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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년3월4일수요저녁 시32:1-7 죄사함 받은자의 행복

그리운시냇가 2015. 3. 5. 23:13

전에 이란에서 샴 쌍둥이 자매가 태어나서 29년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샴쌍둥이로 태어난 라단 비자니와, 라엘 비자니 자매는 태어날 때 몸은 두 개인데 두 개의 머리가 뒤통수쪽이 붙은채로 태어 났습니다.

 

자매는 몸은 두사람인데 머리가 붙어서 태어 났기에 화장실을 갈 때도 두 사람이 같이 가야만 했고 잠을 잘 때도 같이 자야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같이 만나러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두 자매는 인생 전체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좋은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가 붙어 있어서 시험을 볼 때에는 머리가 붙어 있어서 서로 답을 주고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늘 함께 시험을 치르다 보니까 두 자매 모두 변호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습니다.

 

붙은 몸으로 살아오던 두 자매가 29년만에 분리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부모는 결사 반대를 했고 독일의 의사들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했지만 그들은 그동안 살아 오는 동안에 붙어서 살다 보니까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고 또 두 사람이 서로 꿈이 다르다 보니까 자기들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와서 분리 수술을 받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 중 언니인 라단 비자니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라서 분리되면 자기는 법률가로 활동하겠다고 고백했고, 동생인 랄레 비자니는 테헤란에서 기자 생활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두 자매는 자기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건 분리 수술을 결단했습니다. 수술은 싱가포르에 있는 래플즈 병원에서 28명의 전문의와 100여명의 보조 인력이 참여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엉킨 뇌를 분리하는 2단계 수술이 끝날 무렵에 먼저 라단 비자니가 숨졌고, 이어서 두시간 후에 랄레 비자니도 숨졌습니다. 그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수술을 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29년간 함께 붙어서 지내는 동안에 두 자매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29년동안 고통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 두 자매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죄에게 사로잡혀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끌고 다니면서 인생 전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죄는 처음에는 기쁨을 주는 것 같고 행복을 주는 것 같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수치를 가져다주고 나중에는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시편32편에 보면 죄에 대한 네 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1절과 같이 허물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허물은 히브리어로 페솨인데 하나님을 떠나서 내멋대로 사는 반역의 삶을 말합니다.

 

두 번째 죄는 역시 1절의 자신의 죄입니다. 이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아인데 과녁을 벗어났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과 교만함 속에서 살고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2절과 같이 간사함의 죄입니다. 간사함은 히브리어로 레미야인데 자기기만이라는 말입니다. 속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죄를 말합니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까지 하고도 양심을 속이고 계속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상한 음식이나 독약을 먹으면 토해내야 살 수 있는데 그대로 있으면 죽게 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의 죄를 은폐하고 숨기고 모른척 합니다. 그러나 죄를 품고는 복을 받을수도 없고 천국에 가지도 못합니다.

 

네 번째 죄는 5절에 나오는 죄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여기서 죄악은 히브리어로 아온인데 마음이 꼬인 것, 즉 구부러진 심보를 말합니다. 뭐든지 의심하고 뭐든지 나쁘게 보고 뭐든지 악담하고 뭐든지 비판하고 뭐든지 훼방합니다.

 

마귀가 들어있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합니다. 마음이 사탄마귀에게 붙잡혀서 꼬여 있기에 언행심사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런 사람은 악한 귀신이 들려 있기에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상처를 해결하지 못해서 큰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기에 죄를 짓고, 자기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죄성 때문에 죄를 짓고, 그리고 마귀에서 사로잡혀 있기에 온갖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를 지어놓고 나서, 이런 악한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지존파를 만들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여섯명은 현실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다가 살인집단인 지존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서울대 뿐만 아니라 고려대, 동국대, 한성대등에서 부자들이 돈으로 자기 자녀들을 부정입학시킨 사건이 터졌습니다. 광운대는 9293년도에 1억원씩 낸 수험생 68명의 답안지를 총장 지시로 조작해서 부정입학을 시켰고, 경원대도 수험생 17명의 부모로부터 총 7억원을 받고 성적을 조작해서 부정입학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전국의 수 많은 대학에서 부정입학사건이 터졌고 일류대로 이름난 대학교수와, 고교교사와, 학원에서 서로 짜고 수험생 한명당 300015000만원씩의 돈을 받고 대학에 부정입학을 시켰습니다.

 

90년대에는 수도권에 아파트 붐이 불면서 땅을 가진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보상금으로 수백억대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졸지에 엄청난 부자가 된 그들의 자식들은 오렌지족, 야타족이 되어서 고급차를 몰고 다니면서 "야~타!" 하면서 젊은 여자들을 유혹했고 그들이 방탕과 타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지존파 일당 여섯명은 하나같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이 같이 흥청망청 사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마음껏 쓰고 즐기는 자들과 자신들을 비교 하면서 그들을 점점 미워했습니다.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는 질투하는 죄입니다. 심리학 교수 살로비(P. Salovey) 박사는 범죄의 3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강조합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행위의 요인이 됩니다.

 

질투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농부가 농사를 잘 지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회사원이 동네 식료품점이 잘된다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다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질투의 불길이 가까운 관계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그 불꽃이 더욱 사나워집니다. 부부관계, 친구관계에서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그 질투의 불길 때문에 큰 환란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그레고리 화이트(Gregory L. White) 박사는 이혼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지적합니다. 질투는 상대와 비교로 인한 열등감에서 출발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의 축복을 주시고, 나에게 한 달란트밖에 안주셨나?” 하면서 불만을 가지면 질투하게 됩니다.

 

얼마를 받았든지 하나님께서 적당한 것을 나에게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한 달란트의 가치를 땅에 묻어버리게 됩니다.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는 메시야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그 이유는 경제 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고 시기 질투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만 따르니까 시기질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한 목사님이 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느낀 결론은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가 전혀 없었다라는 결론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시기 질투 때문에 망합니다.

 

시기질투에 빠지면 이성을 잃게 됩니다. 부자들은 잘살고 자기들은 못사는게 억울하고 분했던 지존파 대장 김기환은 부자들에 대한 시기질투와 더불어 부정입학등 빗나간 사회상에 화가나서 학교후배 강동은과, 교도소 동기 문상록과 함께 모여서 부자들의 부정입시와 그들의 흥청망청한 삶에 대해서 성토를 하다가 부자들을 죽여 없애기로 결심을 하고 지존파를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1993년에 부자들을 살인할 목적으로 지존파가 결성 됩니다. 두목은 스물 여섯 살의 김기환이었고, 강동은과 김현양 그리고 문상록과 백병옥까지 다섯사람은 절도와 강도등으로 감옥살이를 한 전과자들입니다. 그리고 강문섭을 포섭해서 모두 여섯명이 지존파에 가입합니다.

 

이들은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목표는 “1인당 10억씩 모을때까지 살인을 계속한다입니다. 부자를 죽여서 돈을 뺐는데 일인당 10억이 모일때까지 사람을 죽이기로 목표를 세우고 그때부터 살인과 시체유기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4가지 강령을 만들었습니다. 1.우리는 부자들을 증오한다. 2.각자 10억씩 모을 때까지 범행은 계속한다. 3.배반자는 처형한다. 4.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않는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않는다는 마지막 조항을 집어넣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조항을 넣은 것입니다.

 

이들은 범행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서울강남의 현대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그들을 범행대상으로 삼기로 합니다이들은 살인을 위한 아지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여섯명이 한달동안 막노동을 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에 있는 한 주택의 지하실을 빌려서 그곳에 창살감옥을 만들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한 소각시설을 만들었습니다외부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전력검침기까지 만들어놓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본격적인 살인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19937월달에 살인 예행연습 차원에서 대상을 물색하다가 충청남도 논산(현 계룡시)의 두계역(현 계룡역) 부근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퇴근한 후에 혼자 걸어가던 23세 최미자양을 납치하여 여섯명이 차례로 강간하고 죽여서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서 땅을 파고 암매장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살인은 이들의 범죄행각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탈한 조직원 송봉은을 찾아가서 그를 전남 영광에서 살해 한 후에 산으로 옮겨서 암매장했습니다.

 

이어서 19949월달에 그들은 경기도 양수리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두사람의 연인이 차안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납치 합니다. 남자는 이종원씨(당시 36)였는데 서울강남구 역삼동 카페에서 밴드 마스터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었고 여자는 같은 카페의 종업원으로 있던 이모양인데(당시 27) 두사람은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경기도 양평군 와부읍 양수리에 드라이브를 하러 갔다가 지존파에게 붙잡혀서 그들의 아지트인 전남 영광으로 끌려 갔습니다.

 

지존파는 남자를 묶어놓은 후에  그의 애인인 이모씨를 차례로 성폭행했습니다. 그들은 이종원씨를 살해해서 차에 싣고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장수군의 낭떠러지로 가서 이종원씨를 운전석에 앉히고 차를 밀어서 낭떠러지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이종원씨를 죽여서 낭떠러지로 떨어뜨린 후에 그의 연인이었던 이양도 죽이려고 했는데 이양이 제발 살려 달라고 애절하게 빌면서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하자 그들은 이양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지존파 서열 두 번째인 김현양이 이양에게 애정을 품게되어 이양을 남겨두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문상록은 여자는 믿을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죽여야 한다고 하자 김현양이 문상록과 함께 멱살을 잡고 몸싸움을 벌였는데 김현양이 이기는 바람에 결국 여자는 살아남게 됩니다.

 

이종원을 죽인 그들은 다시 닷새후에 1994913일 경기도 성남시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좋은 차를 타고가는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마침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소윤오사장과 그의 아내 박미자씨가 당시에 가장 좋은 차였던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성묘를 한 후에 귀가 하다가 지존파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지존파는 길에서 차를 막아서서 그들을 납치하여 그들을 전남 영광의 아지트로 데리고 갔습니다. 소윤오 부부는 지존파에게 협박을 당해서 1억원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틀후에 지존파는 죽은 이종원씨의 애인이었던 이양에게 공기총을 주어서 소윤오사장을 쏘아 죽이도록 했습니다.

 

지존파가 이양에게 공기총을 주어서 살인을 저지르게 한 이유는, 만일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양에게 살인을 시켜서 범죄자가 되게 하여 신고를 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자기들처럼 살인범죄에 가담했다는 심적부담을 주기 위해서 그녀에게 총을 주어 소윤오사장을 쏘아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윤오사장의 아내인 박미자씨는 지존파가 칼과 도끼로 살해해서 죽였습니다. 박미자씨가 죽자 김현양은 박미자씨의 시신에서 인육을 도려내어 구워 먹고 소윤오씨의 시체와 박미자씨의 시체를 태워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람타는 냄새를 몰라보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태우는 동안에 삼겹살을 사다가 사람을 태우는 옆에서 구워 먹었습니다.

 

이들의 범행이 탄로 난 것은 1994915일 김현양이가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다가 실수하여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9946월달에 두목 김기환이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모 경찰서 형사들에게 검거가 되어서 오랜시간동안 힘들게 조사를 받았었는데, 김현양은 두목을 괴롭힌 경찰서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보복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지존파 조직원인 김기현이 강원도 삼척에서 잠시 광부로 있다가 그만두면서 몰래 가지고 나온 다이너마이트가 있어서 그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조작 을 하다가 다이너마이트가 폭발을 하는 바람에 김현양이 머리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김현양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전라남도 영광군에 있는 영광종합병원으로 갔는데 그때 인질 여자인 이양과 동행했습니다. 지존파와 김현양은, 이양이 이미 살인에 가담을 했고 또 자기들과 함께 지내면서 말을 잘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양을 믿고 자기가 치료를 받는 동안에 핸드폰과 치료비 50만원을 이양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이양은 김현양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에 병원에서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이양이 공포에 떨면서 빨리 가자고 하자 택시기사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이양은 폭력배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폭력배는 내가 다 안다고 하면서 무슨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양은 택시기사도 지존파와 한패가 아닌가?” 라는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근처의 포도밭에 내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양은 택시에서 내려서 포도밭 주인에게 달려갔고 그에게 부탁하여 다른 택시를 불러서 그 택시를 타고 대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대전에서 다시 택시를 바꿔 타고 서울로 와서 서초경찰서로 가서 자초지종을 신고 했습니다. 서초경찰서 형사들은 이양이 가져온 핸드폰 메시지와 전화번호로 아지트를 확인하고 1994920일 지존파 일당 6명을 모두 검거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만약에 양수리에서 납치했던 이양을 이종원씨와 함께 죽였다면 이들의 범행은 언제까지 계속 되었을지 모릅니다. 김현양이 이양을 살려 두었기에, 그리고 그녀가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검거할 수가 있었고 그들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은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지존파 6명은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1995112일 서울구치소에서 모두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체포된 후에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살인의 이유를 묻자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 때문에 살인을 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모든 책임을 사회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했습니다.

 

두목 김기환은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자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현양은 체포된 후에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 죽여서 한이 된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김현양이 그런 충격적인 발언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양의 어머니는 복잡한 남자관계로 늘 집을 비우고 김현양을 내깔려 두었고 그래서 김현양은 그런 어머니를 지켜 보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차 있었고 어머니도 죽이고 싶은 사람중에 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히틀러도 중학교때 어머니가 이웃집 아저씨와 불륜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부터 성품이 어그러지고 파괴적인 성격으로 변한것처럼 김현양도 그런 배경속에서 자라나는 동안에 안면수심의 성품을 키워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장편 소설에 보면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초인주의사상에 빠집니다. 선택된 의인, 선택된 강자는 죄를 짓는다 해도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그 죄는 선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수전노에 자기밖에 모르는 전당포 주인을 죽이고 그를 살해한 후에 그의 돈을 훔쳐서 좋은 일을 해 보겠다고 작정을 합니다.

 

라스꼴리코프는 어느날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고 돈을 훔쳐서 자기의 계획을 실천해 나가지만 결국은 살인자라는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 때문에 점점 몰락해 가고 맙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로운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죄는 죄입니다. 죄는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후에 그 죄 때문에 몸부림을 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23절로 4절에 보면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32:3-4) 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이름이 800번 정도 등장하는데 예수님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인물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워 집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다윗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까? 그 이유는 다윗이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고 다윗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다윗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와 간통하고 임신까지 시키고 부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버젓이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여 희희낙낙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양과 소를 많이 가진 어느 부자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 집안에 있는 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가난한 농부가 기르는, 한 마리 밖에 없는 양을 빼앗아서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부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노발대발하면서 내가 다스리는 이 나라에 그런 인간이 살다니 당장 죽여 마땅하도다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위로 다윗에게 선언 합니다. “그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바로 악한 부자처럼 행동한 사람입니다 남의 여인을 빼앗아 품에안고 악을 행한자가 당신입니다”(삼하12:7-12)

 

그 말을 들은 다윗은 성령의 비수에 찔린 듯 충격을 받고 그길로 자신을 돌아 보면서 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회개한 다윗을 용서하신 후에 그를 기쁘게 받으시고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종 다윗은 정직한 자다라고 칭찬하셧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자기의 죄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짓는 사람은 미워하시지만 회개하는 자는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앞에서 죄를 지은후에 철저하게 회개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죄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수년전에 제가 한가지 그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박물관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에 보면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서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왕보다 교황이 더 높은 사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앞을 주교가 가로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지금부터 약 1600년 전인, A.D 390년경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데살로니가를 다스리던 로마 장군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이 살해되자 잔혹한 보복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이 장군을 살해한 지역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화를 불러 일으킬수도 있다는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황제가 보복명령을 철회 했습니다그러나 이미 그곳에서는 1500명이나 되는 데살로니가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를 방문했는데 주일이 되어서 밀라노성당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 성당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습니다. 그는 중세의 성자 어거스틴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위대한 주교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성당에 나타나자 성당 정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데살로니가에서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않고는 이 성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결국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을 듣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참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성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서 용서받는 곳입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참회시를 살펴 보면 다윗은 종일 신음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 뼈가 쇠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몸이 지옥에 빠져드는 고통이 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짓고난 후에 뼈까지 쑤시는 아픔이 계속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내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 나니 영적인 자신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죄는 인생의 모든 행복을 뺏어가고 죄책감과 두려움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고통입니다.

 

이런때에 은혜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회개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11절로 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려주셨기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범죄의 현장에 벼락이 떨어졌다면 여기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은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다윗은 회개할 기회를 얻어서 모든 은혜를 회복하고 의인이 됩니다. 다윗은 사죄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6절로 7절에서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32:6-7)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보혈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할 때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네 죄를 옮기리라” “네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1:9)

 

다윗은 회개와 참회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참회시들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서도 밧세바를 원망한적이 없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밧세바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데, 창문을 열어 놓았기에 다윗이 그 광경을 보고 범죄한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다윗이 늘 산책을 하던 왕궁 성벽에서 잘 내려다 보이는 거리에 있었던 밧세바의 집에서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하려고 창문을 열어놓고 목욕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목욕을 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밧세바가 먼저 죄를 지을 동기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한번도 밧세바를 정죄하거나 너 때문에 내가 범죄했다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잘못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라고 고백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에게도 일절 섭섭함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점이 다윗의 훌륭한 점입니다. 다윗은 내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아니하고 그와 원수삼지도 아니하고 그에게 보복하지도 아니하고 겸손하게 그의 말을 받아드리고 회개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가장 잘못하는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다윗같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하는 것이 있어서 주님의 마음으로 권면하고 이야기를 하면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좀 잘해 보자고 권면을 하거나 때로 문제가 생겼을때 지적을 하면 그길로 무조건 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도 한번 삐지면 자존심이 상해서 꼴도 안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잘못 하고도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하지않고 돌이키지도 않으니까 교회를 옮겨 가서도 여전히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을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설령 마음에 안들어서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로 갔더라도 내가 잘못했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목사님의 말이 맞았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회개하고 돌아 오거나 아니면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다시 시작한 그 교회에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후에 회개도 하지않고 오히려 여기가서 비방하고 저기가서 비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은커녕 시험과 환란과 고통의 연단을 주십니다.

 

핑계를 대는 사람치고 제대로된 신앙인은 없습니다. “당신이 그러니까 내가 시험에 들었다! 난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핑계를 대는 사람은 가도 가도 고난과 환란 뿐입니다.

 

다윗은 잘못했을 때, 그리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을 당했을 때, 핑계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진심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더욱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악랄하게 사람들을 죽인 지존파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사형언도를 받고 여섯명 전원이 1995112일날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까지 그들이 12개월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그 기간에 한 목사님이 그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믿고 회개하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명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나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처럼 순하고 겸손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 했기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비록 사형을 당했지만 모두가 죄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시편 32편을 인용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로마서46절로 8절에서 이렇게 인용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람의 원죄를 딱 두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원죄의 속성은 불신앙과 교만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불신앙과 교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쉬운 말로 의심하는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계속 흔들리면서 의심만 합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진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행복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면 복을 받게 됩니다. 믿고 겸손하면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겸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기본 속성입니다.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늘 불안하고 긴장되고 누가 건드리면 튀고 아무것도 아닌일에 상처를 받고 삐지고 도무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교만과 쓸데없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죄인 이라는 깊은 자각을 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회개 해 본 경험이 없기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행복하려면 회개와 더불어 죄사함의 은총, 즉 사유하심의 은총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감사 감격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크리스챤입니다. 그런 죄사함의 감격을 가진 사람만이 충성되고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죄를 안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말씀 하시면서 먹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먹어라 안 죽는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결국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다시 그 선악과를 따서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인 아담이 받아 먹었습니다.

 

아담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자가 잘못 했으면 여보! 어쩌자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어! 이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 당신 잘못했으니 회개해!”라고 하면서 책망을 하고, 아담도 책임을 통감하고 같이 회개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와 똑 같습니다. 하와가 주니까 그냥 받아먹었습니다. 전해오는 속담에는 이런내용이 있습니다. 아담이 여보 당신 그걸 먹으면 죽는다고 했으니까 당신은 이제 죽을거야!” 그랬더니, 하와가 하는 말이 그래 좋겠수다! 나는 죽을테니까 딴 여자하고 잘 살아 보세요!”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아이고 차라리 당신하고 같이 죽자!”하고 아담도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은 것 같아도 불의와 화합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에 화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아내가 잘못하면 아내를 돌이키게 만들고 남편이 잘못하면 남편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훌륭한 신앙입니다.

 

남편이 잘못 하는데도 무조건 남편 역성을 들면서 남편에게 동조하면서 따라가면 같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두려움이 왔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있는데 회개는 없었습니다. 변명은 있었는데 진실은 없었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책임을 전가만 했지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 잘못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와는 뱀이 먹으래서 먹었습니다라고 했고 아담은 아내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 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원죄부터 시작해서 모든 죄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보혈의 공로는 모든 죄를 정결케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온갖 축복은 회개한 자에게 임합니다. 성령도 은혜도 영육간의 축복도 회개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한창 종교개혁을 준행할 때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마르틴 루터를 정죄하기 시작 했습니다. “너같은 죄인이 무슨 종교 개혁을 한다는 거냐?” 하면서 마귀가 조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꿈에 마귀가 나타 났는데 손에 큰 책이 한권 들려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 책을 펼치자 그 책에는 마틴 루터가 살아 오면서 지은 온갖 허물과 죄가 가득 가득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마귀는 그 죄의 목록을 보여 주면서 이런 죄인인 네가 종교개혁을 해 웃기지 마라하면서 조롱을 했습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셨다 어디 한번 나를 정죄해 봐라! 나는 절대로 너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그러자 마귀는 예수의 피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아무리 큰 죄도 씻겨주고 그 어떤 죄도 정결케 해 줍니다. 보혈의 피로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보혈의 공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체험하지 못하면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을 정죄하고 부모를 정죄하고 남을 정죄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보혈의 공로를 체험한 사람은 모든 관계에서 허물과 약점을 가리워주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체험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큰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는지를 알기에 늘 겸손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서 이 성당을 찾아 왔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 이 사람과 마주 앉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거울을 자주 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거울을 보면서 제가 너무 아름답다고 뽐내고 있습니다. 제 교만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신부가 커튼을 잠깐 올린 다음에 이 여인을 한번 힐끗 들여다보고 나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그것은 죄가 아니라 착각입니다 그러니 맘 편안하게 먹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안다, 안다 하면서도 제일 모르는 게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나를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내 속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내 자신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늘 의심하고 불신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됩니다.

 

야곱은 40세가 되기까지 꿈을 품고 죽어라고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라본 것이 무엇입니까? 장자권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탐낸 이유는 장자에게 23배의 재산을 물려주던 고대 근동세계의 풍습에 따라서 아버지 이삭의 부유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장자권을 탐내면서 살아 왔습니다.

 

야곱은 오직 물질의 축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거짓을 일삼고, 잔꾀를 부리고, 술수를 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처없는 내쫓김과 돌베개와 외로움과 가난과 눈물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야곱처럼 살아갑니다. 인생 역전을 위해서 돈에 목을걸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더 이상 돈에 목을 걸고 사는 사람이 되지말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도록 꿈속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축복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크게 흥분하고 기뻐합니다.

 

야곱이 평생에 처음으로 크게 흥분하고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물질세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꿈을 통해서 비로소 야곱은 , 축복은 영적세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었구나” “축복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복을 주시기도 하고 심판하시기도 하는 하나님을 알면 복을 받는 비결을 알게 됩니다.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법 제도가, 판사나 검사를 하다가 그 다음에 옷을 벗으면 변호사를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입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를 먼저하다가 변호사를 잘하면 그 다음에 판사 검사가 됩니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건 사고들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제대로, 올바로 판결할 수 있는 판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한 젊은 변호사님이 계셨는데 아주 의협심이 강하고 특별히 미성년자들을 사랑하는 변호사였습니다. 이 분이 무료 변론을 많이 했습니다. 미성년자로서 범죄한 젊은이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불우한 한 소년은 이 변호사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또 재범을 해서 재판을 받으러 왔습니다. 변호사님은 그 소년을 위해서 또 무료 변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타이르고 설득하여 올바로 살 도록 도왔습니다. 그렇게 그 소년을 여러차례나 도와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이 변호사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재판을 하려고 재판정에 앉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청년이 재판을 받으려고 와 있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가 여러번이나 도와 주었던 그 소년이 청년이 되어서 재판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 청년은 오래 전부터 자기를 도와준 변호사가 판사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반가왔습니다. 이 청년이 이번에는 사람을 죽이고 재판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를 도와 준 판사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판사님, 한 번만 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판사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내가 변호사였을 때 나는 자네를 도와주려고 무진 애를 썼었지! 그러나 자네는 나의 충고와 사랑을 외면하고 또 범죄하고, 또 범죄하면서 지냈지! 그러나 오늘은 내가 변호사로 자네를 만난 것이 아니라 판사로서 자네를 만나고 있다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한 판결뿐일세 자네의 죄목을 살펴보니 자네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네 그러니 자네에게 사형을 언도할수밖에 없네, 이 죄수에게 사형을 선고 한다!”

 

이 재판광경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재판광경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변호사요 재판장이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즉시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변호사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변호해 주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을때까지 나의 변호사가 되셔서 도와 주시고 마지막 재판정에서도 나를 변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내멋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심판의 주님으로 만날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산 사람은 심판날에 심판장으로 앉아 계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지옥형벌이다라는 선언을 듣게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애원해도 구원의 여망은 없습니다.

 

끝으로 무슨 악한 죄를 지어서만 죄가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옳은 일을 하지 않는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나의 평안 나의 안일 나의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사는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도 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의 마음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죄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런 죄는 보통 죄가 아니라 저주 받을 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31-45)

 

구원은 우리의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선행과 사랑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증거 합니다(2:26)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고전13:2).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했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표식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13:16).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중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선한 일을 일체 행하지 않다가 결국 영벌에 들어간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동정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저주 받을 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값싼 은혜(cheap grace)의 종교도 아니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명목적인 믿음(formal, ritual, nominal faith)의 종교도 아닙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3).

 

기독교는 눈물과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구제와 봉사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10:4).

 

아무쪼록 우리는 견고한 믿음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함으로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그리고 선행의 믿음도 겸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어느쪽의 경중을 따져서 구원하신다 해도 아무 거리낌이 없이 구원의 축복속에서 영생을 누리고 상급까지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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