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부터 3장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일곱교회의 순서가, 교회의 연대기적인 순서를 반영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사적으로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마지막 시대의 모습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신학교 교수님 한 분이 신학교 교수 노릇 못해먹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요즘은 한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평가 한다고 합니다. “강의를 얼마나 잘 준비했는지, 강의를 얼마나 성실하게 진행했는지, 강의 방법은 어땠는지, 강의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등등”을 학생들이 예리하게 평가를 하는데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쓴 강의 평가서를 받아서 읽고 나면 그날 밤은 잠이 안온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잠을 못잔다고 합니다.
이 신학교수가 친구 목사에게 “교회를 목회하는 담임목사는 목회 평가서 같은 것을 받지 않으니까 신학교 교수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좋겠네” 하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친구 목사님이 “교수들은 그래도 학기가 끝나고 평가서를 받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목회자들은 설교가 끝나면 매번 바로바로 평가를 받고 또 수시로 평가를 받으면서 살기에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걸”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에 대한 평가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하고, 나애대한 평가가 나쁘면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가능하면 좋은 말을 들으면서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평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신앙평가서와 인생평가서”를 작성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주님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서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잘못한 점을 자세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 까지도 자세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주님의 평가서를 받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자신들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알고 계신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깊이 뉘우쳤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평가가 이토록 형편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16절에서 주님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던 저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서는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가입니다. 대학 평가 잣대로 따지면 F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이토록 참담한 평가를 받았습니까? 어쩌다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버리리라”라는 저주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그 이유를 15절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한 마디로 미적지근한 신앙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지역은 무척 풍요한 도시였습니다. 해변 도시인 에베소와 아시아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라오디게아입니다. 그곳은 사람들의 내왕이 많았고 무역과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양털로 만든 양모 산업이 성업을 이루었고 금융업도 발전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 복음이 들어 가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들은 자유 분망하였고 육신적인 즐거움과 향락에 젖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안일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주의 일에도 열심히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사는 동안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렸습니다.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욕에 불타서 열정을 가지고 몰두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그 열정이 식어서 의욕을 상실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감성 에너지라는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었을 때 나타나는 뇌의 심각한 피로현상”을 말합니다.
소진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이런 증상이 나타납니다.
1. 잠이 잘 안오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2. 집중력이 떨어지고 치매에 걸린 것처럼 깜빡깜빡 한다
3. 이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일에도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4.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5. 관심을 갖는 대상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
6. 사람을 단순한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7. 일의 의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영적소진증후군”속에서 지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의욕에 불타서 열정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열정이 식어서 예배와 봉사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전에는 예배를 드리러 가면 가슴 뜨겁고, 찬양할 때 눈물이 나고, 말씀을 들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아멘이 나오고, 기도할 때 응답의 확신에 감사가 솟구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헌신을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든 일들이 다 심드렁해져서 신앙생활이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습니다. 주님과의 거리도 멀어진 것 같고, 주의 일에도 한 발 빠지고 싶고, 이젠 쉬고싶고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바로 이랬습니다. 영적소진증후군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이런 영적 소진증후군에 빠져있다면 교회에 대한 애정이나 봉사가 예전 같지 않다면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구나!”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문화관광부가 2014년 3월달에 대한민국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로 “전덕기 목사님”을 선정했습니다. 전덕기목사님은 상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지내다가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올해로 순교하신지 101주년이 되었습니다.
전덕기(1875-1914) 목사님은 1875년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885년에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선교사님이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해서 그 다음 해에 정동 병원을 개원했는데 고종 황제는 그 병원을 “시(施)병원”이라고 병원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2년 후인 1888년에 상동교회가 개척예배를 드렸고 스크랜튼 선교사님이 담임 목사로 섬겼습니다. 10년 후인 1898년에 전덕기 청년이 스크랜튼 선교사님에게 23살에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에 전덕기는 엡윗 청년회를 조직했고 나중에는 독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05년에 한일늑약이 된 후에 전덕기는 앞장서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 민족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7년도에 전덕기는 목사가 되어서 상동교회의 6대 담임 목사로 부임을 합니다. 그때 나이는 32살입니다.
전덕기 목사님은 그해에 이준(1859-1907) 열사를 네델란드 헤이그에 만국 회의 밀사로 파견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이준열사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 상동교회의 청년회장이었습니다.
그때 이준열사는 마흔 여덟살이었는데 고종 황제를 만나서 친서를 받아 냈고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세계 만방에 고발하고 한일늑약의 부당성과 더불어 한국이 독립되어야 함을 주창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서 통분한 마음으로 헤이그 현지에서 금식하다가 순국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더군다나 이준열사의 밀사 파견 사실을 알아 챈 일본이 국제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들이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목사님은 1914년 3월 23일날 독립 운동의 주체로 붙들려서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서른 아홉 살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전덕기목사님은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믿음으로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목사님의 희생과 더불어 하나님뜻대로 살려고 씨름했던 그 흔적이 우리를 감동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구경꾼 신자가 되지 말고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여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강만원씨는 종교, 철학 부문의 기독교 서적을 주로 번역하는 전문번역가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을 강의하고 책을 번역하여 출간합니다. 그는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에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은 철저히 주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 합니다.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이 되셔서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올바르게 성경을 바라보면 놀라운 은혜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어려운 번역 원고 정리를 위해서 기도도 하고 머리도 식힐 겸 기도원에 가서 며칠 지내는 중에 개인 방이 없어서 여럿이 함께 묵게 되었는데 한 곱사등이 집사님과 같은방을 사용 했습니다.
그집사님은 어려서부터 곱사등이였는데 목수였던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려서부터 목수 일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뜬금없이 묻기를 “우리나라의 목수 기술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목수 기술자가 누구인줄 아세요?”하더랍니다.
당연히 모르니까 모른다고 대답을 했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불상을 만드는 목공이 최고의 목수입니다”하더랍니다. 과거에 대졸자 초봉이 30만원이고 부장 월급이 80만원일 때 자기가 불상 만드는 목수 일을 했는데 그때 매달 120만원을 받고 과외로 기십만원의 수당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니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술집과 고급 룸싸롱에 드나들면서 술집 아가씨들 틈바구니에서 돈 쓰는 맛에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장애자였기에 어디를 가든지 곱사등이라고 놀림을 받고 어렸을때부터 무시를 다녔는데 술집에 가면 예쁜 아가씨들이 자기를 위로해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에 술집 아가씨들을 만나서 흥청망청 돈을 쓰고 술을 마시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었다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렸을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청년이 되면서 교회를 떠났기에 왠지 주색잡기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아서 하루하루가 괴로웠고 또 날마다 불상을 깎아 만드는 일도 마음에 부담이 되면서 떳떳하질 못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느 날 “더 이상 인생을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교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가 시종일관 일색이더랍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저렇게 하면 축복 받는다”라는 식의 축복 일변도의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듣기가 싫더랍니다.
자기는 뭔가 근본적인 죄사함과 더불어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하고 싶은데 설교를 들으면 맨날 하나님 믿으면 복 받고, 돈 벌고, 건강해진다는 말만 하더랍니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 돈 벌고 복을 받고 싶다면 자기는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불상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면 돈은 원없이 벌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마음속에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참된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시원한 대답을 얻는 것인데 복받아서 돈잘버는 축복만 강조하니까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질 않더랍니다.
사실 자기는 불구로 태어나서 사람대접을 못받고 살았기에 이 세상의 축복보다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해서 교회를 이곳 저곳 옮기면서 갈급한 영혼에 소망을 주는 교회를 찾았는데 목사님들의 설교가 항상 똑같더랍니다.
하나님께 헌금 잘 드리고 하나님께 봉사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설교 뿐이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목수일을 하면서 돈도 잘 벌지만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8)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 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돈과 건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축복은 성령의 은혜속에서 지속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설교중에 가장 첫 번째로 참된 복에 관해서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았다면 성령을 받고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겨우 구원 받은것에 만족하지 말고 성령충만하여 복음의 용사답게 세상의 죄와 악을 이기고 복음의 사람답게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좋은 옷을 입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허영심이 생겨서 부유층과 권력층이 옷 로비사건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강남에 있는 유명교회의 권사님들이 개입이 되는 바람에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영심의 옷을 입지 말고, 신령한 영의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흰옷은 의(義)의 옷과, 성결(聖潔)의 옷을 말합니다. 그리고 흰옷은 하늘나라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입고 갈 정결한 예복을 말합니다.
신부가 세마포로 단장한 옷과 같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깨끗함과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의 의로운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죄 용서 받은 기쁨과 감격과 감사와 소망 중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억만 죄를 깨끗하게 하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수치는 옷으로 가리고 살지만 영적인 수치는 가릴 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죄사함 받고 보혈의 옷을 입어야 구원받고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가는데 그걸 모릅니다.
그 보혈의 은혜와 거듭남의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혈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주님이 피뿌린 옷을 입혀 주실 때 우리의 영혼은 순결한 영혼이 됩니다.
17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다 잘살고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교인들은 이것만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지적하셨습니다.
당시에 라오디게아 지역은 의료산업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안질환의 특효약인 “브루기아 가루”를 생산해서 수출했기에 다들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눈 건강에 필요한 약재는 생산하면서 영적으로는 소경이 되어있었습니다.
게다가 라오디게아 지역은 광택이 나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멋진 옷을 입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옷은 멋지게 입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일에는 큰 관심을 가졌지만 영적인 일에는 무지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역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역설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높아지려거든 낮아져라” “살고자 하면 죽으라”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차든지 뜨겁던지 하라는 말씀은 미적지근한 상태에서 다시 뜨거운 상태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뜨거워질 수 있습니까? 19절에서 주님이 그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다시 뜨거워지려면 우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를 하면 차갑고 냉냉하던 마음에 성령이 임해서 뜨거워 집니다.
오래 전에 개봉되어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중에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도 웬지 그 영화가 좋아서 티비에서 그 영화를 해주면 다시 보고 다시 보면서 그 영화를 의미있게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로마제국의 촉망을 받던 장군이 정치적인 모함의 희생자가 되어서 노예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는 본래 전투에 능한 전사 였기에 검투사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검투사가 된 후에 승승장구하여 결국 로마의 콜롯세움까지가서 경기를 하게 됩니다.
수 많은 관중이 모인 가운데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을 지켜 보던 주인공이 다음 순서에는 자기들이 경기장에 나가서 단체로 상대 검투사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료 검투사들에게 주인공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바깥에서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나가서 뭉치면 생존할 가능성이 많아진다”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싸우자”라고 말을 합니다. 주인공이 “우리가 나가서 뭉치면 승리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하지 않고 “생존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한 것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 검투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입니다. 일단 살아야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검투사들이 그의 말에 순종해서 합심해서 도저히 이길수 없는 전사들을 무찌르고 승리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마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검투사들이 경기장으로 나가는 순간에 철퇴가 날아와서 머리가 박살나서 죽고 창이 날아와서 찔려 죽습니다. 그물이 날아오고 칼이 날아오고 어디서 어떤 공격이 올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 어디서 어떤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준행해야 세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마귀를 이기게 됩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가자 마자 주차장에서 주차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죄를 다스릴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마귀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그가 지은 죄목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네가 이렇게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 하면서 종교개혁을 한다고 큰소리를 치는거냐?”하면서 정죄 했습니다.
마르틴루터는 크게 낙심해서 의기소침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이 생각나서 마귀에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라고 했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마귀야 예수이름으로 물러가라” 하면서 마귀에게 잉크병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놀래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르틴 루터가 살면서 집필하던 집에는 벽에 잉크병이 깨진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초대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듣는 구호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밭을 팔고서 하나님께 드려야할 헌금을 띠어먹은 사람도 있었고, 또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는 단 두 교회밖에 없고 나머지 교회들은 다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방금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뜨뜻 미지근합니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시대는 예수 믿기가 어렵다고 말들을 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시험과 유혹이 많기에 남자는 남자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기가 힘들고 여자는 여자대로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지난주에 김상철성도님께서 전도하러 가자고 해서 두집을 방문 했습니다. 한 집은 해송이발관 이었습니다. 부부가 이발관을 운영하는데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부부가 인품이 좋고 남편은 잘 생기고 아내는 착한 분임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이발비를 김상철성도님께서 내 주셨습니다. 두사람이 삼만원입니다. 제 집사람도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를때까지 기다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쇠섬스토리에 갔습니다. 선소에서 조금 가면 바닷가에 아름다운 편션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오신 분들이 3층 건물을 사서 새롭게 리모델링을 했는데 사장님이 이전에 교회를 다녔다는 정보를 들은 김상철성도님께서 전도하러 가자고 제안을 하셔서 그집에 전도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전도를 하러 가서 보고 놀랜것이 있습니다. 돈도 많은 부부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웨이터와 웨이추레스 일을 했습니다. 두분이 정성을 다해서 손님들을 깍듯이 대하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참 훌륭하신 분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서 식사를 했는데 조혜순사장님께서 특별대접으로 와인을 세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스테이크를 먹는데는 와인을 곁드려야 제맛이 난다고 하면서 고급 와인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가 래서 술을 못마신다고 했더니 성찬식때도 포도주를 드시는데 어떻냐고 하시면서 드셔 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주 냄새가 향기로운게 정말 분위기로 보나 식탁으로 보나 참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술을 마실수는 없어서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술을 끊은 김상철 성도님께서도 포도주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저희들에게 귀한 정성으로 와인을 대접해 주신 조혜순사장님의 성의가 정말 고맙고 감사했지만 끝내 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집을 방문하면서 김상철성도님께서 쓴 돈이 십만원정도가 됩니다. 십만원을 벌려면 “서울 하늘 아래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닌다”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삼천포로 감암으로 노량으로 하동으로 다니면서 생선을 배달해야 하고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김상철성도님은 이제 예수 믿은지 2년도 안되었지만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지옥불로 향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과는 상종할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굽신거릴 필요도 없고 안믿는 사람에게 굳이 교회 가자고 내 자존심을 상해 가면서 그리고 돈써 가면서 권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벌어서 나 좋은대로 살고 대접 받으면서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믿고 구원받고 보니까 전도의 소중함을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130년 전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평생 섬기면서 복음을 전했기에 나와 내 자녀들과 우리나라가 이렇게 구원의 복과 문화적인 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닳아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10년 믿었어도 내 자녀들에게조차 예수 믿으라고 교회 가자고 말한마디 해보지 못한 성도들이 허다 합니다. 그런데 김상철성도님은 예수 믿은지 2년밖에 안됬는데도 벌어서 다 교회에 쏟아 붓습니다.
툭하면 생선을 한보따리씩 가져와서 성도님들을 대접하고 주의 종에게 특심한 사랑으로 마음을 쏟아 주시고 그리고 권사님들과 성도님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으로 선대해 주십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미국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스물 다섯 살에 신부 낸시를 만나서 결혼한 후에 미얀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나와 함께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대로 선교지에 가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낸시와 결혼해서 미얀마로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미얀마는 외국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얀마어를 배웠고 힘들게 지내다가 6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첫 설교를 했습니다. 7년째 되는 해에 한사람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회심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선교하는 동안에 20년에 걸쳐서 애쓴결과 드디어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풍토병으로 죽어서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아내도 또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딸도 죽고 아들도 죽고 그렇게 그는 미얀마에서 두 아내와 6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미얀마가 영국의 침략을 받아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미얀마 군대에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갔고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다시 풀려난 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37년간 외로움과 고독과 씨름하면서 선교에 전념하다가 62세에 순교 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미얀마에는 그의 선교사역으로 인해서 63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7,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미얀마에 선교를 한지 200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에는 300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뜨거운 열정과 열심히 미얀마에 복음을 전했던 아도니람 저드슨처럼 내 주변에서 열심히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 나를 자녀 삼으신 주님, 나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남편과 아내와 부모형제와 자녀들과 일가친척과 이웃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화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많아졌는데 예전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열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점잖고, 얌전하고, 조용합니다. 현대인은 예배도 뜨겁게 드리지 않고 냉소적입니다. 쉽게 감탄하지 않고 속지도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향해 달려가는데 예수님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3:17)
사람이 가난하게 살 때보다 재산이 점점 늘어날 때가 더 위험합니다. 소박하게 살 때 보다 잘살때가 더 문제가 많아집니다. 가난할때는 병이 없었는데 잘살면서 기름지게 먹으니까 혈관 질환과 장기와 신체에 위험 신호가 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잘살고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서 만족하게 살아가는데 예수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보니 너희들이 참 가련하구나, 가난하구나, 눈이 멀었구나, 벌거벗었구나”라고 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이는 칭찬 받았던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과는 정 반대의 책망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궁핍하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부자 이지만 주님이 보실때는 형편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백화점의 고급 시계점에서 스위스제 “파르미지아니 플리에르”(Parmigiani Fleurier)라는 브랜드의 시계를 판매하는데 그 시계점에 50대의 남자가 들어와서 그 회사에서 생산하는 최고의 시계인 “피보나치 포켓 워치”(Fibonacci Pocket Watch)라는 시계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 시계는 시가 30억 원이 넘는 시계입니다. 이 고객이 그 시계를 사겠다고 하자 매장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매장의 사장은 부랴부랴 스위스 본사로 연락을 했고 스위스에서는 담당자가 해당 모델의 시계를 가방에 들고 경호원까지 대동해서 급히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중년 남자의 주문을 받은 스위스의 파르미지아니 회사는 그 중년신사의 요구사항에 맞춰서 다시 시계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세계 3대 시계제작 장인인 파르미지아니가 손수 만든다고 알려진 이 시계는 주문에서부터 완성까지 2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시계를 주문한 남자는 명품시계 수집이 취미인 중소기업 CEO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투자 가치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겠지만 시계를 사느라 30억을 쓴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반면에 대전 유성에 위치한 충남대학교 정문 옆에는 “정심화국제문화회관”이라는 건물이 지어져 있습니다. 그 건물은 대전에 살면서 평생 김밥 장사로 벌은 50억 상당의 재산을 학교 발전 기금으로 헌납하고 돌아가신 이복순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건물입니다. 인돈이 많아도 두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금을 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답게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연단을 통해서 영적으로 순결하게 되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불은 “시련, 연단, 환란, 시험”등을 의미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금보다 귀한 믿음을 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찬
송가 450장 내 평생소원 이것 뿐 의3절과 4절을 보면, “불 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 내용대로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6)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사데 교회에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계3:5)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마귀에게 지면 비참해 집니다. 전쟁도 지면 참담해 집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잘 사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영적 믿음의 부요함을 자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보혈의 은총을 덧입은 흰 옷을 사서 입고 영의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 광명한 천국과 주의 세계를 바라다보며 살아갈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의 주인공이 모두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초청의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아는대로 인간의 경제적인 발전이나 과학 기술의 발전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런것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사야서40장 15절에 보면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다”라고 증거 합니다. 사람들이나 물질적인 풍요함을 사모하고 부러워하지, 주님은 그런것들로 인해서 감탄하시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 제가 산 이 자동차좀 보세요. 주님, 제가 딴 학위를 좀 보세요”라고 주님께 고백해도 주님은 그런 것에 별로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니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오직 중심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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