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배 시간에 플룻 연주로 찬양을 해주신 이성순장로님과 고경실권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고경실권사님은 제가 청소년 시절부터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죽마지우 친구입니다. 고경실권사님께서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시집을 가셨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이신 이성순장로님은 당시에 KBS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직원 이셨습니다. 방송국에서 은퇴하신 후에는 사회복지법인 한국 중앙 복지개발원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요양원도 운영 하시고 사회복지를 위해서 헌신하고 계십니다.
장로님은 서대문 성결교회에서 수석장로님으로 시무하고 계시고 슬하에 두 아들을 두셨는데 두 아드님도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사회복지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고경실권사님과 며느리 김지민집사님이 저희 교회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김지민집사님은 임신중 이었는데 금번에 복중의 아기를 순산해서 애린이를 건강한 아기로 잘 키워서 데리고 오셨습니다.
작년에 김지민집사님께서 오셨을때, 남편 이상헌집사님이 주셨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헌금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금번에도 이상헌집사님과 김지민집사님께서 어제 저에게 100만원을 주셨습니다.
장로님을 비롯해서 가족분들이, 모처럼 휴가를 받아서 갈곳이 많고 오라는 곳도 많을텐데, 갓난아이를 데리고 그리고 악기까지 준비해서 우리 남해 세광교회를 찾아 오셔서 예배에 동참해 주시고 하나님께 귀한 특송까지 올려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 섬김과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두분이 플롯연주로 찬양을 드리는데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다시한번 이 자리를 빌어서 장로님과 권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귀한 예물로 섬겨주신 큰아들 이상헌집사님과 며느리 김지민집사님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고경실권사님의 둘째 아드님이신 이상협집사님도 매년 연말마다 저희 교회에 귀한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자동차세를 비롯해서 자동차 보험료등 많은 지출 때문에 큰 부담이 되곤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이상협집사님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저희 교회를 섬기게 해 주셔서 그 은혜를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경실권사님께서 수 년 전에 둘째 아들인 이상협집사님에게 세 군데의 교회를 소개 하면서, “네가 마음이 가는곳에 선교헌금을 하도록 해라!” 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협집사님이, 어머니권사님이 소개한 세 교회 중에서 저희 남해 세광교회를 선택 했다고 합니다.
이상협집사님은 저희 남해 세광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지도 못하고, 저도 이상협집사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협집사님께서 저희 남해세광교회를 선택해서 매년 연말마다 귀한 사랑으로 저희 교회를 섬겨주셔서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오늘 저희교회에 오신 이상헌집사님 부부도 충청도에 있는 가난한 시골교회를 돕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시는 이성순장로님과 고경실권사님, 그리고 자녀분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제 김연아집사님의 큰아들 정석훈집사님과 며느리 방영화집사님이 오셨습니다. 지난주에 둘째 아드님께서 자녀들을 데리고 다녀 가셨는데 이번에는 큰아드님께서 아버님 산소에 벌초를 하기 위해서 천리 먼길을 달려 오셨습니다.
집사님은 오늘 아침 일찍 벌초를 하시고 주일예배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정석훈집사님과 방영화집사님께서 극상품 포도 두 상자를 사 오셨습니다. 두분 집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우리 시대에 유명했던 엘비스 프레슬리 라는 가수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요 영화배우입니다. 음반만 6억장이 팔려 나갔습니다. 최하로 5불씩만 잡아도 30억불, 3조원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입니다. 영화에도 서른 세편에 출연을 했는데 그 수입만도 3억불, 3000억원을 벌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 리가 한 번 방송에 나가서 공연을 하면 50개 나라가 동시에 공연을 중계해서 수십억의 세계 사람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엘비스 프레슬리도 1977년에 42세로 7개월 동안 마약에 빠진채로 진통제만 먹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온 세계를 다 가진것 같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러나 참된 평안과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마약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릴린 몬로는 여자중에 최고의 영광을 누린 여인입니다. 수천만원 짜리 보석을 수백개를 가지고 있었고 수백만원이나 하는 값비싼 옷들이 수백벌이 넘었습니다. 당시에 세계를 주름잡던 케네디 대통령도 그녀에게 반해서 자기 생일날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서 생일파티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영국의 여왕도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녀를 초대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로 그녀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우상 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모든 남성들과 여성들을 매료시킨 그녀 역시 인생이 너무나 외롭고 허무해서, 서른 여덟살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 집니까? 세상이 주는 행복은, 걷으로는 아무리 멋져 보이고 그럴듯해 보여도, 얼마 못가서 실증이 나고 권태가 찾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영국 왕실에 시집간 다이애나 왕비가 거기서 뛰쳐 나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만이라도 왕궁을 구경하고 싶어서 왕궁 근처에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왕실을 부러워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왕실 안이 지긋지긋하고 싫어서 왕궁을 버렸습니다.
그녀는 남편 찰스도 싫고, 아들도 싫고, 딸도 싫고, 부귀영화가 있는 왕궁도 싫어서 결국 왕궁을 버리고 뛰쳐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동안의 스트레스라도 풀어야겠다는 듯이 이남자 저남자를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파리의 백화점 사장하고 눈이 맞아서 파리에서 둘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잡지사 기자들이 알고 쫓아 오니까 차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결국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모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가졌고 돈도 가졌고 인기도 가졌고 빼어난 외모와 만인의 부러움을 살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가졌지만 그러나 한가지를 갖지 못해서 인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기에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삯인 사망을 열매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연예인도 못되고 돈도 없고 가진것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시골 구석박지에서 평범하게 살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밤낮 교회에 모여서 궁상맞게 예배만 드리면서 살아가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처럼 보일지 몰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들입니다.
사람이 누리는 행복중에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입니다. 한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럽고 불안하니까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민을 갔는데, 그곳이 캐나다 였습니다. 그러나 캐나다는 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사람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감시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정부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일거수 일투족 내가 하는 모든일과 돈쓰는 것 까지 정부가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내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얼마를 썼는지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 추적하여 훤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보내는 돈이 얼마가 통장으로 들어 오는지도 다 압니다. 얼마를 밖으로 보내는 지도 다 압니다. 심지어 캐나다에서는 자기 나라로 이민을 오면, 이민 오기 전에 살던 나라에 두고 온 재산까지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신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살던 나라에 두고온 재산에 까지 세금을 물리는 나라가 캐나다입니다.
그래서 캐나다로 이민간 분들이 뒤늦게 다들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민을 왔는데 오히려 철저하게 감시를 당하고 나라에서 자기 안방까지 휜히 다 들여다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평안하고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안전한 곳은 오직 하나님 품 밖에 없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주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길 때 그곳이 가장 안전한 포구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생명과 내 재산과 내 가정과 내 인생의 모든 삶을 지켜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 했으면 반드시 가져야할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듭난 신앙입니다.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영국의 신학자요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부흥집회를 다니면서 3,000번 이상이나 “거듭나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어느날 죠지 휫필드 목사님이 뜨거운 열정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이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 청년은 휫필드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자원 비서를 하고 싶습니다!”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하게!”하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죠지 휫필드 목사님이 집회하는 곳마다, 목사님의 가방을 들고 같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똑같은 설교만 합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거듭나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은 드디어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왔는데 목사님에게 “목사님! 그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지금까지 제가 몇 번이나 들은 줄 아세요? 무려 70번이나 들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언제나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죠지 휫필드 목사님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는 자네가 거듭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다시한번 요한복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당시에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니고데모가 답답한 마음을 가눌길이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워낙 높은 신분이었기에, 그리고 당시에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계셨기에, 그는 낮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씀 이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거듭나야 할 대상자는 주로 “저 뒷골목에서 어둠의 인생을 살아온 조폭이나, 사기꾼, 또는 창녀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거듭나야 할 대상 이라고” 생각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평생 남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거듭난다는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명제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높은 도덕성을 가진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야 한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3장 10절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요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회의 정신적 기둥같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같이 흠잡을데 없는 그에게 “너는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거듭난다”라는 말입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부패할 때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거듭나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재계가 부패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재벌들이 거듭나야 한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냉장고나 자동차를 광고할 때도 “거듭난 냉장고! 거듭난 자동차!”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단어가 하도 보편화 되다 보니까 “거듭난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거듭난다”라는 말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난다”라는 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새로워져야 한다!, 개혁되어야 한다!, 혹은 뜯어 고쳐야 한다!”라는 뜻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하신 예수님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거듭난다”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거듭 난다”라는 말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born from above)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전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 가는 것이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거듭남의 중요성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7절에,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요 하늘나라에도 들어갈수 없다” 라고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4절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유대인의 지도자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심오한 의미를 통달한 성경박사 치고는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회개를 의미 합니다. 즉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회개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거는 회개와 겸손입니다. 회개와 겸손은 성령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인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인정과 칭찬을 받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왕에 예수를 믿었으면 거듭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온갖 좋은 축복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에 보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라고 증거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듭나게 됩니다.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거듭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밭에,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떨어져서 열매를 맺을 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Norway)는 20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문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구 비례 당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가 노르웨이 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농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스무 살 청년이었던 “한스 넬슨 허그”(Hans Nielson Hauge)는 어느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날 한 장로님이 그에게 성경을 건네주면서 “이것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네 한번 읽어 보게” 하고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1700년전에 어거스틴에게 일어났던 기적적인 변화가 그에게도 일어 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3세기에 유명한 신학자요, 철학자입니다. 그는 총명한 머리에 수사학과 웅변술에도 아주 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지 많은 여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기가 높다 보니까 자연히 그는 생활이 문란해 졌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계신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가 거듭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그에게 큰 기적이 벌어집니다.
30세에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그가 하루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어라!”라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정원의 탁자에는 집 주인이 읽던 성경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성경을 펼쳐서 읽었습니다. 그가 읽은 성경이 바로 그 유명한 로마서 13장 12절로 14절 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이상한 기운이 그를 뒤덮었고 그의 가슴은 뜨거워 졌습니다.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흘렀고 죄와 불신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이 밀려 왔습니다. 그 사건후에 그는 거듭나서 기독교의 신학을 올바로 정립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500년 후에 그와 똑같은 사건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났습니다. 허그는 성경을 읽다가 거듭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거듭난 후에 모든 죄를 청산하고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 카톨릭국가였던 노르웨이는 복음을 전하는 그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인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성령의 불길이 점점 번져서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것을 노르웨이의 “허그 부흥”(Hauge Revival)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성경지식만 가득했지 이런 거듭남의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 거냐고 물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나름대로 잘 살았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누릴 만큼 많이 누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도 하나님을 알만큼은 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해결되지 않는 갈급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왔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 왔지만 왠지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요즘 제주 고검장의 음란행위 사건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따기인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검사가 되고 검사 장 까지 되었는데 길에 나가서 자기 성기를 내놓고 음란행위를 하고 다녔으니 이게 웬일 입니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사탄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추한 동물처럼 전락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암 부스가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 까지는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듭나고 나서 비로소 기독교가 여섯가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오늘날 기독교는 말씀과 성령을 외면하는 종교로 전락해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세상에 교회가 많지만 교회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셋째 모두가 축복은 원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넷째 거듭남이 없기에 구원받는 사람도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다섯째 평생 믿어도 거듭나지 못했기에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많다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반세기 후에 빌리그래함 목사님도 그와 똑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 했고 거듭나지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성도는 세속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도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요즘 학교는 많은 데 교육이 없다. 선생은 많은 데 스승이 없다. 학생은 많은 데 제자가 없다. 집은 많은 데 가정이 없다. 교인은 많은 데 성도가 없다. 목사는 많은 데 참 목자가 없다”
모두 가 같은 지적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없기에 문제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3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거듭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개종했다고 해서 거듭난 것도 아닙니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바꾸거나 천도교를 믿다가 기독교를 믿었다고 해서 거듭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거듭남의 길에 접어든 것이지 거듭남 자체를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캐나다 토론토의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말하기를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거나 다른 종교를 믿다가 예수를 믿어서 개종을 했어도 거듭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고도 거듭나지 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거듭난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삶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었을 때 그런 상태를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한마디로 새생명을 받았기에 신령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세상 죄를 멀리하고 세상 쾌락도 멀리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1장 12절로 13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새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즉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요한일서3장 9절로 11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3장9-11)
한 목사님이 광주에 있는 교회에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 하는데 그 교회의 집사님 댁에서 머무셨습니다. 부부가 집사였는데 남자 집사님은 바쁘다는 핑계로 집회에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나를 이 집에서 자게 하면서 집사님이 집회에 빠지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요!” 했더니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은혜를 받으면 안 됩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저는 사업을 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다보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지 좋은 말로 해서는 돈을 안 줍니다. 그래서 돈을 받으려면 쌍소리도 해야 하고 때로는 깡패짓도 좀 해야만 돈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욕도 할 수 없고 깡패짓을 못하니까 돈을 받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사업을 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님 집회에 참석하면 틀림없이 은혜를 받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못가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거듭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거듭나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우리가 거듭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수천번 예배를 드려도 목사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따지면서 들으면 죽을때까지 거듭나지 못합니다 누가 설교를 하던지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거듭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저는 장로님의 간증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합니다. 2000년동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할 때 거듭나게 됩니다. 밤을 새가면서 자기의 죄를 통회자복 할 때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거듭나려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교회에 친구 하나가 일찍이 은혜를 받고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무척 부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에게도 방언의 은사를 주세요” 하고 많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사모했더니 하나님께서 어느날 성령강림과 함께 방언을 체험하게 해 주셨고 그때부터 제 삶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이어서 거듭나는 은혜는 예배중에 임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회개할 때 거듭남의 은혜가 임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까지 불사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게 됩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대형 콜롯세움에 모여서 격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다가 죽거나 사람과 사자 또는 황소와 대결 시켜서 잔인하게 싸우다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동안 진행 되어온 로마의 격투 경기가 어느날 갑자기 금지가 되었습니다. 격투 경기를 중단시킨 사람은 오노리우스 황제입니다.
어느날 콜롯세움에서 격투 경기가 벌어졌는데 이제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기 직전에 황제와 모든 사람들이 흥분과 긴장속에 검투사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경기장 한 복판으로 달려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검투사도 아니었고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시리아 출신의 “텔레마크스”라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경기장 한 복판에 서서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런 잔인한 경기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인간의 생명을 구경거리로 즐기는 악한 전통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때 로마 병사들이 쏜살같이 달려나와서 그를 체포 했습니다. 오노리우스 황제는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려서 즉각적인 처형을 지시 했습니다. 텔레마크스는 군병들의 창에 찔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다시한번 “이런 잔인한 경기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인간의 생명을 구경거리로 즐기는 악한 전통은 중단되어야 합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친후에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노리우스 황제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잔인한 경기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인간의 생명을 구경거리로 즐기는 악한 전통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만그래서 깜짝 놀라서 잠이 깬 오노리우스 황제는 주위를 살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이 들만 하면 또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잠을 한숨도 못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노리우스 황제는 낮이고 밤이고 눕기만 하면 “텔레마크스”가 외친 말이 자기의 궛전을 때렸는 바람에 3일동안이나 잠을 한숨도 못자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잠을 못자고 괴로워하던 오노리우스황제는 급기야 결단을 내리고 공포를 했습니다. “로마는 격투 경기를 중지한다!”
그래서 AD405년에 400년동안 내려오던 살인 격투기가 중단 되었습니다. 텔레마크스의 간절한 외침은 비록 자기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그의 순교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외치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호소는 세상의 구원을 가져왔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평화를 얻는 복음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서 쩔쩔매면서 당황 했습니다. 그도 선생이요, 성경을 알만큼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책망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예수님의 훈계가 싫지가 않았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으면서 마음이 녹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을 믿었지만 제대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믿기 힘든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단단했습니다. 자기들의 테두리에서 한발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자기들과 다르면 누구라도 짓밟고 법으로 통제하고 죽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니고데모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은혜가 임하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성령의 바람이 니고데모의 모든 완고한 사상을 부수고,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 은혜의 바람을 체험한 뒤 그의 닫혔던 마음이 열리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은 놀랍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그는 밤에 찾아올 만큼 자신을 숨기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젠 숨기지 않고 자기의 믿음을 온 천하에 드러냅니다. 은혜의 바람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2번 더 언급됩니다. 요한복음7장에 보면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부당한 판결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니고데모가 강력하게 반대 하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7:50-52) 밤에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요한복음 3장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숨기지 않았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고,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옹호함으로 인해서 받을 불이익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은혜의 성령의 바람이 그에게 불어왔기에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19장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때는 주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해서 죽으신 이후입니다. 모든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주님의 시신을 처리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때에 다시 당당하게 나서서 예수님의 장례를 주선해서 장례를 치른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잘 처리한 후에 장사를 지냈습니다(19:39-40)
당시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큰 위기가 닥친 상황입니다. 이젠 누구라도 예수님 편에 서면 역적이 되고,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두려워서 다 도망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절체 절명의 순간에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젠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옳은 일 앞에 당당하고,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는 달라졌습니다. 은혜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바꾸어 줍니다. 그의 변화된 믿음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믿음으로 남아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말씀과 성령의 바람이 불어 와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나야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포도나무 > 포도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4년8월31일주일낮 마태복음16장21-28 천하보다 귀한생명 (0) | 2014.09.01 |
---|---|
[스크랩] 2014년8월27일 수요저녁 요3장1-8절 성령으로 난사람 거듭난사람 두번째 설교 (0) | 2014.08.27 |
[스크랩] 2014년 8월17일 주일풍경및 한주동안 있었던 일들... (0) | 2014.08.19 |
[스크랩] 2014년8월17일 주일낮 요한복음3장1-3 거듭나지 아니하면 땡탈락 (0) | 2014.08.19 |
[스크랩] 2014년8월3일눅 20장9-18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 (0) | 201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