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온다고 해서 주차장 공사를 미뤘습니다. 다행히 태풍이 비켜 지나가서 농사짓는 분들도 큰 어려움없이 마무리를 했습니다. 오늘 이성길과장님이 와서 전기공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십자가종탑의 타이머도 달고 식당의 계량기도 전신주에서부터 잘 연결해 주고 그리고 식당에 스피커를 연결할수 있더록 배선도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이제 예배당에 관계된 공사는 모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주차장 공사만 끝내면 모든 공사가 마무리가 됩니다.
윤인준집사님께서 준공검사를 위해서 수고해 주실 계획입니다. 전기공사를 맡은 김원수사장님께서 아직 전기통신허가서를 만들어주질 않아서 준공검사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서류가 완성되는 대로 준공검사신청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준공검사가 잘 나도록 기도 바랍니다.
오늘 김상철성도님께서 삼치 한타래를 가져오셨습니다. 몇주전에 김상철성도님께서 삼치 한타래를 가져 오셔서 삼치 김치찌개를 해서 성도들을 대접을 했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모두가 삼치찌개로 잔치를 했습니다. 바다에서 금방잡아올린 싱싱한 삼치로 김치찌개를 끓이니까 별미중에 별미였습니다.
남해에 교회가 많은데도 남해세광교회를 택하신 김상철성도님께서 저와 마음을 같이 해 주셔서 노인들을 섬기는 일에 사명을 다하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일평생 라이온스 클럽에서 사회 봉사를 하면서 지내오신 김상철성도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내 이름을 내는 봉사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봉사는 금생과 내세에 복을 받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돈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꼭 돈이 많다고 해서 다 행복 한 것은 아닙니다.
전에 소개한 두가지 예화를 다시 소개합니다. 칠십 삼세된 부자 할머니가 한강에 투신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6000억원대의 재산가 였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어디다 쓸지 모를 정도로 부자 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돈 많은 재벌 남편이 그녀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부와 함께 좋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이 할머니에게는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40대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는데 이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별다른 직업이 없이 지내던 아들은 그때부터 부자 어머니를 찾아와서 돈을 타다가 썼습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툭하면 어머니에게 와서 돈을 타다 쓰는것을 알게 된 두 누나들이 은근히 속이 상했습니다. 저렇게 남동생이 곳감 빼먹듯이 어머니의 돈을 다 축내면 자기들에게 돌아올 유산이 점점 없어질것이 뻔하기에 누나들이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아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종주목을 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누나들이 너에게 돈 주는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더이상 돈가지러 오지 말아라!”라고 아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화가나서 누나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그때부터 형제들이 원수가 되었고 어머니는 자식들의 싸움에 큰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자녀들이 돈 때문에 원수가 되어서 서로 미워하면서 싸우고 오직 자기가 가진 돈에 만 눈독을 드리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크게 낙심해서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강에 가서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두 딸은 남동생이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다고 증언을 했고, 아들 역시 누나들이 어머니를 꼬드겨서 어머니의 돈을 쌈짓돈 빼가듯 가져다 썼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은후에 조사를 해 보니까 큰 딸도 어머니집에서 도장을 훔쳐다가 어머니 통장에서 수천만원씩 여러번이나 도둑질해서 쓴 것이 발견 되었고 작은딸도 어머니를 강권해서 수천만원씩 뜯어간것이 발견 되었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돈 때문에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집안은 돈 때문에 재앙과 저주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자도 있습니다. 영국의 시골에서 한 여자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름없는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그녀는 두 가지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졸업하던 그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른 그녀는 슬픈 마음을 안고 직장에 들어갔는데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임시직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에 일을 잘 못한다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녀는 낙담 했지만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서 새로운 직장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신문의 구직란을 살펴 보는데 마침 포르투칼에 영어교육 바람이 불어서 영어 강사를 구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포루투갈로 건너 갔습니다. 그녀는 영어 강사가 되어서 열심히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한 신문사에 다니는 멋진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제시카라는 예쁜딸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3년만에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녀는 결국 남편과 헤어진후에 어린 딸을 데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시골에 방 한칸을 얻어서 딸과 함께 근근히 살았습니다.
그녀는 어린 딸을 키워야 했기에 직장에도 나갈수가 없어서 3년 동안 정부에서 주는 영세민 생활 보조금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부모도 돌아가시고 직장도 잃고 가정도 잃고 사랑도 잃고 모든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소망을 잃지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자기가 꿈꾸던 동화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가지고 산책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쓰기 시작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책을 통해서 얻은 간접 경험과 더불어 자기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글을 쓰기 시작 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드디어 3년만에 완성된 자기의 원고를 들고 무작정 한 출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출판사의 편집장은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가난한 무명작가의 원고를 읽어 보더니 “이 원고는 책은 고사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원고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출판사를 찾아 다니면서 계속 섭외를 했습니다. 그런데 “블룸스웰 출판사”라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그녀의 원고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그녀의 원고를 책으로 출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원고가 책으로 출판 되자 마자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과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책은 한국에서도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해리포터 마법사 이야기” 라는 책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한 아이가 고난을 딛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성공이야기가 바로 해리포터 마법사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해 졌는지, 영국이 세계적인 문학가 톨스토이를 배출한 이래 최고의 경이적인 출판기록을 세우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 소설로 인해서 영국은 다시한번 전 세계에 문학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로를 인정한 영국정부는 그녀에게 공작에 버금가는 높은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는 그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 했습니다. 2001년 3월달에 그녀는 버킹엄 왕궁에서 찰스 왕세자로부터 대영제국 최고의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저명인사를 선정하는 <포브스>지 가 그녀를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 중에서 25위를 수여했고 책 판매와 영화 판권으로 인해서 영국에서 2002년도에 여성으로는 최고의 돈을 번 사람이 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만 들어가는 부호 클럽에 합류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인생의 비극을 극복하고 위대한 소설가가 된 이 여인이 바로 “조 롤링”이라는 여인입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직장에서는 쫓겨나고, 가정은 파탄나서 이혼을 당하고, 그리고 청운의 꿈을품고 이민을 갔다가 결국 이혼을 당하고 빈털털이로 고향에 돌아 왔지만 그러나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를 찾아서 애쓴결과 그녀는 결국 인생의 대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녀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조실부모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런 위대한 소설을 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아픔이 있었기에 그 모든 과정을 밑걸음으로 해서 그런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인생에 실패하고, 인간 관계에 실패하고, 신앙에 실패한 베드로가 등장 합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능력많은 예수님을 만나서 흥분과 감격속에서 큰 기대와 꿈을 가지고 새 출발 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는 어부로 살았던 베드로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인생의 서광이 비칠때가 있구나”하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치유와 이적을 통하여 주님의 모든 영광에 동참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위대하신 예수님이 힘없이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사형선도를 받는 모습을 지켜본 베드로는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게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자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일이 잘 풀리고 범사가 형통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인기와 명예와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 신나게 지내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장관자리 하나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거기서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냐? 너도 그 당이라!” 라고 떠들어대자 그 여종의 말에 놀랜 베드로는 “난 예수님을 모른다! 절대로 모른다!”라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해 돌아가시자 베드로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때 베드로는 생각 하기를 “내가 기대했던 축복은 오지않고 모든 꿈은 물건너 갔구나! 나도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겠구나” 라는 공포심에 두려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와같이 죽음의 공포는 사람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하고 죽기로 각오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약해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큰 일을 해 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시절에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자기 아들을 최 전방에 나가서 싸우게 했습니다. 아들이 죽으면 후계자가 없어지는 엄청난 모험입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기 아들을 최전방에 내 보내서 전쟁을 하자 모든 병사들이 크게 용기를 내서 싸웠고 결국 영국은 그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할 때에도 일본의 4성 장군인 노기가 자기의 두 아들을 최 전방에 내 보내서 싸우게 했습니다. 부하들이 적극 말리자 노기는 “내 아들이 귀하다면 남의 아들도 귀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는 뜻을 굽히지 않고 두 아들을 최전방에 내 보냈습니다. 결국 노기의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그 소식을 들은 일본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당하지 못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생명을 걸고 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생명을 걸고 사회정의를 외친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토마스모어는 당시의 왕이었던 헨리 8세의 학정을 지적하면서 왕이 바른 정치를 하게 하려고 유토피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에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열세번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재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다가 처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모어가 어느날 갑자기 왕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외쳤습니다.
“당신이 사람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 모어는 왕을 모욕하다가 잡혀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 단두대가 만들어졌고 토마스모어가 처형을 당하는날 목을 치는 사람은 얼굴에 수건을 쓰고 칼을 들고 섰습니다. 그런데 칼을 든 사람이 토마스 모어에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수건을 써서 선생님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선생님이 국무총리로 있을 때 제가 왕궁의 수문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가정이 많이 어려웠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근위대 장교로 승진시켜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제가 선생님을 죽이는 자리에 섰으니 이를 어쩌겠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요!”
그 때 토마스 모어는 “장교! 그런 걱정마시오! 당신이 나를 죽이면 내가 하나님을 빨리 만날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라오 아무 걱정말고 임무를 준행하시오 내가 죽음으로서 왕이 변화될 수 만 있다면 나는 백번이라도 죽을거요”
그 말을 남기고 토마스모어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토마스모어를 그 누구보다 더 존경하고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의미없는 사람입니다. 너 살고 나 죽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 살리려고 내가 죽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같은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옳은길을 가셨기에 천하 만민이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 이십니다. 믿기만 하면 만복이 선물로 주어 집니다.
8.15해방후에 공산당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고 6.25전쟁이 터졌을 때 북한에서 땅을 많이 가졌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고 땅이 많아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한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오늘날 모두가 복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 때문에 재산 때문에 망설이다가 북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70년동안 공산치하의 생지옥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고수하려고 다 버리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시지만 복음전파에 생명을 건 사람에게는 별과같이 빛나는 축복을 주십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려고 수천리 먼길까지 다니면서 애를 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에베소까지 수천리 먼길을 간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3년동안 선교사역을 마친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인들과 헤어지면서 이제 이 이별은 다시 볼수 없는 이별임을 직시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행20:18-25)
바울사도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도 생명구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소망교회의 이정신 집사님은 하루에 일곱사람을 만나서 전도지를 7장씩 나누어 주기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앉아 있는 사람에게만 전도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서 있는 사람이 전도지를 받으면 대부분 버리지만, 차안이고 공원이고 앉아 있는 사람은 전도지를 받고 한번은 읽어보기 때문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책에 전도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매일 기도를 했는데 성경책에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한 사람들이 3년만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간증을 한 분도 있습니다.
어떤분은 전도가 하고 싶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전도할 사람 집에 매일 찾아갔는데 작은 선물을 들고 갔다고 합니다. 사과 한 개, 빵 한 개, 파 한뿌리 등을 들고 찾아가서 이야기만 하다가 왔는 데 그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떤분은 정말 말주변이 없어서 그 집앞에 가서 일년동안 예수 믿으라고 대문에 십자가만 그리고 왔는데 그사람도 예수를 믿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영혼구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그 일에 전심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복음이 아닌 인간의 사상과 사탄마귀의 사상으로 염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홀린세이”라는 분은 “악령의 세계”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오늘날 세상에서 복음을 파괴하는 6가지 사상을 지적했습니다.
홀린세이는 이 사상을 “사상 폭탄”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을 죽이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사상이기에 사상폭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첫째는 칸트의 철학입니다. 칸트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고 정반합의 과정에 기초를 둔 철학을 구사 했습니다.
두 번재는 헤겔의 사상입니다. 헤겔의 철학은 칼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결국 공산주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지옥을 부흥시킨 마귀의 앞잡이가 바로 헤겔입니다.
세 번째는 키엘 케콜의 실존주의입니다. 키엘케골은 하나님을 인정 하면서도 칸트와 헤겔을 신학에 섞어서 비 복음적인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네 번째는 칼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사상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 공산주의를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 했지만 결국 실패 했습니다.
다섯번째는 찰스 다아윈의 진화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해악을 끼친 이론이 바로 다아윈의 진화론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근본적으로 배격하고 철저하게 비성서적인 이론을 만들어서 인류의 절반을 지옥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여섯 번째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입니다. 그는 인간이 성에서 시작하여 성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성적인 학문을 고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악한 사상들과 싸우면서 성경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할 사상과 교훈은 오직 성경밖에 없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무장해서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부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기도한 기도자들의 행전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전도자들의 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일에 생명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삭은 100살에 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정말 이삭을 죽이려고 그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이 사건을 알게된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구전이 전해집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까지 가서 이삭을 바치려고 하다가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다시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 사건의 전모를 들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너무나 놀래서 비명을 지르고 기절하여 죽었다고 전해 집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치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두려워서 예수님을 떠나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베드로는 “이제 나는 예전처럼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노라” 라고 푸념을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자기가 누리던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것이 실패가 아니라, 사명과 꿈이 사라진것이 실패 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과 꿈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래서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 가시자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과 비젼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라고 고백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의 인생은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중년 남성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음식이 곰국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아내가 곰국을 한 솥 끓이기 시작하면 남편들이 불안해 합니다. 곰국은 한번 끓여놓으면, 몇날 며칠동안 계속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내가 곰국을 끓인다는 것은 그거 한솥 끓여놓고 친구들이랑 며칠 놀러가겠다는 것이기에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떠나서 놀러가는 게 뭐가 두렵습니까? 아내가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면 언젠가 나를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 빈자리 때문에 당황하고 불안해 집니다. 늘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내가, 갑자기 며칠 자리를 비우거나 아예 떠나가 버리면 그 상실감 때문에 두렵고 당황하게 됩니다.
러시아나 중국 또는 북한에서는 자동차를 세워두면 바퀴나 유리창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동차야 그 부품을 다시 사서 끼워 넣으면 되지만, 사람이 사라지면 이건 상황이 다릅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 함께 만들어 온 사연이 있는 사람이 떠나가면 엄청난 공허와 실연이 찾아 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일을 다 해주셨습니다. 해치려는 자들이 덤벼들면 예수님이 막아주셨습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생겨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파도를 만나서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되었을 때에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걸 익숙하게 여겼고 당연한 걸로 생각하고, 언제까지나 주님이 자기들을 지켜 주실줄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더니 맥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나시고 제자들만 남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당황했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고 확인 했는데도 그래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자꾸만 어디론가 가 버리셨습니다. 잠깐 나타나셨다가, 또 사라지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는데도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집에 가면 부모나 처자식이 나를 받아주기나 할까?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서 다 버리고, 다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이제와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가 받아 줄까? 아내가 받아줄까? 그동안 돈도 못 벌어다주고 부모님에게는 자식노릇도 못하면서 수년을 지내왔으니 이제 집에서는 나를 없는 자식으로 취급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 집에 돌아가야 하나? 하면서 고민을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더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수 제자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도 크게 한 자리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주님! 무슨일이 있어도 제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 보기도 민망합니다.
배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마음이 편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 이상 이런 상황을 견디질 못해서, 고기를 잡으로 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자 역시 막막했던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라고 생각하면서 참담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고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 틀 무렵에 사방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바닷가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새벽에 저 사람은 누굴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뭘 좀 잡았느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상한 사람이 와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밑져야 본전이다!” 라고 생각하고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물을 끌어 올릴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제자중에 한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치자 베드로가 놀래서 바다로 뛰어내려서 해변가에 계신 예수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이제는 고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고기는 잡으나 못 잡으나 그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곁으로 가서 보니까,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생선을 숯불에 올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신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못 믿으시나? 내 사랑이 부족한가?” 예수님이 반복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다시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왜 예수님이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까? 베드로의 대답이 못 미더워서 3번이나 물어보셨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기에 그걸 벌충하느라고 3번 물으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 이유는 베드로를 질책하거나 책망하기 위해서 또는 따지려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종종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당신 나 사랑해? 정말 나를 사랑해?”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남편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그걸 꼭 말해야 알아?”하고 대답을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남편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걸 당신이 알고 있어?”라는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여보, 나 사랑해?”라고 묻는 것은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 그거 알고 있어?”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 엄마가 아가에게 “아가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니?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너하고는 바꾸지 않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내 아이니까”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씩이나 물어보신 것은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나를 저주까지 하면서 나를 버리고 도망간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그보다 더한 일을 했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그렇게 너를 사랑하는 걸 너는 알고 있느냐?”라는 뜻이 담겨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슴 시리도록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옆에 계시지 않으니까 비로소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비로소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돌이키고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비로소 베드로도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제자가 되고야 맙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가 쓴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 이른 시간인데도 모녀로 보이는 여자 둘이 병원 로비에 와서 앉아 있었다 25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엄마처럼 보이는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서로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엄마는 연신 딸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얼마후에 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제 딸아이입니다. 옛날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외갓집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이 모두 다 잘려나갔답니다.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는데 네 번째 손가락만은 너무 심하게 다쳐서 접합수술이 안되는 바람에 제 딸아이가 약지 손가락을 잃었답니다. 이제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는데 사위될 아이는 손가락하나가 없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는 마음이 편칠 않습니다.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제 딸 아이가 손가락을 잃은후에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라도 제 딸아이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의 바람이랍니다. 그래서 비록 나이들어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을 딸아이에게 주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 손가락을 떼어서 딸아이 손에 접합수술이 가능할까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원장 선생님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장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한참 후에 원장 선생님은 눈물이 그렁 그렁한채 대답하셨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녀는 함께 울었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그 사건은 내 평생에 잊을수 없는 사건으로 각인될 것이다.
딸에게 손가락을 주고 싶은 그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고, 또 주고, 다 주어도 더 주고싶은 사랑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손가락 하나가 없는 딸을 지켜 보면서 살아온 엄마는 내 다섯 손가락이 멀쩡한 게 한없이 미안하고 안타까왔습니다. 그래서 할수만 있으면 내 손가락이라도 주고싶은 마음으로 살다가 딸아이가 시집을 간다니까 딸아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싶어서 자기 손가락을 준 것처럼 예수님도 나를 지옥불에서 구원 하시려고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손가락하나도 드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냥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기특하게 보시고, “그래 고맙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니 정말 고맙구나!”라고 말씀 하시면서 기뻐 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좀더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네 곁에 있는 목자잃고 방황하는 양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전심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그 사명을 감당하고 완수하는 제자가 됩니다.
우리도 종종 실패한 베드로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정말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찾아 오셔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너도 나를 사랑하냐고 물어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나, 또는 아내와 남편의 사랑이 없어지면 그 빈자리는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인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주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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