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군청에 들어 갔더니 윤인준집사님께서 건축에 관한 제반 서류를 접수해 주셨고 군청 직원은 금주내에 건축 허가가 날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윤인준집사님은 부산 포도원교회의 성전건축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아서 근 일년동안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부산 포도원교회는 오늘 입당해서 예배를 드리고 헌당예배는 12월달에 드린다고 합니다. 섬기시는 교회의 건축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저의 교회의 설계와 행정적인 일들을 위해서 헌신해 주신 윤인준집사님께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군청에 들어가서 우리교회 건축에 관해서 담당직원과 함께 상담을 했는데 마침 권성도계장님께서 오셔서 같이 상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건축을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문제들을 권성도계장님과 담당 직원이 잘 가르쳐 주시고 조언해 주셔서 성전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금번 성전건축을 놓고 몇달동안 새벽기도를 하면서 우리교회의 건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짓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축도 아니고 성전건축이니까 술취한 사람들이 짓지 말고 경건한 사람이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우리교회의 성전건축을 장로님이 짓게 되었습니다. 이제 금주중에 건축 허가가 나오는대로 곧바로 건축을 시작 하도록 하겠습니다.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 되도록 계속해서 기도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 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다른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들 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람들은 거짓을 지어 내서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 합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서 광우병 때문에 촛불집회를 하느라고 나라가 마비된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MBC 피디수첩에서는 말도 안되는 장면을 내 보내면서 그게 광우병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피디수첩은 미국의 동물보호 협회인 휴메인 소사이어티가 제작한 동물학대 동영상을 편집했습니다.
일어서지 못하는 젖소들을 전기로 지지고 물고문을 하면서 학대하는 모습과 더불어 아레사 존슨의 시체를 장례식을 하는 광경을 보여주면서, 일어나지 못해서 학대받는 소와 도살하는 소를 마치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보도를 했고, 아레사 존슨의 장례식을 마치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먹고 죽은 것처럼 동영상을 편집해서 방영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국민들은 그런소를 수입해서 우리에게 먹게 하려고 하는 거냐고 화가나서 촛불 시위를 했고 정치판에서는 그것을 악용해서 정부를 완전 마비시키는 바람에 나라가 큰 어렴움을 겪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떻했습니까? 쇠고기를 수입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중에 광우병으로 입원하거나 죽은 사람은 역사이래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수입 쇠고기에서도 광우병은 전혀 발견 되지도 않았고 광우병에 대한 염려는 기우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엉터리 보도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혀서 촛불집회가 일년동안 계속 되었고 정부와 국민간, 국민과 국민간에 불신이 깊어져서 결국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다 길거리에 나와서 시위를 했는데 그 시위가 반정부 투쟁으로 번지는 바람에 나라가 아비균환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심과 불신의 사람들이 판치면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광우병 시위에 동참한 연인원 수백만명의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200만명의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은 이유는 열명의 정탐꾼들이 원망 불평할 때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동조한 200만명은 모두가 멸망을 당해 죽었습니다.
광우병 사태는 방송매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못 선동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광우병을 보도한 MBC PD수첩 사건때 검찰이 당사자들의 컴퓨터를 압수해서 조사를 했는데 PD수첩 작가의 e메일속에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서 광적으로 일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악의적으로 보도를 하는 것이 나라에 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사건후에 MBC는 크게 반성하고 공영방송의 정도를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KBS가 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문창극 총리후보를 완전 편파 보도함으로서 훌륭한 후보를 하루 아침에 친일파에 매국노로 몰아 부쳐서 낙마를 시키는 바람에 국민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KBS가 문창극총리후보에 대한 보도를 낸 후에 MBC가 당장 150분의 긴급대담프로를 제작해서 “KBS가 여론을 호도하는 엉터리 선동방송을 했는데 이것은 악마적 편집 이었다”라고 보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MBC는 문창극후보가 교회에서 강연한 40분 동영상을 다 보여주면서 진실을 규명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당시에 KBS 뉴스는 보도 하기를 “문창극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와 더불어 이어진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라는 앵커의 멘트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창극 총리후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고 고난을 준 다음에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뉴스 어디에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A는 돈을 받았다 그것은 정당한 댓가요 보상이었다”라고 보도해야 진실인데 “A는 돈을 받았다”라고만 보도를 해서 마치 아무죄도 없는 사람이 뇌물을 받은 것처럼 만든 꼴이 된 것입니다.
KBS가 이런 엉터리 보도를 하니까 다른 공영방송사와 신문등 많은 매스컴에서 “공영방송인 KBS가 악마적으로 편집을 했다”라고 까지 표현하면서 강하게 반발한 것입니다.
결국 KBS는 불공정한 보도로 국기(國紀)를 흔들고 멀쩡한 사람을 친일파로 만들어서 그를 총리에서 낙마시켰습니다. 저는 문창극 총리후보 보도사건 이후에 이런 엉터리 편파방송을 하는 KBS 뉴스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사기꾼같은 사람들이 보도하는 엉터리 방송을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아서 입니다.
방송 심의기준 9조(공정성)는 방송이 진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KBS 방송국의 강령에서도 “인터뷰 편집도 전체 흐름에 어긋나거나 일방적 방향으로 해선 안 된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래서 문창극총리후보 보도가 나간후에 KBS자체 에서도 “이 보도는 본인의 반론을 전혀 담지 않았기에 보도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최악의 보도였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KBS는 크게 반성해야 하고 공영방송으로서 다시는 이런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시사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요즘 매스컴이 하도 타락하는 바람에 흥분해서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하여튼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일은 언제나 갈등을 조장하고 국론을 분열 시키고 원망불평하게 만들고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그런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 언론입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인들이 회개하고 반성해서 공정 보도를 해야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우리에게 왜 믿음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잘 나서나,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크건 작건, 부자건 가난하건, 잘났건 못났던 이런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로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마지막에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비록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재판을 하는 불의한 재판관 일지라도 억울하고 한 많은 과부가 날마다 찾아와서 하도 간청을 하니까 불의한 재판관이 그 과부의 호소를 들어준 것처럼 그런 사필규정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 훌륭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는 그날에 세상 사람들중에 과연 이 과부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있겠느냐?” 라고 말씀 하시면서 탄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믿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恨)이 서린 기도 제목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 기도 제목을 가지고 끝까지 부르짖는 사람은 없고, 또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더더군다나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킹 제임스 번역판 성경은(KJV번역) 이 내용을 다른 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음이 보게 합니다.
증거라는 말은 헬라어로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문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을 사고 팔거나 증여할 때, 땅을 직접 들고 와서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땅문서를 주고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을 소장하는 게 아니라 땅문서를 소장합니다.
그런데 이 땅문서는 땅의 실체와 같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도 땅문서만 가지고 있으면 그 문서를 가진 사람이 땅의 주인이요 땅의 소유권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 합니다.
하늘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돈도 필요없고 학벌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질수가 있습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무작정 믿을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배우면 됩니다. 모델을 보고 벤치마킹하는 것 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따라가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누군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직업별로 믿음을 성장시키고 믿음을 올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채소가게 주인은 믿음을 쑥쑥 올립니다.
점쟁이는 점점 올립니다.
한의사는 한방에 올립니다.
성형외과의사는 몰라보게 올립니다.
구두미화원은 반짝하고 올립니다.
백화점사장은 파격적으로 올립니다.
합기도관장은 기차게 올립니다.
총알택시기사는 항상 따블로 올립니다.
목욕탕주인은 때를 기다립니다.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믿음을 끌어 올리는 방법은 우리보다 믿음이 좋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고 따라가면 됩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은! 태권도 학원에 가서 사범을 따라 하다 보면 실력이 늡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면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여러 사람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예배의 사람입니다.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아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마음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렸느냐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아벨만 제사를 드린게 아니라 가인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 “만남”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만나느냐를 하나님은 평가하십니다. 예배시간에 늘 조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날 김상철성도님이 “목사님! 다음주부터는 일찍 오겠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그런데 오늘 정말 일찍 오셨습니다. 참 잘하신 결단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진실한 만남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뜨거웠는데 지금 식어 졌다면 그 믿음은 다시 불을 지펴야 합니다. 옛날의 믿음을 계속 우려먹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 옛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바리새인이 되고 맙니다. 내 속에서 굳어진 타성과 무감각한 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말고 오늘! 마음과 정성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집사 이상의 직분자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와 세상일을 바꾸면 안됩니다.
아벨은 항상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 했기에 그는 죽었지만 지금도 그 믿음으로써 말하고 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두예배에 정성을 쏟았더니 아벨은 수천년동안 칭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믿음의 사람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동행의 사람입니다.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70인역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씀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은, 에녹이 타락한 세상 한 복판에 살고 있었지만, 에녹은 하나님 마음의 한 복판에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6절이 바로 에녹의 삶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은 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공기가 내 곁에 있듯이, 또 호흡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뢰하고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면서도, 하나님이 내 곁에 없는 것처럼 살아 갑니다. 세속에 물들어서 내멋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뭘 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늘 같이 동행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함께해서” 입니다. 영어로 하면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남북전쟁이 벌어졌을 때 링컨은 전투때 마다 패배하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무려 5년동안이나 그랬습니다. 7년간의 전쟁에서 5년 동안은 계속 졌습니다. 그래서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병사들은 탈영하고 점점 패색이 짙어 졌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기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패색이 짙어지자 북군의 많은 장군들과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도 낙담 했습니다.
사실 당시에 미국은 남군이나 북군이나 모두 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 보자고 세운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주일이면 양편이 모두 잠시 쉬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특히 북군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고민에 빠진 대통령의 참모들이 어느날 모였는데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신다면 참 좋겠는데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단호하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를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그리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여기에 링컨 대통령의 위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고백속에는 믿음의 관점이 올바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게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성수 하라고 해도 일이 생기면 안나옵니다. 자식이 오면 안나옵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안드립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라고 해도 내가 싫으면 싸우고 원수지고 꼴도 안보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근본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믿음과 자기 주장대로 믿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 마치 옛날의 과학자들이 “천동설”’을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천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해와 달과 별들과 하늘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동설”즉 지구가 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몰아 붙여서 다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지동설이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진리가 아닌 것을 우기면서 고집하는 경우를 “교만”이라고 판단 하십니다. 분명히 잘못 되었는데도 끝까지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으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 하시는데도 내멋대로 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전쟁상황은 링컨이 항복하고 전쟁을 끝내야 할 상황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링컨은 허망한것처럼 보이는 믿음만을 계속 선택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갑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남북전쟁에서 링컨이 승리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요! 기도의 승리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링컨은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일순간에 남군이 무너지면서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 했습니다. 정말 기적입니다.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 영달과 자기 욕심을 위해서 일을 했지만 링컨은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링컨에게 복을 주셔서 전쟁에 승리한 것입니다.
마치 6.25때 김일성이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서 우리나라가 끝장난 상황까지 갔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이승만대통령과 주의 종들, 장로님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유엔군대를 급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믿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믿음으로 승리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믿음의 사람은 노아입니다. 노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설교를 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식당에 제일 많이 붙여진 수식어는 아마도 “원조”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유명한 특산맛집들이 있는 맛집촌은 의례적으로 “우리가 원조입니다” 라는 원조간판을 붙여 놓아서 처음 찾는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미식가들이 끊임없이 원조 식당을 찾아가려고 애쓰는 이유는 원조식당만이 가지고 있는 깊은 역사와 오리지널한 맛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조는 언제나 나중 것들의 기준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믿음의 원조가 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교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만장일치로 믿음의 원조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원조 믿음이 되었습니까?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라는 말씀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실 때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날도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다 알고 믿는 게 아닙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 장차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여 떠난 것입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 땅의 유지요, 재물도 많고 당신의 친척,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고, 부모 형제도 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게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엄청난 땅과 재산도 다 당신에게 돌아갈 터인데 이제 75세의 나이에 목적지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말입니까?”
부모나 동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떠난다고 할 때 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무모한 짓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증거 합니다. 믿음을 믿음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진짜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해서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유익이 되었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노아와 그 집에 유익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문제가 때로는 탁상공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탁상공론은 필요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빈체레(Vincere)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있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의 리더가 되었지만 젊었을 때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 영화 초반에 젊은 무솔리니가 마을의 신부님들과 함께 종교에 대한 공개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솔리니가 회중시계를 손에 들고 “내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일분 안에 나를 쳐 죽이십시요!” 그는 그렇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일분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무솔리니가 말하기를 “거 봐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나를 하나님이 죽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다!” 그래서 그 토론장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그는 승승 장구하여 나라를 통치 하면서 국가를 좌지 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결국 시민군에 의해서 붙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도시의 넓은 광장에 그의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수치를 당하면서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가 세운 동상도 거대한 프레스에 의해서 납작하게 빈대떡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무솔리니가 정한 시간에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악을 행하는 그에게 오랜시간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결국 무솔리니 같은 인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과 징벌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미련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상급을 누리면서 살 수 있고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지옥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뒤늦게 지옥불에서 아무리 회개하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달라고 떼를 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묵묵히 기다리면서 인내할 때 때가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법적으로는 즉각적으로 순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떠나라는 말씀이 떨어 졌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즉시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당장 짐을 꾸려서 떠났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어디로 가느냐”라는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순종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무슨 말씀이 떨어 지든지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 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그를 따라오는 모든 후배들에게 믿음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면 늘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꼭 할게요”라고 하면서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일년을 지내고 휴가를 온 아들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 군대에서 뭘 배웠냐?”하고 물었더니 “예, 지금 당장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마치 성경 같은 말을 덧붙였는데 “순종을 미루는 것이 불순종인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왜 순종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순종한 이유는 자기를 부르시고 말씀 하시는 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 앞에서 할 일은 순종과 충성입니다.
느헤미야9장 7절로 8절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의 모든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셨다”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순종과 충성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영적인 복과 땅의 복을 누리게 만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가운데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자문역을 맡았던 갤브레이스 박사는 (John Kenneth Galbraith) 자서전에서 자기를 평생 도왔던 가정부요 비서였던 에밀리(Emily Gloria Wilson)라는 여성에 대해서 극찬을 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피곤해서 “낮에 잠간 쉴터이니 깨우지 말아라!” 라고 말하고 낮잠을 잤는데, 그때 미국 대통령인 존슨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여기는 백악관인데 갤 브레이스 박사좀 바꿔 주시게” 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이때 비서인 에밀리는 “죄송합니다! 박사님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계시는데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통령이 신분을 밝혔습니다. “나는 대통령 존슨일세” 그러자 에밀리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대통령 각하시군요! 그런데 각하 너무나 죄송합니다! 저를 고용하신 저의 주인은 각하가 아니라 교수님이십니다! 저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잠자는 동안에 깨우지 말라고 부탁 하셨기에 지금은 주인님을 깨울수도 없고 전화를 바꿔 드릴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에밀리 박사가 깨어나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존슨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존슨 대통령이 에밀리 박사에게 “자네는 정말 훌륭한 가정부를 두었군! 그 여자를 백악관으로 보내 줄 수는 없겠나?”라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부르신이가 정말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더불어서 순종의 믿음은 희생이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것 자체가 희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고고학계의 증언에 따르면 갈대아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 남부 유프라데스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인데 고대에 굉장한 문명이 있었던 곳입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에 가나안은 아무 것도 개발되지 않은 시골 촌 동네였고 갈대아 우르는 엄청나게 문화가 발달한 대도시 였습니다.
그런데 부요하게 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졸지에 집과 재산과 땅을 다 버리고 장막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좋은 저택에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공부도 많이하고 인품도 훌륭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다 버리고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그가 이방땅에서 장막에 거했다”라고 증거 합니다. 우거는 나그네처럼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나그네 인생길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고난이요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때문에 행복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비로소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느냐 안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요, 나의 상급이라는 사실을 깨닳았습니다.
그의 행복은 땅이나 저축된 자산이나 금이나 증권이나 돈을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과 중 최고의 시간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아브라함이 어떤 별명을 얻었습니까? 야고보서2장 23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라는 칭함을 얻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친구!”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별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내 친구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면서 사랑했던 정다운 친구들을 잃었고 정들었던 가족과 친척들과도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한밤중 빛나는 사막의 별을 보면서 외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내 친구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순종한다는 것은 희생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인생을 계산으로만 살아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머리로만 계산해서 행동 했더라면 절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인간적인 머리로 계산하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믿음의 조상이나, 믿음의 원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냥 갈대아 우르에서 잘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지옥불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3500년동안 지옥불에서 형벌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잘 떠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을 뵙는 그 순간에 가장 복되고 칭찬받는 사람은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도 아벨처럼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순종과 충성으로 일관해서 하나님의 온갖 좋은 기업을 이어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가진 믿음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축복속에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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