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월요일부터 신년 축복 대 심방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일동안 남양구역과 금음구역, 옥동구역 심방을 마치고 이제 내일부터는 봉우 구역과 감암구역을 심방할 계획입니다.
매년 신년 정월달에 신년 축복 대 심방예배를 드리는데 모든 성도님들이 얼마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기다리시는지 제가 가서 예배를 드릴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015년도에는 모든 가정에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큰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제가 청년때 충청남도에 있는 목양교회에 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우물을 팠는데 우물을 거의 다 파서 물도 나오고 이제 조금만 더 파면 되는데 그만 갑자기 우물이 무너지면서 우물을 파던 사람이 흙더미 속에 같혔습니다.
흙이 무너지자 깊이 3미터 아래에서 우물을 파던 사람이 우물속에 같혔습니다. 그분은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당시만 해도 포크레인도 없고 구해 낼 방법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얼른 양수기라도 가져와서 물이라도 퍼냈어야 하는데 시골동네라서 사람도 없고 여자들만 우왕좌왕 하면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물이 점점 차 오르자 그 사람은 우물 속에서 “물이 차 올라온다! 물이 차서 나는 죽는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분은 결국 물이 차 올라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날밤에 가슴이 아파서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메사추세츠주에 사는 용접공 한 사람이 도심에서 12km쯤 떨어진 공사장에서 하수도 송수관을 묻는 일을 했는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맡아서 용접을 해야 할 부분이 마무리가 안 되어서 동료들에게 한시간만 더 일하고 갈테니까 먼저들 가라고 이야기를 한 후에 남아서 잔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퇴근을 하고 혼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공사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이분이 하수도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이 용접공은 용접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간신히 숨을 쉴 수는 있었지만 사방에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에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고 가슴은 답답해지고 심장도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누구든지 이곳에 사람을 보내 주셔서 저를 좀 꺼내 주세요”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다가 그는 점점 의식을 잃어 갔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집에가서 씻고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생각이 나서 친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길로 공사현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가서 보니까 공사장이 무너져 있었고 흙더미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는 당장 911에 전화를 해서 응급 구조대를 요청했고 구조대가 달려와서 흙더미를 걷어내는 바람에 그 용접공 친구를 구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의 의미와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험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서 살게 됩니다.
며칠전에 한 성도님이 농협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거기서 일을 보고 밖에 서 있는데 농협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한 분이 트럭을 운전해서 후진을 해서 나가다가 드리받을뻔 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뒤에 서 있는 성도님을 보지 못하고 후진을 하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할뻔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사로 지켜 주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심히 살아가다가 무기력증에 걸릴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에 한 목사님은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믿음의 길을 가다가 때로는 실족해서 영적 허탈감이나 피곤함 때문에 죽을 만큼 푹 꺼질때가 있는데 저도 종종 그럴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일을 완수 해 놓고서 그런 피로감을 느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이 심한 영적 피로감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나는 매 주일마다 설교를 하고, 금요기도회 설교도 하고, 새벽마다 설교를 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성경 공부도 시키고, 구역장 예배도 인도하고, 심방도 하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정말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내 속을 조금만 헤집고 들어가 보면, 나는 너무나 많은 문제와 질병과 결핍을 안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목회를 하면서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마음에 안드는 일이 생기면 분노하고, 목회를 하면 할수록 점점 인내와 사랑이 없어져 가는 것 같아서 답답하고, 기도시간이 좀 더 길어져야 하는데 기도도 많이 못하고, 주일날 예배시간에 나와야 할 성도가 나오지 않아서 빈자리가 생긴 것을 보면, 안나온 그 성도를 걱정 해 줘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권사가 또 교회를 안나왔지?” 라는 생각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화가나서 안나온 성도를 정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게다가 목숨을 걸어도 될까 말까 한 게 목회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목회를 편하게 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고민입니다”라고 그 목사님은 고백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목사님들도 엘리야처럼 기진맥진해서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서 탈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다시 힘을 얻는 비결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비결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눅1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문제를 해결 받는 길이 열린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도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전에 큰 교회에서 한 직분자가 정년 퇴직 기념으로 독일제 그랜드 피아노(Grad Piano)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본당 피아노가 오래 되어서 낡았기에 최고의 피아노를 하나님께 헌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를 처리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피아노는 예배당을 지어서 헌당할 때 한 권사님이 바친 피아노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치울수는 없기에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권사님! 본당에 피아노를 바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바쳤습니다” “권사님! 어떤 분이 새 피아노를 바치셨는데 권사님이 드린 피아노를 치워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권사님이 잠시 말이 없더니 “목사님,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눈물로 기도하고 바친 건데 치우면 안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새 피아노를 본당에 들여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365일 새벽기도를 쉬지않는 기도에 열심인 권사님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권사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엉터리 기도꾼 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기도꾼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된 목사님은 선배 목사님에게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사님이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후배 목사님이 “방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사님은 “오늘부터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게나! 하나님! 간절히 구하오니 하루 속히 그 권사님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게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열심히 기도를 하고는 있지만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내 마음에 안 들고, 내 뜻에 안 맞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내 생각을 이루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5)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형통한 복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는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들키면 사자 밥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어느 때나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의 대통령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맡은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그 왕과 함께 일하던 신하들을 죽은 왕과 함께 다 생매장을 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새 왕이 즉위하면 선왕의 신하들이 역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교회도 그동안 비슷한 행정처리를 해 왔습니다. 담임목사가 바뀌면 담임목사와 함께 일해오던 부목사님들이나 전도사들은 모두 다 사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 다른 교회로 가거나 그중에 몇사람은 재 임용을 받기도 합니다.
근래에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은퇴하고 새 목사님이 오셨는데 새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마음이 맞지 않아서 분쟁이 일어나고 뉴스거리가 되는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래서 힘이 바뀌는 지점에, 그 틈새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충성을 다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고 직분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부터 시작해서 벨사살 왕을 섬겼고, 바벨론이 망한 후에 메대사람 고레스왕이 다스릴 때 까지 왕조가 여러차례 바뀌었어도 변함없이 인정을 받으면서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8)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형통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우연히 종합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병원에서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일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 판정이 나면 그 다음에는 꿈도 비젼도, 가정도, 직장도, 가족도, 친구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돈도 소용없고, 인기도 소용없습니다. 좋은집, 좋은차, 좋은음식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암 말기 판정을 받으면 병원에 가서 옷을 홀랑 벗기고 환자복을 입고 풀이 죽어서 지내다가 심해지면 결국 수의로 갈아입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 만명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일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살아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괜찮겠지!”하고 살아 가다가 순식간에 인생에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일이 벌어져도 요동치 않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지금 “현재”를 영어로는 “프레젠트”(present)” 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다른 뜻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기도하면서 준비하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기도에는 기적을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람은 밤중에 벗을 찾아가서 떡을 좀 달라고 강청합니다.
5절로 6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런데 이 친구는 거절을 합니다. 밤도 늦고 식구들이 모두다 누워 자니 미안하지만 못주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떡을 구하러 온 친구가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간청을 하면서 애걸하자 결국 이 친구가 떡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간청이라는 단어 입니다.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떡을 좀 달라고 “간청”(boldness)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간청이라는 헬라어의 본래 뜻은 “아나이데이아”인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파렴치한 처럼 생떼를 쓰는 것”을 간청이라고 합니다. 때와 장소, 또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가시게 구는 것이 간청입니다. 즉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이 간청입니다.
이것은 첫째, 체면 불구하고 강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살전5:17)
큰 교회의 목사님들은 청년들의 결혼 주례 때문에 부담을 느낀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일정이 워낙 바쁠 뿐 아니라, 누구는 해 주고 누구는 주례를 안 해 줄수 없어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주례를 부목사님들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목사님들은 신랑신부들이 주례를 부탁하러 오면 “아! 참 미안하게 됐네! 워낙 일정이 바뻐서 도저히 안되겠네!”하면 청년들이 “아 그러세요! 그러면 할 수 없죠 뭐! 저희들이 목사님을 안 봐드리면 누가 봐 드리겠어요!” 하면서 그냥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하고 돌아가면 목사님들이 정작 고마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저렇게 해서 무슨 복을 받겠는가?”라고 생각들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담임목사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조르면서 결혼 날짜를 담임 목사님의 일정에 맞추겠다고 고집하는 신랑신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두사람이 “목사님이 아니면 저희들은 결혼을 안하겠습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목사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목사님이 해 주십시요”하면서 생떼를 쓰면서 강청하는 커플이 있는데 그런데 목사님들은 오히려 이런 커플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한두번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걸 보니까 하나님이 바쁘신 것 같네요! 제가 하나님을 귀찮게 하면 하나님도 불편하실 테니까 하나님이 안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다시는 기도를 안 한다면 응답은 꽝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귀찮을 정도로 달라고 간구해라, 특별히 성령에 대해서는 더 그렇게 기도해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을 달라고 부르짖어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간청하는 기도를 계속해서 반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북극지방 사람들이 늑대를 잡는 방법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쉽게 늑대를 잡습니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칼에 피를 흠뻑 묻힌 다음에 이것을 얼립니다. 그리고 칼날을 위쪽으로 향하게 하고, 칼의 손잡이는 얼어붙은 땅속에 박아 놓습니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피가묻어있는 칼날을 핥는데 날카로운 칼날을 핥다 보면 자기 혓바닥에서 피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추위에 혀를 핥으니까 혀가 얼어서 무감각해서 아픈줄 모르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피에 도취해서 계속 칼날을 핥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피를 흘린 늑대가 죽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같이 술과 마약과 죄악에 중독이 되어서 살아 갑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감각하게 하루 하루 신앙생활을 반복하다보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무기력한 신앙이 됩니다. 신앙이 무기력해지면 의미없이 살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둘러서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우리는 2015년도에 만사를 제쳐놓고 성령충만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디애나 존스라는 영화에 보면 엄청난 거인이 큰 칼을 들고 나와서 주인공 존스 박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 거인은 “넌 이제 죽었다!”라는 표정으로 큰 칼을 들고 나와서 존스박사를 죽이려고 다가 옵니다. 그때 존스박사가 놀래서 당황하다가 자기 품에 권총이 있는것을 알고서 권총을 꺼내서 빵 쏘니까 큰 칼을 든 거인이 쿵 하고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그때 존스 박사의 표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쓰러진 거인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과 더불어, 자기가 이긴것이 놀랍고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총을 드려다 보면서 씩 웃습니다. 제 아무리 큰 칼을 가진 거인도 총을 가진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속박을 당하기를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안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등록을 안하고 다니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종교가 자신을 속박한다고 생각해서 종교를 원치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를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마귀를 이기고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시려고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 주변에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이지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홀로 신앙을 가진 사람치고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믿음생활을 하지 않으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어떤 군인이 총을 메고 전쟁터에 나갔는데 “당신이 소속한 부대는 어딥니까?” 라고 물었더니 “나는 부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혼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대답 한다면 그사람은 온전한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영적 군사들입니다. 나홀로 신앙은 언제나 사탄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공격목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 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 라고 증거 했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보면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동물은 항상 무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풀을 뜯는 동물이 사자에게 잡혀 먹힙니다. 군락속에서 함께 무리지어 있는 곳에는 사자라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TV나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치고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시험에 들면 대부분이 교회를 안나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꼴보기 싫은 사람들을 안보니까 마음이 시원할지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마귀의 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떠났더라도 반드시 다른 교회라도 나가야 합니다. 혼자서 나홀로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병든 신앙인이 됩니다. 나홀로 신앙인은 빛을 발하지도 못하고 칭찬과 인정도 받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곳에는 축복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 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감옥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기뻐하라”라고 권면 할 수가 있었습니다.
조엘 오스틴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자기 교회에 대기업 회사의 전무였던 40대 남자가 혈압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자 그는 신앙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 매일같이 원망 불평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를 간호하던 부인조차 남편의 원망과 불평을 견딜 수 없어서 더 이상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병원의 원목이 찾아와서 “그렇게 원망 불평만 하지 말고 살아오면서 당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에게 감사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께서 감동 하셨는지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누가 있나?” 하고 생각을 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도무지 감사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수성가 해서 이렇게 성공을 했는데!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나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하면서 도와준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고 나니까 이제는 부인도 친구도 자식도 목사도 그 누구도 고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밤에 잠이 안와서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여 선생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에 집안도 가난하고 초라한 학생이었던 자기에게 늘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셨던 선생님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그 여선생님의 사랑과 위로가 있었기에 자기가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성공해서 대기업의 중역까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는 항상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깊이 생각해 보니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신 것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그는 초등학교에 수소문을 해서 물어 물어 드디어 그 선생님의 주소를 알아내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스티브입니다. 저는 지금 반신불수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선생님은 저에게 둘도 없는 은사님 이십니다. 제가 성공해서 대기업의 중역이 된 것은 선생님의 사랑과 위로와 권면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고 감사도 드리지 못하고 무심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뒤늦게 선생님의 사랑이 생각나서 편지를 올립니다. 진작에 선생님을 찾아 뵙고 감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이제야 편지로나마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비록 병상에서 드리는 감사 인사지만 제 마음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감사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외롭게 지내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편지를 받고나서 얼마후에 제자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스티브에게, 평생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를 받아본것은 이번이 처음 이라오! 그대가 보내준 편지는 이제 늙어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노인이 된 나를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해 준 편지 였답니다! 나는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 편지를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이제는 그대가 보낸 편지를 내 침대 옆에 놓고 매일같이 한 번씩 읽고 있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대에게 감사한답니다! 그대가 보낸 이 편지 한 장이 나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답니다! 나는 그대의 편지를 교편생활의 열매와 보람으로 알고 죽는 날까지 간직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는데, 그대의 편지를 받은 그날부터 그대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줄 믿습니다! 스티브! 힘을 내기 바랍니다! 그대의 오래된 선생님이”
반신불수로 날마다 원망불평만 하고있던 이 사람이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가 피어 올랐습니다.
“선생님도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구나!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어도 감사편지 한 장 보내준 제자가 없었구나! 내 편지 한통을 받고 이렇게 고마워 하시다니 게다가 나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를 해 주신다니, 나도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된 그는 다음날 아침에 원목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 후에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원목 목사님이 간절하게 기도를 해 주셨고 성령께서 임하셔서 큰 은혜가 넘쳤습니다.
이 분이 담임 목사님께도 연락을 해서 기도를 부탁 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도 오셔서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환자가 비로소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동안은 원말 불평만 하면서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걷는 연습과 말하는 연습도 열심히 하면서 하루 하루를 주님과 동행 했더니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더니 6개월 후에는 완전한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복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회복된 것은 첫째,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을 기억하고 감사할 때 인생이 새로워 졌고, 둘째 믿음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이와같은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면 공허가 떠나갑니다. 성령충만하면 인생이 기쁘고 범사가 형통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다시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간청하면 복이 임합니다.
대전 중앙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신성종목사님의 간증입니다. 한 집사님이 정말 무식하고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제가 우리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하게 해 주세요” 이분이 시마다 때마다 철야 기도때에도 오직 이 기도만 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를 했는데 결국 이분이 나중에 최고로 십일조를 많이내는 집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분명히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라는 말씀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928년 뉴욕 브르클린의 플리마우스(Plymouth)교회에서 한 흑인 할머니 성도가 예배가 끝날 때 쯤 손을 들고 목사님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제가 오늘 간증좀 하게 해주세요” 그 모습이 너무도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했습니다.
앞으로 나온 그녀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68년 전인 1860년 9월 19일날,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이 교회 앞마당에서 노예 시장이 열렸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팔려갔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려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하는 생각에 초조하여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목사님이 나오시더니 목사님이 800달러를 지불하시고 저를 사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날 아침에 목사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성령님께서 감동하시기를 “너희가 한사람이라도 사서 자유를 주어라” 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중에 성도들에게 “우리가 헌금을 해서 노예를 한 사람이라도 사서 그에게 자유를 줍시다”라고 제안을 했고 그날 성도들이 헌금한 돈을 가지고 저를 사서 풀어주신 것을 뒤늦게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자유인이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남의집 식모로 시작해서, 가게의 점원으로, 호텔 청소부로 살면서 생계를 연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슨일이 있어도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68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시간이 날때마다 교회의 주방에서 봉사하고, 청소도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이제 제가 나이 많아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이 사실을 여러분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를 자유인이 되게 해 주신, 돌아가신 원로 목사님과 제가 노예로 팔려가는날 저를 사는데 헌금을 해 주셨던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자유를 주셔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면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
교회를 통해서 자유를 얻은 그녀는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평생동안 그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노예로 살아야할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도 죄의 노예, 악의 노예,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불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해서 속량금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다 치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몸바쳐 나를 사셨기에, 내 생명을 속량해 주셨기에 그 속량의 은혜로 우리가 금생과 내세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 은혜를 깨닫고 평생동안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날 아침에 목사님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한 사람의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한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따라 기도하면 마귀에게 속한 영혼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조건 이득입니다. 결코 손해가 없습니다. 기도는 축복을 불러오는 통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그중에 최고의 선물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사슬이 풀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있고 우리 속에서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고, 물질 축복을 받고, 승진하고 합격하는 것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기도하면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영이 나가기도 합니다. 악한 영이 나가는 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그것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면 술과 마약과 음란을 끊게되고 경건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해서 들어오는 것은 육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이고 성령을 받고 악령이 나가는 것은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 두가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급할 때만 사용하는 비상벨이 아닙니다. 매일 샘솟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시대가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이끄시는 방법은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로 세상을 바꾸시고 기도로 병을 치료하시고 기도로 온갖 기적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한동대학은 처음부터 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세울 때 학교를 세운 기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세웠는데 기숙사를 세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대학교에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기탁금제도를 적용한 것입니다.
기숙사에 입사 할 때 100만원을 기탁하면 졸업할 때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의무는 아니고 자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교생을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기숙사가 모자라자 학생들 30%가 기숙사에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기준을 정했습니다. 기탁금을 낸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배정받는 우선권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학생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의를 제기 했습니다. “한동대학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세상방식으로 선정하면 안 되고 도리어 반대로 기탁금을 내지 못한 가난한 학생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기탁금을 낸 학생들을 내보내고 가난한 학생들을 우선해서 기숙사에 들여보내 주십시요”라고 상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이 받아드려졌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들이 기숙사에 남고 부요한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나갔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이게 웰빙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바꿉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기도로 종겨개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매일 두 시간씩 기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귀에게 질 수밖에 없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마룻바닥에 기도하는 자리가 새겨질 정도로 기도를 했다고 전해 집니다. 예수님도 습관적으로 감람산을 찾아서 기도를 하셨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눅22:39) 이처럼 기도하면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서 식사를 조절하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저녁 6시 이후에는 안 먹으려고 노력하고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합니다. TV를 볼 때에도 가만히 앉아서 보면 엉덩이가 퍼진다고 다리를 움직이면서 쉴 새 없이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운동할 시간은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TV 보고 컴퓨터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예쁘게 치장을 할 시간은 있어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자동차와 비교하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급해도 기름이 없으면 차가 가지 않습니다. 주유소에 들러서 반드시 기름을 넣어야 차가 움직입니다. 기도는 주유소에 들러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의 기름이 충만해져서 성령께서 형통한 길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에 바빠서 기름넣으러 갈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무용지물이듯이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성도로 전락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기도하지 않고 사업을 잘 해 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로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도와 주시지 않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라고 증거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어요. 지혜가 부족합니다. 도와 주세요 인도해 주세요” 하고 무릎 꿇어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수 없이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님에게도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세요? 날씨 추운데 따뜻하게 입으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프신 데는 없으세요?”라고 하면서 늘 부모님께 안부를 묻고 평소에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2~3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뭔가를 도와달라고 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괘씸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4장2절에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령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이와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신학교에서는 신학은 깊이 있게 연구를 하지만 성령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만큼이나 인간의 이성(理性)을 중요시 합니다. 눌린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 신학교 출신들은 술도 잘 마시고 사회의 잘못된 것을 보면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데모를 하다가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들은 이름없는 민중들을 사랑하는 정의감에 불타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신학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바람직스러운 신학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성기도를 하지 않고 성령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꼭 그렇게 소리 내서 요란을 떨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통성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성령충만을 받으라!”라는 말입니다. 신학교에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을 무시하는 신학교는 이 학교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인데, 왜 따로 또 성령을 받아야 하는거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믿은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았고, 또 성령 자체가 인격자이신데, 성령을 무슨 물건처럼 달라고 떼를 쓰는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좀 유치한 것처럼 여기는 풍토가 그 내면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믿고 성령이 내주한다고 해서 다시 성령을 구하지 않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몇주동안 살펴본 말씀에도 나오는 것처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성령충만은 반드시 받아야 하고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두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면 모두가 인정하는 부부가 됩니다. 그러나 결혼이 전부는 아닙니다. 결혼을 했으면 그때부터 한 가정을 이루고 계속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 하셨고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성령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셨지만 우리 안에서 성령이 더 크게 역사하시려면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즉 성령이 내 속에서 내 영혼을 지배하고,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도록,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그 죄를 계속 반복해서 범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가 지겹고 찬양이 기쁘지 않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일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거나 목사님과 교류가 없고, 형제자매와 화목하지 않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못하는 분도 성령충만을 받아야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성령충만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선물은 성령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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