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해세광교회의 2015년 교회표어는 성령충만, 은혜충만, 사명충만 이라고 첫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사명을 감당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새벽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는 비결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33:3)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면서 구하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령충만을 주실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더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가득 차게 하다” “완성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인간의 소욕과 욕심이 사라지고, 성령을 따라 살면 내힘으로 해결할수 없는 상황에서 성령의 도움을 입게 됩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목사님은 청교도 설교가 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찰스 2세때 왕정이 복고되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의 설교와 집회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목사님은 계속해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다가 붙잡혀서 12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훌륭하고 신실한 목사님으로 정평이 나 있던 존 번연 목사님이 감옥에 들어와서 감옥생활을 하자 수년이 지난 어느날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감옥의 옥사장이 감옥문을 열고 목사님을 불러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에게 며칠동안 휴가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변복을 하시고 가셔서 부인과 가족을 보고 오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옥사장이 특별히 목사님에게 배려해 준 것입니다.
존 번연 목사님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그길로 집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달려 가다가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 와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옥사장에게 “호의는 고맙지만 가다 보니까 성령께서 다시 되돌아 가라고 하셔서 돌아 왔습니다 마음은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성령께서 돌아가라 하시니 마음을 접고 돌아 왔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옥사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목사님을 다시 감옥에 들여보내고 문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시간 후에 국왕이 보낸 고위직이 감옥을 시찰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존 번연과 더불어 나라에서 지목한 죄인들이 잘 갇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일은 영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들이 돌아가자 옥사장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부터는 제가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까 그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목사님이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셔도 좋습니다”
만약에 존 번연 목사님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다면 옥사장과 목사님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순간순간 어려움에 처할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 성령님께서 선한길과 복된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도 보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증거 합니다. 로마서 8장5절에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나게 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롬8:6~7)고 증거 합니다.
더불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갈5:16-17)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와같이 육신의 생각은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과 축복의 길로 인도하기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소개 합니다. 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속량하라”(건져내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질없는 세상에서 유혹과 시험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악한 세상에 물들어서 살다보면 부질없는 일로 인해서 아까운 인생을 탕진하게 됩니다.
지난 12월달에 로또 1등에 당첨이 되어서 242억 원의 상금을 수령했던 A 씨가 사기 혐으로 경찰에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 갔습니다, 그는 엄청난 당첨금을 받은후에 그 돈을 주식에 투자하고, 고급 아파트도 2채를 구입하는등 무 계획적인 투자로 당첨금을 전부 탕진했습니다.
결국 아파트도 다시 팔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생활고에 시달리던 A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로또 당첨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펀드 전문가 행세를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1억 4,000여 만 원을 가로챘다가 사기 혐의로 검찰에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강원도 양양에서 집에 불을 질러서 일가족을 죽게한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마흔 한살인 이 모 여인은 세 살 아래인 박 모 여인으로부터 1800만원을 빌렸습니다. 서로 언니 동생사이로 친하게 지내던 두사람은 돈을 빌려주면서 금이 갔고 동생은 돈이 필요하니까 빨리 갚으라고 종용 했는데 돈을 갚으라고 다그치던 동생벌인 박모여인이 나중에 화를 내면서 “그렇게 사니까 딸아이가 뇌성마비가 되지!”하면서 이씨의 딸을 비하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씨는 화가나서 박씨가족을 죽이기로 결심했고 수면제를 구입해서 술과 음료수에 탄 후에 박씨집을 찾아가서 술을 한잔 하자고 하면서 박씨에게 수면제가 든 술을 마시게 했고 아이들에게는 수면제가 든 음료수를 마시게 한 후에 박씨 가족이 잠들자 가져간 휘발류를 방에 붓고 불을 질러서 박씨와 두 아이들이 불에 타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며칠전에 발생한 서초구 세 모녀 살인사건의 범인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 강씨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온 수재였습니다. 서울 강남에 44평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일제 중형차와 국산차 등 차량도 두 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강씨가 소유한 아파트는 현재 시가로 11억원을 호가 합니다. 부동산을 담보로 5억 원을 대출했는데 2억7천만원을 주식에 투자해서 날렸지만 아직도 1억3000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IT부품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후에 재 취업에 실패해서 담보대출을 받아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다가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재취업에 실패하자 마음이 불안해졌고, 내가 제대로 살지 못하면 내 가족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결국 가족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을 하려고 생각을 했다가 가족만 죽이고 자기는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붙잡힌 강씨는 “내 입장에서는 가족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어쩌면 이런사람을 위해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뉴우스 시간에 그 영화를 소개하는 것을 보니까 힘들고 어려워도 가족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 가장들의 스토리를 다룬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강씨의 경제 개념은 달랐습니다. 얼마든지 회생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가족들의 인생을 망치고 자기의 인생도 망쳤습니다.
사실 강남 중대형 아파트를 처분하면 대출을 전부 해소하고도 세 모녀와 함께 서울 어디에서든지 집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에서도 전세를 구할 수 있습니다. 차도 외제차를 처분하고 국산차 한대만 끌면 됩니다.
그런데도 강씨는 실직한 후에도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대출금에서 매달 생활비로 400만원을 썼습니다. 생활비 400만원이면 거의 중,상류층에 가까운 소비입니다. 우리나라의 서민들은 한 가구당 한 달 생활비를 200만원 정도도 쓰지 못합니다. 진짜 서민은 빚 1억도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재산이 6-7억이나 있고 차도 두 대나 있는데도 못살겠다고 아내와 자식을 목졸라 죽이고 자살을 하려고 했다니 이건 뭔가가 씌여서 그런일을 한 것이지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그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성경은 증거한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사건들은 하나같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인 참극입니다.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 잡히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수년전에 제가 유명한 살인마 고재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재봉은 도끼로 일가족 여섯명을 살해 했습니다. 그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군에 입대해서 소속 부대장인 박 중령의 사택에서 당번으로 수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재봉이 일을 마치고 박중령의 서재에서 뭔가를 들고 나왔는데 식모가 그것을 보고 야단을 치자 고재봉은 식모를 위협했고 박 중령은 고재봉의 손버릇을 고치려고 그를 헌병대로 넘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재봉은 7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교도소에서 괴롭고 힘든 시간을 지내던 고재봉은 교도소에서 나가면 그 길로 박 중령 일가를 죽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 나오자 마자 그는 청계천에서 도끼를 사서 가방에 넣고 밤중에 박 중령의 집으로 찾아가서 숨어 있다가 한밤중에 박중령의 일가족 6명을 도끼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쳐 죽인 가족은 박 중령 가족이 아니고 새로 부임한 이덕주 중령의 가족이었습니다. 박중령은 이미 다른 곳으로 전보 발령이 났습니다. 고재봉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사형선도를 받았습니다.
고재봉은 교도소 안에서도 폭언과 난동을 부리면서 안하무인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난동을 막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뉴스가 전해진지 얼마후에 안국선이라는 집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성령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네가 고재봉을 찾아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해라” 아무도 못말리는 험악한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성령님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안국선집사님은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여 교도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고재봉을 찾아갔습니다.
안 집사님은 면회를 요청한 후에 고재봉이 면회실로 오자마자 고재봉 앞에서 다짜고짜 요한복음 3장 16절로 20절까지를 읽은후에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가 누구신가를 전했습니다. 면회시간은 단 15분이었고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을 전했는데 그 순간 성령님께서 고재봉을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재봉은 자기도 모르게 회개할 마음을 갖게 되었고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안국선 집사님은 고재봉에게 성경책을 한권 전해주고 갔는데 고재봉이 성경을 읽다가 드디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재봉이 구원의 확신을 얻은날 고재봉은 교도소가 떠나갈만큼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들아! 왜 나에게 진작 예수를 알려주지 않은거야! 내가 예수를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내가 무고한 사람을 여섯명씩이나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그날 통곡하면서 밤새도록 “내가 예수를 조금만 일찍 알았으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여섯명이나 죽이지는 않았을텐데”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고재봉은 교도소안에서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고재봉은 죽을때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중에 그의 전도를 받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형집행을 당하는 날, 사형 집행인에게도 “간수님! 간수님도 꼭 예수 믿으세요”라고 당부를 한 후에 찬송을 부르면서 사형집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저는 고재봉이 죽인 이득주 중령의 가족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이득주 중령과 결혼한 여자가 바로 김재옥선생이었습니다. 김재옥선생은 6.25때 처음으로 우리 국군이 대승을 거둔 동락리전투때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한 후에 정보를 제공해서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동락초등학교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김재옥선생님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7일날, 당시에 충청북도 충주의 한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서 교사로 재직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정으로 북한군이 몰려오자 갓 부임한 어린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해서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거짓 보고를 해서 북한군을 안심시킨 뒤에 몰래 빠져나가서 산 위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 7연대를 찾아가서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국군 400명이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북한군 1개 연대 2200명이 모조리 섬멸되었습니다. 동락전투는 6.25 전쟁에서 국군의 첫번째 승리로 남게 됩니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노획한 군수물자중에 소련제 군수품이 발견되었고 그 군수품을 미국으로 공수함으로서 소련이 북한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져서 UN군이 참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와 더불어 UN군이 참전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주인공이 바로 당시에 19살이었던 김재옥선생이었습니다. 김재옥선생은 동락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득주소위와 결혼을 했고 그후로 두사람은 행복하게 살면서 신앙생활도 성실하게 해 왔습니다.
김재옥선생과 이득주소위의 이야기는 훗날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이득주중령과 김재옥선생이 고재봉이에게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저는 이득주중령과 그의 아내 김재옥선생이 아주 훌륭한 인물들임을 알고 놀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그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고재봉이가 죽인 사람이 자기를 부질없이 괴롭힌 박중령이었다면 고재봉이는 절대로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재봉은, 자기가 죽인 사람이 충성된 군인이요 그의 아내는 만인이 존경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틀림없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국선집사님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고재봉을 감동 하셨기에 천하에 극악한 고재봉이 회개를 했고 결국 고재봉은 회개하고 중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득주중령과 김재옥선생을 한알의 밀알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풀렸습니다. 때때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순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악한일을 행한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사탄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끔찍한 죄를 저지를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했어도 죄사함을 받을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비록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죄를 범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죄를 소멸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셨기에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지나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기에 더 이상 지나간 죄로 인한 죄책감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 사함 받은 기쁨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으면 생명과 평안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들이 술 취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싸움도, 권모술수도, 음란도, 살인도, 전쟁도, 술로 인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취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신앙생활에도 승리하게 됩니다. 세상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성령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명령하면서 성령충만과 술 취하는 일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명령 합니다. 술에 취하면 방탕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성경은 증거한 것입니다.
방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소티아”(ՁՓՙՔՉՁ)인데 부도덕하고, 품행이 나쁘고, 낭비가 심한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였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는데 여기에 나오는 “허랑방탕”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탕”이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술취함은 방탕과 부도덕함과 낭비적인 삶의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술 취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D.M. Lloyd-Jones) 목사님은 술취한 사람들의 방탕한 삶을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술취한 사람들은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고 던져 버린다. 대부분의 여자들도 술로 인해서 순결과 정조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술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망치는 주범이다. 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보배로운 선물들을 망가뜨리는 해악이다. 술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능력도 망가뜨린다. 술은 사람을 망치게 하기 위해서 사탄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술취한 사람에 대해서 더 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술취한 사람은 방탕하고, 난폭하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게 된다, 술취한 사람들이 하는 짓은 짐승 같거나,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술의 유익함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술은 인류 역사상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 주는 주범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문제가 벌어질 때 성령님이 인도해 주셔서 큰 화를 면하게 됩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옥목사님 교회의 이집사님이라는 분이 직장을 다녔는데 어느날 부서를 옮긴후에 그 부서의 직장 상사에게 괘씸죄에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직장 사람들끼리 모이는 회식 자리에서 그 부서의 상사가 술을 권했는데 집사님이 계속 거절을 하니까 건방지다고 눈에 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시 회식 자리가 있었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직장 상사가 다시 집사님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상사가 권하는 술을 계속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술을 권해도 술을 안받자 화가 난 이 상사가 술김에 집사님의 뺨을 한 대 후려 갈겼습니다. “도대체 직장 상사를 뭘로 보는거야! 직장의 위계질서를 잘 지켜야 부서가 원만하게 돌아가지!” 하면서 뺨을 한 대 때리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래도 처자식이 있고, 나이도 들만큼 들었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이 집사님이 얼마나 창피하고, 분했겠습니까? 이 집사님이 그날 집에 와서, 괴로워 하다가 다음날 회사도 안가고 무단 결근을 하면서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분을 삭일수가 없어서 결국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운전을 하던지 배추 장사를 해서 먹고 살 망정 더 이상 더러운 꼴 안본다” 하고는 사표를 내기로 작정하고 사표를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금요 저녁기도가 있는 날이라 집사님이 저녁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하나님앞에 기도를 하면서 지금까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 온것과 더불어 충성을 다했는데도 상사에게 뺨을 맞았다고 하면서 마음속에 담긴 서러운 생각과 더불어 분한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이제 사표를 내기로 작정하고 직장을 그만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기도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박영문씨가 도망간 아내와 처갓집 식구를 도끼로 다 쳐 죽인다고 도끼를 들고 처갓집으로 갔다가 거기서 “여봐라 여봐라 네가 그러면 안된다” 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놀래서 마음을 돌이킨 후에 회개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 것처럼,
이 집사님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집사야! 너는 겨우 뺨 한대 맞은 것으로 그렇게 분하고, 억울해 하느냐?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 채찍에 맞았고 그리고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밖혔느니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이집사님이 기도를 하다말고 놀래서 눈을 번쩍 떴는데 옆에서는 다들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고 주변에 그런 말을 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놀래서 “이게 무슨 일일까?” 하고 얼떨떨해 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그 말씀이 성령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린후에 집에 돌아와서 사표를 찢어 버리고 그 상사를 용서하는 기도를 한 후에 다음날 다시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근한 하루동안에 회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뺨을 때린 상급자가 회사에서 갑자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고 회식중에 집사님의 빰을 때린 사건도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그 문제까지 겹쳐서 그 상관이 궁지에 몰려서 졸지에 짤릴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집사님이 회사의 높은 사람에게 불려가게 되었는데 집사님은 자기가 하루 결근한 것은 몸이 안좋아서 결근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고, 그리고 술좌석에서 자기의 뺨을 때린 상사는 장난 삼아서 그런일을 한 것 뿐이고, 그분은 누구 보다도 일을 잘하는 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짤릴 위기에 있었던 그 상사가 집사님의 두둔과 해명으로 간신히 구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에 이 직장상사는 집사님의 언행심사에 크게 감동을 받고 마음이 변해서 그후부터는 집사님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집사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상사가 집사님을 따라서 예수를 믿고 함께 교회까지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이와같이 은혜스러운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신앙생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삶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에서 상처를 입고, 교회에서 마음이 상하고, 교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교회에서 실연을 당하기도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들을 당하는 이유는 성령충만을 받지못했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행복을 누리게 되지만, 인간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수 없다”라고 증거 했습니다.
죤 뉴톤은 본래 아주 강퍅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고 그때부터 인생이 험악해 졌습니다. 존 뉴톤의 어머니는 믿음도 좋고 인품이 훌륭한 여인 이었기에 날마다 존 뉴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 가시면서 존 뉴톤은 거친 세상에서 짐승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노예상의 심부름꾼이 되어급기야 아프리카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는 노예상들 밑에서 노예들을 사고 파는 일을 배웠고 노예들을 잔인하게 다루는 악한 선원이 되었습니다.
먼 훗날 그는 고백하기를, 자기 마음 속에서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성경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이 늘 싸움을 했지만 항상 악이 이겼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의 양심을 질책 하면서 악한삶을 청산하라고 끊임없이 질책 했지만 그러나 사탄마귀가 강하게 역사했기에 그는 타락한 노예상인이 되었고 그는 노예상인으로 성공해서 수많은 노예들을 잡아다가 이나라 저나라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노예들을 배에 싣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죽게 됩니다. 그는 다가온 죽음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나온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니까 자기가 얼만나 악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더라도 당신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만약에 저를 한번만 살려 주신다면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한번만 살려 주십시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엄청난 태풍이 일순간에 점점 사그러지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펜을 들어 감사의 고백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가 쓴 감사의 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찬송이 됩니다.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305장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험한 폭풍우에서 살아난 죤 뉴턴은 그날 이후로 180도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잡아간 모든 노예들을 다 풀어주고 그길로 그는 하나님께 귀의하여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후에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평생을 노예 해방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무엇이 이와같은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첫째는 어머니의 기도였습니다. 둘째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성경말씀 이었습니다. 세째는 환란중에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넷째는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죤 뉴톤을 거듭나게 하셨기에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찬송을 지어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성령께서 우리 영혼 위에 임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수도 없고 구원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목될 수도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구원 받아서 천국백성이 된 것입니다.
더불어서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닳아진 것도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16장8절에 보면 “그가(성령)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것 만이 기적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게 된 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신 기적인 것입니다.
자고로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셔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시킨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수백가지 아이디어와 수많은 방법이 나오지만 비결은 오직 한가지 성령충만을 받아야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고 부흥성장이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비결을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성령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갈리리 바다에서 아침 식사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베드로와 수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후에 감격하고 흥분해서 기뻐했지만 그러나 한사람도 예수님의 부활을 나가서 증거하지 못했고 자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하나같이 모두 다 다락방에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서 수 많은 기적을 보았고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물위도 걸었고, 죽은자도 살아나는 기적을 보았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도 목격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목격한 부활의 주님을 자랑하거나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부활신앙이 살아납니까? 오순절날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부활신앙이 살아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이적을 체험하고 목격했어도, 성령충만을 받기 전에,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용지물 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후에 모든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오백여명에게도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것은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감격은 곧 사라졌고 다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 이제 내가 부활한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너희들은 예루살렘에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감격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겠기에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적도 체험하고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충만 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거룩한 척해도 모두가 죄인입니다. 첫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죄의 자녀들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나 별볼일 없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 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수가 있고 종국에는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중에 “예이옐 디무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1961년도에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의 가장 측근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이 예이옐 디무르에게 옆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좀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재판관의 요구에 예이옐이 한참 동안 아이히만을 쳐다 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졸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이 나의 동료들과 그 많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 남녀들을 비참한 가스실로 넣어서 죽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입장이 바뀌어서 내가 독일사람들을 심판할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나도 우리를 잔인하게 죽인 독일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을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아이히만을 보는 순간에 자기 속에서도 아이히만처럼 미움과 증오와 살인의 광기가 솟아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의 죄를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도 언제든지 상황이 벌어지면 그와 같은 죄를 범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속에는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죄의 속성은 죽을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죄의 속성을 이기면서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병고침, 기적.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런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 하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같은 능력을 행할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람이나 파도를 명령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다 치료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로부터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바로 성령충만이었습니다.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고 떠나시면서 주님이 주신 약속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부활신앙의 삶을 살려면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우리 모두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담대한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옛사람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옛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죄와 정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귀를 따라간 사람이 받을 상급은 죄와 지옥불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죄악된 삶에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옛사람을 품에 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 하실 때 예수님께서 나를 안고 함께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 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믿음생활을 잘 하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다 쏟아 버리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면 무슨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일군들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믿음은 큰 믿음이 되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늘의 위로와 평화와 담대함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다리가 떨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은사가 나타나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쫒아내고 방언도 말하고 밤새도록 기도해도 지치지 않는 기도의 사명자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담대하게 전도하게 됩니다.
끝으로 성령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의 인격과 신앙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허락하신 것은 단순하게 능력의 부으심이나 영적인 열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주님께 헌신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신앙고백과 함께 범사에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 나의 주장, 나의 자아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목사님은 성령충만을 “바꾸어진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진 것이 성령충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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