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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년9월2일히브리서11장8-16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그리운시냇가 2015. 9. 3. 21:31

 

오늘은 일일 부흥회를 하겠습니다.

 

지난 토요일날 주차장 공사를 마친후에 제 집사람이 농협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트럭과 부딪쳐서 경미한 사고가 났습니다.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았더니 뒷 범퍼가 찌그러 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트럭운전을 하신분에게 제가 보험처리를 해서 고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자기도 실수를 인정하면서 쌍방이 서로 각각 차를 고치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전에 문의에서 오토바이와 사고가 났을 때 남해의 자동차 수리 공장에 차를 맡겼는데 차를 찾으러 갔더니 수리를 하지 않아도 될 본닛까지 뜯어내고 수리를 해서 처음에 상의했던 견적의 두배나 되는 견적이 나와서 황당해 했습니다.

 

그래서 진주에 있는 우진자동차에 수리를 맡겼는데 어제 차를 다 고쳤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와서 준비를 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지쯤 갔는데 이성길 전기과장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기공사를 마무리 하려고 교회에 왔다는 전화 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를 돌려서 교회로 가서 예배당 문을 열어준 후에 이성길과장에게 일을 하라고 하고 다시 진주로 향했습니다.

 

진주에 가면 프로젝터 옆에 있는 예배당 창문의 블라인더도 맞춰야 하고, 목양실 전등의 깨진 유리판도 교체해야 하고, 주차장 라인을 그릴 페인트와 도구들도 사야 하고, 그리고 전자랜드에 가서 냉난방기를 설치하느라 추가로 들어간 70만원의 배관비 문제도 해결 해야하기에 마음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왕지에서 리턴해서 교회로 갔다가 다시 출발한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었기에 마음이 조급해서 부지런히 달려 갔는데 가다가 느림보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는 1톤 트럭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길에서 그 트럭을 추월 했는데 추월하자마자 신호등이 나왔습니다.

 

차는 이미 가속을 해서 속도가 빨랐고 아무도 없는 시골길의 신호등 이어서 빨간불인데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신호를 위반하고 지나 갔습니다. 위반을 안하다가 어제는 마음이 조급해서 그랬는지 아무도 없는 그 시골길 신호등을 위반하고 그냥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신호등을 위반하고 지나갔는데 저 앞쪽에 경찰차가 서 있었습니다. 제가 지나가자 경찰차가 사이렌 불을 켜고 따라 왔습니다. 저는 애고 걸렸구나하면서 차를 세웠습니다. 따라온 경찰은 저에게 운전 면허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고 저는 운전면허증을 경찰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운전면허증을 받더니 앞차를 추월하면서 중앙선을 침범하고 그리고 빨간불에 서지않고 지나 갔으니 중앙선침범과 신호위반을 하셨습니다 과태료를 내고 벌점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송합니다! 그동안 신호위반을 한적이 없는데 제 집사람이 사고를 내서 차를 맡겼습니다 차를 찾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급히 가다가 그만 위반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제 운전면허증을 조회를 해 보더니 제가 수십년 운전경력에 신호위반으로 걸린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는지 다시 저에게 와서 앞으로는 위반을 하지 마십시오 안좋은 일이 있었다니까 한번만 봐 드리겠습니다하더니 운전면허증을 저에게 도로 주셨습니다.

 

저는 위반을 했는데도 용서를 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쁜 마음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않고 운전을 하기로 결심을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후에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지옥불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뜨거운 불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면 의인이 됩니다.

 

요즘은 교통법규를 어기면 벌금이 엄청납니다. 중앙선침범은 벌금이 9만원이고 신호위반은 7만원, 어린이보호구역이면 13만원을 내야 합니다. 게다가 중앙선침범은 벌점 30점에 신호위반은 벌점이 15점입니다.

 

속도위반은 20키로 위반이면 과태료가 9만원에 벌점이 30점입니다. 40키로 위반이면 벌금12만원에 벌점이 60점입니다. 일년에 벌점 121점이면 면허가 취소 됩니다.

 

속도위반으로 카메라에 찍히거나 주차위반을 하면 누가 운전했는지 모르기에 차주에게 벌점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통경찰이 제가 위반한 것을 규정대로 딱지를 끊었다면 그동안 제 집사람이 사고를 낸 벌점까지 합하면 벌점이 90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한번만 더 위반하면 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통경찰이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잘못했지만 겸손하게 용서를 빌었더니 이분이 사면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면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짓고 잘못 했어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 좋은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죄를 짓고도 징벌을 받지않고 오히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전기공사 사장님이 공사비 청구서를 보내왔는데 전기 공사비가 1200만원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과한 금액을 청구 했길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전기공사 사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후배 목사 교회도 평당 10만원씩에 공사를 했는데 어떻게 우리는 평당 14만원에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펜션이나 공공건물은 14만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물론 무더운 여름에 이성길과장이 전기공사를 위해서 애를 많이 썼지만 사실 그동안 전기공사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 힘든 일들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이야기들은 일체 하지않고 다른 사람들이 전기공사를 한 것과 비교할 때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하면서 청구 금액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장님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은 저는 전기공사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청구서를 들여다 보다가, 이런일에 연륜이 많고 경험이 많은 정평관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일반적으로 어떻게 공사비를 책정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평관집사님이 알아 본 결과 함안지역에서는 배전판을 포함해서 평당 10만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전기공사 사장님에게 잘 말씀을 드려서 공사비를 경감 받을수 있도록 해 보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마침 준공검사 문제로 윤인준집사님과도 통화를 할 기회가 생겨서 윤인준집사님에게 청구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 드리고 윤인준집사님에게도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윤인준집사님께서 알아 보시고 한시간 후에 전화를 주셨는데, 일반주택이나 인테리어가 되어있지 않은 건물에 전기공사를 할 경우에는 전기공사가 쉽고 전등도 달기가 쉬워서 평당 10만원이면 되지만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건물에는 전기공사가 어려워서 평당 15만원씩 받는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사장님이 청구한 청구금액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실내 인테리어를 한 후에 전기기사가 공사를 하는 것을 볼 때 훨씬 더 할 일이 많고 어려움이 많았다는 사실을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청구한 금액이 생각보다 많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는 금액이라는 이해가 생겼습니다.

 

저는 일단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전기공사 사장님과 대화를 하기전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면서 하나님께서 전기공사 사장님의 마음을 감동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전기공사 공사비뿐 아니라 레미콘 타설비용도 드려야 하고 테라스와 배관공사 자재비용도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공사비용을 경감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전기공사 사장님도 다혈질에 성격이 급한 분이고 저도 문제가 생기면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서 대화를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서 문제가 커질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전기공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일을 생각하면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러나 끝까지 참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기에 사장님에게 아무말도 하지않고 오직 기도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기 보다는 편지를 보내는 쪽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기공사 사장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전기공사 사장님의 마음을 감동 하셨는지 국물도 없을 것 같이 이야기를 하셨던 전기공사 사장님께서 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200만원을 감해 주셨습니다. 평당 10만원의 금액으로 조정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그에 합당한 축복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4개월동안 공사를 한 전기공사 직원이나 사장님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타당하고 또 우리도 일한만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전기공사 사장님에게 준공검사를 받으면 융자를 받아서 천만원의 공사대금을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청남레미콘의 하종원실장님에게도 준공검사후에 대금을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평생에 외상을 하지않는 저이지만 돈이 없으니 어쩔수 없이 사정을 하면서 양해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예배당 건축공사를 아무 사고없이 은혜중에 무사히 마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수 없습니다.

 

저는 예배당을 다 지은후에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4개월 전만해도 이 자리에 예배당이 없었는데 이 자리에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이 세워진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볼 때 정말믿음대로 되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믿음이 발동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당을 짓고 싶으니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기도대로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히브리서113절에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영()이라고 하고, 보이는 세상을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의 나라에서, ()의 나라가 나왔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던 이 개천옆에 아름다운 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무에서 유가 나온것과 같습니다. 영의 생각이 예배당을 짓게 한 것입니다.

 

영의 나라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왔다는 말처럼 육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근본(根本)은 보이는 나라가 근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이는 세상은 그림자에 불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가 실체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지은 이유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진짜 예배당은 하늘나라에 있고 하나님도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이땅에서는 누구나 잠시동안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

 

본향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천국을 가르쳐 주기 위한 시청각 교재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받은 땅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땅은 실제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는 산악지대였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11:11)라는 말처럼 그땅은 좋은땅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 하시기를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사람들이 없고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을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7: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길이 힘들고 어렵기에 그길을 포기하고 쉽고 편안한 길을 가는데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이게 천국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따라 살면서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길이요 세상 나라는 등 따습고 배부른 길을 선택해서 가지만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복이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아담의 아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선지자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이요 그들은 하나님나라에서 상급과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23:35)

 

이런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복을 받은 인생이 됩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우상을 숭배했던 그의 조상들처럼 무익한 인생을 살다가 지옥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그는 성경에 기록될 리도 없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되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생은 빈껍데기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아브라함이 있고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그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근거는 아브라함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믿음의 원조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교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만장일치로 믿음의 원조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원조인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8절을 다시보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8절에 보면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났다라고 증거 합니다.

 

떠나라고 하니까 떠났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중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 하실때 하나님께 한번도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순종하고 무조건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라고 명령하실 때 아브라함은 어디로 떠날 가요?” “떠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언제 떠날 가요?” “왜 떠나야 하나요?” “이삿짐은 얼마나 가지고 가야 하나요?” “언제 돌아 오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떠났습니다. 믿음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어느 날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잡아서 내게 번제로 드려라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아들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죽이라고 하십니까? 100살에 난 아들을 어떻게 죽입니까?” “어디서 죽여야 합니가?”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하고 죽입니까?” “아들 이삭에게는 뭐라고 말하고 데리고 가서 죽입니까?” “죽이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에게 묻고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이삭을 죽이려고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칼로 내리쳐서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22:13-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질문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순종해서 받들었습니다.

 

전에 한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예배가 끝나고 몇 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교회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 여자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목사님! 어깨에 루즈가 묻어 있네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집사님이 누구 루즈예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권사님이 목사님! 어제 뭘 하셨어요? 수상한데요?”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어제 목사님이 부흥회를 다녀 오셨어요 아마도 안수하다가 묻었을 거예요!” 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루즈를 묻혀와도 목사님을 믿기에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사님도 교회에서 지내다가 밤 10시에 집으로 전화를 하는데 사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나보다! 운동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기에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 하면 시시콜콜 캐묻게 됩니다. 그러나 믿으면 무조건 믿습니다.

 

옛날의 왕은 절대자였습니다. 어느 왕이 죽으면서 가장 신임하는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게 가장 충성된 신하다. 나는 오늘 죽는다. 네가 죽음의 세계에 먼저 가서 내 길을 닦아 놓거라.”

 

신하는 절대자인 왕의 명령을 듣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하는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라고 묻지않고 즉각 칼을 빼서 자결했습니다. 신하는 왕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질문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중에 절대자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절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십일조는 절대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안식일을 왜 지켜야 합니까?”라고 따지고 물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집에서 부모가 심부름을 시키면 나중에 할께요하고 일을 미루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서 휴가를 왔는데 아들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 많이 달라졌구나 어떻게 그렇게 변했냐?”했더니

 

예 군대에서 지금 당장 순종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순종을 미루는 것이 불순종인 것을 깨달았습니다하더랍니다. 아들이 정말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왜 순종이 중요했습니까? 그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임을 깨닳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가운데 하버드 대학 교수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 자문역을 했던 갤 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라는 분이 있습니다. 갤 브레이스는 자기를 평생 도왔던 비서요 가정부였던 에밀리(Emily Gloria Wilson)를 극찬 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피곤해서 낮잠을 자는데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존슨대통령이 갤 브레이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때 비서인 에밀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존슨대통령은 여기 백악관인데 갤 브레이스 교수 좀 바꿔 주게나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비서인 에밀리는 죄송합니다. 교수님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계시는데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나 대통령일세! 존슨대통령이요그러자 에밀리는 아 각하시군요! 그런데 각하! 죄송합니다 저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주인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주인님이 주무시기에 깨울수가 없습니다 저를 고용한 분은 주인님이시니까요! 일어 나시면 연락 드리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이 할 수 없이 전화를 끊고 나중에 갤 브레이스 교수가 전화를 했더니 존슨 대통령이 하는 말이 자네! 정말 훌륭한 가정부를 두었군! 그 가정부를 백악관으로 좀 보내줄수 없겠나?”하고 대통령이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나를 부르시고 나를 축복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주님이 부르실때에 그리고 주님이 하시고자 명령하실때에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때에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75세는 결코 만만한 나이가 아닙니다. 그 나이에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 생활 터전을 버리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그의 가문을 이을 장자였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조상 제사를 책임져야 하기에 장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는 장자의 책임과 특권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장자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그 명령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의 친척들은 이 같은 아브라함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더니 정신이 나갔다고 떠들어 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브라함이 옳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동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기만 하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받은지 24년이 지나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끝까지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게 됩니다.

 

또한가지 대단한 일은 그 당시의 여행길에는 강도와 도적떼도 많았고, 질병의 위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단호하게 결단하고 순종하여 고향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갈대아 우르는 우상이 만연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42절에 보면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갈대아 우르는 달신과 이난나 라는 여신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난나 여신이 흥분해야 그 땅에 비도 많이 오고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이난나 여신이 흥분하도록 여성들이 남자들과 자유롭게 성교를 즐기는 파티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이난나 여신이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으로 발전이 됩니다. 그 여신이 로마로 건너가서는 비너스라는 여신으로 발전됩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원조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그런 우상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의 도시에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데 방해되는 우상은 과감하게 버리고 미련없이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란 아브라함처럼 우상에서 떠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악의 습관, 죄악의 문화에서 단호하게 떠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악을 즐기고 죄와 타협하는 문화에서 단호하게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불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과거에는 세상이 이끄는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을 과감하게 떠나서 하나님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예수 믿으면 생활이 변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분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별명은 <조선의 스승> 또는 <조선의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죽어서 초상을 치를 때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회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서울인구가 30만명이었는데 장례식에 20만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만큼 이상재 선생은 존경받는 민족의 지도자였고 한국 초기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습니까?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02년 개화파 사건으로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 감옥에서 이승만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당시에 이승만대통령은 이상재선생보다 스물 다섯 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런데 이승만박사가 이상재선생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심심하니까 성경을 읽어 보라고 이승만 박사가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이상재선생이 그 성경을 읽다가 마음문이 열려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놀라운 체험을 한 이상재 선생은 그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상재선생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후부터 철저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상재 선생은 집에 오자마자 자기집의 하인들을 모두 불러서 안방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황송해 하면서 모두들 안방으로 들어왔는데 이상재 선생은 그들을 아랫목에 앉히고 하인들에게 형제님, 자매님들 나의 절을 받으시요하면서 그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하인들이 놀래서 어쩔줄 모르는데 절을 한 이생재선생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지으셨는데 내가 그동안 여러분들을 천한 종들이라고 차별한 것을 회개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요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안방으로 모셔놓고 절을 하고 사과를 한 후에 종들에게 자기가 가졌던 많은 땅을 다 골고루 나누어 주고서 종들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었다 해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재선생은 예수를 믿자마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단호하게 과거와 결별하고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 후에 새출발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죄악된 생활을 버리고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술이든지 돈이든지 성공이든지 사랑이든지 인간관계든지 어떤 것이든지 내 삶에 죄를 가져오는 것들은 모두 다 단절하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떠나야 합니다.

 

로마서 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증거 합니다. 변화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으면 새사람답게 살아가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삼성전자가 어떻게 세계 일류기업이 되었습니까? “이건희 개혁 100이라는 책에 보면 옛날에 삼성에서 만든 제품중에 어쩌다가 한두개씩 불량품이 나왔는데 이건희 회장은 불량품이 나온 회사의 공장 마당에 2천명 전 사원을 집합시키고 불량품이 나온 모델의 제품들을 전국매장에서 다 수거하고 공장에 있는 물건까지 몽땅 가져다가 쌓아 놓았습니다.

 

실제로는 그 제품들중에 불량품이 거의 없었지만 한두개 불량품이 나왔다고 그 제품을 몽땅 수거해서 가져다가 쌓아놓고 해머로 때려부순후에 불로 다 태웠습니다. 불량품 화형식을 한 것입니다. 그때 잿더미가 된 제품이 싯가로 500억원어치 였다고 합니다.

 

수십년전에 500억원이면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건희회장은 회장이 된 후에 우리 회사의 제품에서는 절대로 불량품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500억원 어치의 상품을, 불량품 몇 개 나왔다고 다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비장한 각오를 했고, 그후로 삼성은 급성장을 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기업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먼저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는 새출발을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과거를 포기하고 과거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 집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장막에 텐트에 거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좋은 집을 버리고 황무한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막에 우거했다는 말은 나그네처럼 거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선택한 후에 행복한 나그네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을 소유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요, 하나님이 그의 상급이요, 하나님이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의 행복은 저축된 자산이나 증권을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과 중 최고의 시간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간 아브라함에게 별명이 생겼습니다. 야고보서223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얻었다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친구!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별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희생했지만 그러나 저녁노을 조용한 미풍이 그의 뺨을 스칠 무렵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너는 내 친구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고향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들을 떠나야만 했고 정든 친구들과도 이별 했습니다. 외롭고 힘든 여정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밤중에 빛나는 사막의 별을 보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 하나님이 친히 너는 내 친구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속삭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때마다 그는 더없는 위로와 소망을 느끼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희생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희생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인생을 계산적으로만 살아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계산을 했더라면 땅과 유산과 부요함이 저절로 상속되는  갈대아 우르를 절대로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순종하여 떠났기에 존경받는 믿음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가 떠났기에, 희생했기에, 포기했기에,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을 뵙는 날, 제일 부끄러운 인생이 있다면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가장 부끄러운 인생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오늘날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기쁨으로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땅에 너무 미련을 두지 않고 삽니다. 그래서 좋은 집? 좋은 차? 그런것들을 너무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남들이 좋은 아파트에 미쳐서 자꾸만 큰 평수로 옮겨가는 것처럼 신자도 그런일에 미쳐서 아파트만 바라보고 살면 안됩니다. 남들이 성형에 미친다고 성도가 같이 미쳐서 보톡스를 맡고 성형수술을 하면서 살면 안됩니다. 세상 유행을 따라가는것도 옳은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을 마치는 날, 이 땅에서 가진것중에 아무것도 가지고가지 못합니다. 그날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반납하고 빈손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1977년도에 부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소개 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면서 고생한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서 임종이 가까워오자 흩어졌던 4남매가 다 모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얘들아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내 평생에 그 좋은 다이아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 하구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서 서로 서로 돈을 내서 어머니가 죽기전에 다이야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최근에 자기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야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잠시만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돌아가시면 빼서 되돌려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두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반지를 빌려다가 반지상자에 넣어서 마치 사온것처럼 해서 누워계신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서 어린애처럼 좋아 하셨습니다.

 

이제 내 마지막 소원이 성취 되었구나 하시면서 그 반지를 불빛에 비쳐보기도 하고 얼굴에 부비기도 하면서 좋아하시더니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물을 갔다 드렸더니 어머니가 반지를 빼내 입에 넣고는 꿀꺽 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만족 한 듯이 너희들이 선물한 이 다이야반지, 이 에미가 극락까지 가지고 갈란다하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은 다이야 반지를 어떻게 찾아서 되돌려 주어야 할지를 두고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배를 가를수는 없어서 결국 화장을 시킨후에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기로 했는데 화장을 하고 났더니 다이야반지가 손상이 되어서 돌려 줄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서 똑같은 크기의 다이야반지를 사서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 어머니는 반지를 삼키면 저 세상에도 반지를 가지고 갈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놓고 빈손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재산이나 땅을 남기면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싸움이 나고 의가 상해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장례식때에도 부조금 때문에 싸우는 자녀들이 종종 있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입니다.

 

많이 남기는 인생이 잘 산 것이 아닙니다. 물질 보다는 덕과 사랑을 남기려고 애써야 합니다. 카아네기는 말하기를 부자가 재물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치욕스런 일은 없다 돈을 남겨두고 죽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몽땅 사회에 환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일에 한푼도 남기지 않고 헌신했습니다. 그는 억만장자 였지만 돈을 다 쓰고 갔습니다.

 

미국의 록키산맥이나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여행하다 보면 길 곳곳에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요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습니다. 왜 먹을것을 주지 말라고 팻말을 붙였느냐 하면 산양이나 다람쥐나 사슴들에게 관광객이 음식을 던져주면 그 짐승들이 비둔해져서 암벽을 오를 수도 없고 달릴 수도 없어서 결국 맹수의 밥이 되기에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경고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살찐 다람쥐나 산양과 같습니다. 욕심의 비겟살이 찌면 위를 향해 올라가지도 못하고 달려가지도 못합니다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은 천국에 집착하게 되지만 세상에 열심히 투자한 사람은 세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에 투자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천국에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재물을 미리 보낼 수는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돌려받을 상급과 축복의 기업을 지금 쌓아놓을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투자한 사람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넘쳐 납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당당합니다. 그게 참된 신앙입니다.

 

깨농사를 지어서 20만원을 벌려면 깨를 20키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20키로를 만들려면 죽도록 고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재준집사님이 농사 지어서 강단에 20만원어치의 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20만원어치 꽃을 헌화 하는일은 결코 쉬운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에게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존귀를 선물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크게 복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뺏겼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혼내주시고 아내를 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마다 때마다 괴롭히는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고 영육간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간 아브라함에게 물질이 따라왔습니다. 이를 물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돈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돈이 따라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재물을 안겨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민자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약 1,800km 거리의 가나안으로 이민을 가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살 것인가 가나안으로 떠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엄청난 갈림길입니다. 그런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내렸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않고 자기 마음대로 한 일에는 항상 부작용이 따랐습니다.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번성시켜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사건은 세계 전쟁의 불씨가 되고 맙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지금도 중동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 중에서 마호멧이 나왔습니다. 그가 모슬렘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전쟁과 테러와 온갖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데 그 모든 악의 뿌리가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기독교의 가장 큰 원수가 되었고 적수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기다리고 참았으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을 것이고, 이삭만 태어나고 이스마엘에 나지 않았다면 수천년간 계속되어온 중동 사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응답을 받고 결정해야 합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부부 둘 다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매가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중에 주님이 그 이유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자매는 자랄 때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딸만 다섯인 집의 막내로 태어나서 언니들 옷을 물려받아서 입었기에 새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언니들의 구박이 심했습니다.

 

그녀는 언니들의 구박을 받을 때마다 결심을 했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커서 결혼하면 절대로 아이를 낳지 않을거야

 

이 자매는 기도중에 뜬금없이 자기가 어렸을 때 늘 고백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고백이 자기의 태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는 그순간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내멋대로 떠들어댄 말을 용서해 달라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에 드디어 태가 열리고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일이 있던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물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하자 자기도 복을 받고 또 아브라함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3가지의 축복을 상속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째 민족의 축복, 둘째 땅의 축복, 셋째 메시야의 축복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13절에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증거 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나그네인생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우리 믿는 자들을 땅에 살고 있지만 천국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3:20)

 

오늘본문 10절에서 아브라함이 장막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기쁨으로 살아간 이유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성이 바로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이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위대한 책을 쓰게 됩니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에 너무 목을 매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한국교인들의 믿음을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타계적이라고 지적하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물론 기복적이라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타계적이라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기복적인 신앙이 되는 이유는 타계신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세와 천국이 존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타계신앙 즉 천국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이 땅의 모든 고난과, 모든 불편함과, 부족함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에 불과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청교도 지도자중 한사람인 존 브래드포드(John Bradford)는 죽기전에 친구에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비록 여기에서 사는 동안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천국에는 풍요함이 있을 것을 믿는다네,

여기에서는 굶주림이 있었지만 천국에는 배부름이 있을 것을 믿는다네,

여기에서는 피곤함이 있었지만, 천국에는 안식이 있을 것을 믿는다네,

내 비록 여기에서는 이제 내 몸이 죽어가지만 천국에서는 부활의 새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아갈 것을 믿는다네

 

존 브래드포드가 바라본 영원한 도성, 어거스틴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아브라함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우리도 그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불편하고 서럽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사는 동안에 외부인이라고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원주민들이 아브라함에게 많은 텃세를 부렸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살아 갑니다. 하물며 4000년 전에는 얼마나 텃세가 강했겠습니까? 그 텃세를 짐작 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아내 사라의 장례식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평생동안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에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내인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의 무덤을 만들 땅만 겨우 그들에게 사정해서 샀습니다. 그것도 바가지를 쓰면서 많은 돈을 주고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런 나그네의 설움을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나는 나그네의 삶이 좋다! 나그네의 삶이 행복하다!" 라고 자랑하고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나그네 삶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불평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기뻐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나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기에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자랑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천국만 자랑하는게 아니라 작은 것에도 다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이 천국으로 가득하면 못난 남편도 자랑감이요, 골치덩어리 자식들도 자랑감이요, 교회도 자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작은 예배당도 자랑이요, 무엇을 먹든지 감사하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천국이 없는 사람은 믿음생활 때문에 원망 불평만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나서부터는 다른사람들처럼 주말도 즐기기 못하고 술집에도 못가고 골프장에도 못가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서 싫어"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불편함 때문에 원망불평만 합니다.

 

이어서 15절에 보면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증거 합니다. 사람마다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고향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을 말합니다.

 

미국 이민자들 중에는 향수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십수년을 살았지만 가장 힘든일이 바로 향수병입니다. 향수병이 심하면 이민생활을 비관하고 자살까지 합니다. 사람이 고향을 멀리 떠나가서 살면 고향에 가보고 싶은 향수병이 생깁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가보면 땅도 옛날 땅이 아니고 사람도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에 이민가서 살다가 몇십년만에 고향을 방문한 사람이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산천은 같은데 사람들이 다 변했고 인심도 변했기에 다시는 안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정든 고향을 떠나 살면서 어찌 향수병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향수병이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향보다 더 나은 하늘나라 고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보다 더 나은 하늘나라를 고향찾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떠나온 고향을 다시는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며 살던 정든 고향보다는 하늘나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요 또한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의 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절대로 믿기 전의 불신자의 상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믿기 전에는 무엇이 좋았는데 하면서 과거에 죄짓고 살고, 죄와 함께 산 생활을 동경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과거로 돌아가서도 안되고 또 돌아갈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삶은 오직 전진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오직 시선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과거로는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 보셨기에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세상의 몰이해도, 십자가의 고통도 천국을 바라보면서 극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마지막 설교를 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14:1-3) 라고 말씀하시면서 근심하고 불안해 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천국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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