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5장16절로19절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한마디로 행복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도 많은 성도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감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가 어린 아들형제를 데리고 친구남편이 운영하는 사과농장엘 갔습니다. 친구 남편이 두 아이에게 큰 사과를 하나씩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사과를 받아 들고 아무말도 하지않고 사과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남편이 “이 아이들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좀 가르쳐야 겠구나”싶어서 “얘들아 선물을 받았을때는 뭐라고 말해야지? 다섯 자 있잖아?! 선물 받았을 때 하는말!”
그러자 큰 아들이 “깎아 주세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뭘 이런걸 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부모가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잘못 믿으면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감사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오직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으로만 생각 합니다. 그래서 늘 머릿속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고난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처절하게 기도 하시고 십자가에서 비통하게 돌아 가셨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행복하게 사셨고 즐겁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늘 잔치가 벌어졌고 음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칫집에도 초대를 받으셨고 삭개오의 집에 가서도 잔치를 하셨고 오 천명도 배불리 먹이시고 마리아 집에서도 잔치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바로 전에도 유월전 잔치를 하셨고 요한복음 24장에 보면 부활하신 후에도 잡수셨습니다.
부활하신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기 먹을 것이 없냐고 하시면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도 보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도 예수님의 특징을 소개할 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그들은 증거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셨고 잡수시는 것을 좋아하셨고 늘 즐겁게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는 잔칫 자리에서 인상을 쓰셨겠습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로 만드실 때 침울하고 비통한 표정으로 “이제는 이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갔다 주라”라고 하셨겠습니까?
삭개오의 집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칫자리를 베풀었을 때 예수님이 슬프고 우울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이렇게 말씀 하셨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잔치 집에 가서는 늘 기뻐하셨을 것이고, 삭개오의 집에서도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를 크게 기뻐 하시면서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구원받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기뻐 하시면서 잔칫자리에서 먹고 즐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십자가가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도 늘 잔치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교회마다 교인들 얼굴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을 오래 믿을수록, 그리고 직분자가 될수록 중직자가 될수록 얼굴이 근엄하고 무겁고 어두워 집니다.
신앙연륜이 깊으면 깊을수록 기쁨과 행복과 웃음이 넘쳐야 하는데 얼굴에서 기쁨은 사라지고 근엄하고 위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갈수록 얼굴이 밝아져야 합니다.
요즘 왕지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얼굴이 훤합니다. 갈수록 얼굴이 점점 밝아 집니다. 그래야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천국의 빛과 예수님의 은혜의 빛이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내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할 그 시간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깨닫고 나면 내 십자가를 짊어져도 행복합니다. 고난도 기쁨으로 여겨지는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면서 범사에 감사 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믿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전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제자훈련 받고, 날마다 새벽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원 가서 성령충만하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환상을 보아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 예수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아야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면 세상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며 살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는 삶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기에 날마다 저렇게 행복하게 사냐? 나도 한번 교회 가볼까?” 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밤낮 얼굴을 찌푸리고 근엄한 얼굴로 지내면 “저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얼굴은 왜 저렇게 성난 산돼지 같으냐? 난 교회 안갈란다!” 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김부송권사님처럼 늘 웃고 다니면 사람들이 친근감을 갖게되고 그래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무신론자였지만, 본래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세상에서 유명해 졌습니다. 니체가 그런말을 한 이유는 예수 믿는 부모와 성도들로부터 그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가 된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이유는 예수믿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고 행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단히 심각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생활속에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지만, 예수믿는 우리가 밤낮 지지고 복고 싸우고 불행하면 그 모습을 본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환경이 상황이 어떻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전도가 되니까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면서 살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살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에 연쇄 살인범 유영철 씨가 20여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무고한 여성을 둔기로 때려서 죽이고 사체를 토막내어 불태우기도 하고 비닐로 싸서 땅에 파 묻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증거를 없애려고 손가락의 지문을 도려 내기도 하고 손목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김대두, 지존파, 막가파 사건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에서 가출한 중학생들이 같은 또래 여학생을 9시간이나 구타하여 죽자 토막내어 다리 밑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사건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마귀의 종이 되니까 죽이고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고위층은 권력으로 사람을 무시하고 힘든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함부로 폭언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피터지게 싸웁니다. 잠재해 있던 죄성이 아무것도 아닌엘에 분노로 폭발하여 무자비한 사건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기뻐할 일보다 슬퍼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기쁨과 평안과 만족 보다는 근심과 걱정과 번민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뻐할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면 신실한 신앙을 되찾아야 합니다. 내가 신실한 신앙을 갖게되면 참된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노래방에 가서 유행가를 부르면 즐거움이 있습니다. 반면 예배 때 찬양을 부르면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소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할 때 참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오면 참된 나를 보게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되고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받은 기쁨이 바로 최고의 기쁨입니다.
말레이시아의 카마루딘 이라는 72세의 노인은 53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53번째로 결혼한 상대는 1957년 결혼했다가 이혼한 첫 번째 부인 이었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온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꿀 때에도 사정(事情)보다는 사명(使命)을 따라 바꾸고, 편의(便宜)보다는 대의(大義)를 따라 바꿔야 합니다. 사명과 대의 없이 나 하나 편히 살자고 무작정 바꾸면 인생은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살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태도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현재 나에게 주신 모든것은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좀 더 좋은 것을 원하면서 아쉬워 할때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내 자녀와 내 배우자와 내 상황이 내게 제일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곁눈질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게 주어진 고난과 문제조차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복되게 더 큰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주어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복된 인생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행복의 탑이 튼튼하게 쌓여가는 것입니다.
1993년 7월 23일날, NBA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고속도로에서 2인조 살인강도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마이클 조던은 그해 10월 6일 농구계를 은퇴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이었던 야구선수로 입문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도전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농구에서는 더 도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 새롭게 야구에 도전합니다”
다음해 2월, 그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야구팀과 입단 계약을 하고 그 산하 트리플 A 팀에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큰 공을 가지고 운동을 하다가 작은 공을 치려고 하니까 잘 맞지 않았습니다. 시즌이 시작 하자마자 29타수 무안타 행진을 하다가 결국 더블 A 팀으로 강등되었고, 그해 더블 A 버밍햄에서 올린 성적은 타율 2,02, 홈런 3개, 타점 51점의 초라한 성적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야구를 포기하고 골프 선수로 입문했습니다. 격렬한 농구에 비하면 푸른 초원을 걸으면서 하는 골프는 너무 편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포츠 중에서 가장 큰 농구공으로 큰 구멍에 넣다가 스포츠 중에서 가장 작은 골프공으로 작은 구멍에 넣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넣기가 힘든지, 골프를 계속 하다가는 스트레스로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얼마 후에 골프를 그만 두고 다시 농구 선수로 복귀했습니다. 그때 언론은 “농구의 신이 초라하게 돌아왔다”라고 썼습니다.
우리도 너무 다른일에 곁눈질하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터전에서 내게주신 사명을 위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샘을 파면 사막에서도 샘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척박한 곳에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씨앗을 뿌리고 꽃을 심으면 언젠가는 그곳은 에덴동산이 될날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처지를 불평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형편을 감사하면서 꾸준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 부부가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처음에는 산책을 할 때마다 경치를 감상하느라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그들은 주변의 황홀한 경치를 그냥 지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경치에 익숙해진 그들은 더 이상 경치를 보고 흥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입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돌변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입니다.
감사도 지속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날마다 죽을때까지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정원에 많은 나무들이 심겨져 있는데 모든 나무와 꽃들이 자기 불만에 가득 차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키가 작은 제비꽃은 혼자서 예쁘고 즐겁게 살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제비꽃아, 어째서 너만 그렇게 즐겁게 살아가는거냐?” 그러자 제비꽃은 “임금님! 저를 여기에 심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나는 비록 키도작고 장미처럼 화려하거나 예쁘지는 않지만 이곳에 심어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열심히 꽃을 피워서 임금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살겠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뜻을 헤아린 제비꽃이 임금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부모의 기쁨은 자식에게 달려 있습니다. 부모는 돈버는 재미에 빠져서 기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부모에게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는 신나는 일이 생겼는데 자식이 아프면 기뻐할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기에게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자식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금방 슬픔으로 바뀝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인 우리에게 가슴아픈 일이 생기면 하나님도 가슴아파 하시면서 영향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쁘게 살면 하나님도 기뻐 하시지만 우리가 슬프게 살면 하나님도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면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뭐 대단한 일을 행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기쁘게 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몇 시간 전에 하신 고별설교를 보아도 알수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더욱 기뻐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 11절)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서도 “지금 내가 기쁘니까 너희도 기뻐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 52절에 보면 제자들도 이런 기쁨에 충만했다고 증거 합니다. 선교하면서 고난을 많이 당한 바울도 기쁘게 살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쓴 빌립보서에 보면 기뻐하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 됩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썼기 때문에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차디찬 감옥에 같혀있는 사람이 뭐가 기뻐서 기뻐하라고 강조 합니까? 그런데도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4장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0절에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했다”라고 고백합니다.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항상 기쁘게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기쁘게 살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환난이 닥치고 어려운 일이 생겨서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기쁘게 살기로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나는 무슨일이 벌어져도 무조건 기쁘게 산다!. 하나님이 기뻐하라고 말씀 하셨기에 나는 기쁘게 살겠다!” 이렇게 결정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Best Years of Our Lives)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비롯해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분을 석권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 “레셀” 이라는 청년이 2차 세계 대전 때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그만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잃게 됩니다.
레셀은 영화에서는 폭탄에 맞아서 두팔을 잃었지만 실제로는 열차 사고로 두 팔을 절단한 장애자입니다. 불구가 된 그는 하나님께 이런 원망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슬픔과 절망 속에서 지내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레셀아! 그래도 잃은 것보다 아직 남아있는 것이 더 많지 않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았습니다. 자기에게는 아직도 생명이 있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 아직 나에게는 남아있는 게 더 많아! 용기를 내서 살아야지!”
그래서 그는 의사를 찾아가서 의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는 의수를 끼고 타이프 치는 연습을 시작 했습니다. 타이프를 잘 못치는 사람들은 소위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프를 칩니다. 두 손가락만 이용해서 타이프를 치는 것을 독수리 타법이라고 합니다. 레셀도 의수라서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의 인생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냅니다.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서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예 물론 처음에는 절망했는데 하나님게서 저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더 많지 않느냐? 라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기에 저는 그때부터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저에게 이런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육체적인 장애가 도리어 나에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것이나 상실한 것을 생각하고 절망할게 아니라 아직도 남은것과 가진것들을 감사 하면서 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에는 조건적 감사나 상대적감사 또는 무조건 감사가 있습니다. 조건적 감사는 나에게 주어진 여건이 좋을때만 감사하고 일이 잘될 때에만 감사하는 것이 조건적 감사입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깊은 학문을 탐구했다든지, 많은 물질을 소유했다든지, 다른 사람보다 높은 명예를 소유했다든지 하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온전한 감사는 아닙니다.
셋째는 절대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소유와 상관없이 무조건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시고 공부시켜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모이기에 감사하고, 배우자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감사하는 것이 무조건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강조하는 감사도 무조건적인 감사 즉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기도 좋고 경치가 좋은 남해에서 살고 있으니까 감사하고, 남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까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감사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분이 요일을 가지고 7행시를 지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쁘게 살고,
월요일은 월급 받는 날처럼 기쁘게 살고,
화요일은 화사한 봄 날씨 같은 기쁨으로 살고,
수요일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쁘게 살고,
목요일은 목욕한 듯 기쁘게 살고,
금요일은 금면류관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기쁘게 살고,
토요일은 토끼처럼 빠르게 일을 마치고, 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삽시다! 할렐루야.
예배도 기쁘게 드리고 찬송을 해도 기쁜 얼굴로 부르고 노무현 대통령 주름도 다 피고 밥도 기쁘게 먹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사를 한 후에 주일날 교회를 가려고 하는데 마땅한 교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사거리에 각각 한쪽 길마다 한 교회씩 네 교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거리에 교통경찰이 있기에 이사람에 그 교통경찰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사를 와서 이 동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 네 교회중에 어떤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입니까?
그러자 이 교통경찰이 “저기 동쪽에 있는 저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 같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좀 궁금해서 그 경찰에게 다시가서 물었습니다. “사거리에 교회가 네 개나 되는데 왜 저 교회를 소개시켜 주셨습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그 경찰이 대답하기를 “예, 제가 주일마다 여기에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저 동쪽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얼굴이 제일 기쁨이 가득하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구나 라고 생각이 되어져서 그 교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30년 동안 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녀는 파킨슨병, 직장암, 척추, 대상포진, 심장병등 엄청난 중병에 시달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의 질병이면 절망합니다. 그런데 미우라 아야꼬는 달랐습니다. 비록 몸은 병으로 고생했지만 그녀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병원 생활중에도 늘 감사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폐결핵을 앓는 남자가 그녀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반해서 청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병실을 다니면서 고통 당하는 환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환자들을 위해서 매일같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쓴 글을 가지고 다니면서 병실마다 보여주었습니다. 환자들이 그걸 읽어보고는 너무나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글을 써서 돌리니까 병실에 입원한 사람들이 아야꼬의 글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뭐가 나올까? 내일은 무슨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해서 글을 써서 모은 것이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그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우리도 환경과 상황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면 내가 달라지고, 이웃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의 환경과 여건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당장 형통한 삶이 열리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어지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살면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다시 소개 하지만 이지선 자매는 KBS의 인간극장에 5회 연속으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이지선자매는 술에 취한 운전자에 의해서 사고를 당했는데 차가 두 바퀴를 구른후에 불이 나서 온 몸에 중화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큰 대형사고 였던지 손가락은 뼈까지 완전히 타버려서 엄지를 제외한 여덟 개의 손가락을 절단했습니다. 얼굴은 다 일그러지고 피부의 55%가 없어졌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아름다운 이화여대 4학년 여대생 이었습니다. 그녀는 사고 후에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나를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병원에서 기도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회복시켜주신다면 돌아가겠습니까?” 라고 묻는데도 그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때에 정말 예뻤는데도 그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지선자매는 교통사고로 인해서 얼굴과 몸은 괴물처럼 되었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너무나 감사한 일이 많았고 깨닳은 것이 많아서 과거로는 절대로 안돌아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손이 불에 탄 후에 여덟 개의 손가락을 자를 때 그녀는 걱정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엄마, 손가락 여덟 개를 잘라 내야 하지만 아직 두 개가 남아 있으니까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는 이런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나의 온 몸에 남은 상처와 사라진 여덟 개의 손가락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다녀가신 흔적이기에 감사 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 누추하고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도 하고 사람들과 악수도 합니다. 나는 엄지 손가락만 가지고 글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불쌍하게 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인생사 모든일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챤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사람의 됨됨이와 사람의 인격은 세 가지로 평가한다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 가지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요 이 세가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 했습니다.
많이 배웠어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잘못 배우면 교만해집니다. 지식은 지식이지 인격이 아닙니다. 감사의 분량만이 인격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절대적인 감사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환경과 조건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그저 감사하며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큰 일이든 적은 일이든 기쁠때나 슬플때나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제 다시 오늘부터 항상 기뻐하면서 살고 쉬지말고 기도하면서 살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대로 살아서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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