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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년6월28일주일낮 마태복음5장1-12 화평하게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운시냇가 2015. 6. 28. 15:57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때부터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라이트교수전쟁의 연구라는책에 보면 1480년도부터 1941년까지 약 460년 동안에 인류는 400번에 걸쳐서 전쟁을 치렀다고 증거 합니다. “왜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느냐?”라는 물음에 그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참으로 모순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와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북한의 핵 문제입니다. 핵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전쟁의 두려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와(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도시), 이슬람교와(무하마드가 승천했다고 믿는 도시) 그리고 유대교가(다윗이 세우고 다스린 도시) 성지로 생각하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살렘,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인데 살렘평화라는 뜻이고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그 어떤 도시보다 전쟁과 학살, 역모와 갈등으로 얼룩진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이 많았기에 평화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도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두껍고 견고한 장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민족 외에 모든 다른민족을 야만인으로 여겼습니다. 자기들은 선택받은 민족 즉 선민이라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가장 안쪽에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는데 그 뜰에는 제사장 지파인 레위족만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스라엘백성중에 남자들만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인들의 뜰이 있어서 이스라엘 여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의 뜰 다음에는 1.5m 높이의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그 바깥쪽으로 이방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성전에서 가장 멀리있는 여자들의 뜰보다도 훨씬 바깥쪽에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오직 이 이방인의 뜰 까지만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에 이방인이 그곳을 통과해서 이스라엘 여자들의 뜰이나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로 들어가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셉푸스에 의하면 유대인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구내에 이방인이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라는 경고문이 붙여져 있었다고 그는 기록해 놓았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외에 다른 민족은 저주받은 사람들로 여겼기에 이방인은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습니다.

 

이방인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어떤 고통을 받아도 절대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의 그리스-로마인들은 이와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유대인들을 야만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류의 역사나 문화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되기에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는 반 유대주의가 서구인들의 의식속에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와같이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던 시대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첫 번째 팔복설교를 하시면서 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선민도 없고 잘난 민족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화평케 하고 나라를 화평케 하고 공동체를 화평케 하고 가족을 화평케 하고 갈등과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은 진리를 깨닳은 바울사도는 그리스에 세워진 에베소교회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 버리셨으니”(2:13-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가 바로 원수된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크게는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려고 돌아 가셨고 두 번째는 민족과 민족 개인과 개인의 갈등과 원수된 관계를 풀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미국에는 우체국에 우표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전이나 지폐를 넣고 누르면 우표가 나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우표를 사려고 긴 줄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저 자판기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으시면 우표를 구할수 있어요하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가 하는 말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 우표 자판기는 저에게 관심이 없답니다. 우표를 파는 저 직원 아가씨는 나를 만나면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프지는 않으셨어요? 하고 묻지만 저 자판기는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아요라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 할머니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생은 나누는 것입니다. 교감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단순하게 어떤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코이노니아(koinonia) 즉 교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 동시에 성도들이 삶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이 말을 쉽게 바꾸어서 말하면 교회는 형제님, 자매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디 아프지는 않으셨어요?”라는 대화와 사랑과 돌봄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하나가 됩니다.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신앙공동체로 지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화평의 코이노니아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다 해도 거듭나기 전 까지는 아직도 우리안에 존재하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죄의 본성이 화평을 깨뜨리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를 망쳐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었다고해서 당장 예수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거듭나게 해 주셔야 비로소 예수님처럼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예수믿고 거듭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네가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19:41-42)

 

유대인들은 세계 그 어느나라보다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은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마다 샬롬이라는 말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샬롬이 바로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 샬롬은 그리스 말로는 에이레네이고 영어로는 “peace”입니다. 즉 화평을 이루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사람들도 가장 좋아하던 가훈이 바로 가화 만사성”(家和萬事成)입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다 성취 된다라는 말입니다. 성경 잠언에 보면 마른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것이 육고기가 가득 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 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로 하신 팔복설교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화평하게 하는자는 헬라어로 에이레노 포이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평화를 만들어 가는자”(peace makes)입니다. 그러니까 화평하게 하는자는 수동적으로 평화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앉아서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서로 싸우고 갈등이 생겼을 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겠지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분한일을 당해도 나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인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날 제가 우리교회의 마당을 진흙밭으로 만들고도 계속해서 저를 피곤하게 했던 사람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제가 신경을 썼더니 제 집사림이 저에게 "목사님이 속이 상해도 용서하시고 축복하세요"라고 조언을 해서 제가 먼저 그분을 찾아가서 대화를 하고 화해를 한 후에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영국에서 시골에 살던 두 젊은이가 런던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시골에서도 교회를 다녔기에 도시로 옮겨와서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교회는 시골 교회와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시골교회에서는 서로 서로 다 알고 지내기에 교회에 오면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나 도시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헤어지기에 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일 년 가까이 교회에 출석했지만 아무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런 행복과 의미를 찾지 못한 두 사람은 교회를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 나가는 것을 그만 두기로 작정했고 또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은 다음주에도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자 그 주부터 교회를 떠났습니다. 또 한 사람은 아무도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자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예배후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마침내 그 교회에 정착했고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님입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적즉적으로 화평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적극적인 화평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백스터 목사님은 수백년간 풀리지 않았던 청교도와 영국성공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크게 일조 했습니다. 목사님의 명저인 성도의 영원한 평안이라는 책은 다섯 번이나 재판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 했습니다.

 

백스터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닳은 사람은 상대방이 사랑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화평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자는 세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화평이고, 셋째는 자기자신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으면 살아 생전에 지은 모든죄를 사함받고 천국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죄가 쌓이고 쌓여서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은 욕심과 고집이 점점 많아 집니다.

 

화이트”(W.R.White) 라는 분이 사람의 진짜 속마음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서로 경쟁을 하면서 장사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장사를 하면서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늘 서로 마주보면서 시기질투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저 가게가 망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보내서 서로 화해를 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가게 주인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큰 선물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훌륭한 자녀를 원하면 훌륭한 자녀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나중에 고백하는 사람은 먼저 고백한 사람보다 두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먼저 금 100돈을 구한사람은 금 100돈을 선물로 받고 나중 사람은 금 200돈을 얻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축복하시기로 작정 하셨는데 먼저 복을 구하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시지만 상대방에게는 두배의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말을 들은 가게 주인들이 두배의 복을 받고 싶어서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더니 결심하듯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요

 

자기의 한쪽눈이 멀면 상대방은 두배가 되기에 두 눈이 멀어 버립니다. 이 상인은 자기 앞에서 장사하는 저 앞집이 복을 받고 잘되는 꼴을 보기가 싫어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하는데도, 먼저 자기의 한쪽눈을 멀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상대방이 두 눈이 다 멀어버리게 하려고 그런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복을 준다해도 복보다는 상대방이 망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악한속성을 꼬집은 이야기입니다.

 

한편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부부가 오랫동안 서로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을 결정하고 물건을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살림을 나누는데 그릇도 나누고 남비도 나누고 이불도 나누어 가졌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 년 전에 병으로 불행하게 죽은 아들의 유품이었습니다. 아들이 죽고난 후에 부부는 아들이 쓰던 물건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날까봐서 아들의 유품을 다 없앴습니다. 그런데 정리하다 보니까 서랍 깊숙한 곳에서 아들의 일기장이 나왔습니다.

 

부부는 이 일기장을 서로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싸웠습니다. 그아들의 유일한 유품 이었기에 서로 가지려고 싸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일기장을 반으로 잘라서 나눠 갖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일기장을 반으로 짜르려고 가운데를 펼쳤는데 일기장에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엄마 제발 싸우지 마세요 행복하게 사세요 아빠 엄마가 행복하게 사시기만 한다면 저는 죽어도 행복할 거예요

 

아들이 써 놓은 일기장을 읽은 두 부부는 목이 메어서 말없이 있다가 둘다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후에 서로 화해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가 죽은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줍시다하면서 다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죽어서도 화평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로 인해서 형제가 화목하고 동서지간에 화목하고 부모자식이 화목하고 이웃간에 화목해 진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손경미 사모님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암이 전이가 되어서 여섯 번의 재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머릿속에도 콩알만한 종양이 자라서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손경미사모는 처음에는 속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탄식도 했지만 그러나 기도중에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암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닳았습니다. 그래서 아시안 암 환우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손경미사모님은 죽게된 마당이지만 암 환자들을 찾아가서 전도를 시작 했습니다. 암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일반 사람이 찾아가면 만나 주지도 않고 전도해도 말을 듣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암 환자를 찾아가서 자기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전도를 했더니 많은 암 환자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손경미사모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에게 힘이 될게요(WITH YOU)”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고백하기를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는 저에게 암이 온 것을 알고 원망과 충격과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내려놓은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암 환자가 아닐때는 암 환자에게 전도하러 가도 거절만 당했지만 내가 암 환자가 된 후에는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암 환자도 나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들과 진실한 소통을 하고 위로도 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경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커튼 뒤에 행복을 숨겨두셨습니다라고 그녀는 고백을 했습니다.

 

세계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UN대표들을 찾아가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각국을 대표하여 이곳에 모여서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여러분이 아무리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해도 여러분을 통해서는 세계 평화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당연한 말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오셔야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찬양을 한 곡 같이 부르겠습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네

주는 내 맘의 주인 되시었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주님이 날 구하시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주님 없는 세상 전쟁과 싸움뿐

사람들은 무서워 떠네

평화의 주님이 다시 올때까지

죄와 전쟁은 끝이 없네

오 주없이 살수 없네

오직 주께만 구원 있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없이 살수 없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안(살롬)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설교에서 하신 말씀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것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로 하신 설교도 평화에 대한 설교이고 마지막으로 하신 설교도 평화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서 삽니까? 왜 늘 걱정과 근심속에서 살고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죄악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면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악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전에 60세가 가까운 경찰이 다방에 출입하다가 다방에서 일하는 21살 나이의 아가씨와 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가씨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그녀를 찾아가서 총으로 그녀를 쏘았습니다. 다행히 그녀가 죽지는 않았지만 크게 중상을 입었습니다.

 

법원에서 판사는 그 경찰에게 당신은 왜 그녀에게 총을 쏘았습니까? 사랑했다면 끝까지 축복하고 잘되도록 도와주는게 사람의 도리 아닙니까? 당신은 왜 딸같이 어린 여자를 탐내서 범행을 저질렀습니까?”

 

그러자 경찰관의 대답이 이렇했습니다. “내 마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내마음을 나도 어쩔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죄를 범하는 것이 죄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목사라도 타락해서 범죄하고, 장로라도 천국문을 막고서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성경은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믿고 성령을 받아서 늘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따라 감정따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화평을 누리면서 살고 또 화평을 만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לוֹ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날 때 샬롬으로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샬롬으로 헤어집니다. 화평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 샬롬, 즉 평안이 없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샬롬의 모음이 변해서 셀렘이 되면 셀렘은 화목제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셀렘이 다시 실렘으로 변하면 댓가를 지불하다라는 동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셀렘”(화목제물)으로 오셔서 실렘”(대속)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내 대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하시고 화목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화 평안을 맛보면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던 예루살렘 총독관저를 옮겨다가 지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루터는 의롭게 되기 원하여 무릎으로 힘들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힘들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루터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내가 의로워진 것이지 이렇게 고행이나 선을 행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깨닳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벌떡 일어나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루터는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후에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참된 평화와 행복의 길로 인도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종종 말씀드리는 예화입니다.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로 이사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교회를 갈까 하고 고민하다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나갔는데 마침 사거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사방 네군데에 높은 종탑의 큰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통경찰에게 저는 이곳에 이사를 왔는데 좋은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면 가르쳐 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경찰이 저 교회로 가시면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하고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사람은 그 경찰이 가르쳐 주는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경찰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경찰에게 좋은 교회를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보니까 목사님께서 설교를 참 잘하시더군요 당신도 저 교회를 가 보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수십년간 교통경찰로 일을 하다 보니까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과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을 매번 보게 되는데 제가 말씀드린 그 교회의 성도들은 언제 보아도 얼굴이 행복하고 평화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내 얼굴이 그 교회의 얼굴입니다. 내 얼굴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내 얼굴이 험상궂고 늘 원망불평이 가득하면 그 교회는 그렇고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절대로 가면 안됩니다. 잘못가면 실족해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 믿고도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거나 집안이 평화롭지 못하면 예수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피스 메이커입니다. 예수 믿었으면 나도 평안하고 남도 평안하게 만들어야 진짜 크리츠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항상 평안 속에서 살고 평화를 만드는 성도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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