가득찬 존재입니다. 종말이나 천국은 먼 훗날의 일이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신앙관과 종말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참된 생명과 참된 축복은 살아서도 누릴수 있지만 진짜 축복은 천국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믿으셨기에 젊은 나이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후에 비로소 이와같은 하나님의 뜻을 깨닳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나 죽으나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연결의 선을 물리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지만 천국이 실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는 순간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지금과 10년 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오늘의 내가 10년 전의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나의 실존이 10년 전의 나의 실존에 연결되어 있듯이 장래에 우리가 들어갈 천국도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정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다시 부활해서 신천신지인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자식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내 생명을 잃게 되는일이 생겨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 천하를 얻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천국을 얻었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 값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없지만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댓가가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은혜로운 교회나,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댓가를 지불했기에 그런 행복과 은혜가 누려지는 것입니다. 그 댓가란 땀과 눈물과 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을 때 은혜로운 가정과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감으로 충만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바울은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될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된 자신의 모습은 죄인중의 괴수요, 배설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에는 자기만이 의롭고, 자기만이 지혜로운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로운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 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깨닫고 보니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구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세계 선교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첫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사울은 큰자 라는 뜻이고 두 번째 이름은 바울인데 바울은 작은자 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비로소 작은자로 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작은자가 된 바울은 그 후에 예수님께서 큰자로 만들어 주셔서 예수님 다음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깨달았을 때,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분명히 깨달은 사람은 나를 살리신 주님의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 가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재능을 주셨는지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셨다는 깨닳음으로 열심히 봉사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말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한 덩어리를 이루는 말입니다.
우리가 댓가를 치르려면 먼저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를 앞세우는 이기주의와 내 주장만 고집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댓가를 치르는 삶입니다.
곽선희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자기 교회의 한 장로님의 딸이 시집을 갔는데 너무나 힘들어서 이혼을 결심 했습니다. 그녀는 고집 세고, 술을 잘 마시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권위적인 남편 때문에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목사님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부모님도 자기에 대해서 하는 말이, 큰 교회의 장로님 딸이라고 해서 기대를 가지고 맞아 들였는데, 이 며느리가 자기집에 들어 온 후에 집안이 생지옥이 되었다고 고백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부모가 하는 말이 “장로딸 며느리가 시부모를 우습게 여기고 강남의 50평 아파트를 사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가 하면 자기 아들에게 이때까지 그런 돈도 못 모으고 뭐했어?”라고 하면서 따지고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 시부모도 점점 화가 난다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화가 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향해서 욕을 하는가 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참다못해 며느리의 뺨을 때리는 사건까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서로 사돈끼리 만나서 이혼을 시키려고 상의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벌어 졌습니다. 이목사님께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기도를 해 보라고 권면을 드렸는데 이 장로님의 딸이 어느날 마음을 추스르고 성경을 읽는데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기도를 시작 했는데 기도를 하다보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으로 살아왔고, 믿음 없는 시댁의 모든 가족들은 다 저주받을 죄인으로 여기면서 지낸 것이 자기의 교만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그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남편에게도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미안해 하면서 남편이 점점 변하게 시작했고 자기가 변해서 잘 섬기니까 시부모도 변해서 드디어 가정이 천국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다른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변화됩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나의 못난 모습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나의 못난 모습을 보면서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님이 떠난 사람은, 매사에 나는 의인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못난 사람으로 보여서 정죄하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을 사모하며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멸시하는 마음은 영혼의 암 덩어리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미워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니라 저주가 임하여 광야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나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타인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미워하고 멸시할 때 나에게 저주가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보너 “나야 말로 거친 십자가구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든게 아니라 나 때문에 나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도 힘든거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할 때, 비로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내 십자가를 지고 겸손하게 엎드려 회개하고 주님이 주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나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밝아지는 축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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