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권옥란권사님께서 중참으로 수박을 한통 사오셨습니다. 박양순집사님께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유모차를 끌고 교회에 오셔서 50만원의 건축헌금을 건네 주셨습니다.
박양순집사님은 아들이 일주일에 두 번 삼천포에 투석을 하러 다니시기에 병원비로 많은 지출을 하셔서 건축헌금을 더 많이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박양순집사님의 50만원은 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귀한 헌금입니다. 어려운 중에도 성전건축을 위하여 헌신해 주신 박양순집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박천엽집사님께서 오늘 새벽에 중참비로 쓰라고 10만원을 건네 주셨습니다. 요즘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주사를 맞으면 천오백원의 병원비가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골에서 10만원은 매일 병원에 다니면서 주사맞고 물리치료를 받는다 해도 60일분의 병원비입니다. 귀한 사랑으로 섬겨 주시는 성도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하영순권사님 아들 김명준성도님께서 멀리 거제에서 수박 두통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멀리서 본 교회를 방문해 주신 김명준성도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지난주에 나영이 할머니와 진목에 사시는 나영이 할머니 친구분께서 금음집의 풀을 다 뽑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영순권사님께서 지난주에 금음집에 가셔서 간절히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기도해 주신 하영순권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정평관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큰 길쪽의 교회 입구에서부터 저 아랬쪽 개울가의 논쪽으로 다리가 있는 곳 까지 아스콘 포장 견적을 냈는데 200평 을 포장하는데 1500만원의 견적이 나왔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집사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정평관집사님께서 우리 남해세광교회의 건축을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일일이 챙겨 주시고 후원해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과 통화를 하다가 그만 목이 메서 말을 못하고 있었더니 집사님이 알아 채시고 바쁜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나중에 다시 통화를 하자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다가 집사님과 통화를 한 후에 전화를 끊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고, 또 지금도 살고 있지만 정평관집사님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집사님이요 하나님께서도 특심한 사랑으로 정평관집사님을 사랑하실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정효범성도님을 구원시켜 주신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시고 530평의 집과 땅을 명예이전해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7500만원을 들여서 집을 수리해 주시고 별채를 지어 주시고 2층 정자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곳에 가구와 소파와 텔레비전과 에어컨까지 설치해 주시고 일년에 몇 번씩 기백만원의 용돈을 주시고, 수천만원의 건축헌금을 해 주시고, 이제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실내 인테리어공사까지 후원해 주시고, 그리고 예배당 철거와 주차장 포장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시장조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어찌 제가 울지 않을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평관집사님께 60배 100배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금주에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박경호사장님과 서용원사장님께서 보내주신 인테리어 목수님들이 얼마나 일을 잘 하시는지 이틀만에 본당 벽체 공사를 거의 다 마치고 벌써 천정 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건축을 하면서 일하시는 분들이 술을 달라고 해서 술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도 술을 드렸더니 높은 곳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거절을 하셨습니다.
오늘 전기공사 사장님이 견적을 주셨습니다. 평당 14만원의 견적을 주셨습니다. 70평이면 전기공사비가 980만원입니다. LED 전등 130개를 구입하면 150만원이 더 추가가 됩니다. 그리고 방통공사 공사비가 200만원이고, 예배당 바닥 타일 및 화장실 도기타일 공사비가 500만원, 철거비용 1300만원, 주차장250평 포장 공사비가 2000만원, 십자가 종탑이 1000만원, 큰길쪽 교회 싸인과 성구부착 철탑공사비가 300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셔서 이 모든 공사비를 넘치도록 후원해 주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다만 이중에서 제가 1000만원이 들어가는 십자가종탑 공사 한가지만 성도님중에 한분이 헌신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헌신 하시고 복을 받으시라고 특별히 기회를 드린 것입니다.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에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에 앉아 있는데 혼자서 심심한데다가 속도 좀 허해서 과자 1봉지와 신문을 샀습니다.
그리고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신문을 펼쳐들고 읽으면서 과자를 먹으려고 하는데, 자기 옆자리에 앉아있는 점잖게 생긴 신사분이 자기가 사가지고 온 과자를 먼저 집어 먹더랍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신사분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사가 씽긋 미소를 띠우더니 연신 과자를 허락도 없이 집어 먹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집사가 치사하게 과자 한봉지 때문에 그 신사분에게 뭐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그냥 참고 자기도 과자를 얼른 집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사도 먹고 자기도 먹는데 과자가 없어기지 전에 자기가 더 많이 먹으려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습니다. 그래서 신사가 한 번 먹고, 집사님이 한 번 먹고 둘이서 먹다 보니까 어느덧 과자 1봉지가 훌쩍 비워졌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봉지안에 과자가 딱 한개가 남았더랍니다. 그런데 이 신사분이 그 과자를 얼른 집더니 반을 딱 갈라서 반쪽을 자기가 먹고, 나머지 반쪽은 과자봉지에 놓아두더랍니다. 그리고 빙긋 미소를 짓고는 일어나서 저쪽으로 가버리더랍니다.
이 집사님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남의 과자를 말도 없이 처먹고 가면서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가?” “정말 오늘 재수 옴붙었네!”하면서 아주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에이 그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참아야지”하면서 루즈를 다시 바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아! 세상에 이런일이? 가방을 열고 보니까 아까 신문과 함께 산 과자가 가방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사님이 신문을 보면서 씩씩 거리면서 열심히 집어먹은 과자가 자기 과자가 아니라 그 신사분의 과자였던 것입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서 그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그 신사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웬 여자가 자기 옆에 앉더니 신문을 펼쳐들고 자기 과자를 허락도 없이 집어 먹는데 자기를 힐끗 째려 보더니 자기보다 더 빨리 먹으려고 연신 손을 과자봉지에 넣어서 과자를 먹습니다.
그러니 그 신사가 볼때는 “아니 이 여자가 옷은 멀쩡하게 차려입고 공항까지 와서 염치도 없이 남의 과자를 제멋대로 먹어?” 하면서 단단이 화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신사분은 오히려 빙그레 웃으면서 과자를 착하게 나누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그나마 예수님 때문에 참았기에 망정이지 “왜 내 과자를 허락도 없이 먹는 겁니까?”하고 큰소리를 냈다면 이 집사님은 많은 사람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참고 인내 했기에 망신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 성품을 잘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어제 새벽예배가 끝난후에 제 집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어서 제가 언성을 높였습니다. 환기를 시킨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는데 제가 언성을 높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인테리어 목수님 두분이 6시30분이 조금 지났는데 벌써 오셨습니다. 그렇게 일찍 오실줄 알았으면 조심해야 하는건데 그것도 모르고 제 집사람에게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두분이 벌써 와서 계신 것을 알고서 제가 민망해서 두분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 인격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제가 사과를 드렸더니 제 집사람이 얼른 그분들에게 “제가 가끔 이렇게 목사님에게 야단 맞을 짓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제 집사람도 사과를 했습니다.
목사와 사모는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살아야 하는데 평소에 훈련이 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교회 앞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드럼을 치고 물을 받았는데 그 흙탕물이 넘쳐서 교회 아랬쪽 마당이 완전 흙으로 진흙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아랫 마당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번도 그런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한달 전에 주일날 교회로 들어오는 길에 경운기를 세워 놓았길래 제가 차량운행을 하면서 성도님들을 모시고 오다가 차를 세우고 그분에게 경운기를 좀 빼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멀리 계셔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분이 논 저 끝에 계셔서 어쩔수 없이 큰소리로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그때 그분이 제가 멀리서 소리를 지르니까 마음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인사를 해도 받지않고 밭에서 두 부부가 일을 하면 종종 음료수와 빵을 가져가서 드리기도 하는데 음료수와 간식을 드려도 아내는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데 그분은 저를 쳐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젊은 목사가 건방지게 자기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마음이 상하셨는지 인사도 잘 받지않고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드럼을 치는날 흙탕물을 내 보내서 교회 아랫마당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나가서 진흙뻘이 되어버린 교회의 아랫마당을 한참동안 살펴 보면서 마음이 상했지만 그분에게 아무말도 안하고 들어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줄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을 빌미삼아서 남을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사고를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늙은 부모를 학대하면서, 성전에 가서 헌금만 두둑하게 내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이스 즉 헬라와, 로마 사람들은 애를 낳았는데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그냥 하수구에 내다 버리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비정하고 냉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삭막하고 강퍅한 세상에 오셔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요즘 잘 안 쓰는 고어가(古語)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긍휼이라는 말은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긍휼이라고 합니다.
긍휼은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그만큼 긍휼은 폭이 넓고 심오한 마음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또 한가지 단어는 “동일시”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에 서서 그사람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여기고 그를 도와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자기를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당하셨습니다(히4:15)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특별히 긍휼히 여기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장 긍휼히 여겼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다가 지옥불로 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두 번째로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 받고 천대 받는 죄인들, 귀신 들린 자,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원수들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후에 자기를 못밖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인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시편145편 8절에 보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성를 바라보시면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고 죄악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2-24).
이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맏아들은 돌아온 탕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했지만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최상으로 선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많고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더욱 사랑하시고 죄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긍휼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남편 다섯을 두었다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그 불행한 여인도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 “너희 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긍휼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 드려서 복 받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하나도 고맙지 않다 오히려 긍휼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어떤 부자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일만 달란 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만달란트는 천만불 우리돈으로 하면 7조원입니다. 그러니 죽을때까지 갚아도 못갚습니다.
그런데 빚진 사람이 울면서 사정을 하니까 주인이 불쌍히 여기고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고맙고 인사를 하고 부자집 문을 나갔는데 나가자 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20만원쯤 되는 돈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20만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빚을 갚아! 안갚으면 고소한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이사람이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곧 갚겠습니다” 하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그의 멱살을 잡고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해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자가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내가 네게 긍휼을 베 풀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왜 긍휼을 베풀 줄을 모르느냐, 내가 너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그러면서 부자는 그를 고소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죄값으로 하면 지옥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기에 내 죄가 사함받았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내 죄의 빛이 일만 달란트인데 그 죄의 빚을 예수님이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 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공로도 보상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 뿐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베푸는 마음의 기본적 자세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몇 달 동안 놀았습니다. 초조하게 지내다가 어느날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 시험을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부지런히 가는데 한 중년부인이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요즘은 보험회사에서 다 처리해 주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제도가 없었기에 그 여자는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이 사람이 그걸 보고서 “아무리 바빠도 그냥 갈순 없지”하고는 차를 멈추고 그 중년부인을 도와 주었습니다.
결국 시간에 늦어서 인사과에 들어갔더니 “시간이 늦었습니다. 당신의 면접순서가 끝났습니다” 합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한 여자가 나오는데 보니까 그 여자가 바로 자기가 타이어를 교체해준 여자입니다.
그 여자는 그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마치면 최종 결정을 하는 결정권자가 그녀 였습니다. 그녀가 이사람을 보더니 “여기 웬일이세요?” 합니다. 그래서 “오늘 면접인데 오다가 타이어를 갈아 드리느라 지체가 되었습니다. 이젠 늦었다네요” 했더니 그여자가 “이분 지금 당장 제방으로 들여 보내세요”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 방으로 들어갔더니 “내일부터 출근 하세요 당신같은 사람은 무조건 합격입니다” 그래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오늘 긍휼을 베풀고 당장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안이루어져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푼 사람에게 반드시 긍휼을 되갚아 주십니다. 긍휼을 베푸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일 뿐더러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활화 되어야 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17세기 이후부터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진주와 금과 다이아몬드를 가져 갔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가서 보니까 얼굴이 새까만 흑인들이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야만인들이 살고 있었구나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이구나 하고는 강제로 잡아다가 전부 종으로, 흑노(黑奴)로 매매를 했습니다. 그래서 흑노 무역 사업이 성행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잔인하고 멸시하는 태도로 흑인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를 향해서 간 리빙스턴이나 그 외의 모든 선교사들은 그들을 불쌍한 눈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하면서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몸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한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건져 냈지만 그 양은 가시덤불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여러 곳을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해서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짤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빠진 털을 쪼아서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가시에 붙은 양털을 한입 가득 물고서 날아갔습니다.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작은 새는 이 가시에서 집을 지을 털을 가져 가네요 아빠 이 가시나무 자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나 가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실 정도로 긍휼하신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오기까지 심판하실 때까지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뽑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아니하면 어떤 흉악한 일에 휘말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고백하기를 “저 같이 부족한 종이 날마다 엎드려서 고백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목사지만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내가 오늘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거룩하게 앉아서 기도만 한다 해도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마만큼 행복하게 사는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고 또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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