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포도나무

[스크랩] 2016년1월10일 주일낮 마1장18-25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갈등

그리운시냇가 2016. 1. 10. 16:23

 

오늘은 이땅에서 살았던 수 많은 남자들중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한 남자의 이야기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남자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그 인물의 중요성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애굽의 총리가 된 야곱의 아들 요셉이나 또는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요셉보다도 그 지명도가 훨씬 떨어집니다.

 

요셉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 보더라도 야곱의 아들 요셉은 엄청난 분량을 다루고 있지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이름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질 않습니다. 영화로 보면 요셉의 분량은 마치 한 두 컷 나오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요셉이 그 위대한 예수님의 아버지로 선택을 받았으면서도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 때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비근한 예로 로마 황제가 천하에 호적을 다시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요셉은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갑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들레헴은 요셉의 고향입니다. 적어도 고향에 갔으면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아는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요셉은 아내 마리아가 출산할 방 하나도 제대로 구해주지 못해서 결국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낳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데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깊은 뜻이 계셨기에 마굿간에서 태어 나셨지만 요셉의 능력면에서 살펴보면 방하나 얻지 못한 요셉이 참으로 답답해 보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너무 일찍 죽어서예수님이 청소년 가장이 되어 일찌감치 생활전선으로 내 몰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일생에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 아빠처럼 여겨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주 중요한 사명을 감당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이 가진 남다른 은사는 훌륭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사실 요셉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이 절망으로 끝날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마음을 강퍅하게 먹었다면 메시야 구세주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인류역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역사로 전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엄청난 불행을 막은 요셉의 믿음이 소개 됩니다.

 

어느날 마리아는 요셉과 육체관계를 갖지도 않았는데 임신을 하게 됩니다그래서 마리아는 고민 하다가 자기가 임신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요셉을 찾아 갑니다. 마리아는 그동안 되어진 일들을 생각할때 심히 두려웠습니다.

 

내가 임신을 했는데 성령으로 잉태 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요셉이 믿어줄까? 나에게서 날 아기가 장차 메시야 구세주라고 말하면 그걸 믿어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요셉이 당장 화가나서, 너 누구와 간음한거야? 누구의 아기를 임신한거야?” 라고 노발대발 할텐데 어떻게 하지?”

 

마리아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요셉을 찾아가서 드디어 천사 가브리엘이 방문한 이야기, 그리고 메시야 구세주를 낳을 거라는 이야기를 고백 했습니다.

 

사랑하는 약혼녀 마리아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마리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정말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을 했을까?” “혹시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행한후에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만나는 애인이 있었고, 그 애인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했나?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와 잤을까? 임신을 하고 나니가 성령을 끌어 들여서 나를 속이려는 것인가? 아니면 로마 군병에게 성폭행을 당했나?”

 

실제로 당시에 로마 군병들이 종종 이스라엘 여자들을 성폭행을 했기에 요셉은 그런 의심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마리아가 로마 병사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지금까지 알아온 마리아는 절대로 부정한 일을 행할 여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은 더욱 마음이 괴롭습니다.

 

18절을 다시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그리고 이어지는 19절에는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요셉의 기나긴 고민과 씨름이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은 이 문제를 두고 심히 고민한 게 틀림없습니다. 요셉은 고민하다가 19절과 같이 마침내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성경에는 마치 요셉이, 마리아의 고백을 듣고나서 전혀 요동하지 않고 아무런 감정적 반응도 없이 행동한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워낙 믿음이 훌륭해서 이런일을 당하고도 아주 의연하고 태연하게 모든 일을 평안하게 처리 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19절은 증거 하지만 그러나 요셉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과 혈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후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고백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고백하기를 천사가 와서 나에게 계시를 했는데요 나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임신을 하게 된다고 했는데 정말 내가 임신을 했어요!” 라는 마리아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요셉은 절대로 파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인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천사가 와서 친히 계시해 주셨다면 이건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요셉이 그런 이야기를 믿었다면 요셉은 무조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있어! 그런 거짓말로 너의 부정한 행동을 덮어 보려고 해?”하면서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한 이유는 마리아가 부정한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정한 여자를 데려다가 살수는 없다고 생각 했기에 파혼을 결심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래도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파혼하려고 한 것을 보면 요셉도 우리와 별 반 다름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생각하기를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서 임신해 놓고 그걸 성령의 잉태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천사의 계시와 성령의 잉태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볼 때 요셉이 파혼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요셉이 얼마나 갈등이 컸겠습니까? 아마도 그 결정을 하기 까지는 요셉의 마음에 분노가 타올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해석을 놓고 반문할수도 있습니다. “아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이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분노합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일수록, 바르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마음속에 불의에 대한 강한 의분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를 배신하고 임신한 것에 대해서도 화가 났겠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 부정을 덮으려는 간교함에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어쩔수 없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게 되었어요 용서해 주세요!”하고 이야기를 했다면 용서해 줄수도 있겠는데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자기의 부정을 덮으려고 하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만큼 분노가 더 무섭게 타 올랐을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초등학교때 혈액검사를 했는데 AB형 이더랍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낳아서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혈액형 검사를 받았는데 큰아이 둘째아이가 다 O형 이더랍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랐랬습니다. 아내가 O 형이고 자기가 AB 형이면 이런 경우에는 부모와는 전혀 다른 A형이나 B형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둘 다 0 형이 나왔으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이들의 혈액형을 알게된 그 순간, 혈압이 확 솟아 오르면서 아니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사모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우리 아이들을 낳았나?” 그 순간 목사님은 화가나서 심장이 터져 죽겠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를 보면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전에 사귀던 남자와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같이 자서 임신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 살다가 옛날에 사귀던 남자를 다시 만나서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는 것도 보았기에 내 아내가 혹시 나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서 아기를 낳은 것은 아닐가? 둘째 아이도 혈액형이 나와 다른걸 보니 둘째 아이도 나 몰래 만난 남자의 아기를 낳은건가? 아니 이럴수가 있나?” 하면서 목사님은 뚜껑이 열릴 정도로 화가나고 분해서 견딜수가 없더랍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우선 병원에 가서 다시한번 내 혈액형을 검사해 보자!” 하고는 병원에 가서 피를 뽑아서 혈액형 검사를 했더니 이게 웬일 입니까? 목사님 혈액형이 AB형이 아니고 B형 이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어렸을 때 내 혈액형 검사가 잘못 되었었구나! 큰일날뻔 했구나! 하마터면 아내와 죽도록 싸우고 헤어질뻔 했구나!”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은 사랑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고백을 했을 때 의로운 요셉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고 또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습니까? 그 타오르는 분노 때문에 요셉은 밤을 지새면서 마음속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몇 번이나 죽였다 살렸다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천사가 계시했고요! 성령 때문에 임신했어요!”라고 고백하는 마리아를 볼 때 요셉은 화가나서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서 파혼을 결심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이 상황을 알고난 후에 밤잠을 못자면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화가치밀어 오를때는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자서 임신을 해? 넌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면서 마리아가 자기 눈 앞에서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으로 돌아 누우면, 그 동안 마리아와 지냈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그녀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사랑하는 마리아야!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지금까지 나는 너만 사랑하고 너도 나만 사랑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요셉은 그래도 차마 사랑했던 그녀를 죽일수는 없었기에 고민하다가

 

그래 당신이 정말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놓아줄게! 보내 줄게! 가서 잘 살아! 내가 너를 돌에 맞아 죽게 할순없지!” 그래서 밤새도록 마리아를 죽였다 살렸다 하면서 고민하던 요셉은 결국 마리아를 죽게 만들기보다는 파혼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바로 보통사람인 요셉의 모습입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요셉은 결국 파혼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사지로 내몰지 않고 돌에 맞아 죽게 만들지 않고 파혼으로 끝내려는 요셉이 훌륭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갈등과 살인과 폭력으로 물들어 가는 이유는 분노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분노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분노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이 발전한 시대요 또한 교육 수준도 가장 높아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분노의 수준역시 제일 높고 강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분노가 얼마나 가득찼는지 분노가 한 번 터지면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기에 평화를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금도 아니요 은도 아니요 평화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거룩한 성자가 되는것도 아니요 엄청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내 속에있는 분노를 씻어내고 참된 평화를 가지고 살다가 천국에 가라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내 속에 있는 분노와 상처들을 잘 해결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주님이 보시기에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속에있는 분노와 상처를 잠재울 수 만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내 인생에 나비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가정을 살리고 내 지역을 살리고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쓰임받게 됩니다.

 

내 속의 분노와 상처를 해결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분노를 해결 하려면 분노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은 죄이기에 믿음 좋은 사람은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감정 속에는 좋은 감정도 있지만 나쁜 감정도 있습니다. 미움을 느끼는 것, 분노를 느끼는 것, 시기심을 느끼고,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 사랑하고 싶은 것, 이런 감정들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있는 감정입니다.

 

문제는 그런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에 둥지를 틀고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가 났는데 그 화난 감정에 사로잡혀서 계속해서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르틴루터는 말하기를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나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날 때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분노는 결코 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거나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다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화가 났을 때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분노의 감정을 꾹꾹 눌러서 억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나 혹은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감정을 꾹꾹 참으면서 억압하는 편을 택합니다.

 

그런데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감정을 꾹꾹 억누르기만 하는 방법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분노를 참고 억누르면 잠시동안은 그 분노의 감정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노를 꾹꾹 참기만 하면 그 분노가 마음 속에 차곡 차곡 쌓입니다. 그래서 분노가 마음속에 숨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쌓인 분노가 폭발하면 세상이 떠들썩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지난달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생방송을 하던 기자 두명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베스터 리 플래내건”(41) 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두 기자를 쏴 죽이고 경찰이 쫓아오자 도망가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자살하기 며칠전에 자살노트를 써 놓았습니다.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나는 직장에서 인종차별을 받았고 심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나의 분노는 꾸준히 쌓여온 것입니다. 나는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입니다. 이제 그 화약이 폭발할 것입니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참고 또 참다 보니까 인간 화약통이 된 것입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흑인교회에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아홉명을 죽인 사람도 억울하고 분한일이 쌓여서 총기를 난사 했습니다.

 

2007년도에 한인 학생 조승희가 저지른 버지니아 주 총기 난사 사건도 동기가 비슷합니다. 조승희는 총을들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총을 난사해서 32명을 죽였습니다.

 

사건을 벌인 조승희는 경찰조사에서 나는 친구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조롱을 받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종차별을 당했다! 더 이상은 참을수가 없어서 총기를 난사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20005월달에 부모를 토막 살인한 한 명문대 학생도 부모가 야단치고 윽박지를 때마다 참고 또 참다가 결국은 부모를 죽이고 톱으로 토막 내는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이와같이 분노를 참고 또 참으면서 분노를 억누른 사람들은 나중에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 분노를 억압하는 것보다는 그때 그때 표출시키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러나 분노가 치밀어 오를때마다 내 감정을 함부로 표출시키는 것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포장마차에서 술마시다가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통화를 기다리다가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주차장에서 시비를 하다가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위 아래층간에 시끄럽다고 시비를 하다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나와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방법으로 감정을 나타내면 서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전에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이디 아민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디아민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바로 옆 나라와 국경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웃 나라와의 국경분쟁은 정말 골치아픕니다.

 

특히 국경 분쟁은 그 해법이 어렵습니다. 이디 아민 대통령도 당시에 국경 문제로 꽤 골치를 썩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디 아민대통령이 국경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고 하면서 들고 나온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양국 대통령이 사각의 링에서 복싱으로 승부를 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권투를 해서 이긴 대통령의 뜻을 따르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디 아민 대통령은 나이가 40대였고 옆 나라 대통령은 70대였습니다.

 

그래서 이디아민대통령은 상대방 나라 대통령의 나이를 고려해서 한가지를 더 제안 했습니다. 자기는 한 손을 안쓰고 한 손으로만 싸우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디 아민대통령은 헤비급 복싱 선수 출신이었습니다 한손으로 싸운다 해도 70먹은 노인네대통령을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나라의 정치 평론가들은 그런 제안을 한 이디아민 대통령을 정신병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외교관은 이디 아민대통령이 제안한 방법은 뚱딴지같은 제안이지만 그러나 그의 단순한 제안은 국제 관계의 해결에 정답이 될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권투가 아니라도 좀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수가 있다는 뜻으로 그런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감정싸움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노의 문제는 요셉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최초부터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분노입니다. 누가복음1150절로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인류의 첫 번째 범죄도 분노때문이요 신약시대 마지막 선지자인 사가랴가 죽은것도 사람들의 분노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분노가 세상을 망쳤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시대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한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분노로 인해서 세상이 파괴될 것을 예고한 사건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종교 기득권자들의 악한 분노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하고, 영구적인 방법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데서 찾으면 진정한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먼저 분노를 해결하려면 나에게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고백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게서 나오는 분노의 정체를 알게됩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면 성령께서 내 감정을 다스려 주시고 문제를 풀어갈 지혜를 주십니다.

 

본래 믿음의 사람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방법으로 분노를 해결했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한나의 분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나가 억울하고 분한일이 있을 때 그녀는 분노를 남편에게 쏟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친정 어머니를 찾아가서 떠들어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토로하고 호소 함으로서 복중에 복을 받은 여인이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성경 시편에도 보면 끓어 오르는 자기의 분노를 탄원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탄원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내 원통함을 좀 알아주세요!” 라는 탄원기도로끝나지 않습니다. 기도 내용을 보면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을 저주하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한가지만 예를 들면 시편 109편에 보면 그 고백은 완전 저주에 가깝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송사하는 자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이와같이 이 기도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는 이런 저주의 기도가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아니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나를 괴롭힌 그 사람이 명이 짧아져서 빨리 죽게 하시고, 그의 모든 재산은 다 떠나가고, 그가 하던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해 주시고, 그 자식들은 아비 없는 자식이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거지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빌어먹게 해 주십시요”(6~10)

 

참으로 엄청난 저주의 기도입니다. 이건 그만큼 분노가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떨때는 성경을 읽다가 ! 이런 내용은 차라리 성경에서 좀 뺐으면 좋았을걸 그랬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기도를 드리는것까지 허락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한 기도이기에 성경에 기록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천하의 성군이요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주 기도까지도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분노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 분노 때문에 살인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집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고, 그 자식들을 다 죽여버려도 한이 풀리지 않을만큼 분하고 억울할 때, 그런때에 범죄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내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기에 이런 기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소개해 드린 원수에 대한 저주의 기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감정을 정직하게 토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풀려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주하는 기도가 항상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처지는 우리와 다릅니다. 다윗은 근 10년동안 억울하게 쫓겨 다니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죄도 없는 자기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철천지 원수 때문에 이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을 축복할만한 인격과 믿음이 못되면, 악을 악으로 갚느라 살인을 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다윗처럼 미움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가 응답된다고 한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저주의 기도가 응답되면 마음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때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이 상대방을 향해서 그런 저주의 기도를 드린 것이 심히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분노가 치미는 일이 생길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분노를 하나님앞에 표출하다보면 그 분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리고 나면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다시 요셉으로 돌아가서 요셉의 믿음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깊이 살펴 보겠습니다. 유대적인 배경에서 의롭다라는 말은 율법에 따라 곧이 곧대로 산다! 정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율법을 곧이 곧대로 지켰다면,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 이었다면 당장 마리아를 고발해서 마리아가 돌에 맞아 처형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정의만을 내세운 사람이었다면,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마리아를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분문에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 라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산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형식적으로 또는 율법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매사를 결정해 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 마리아를 통해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셉의 의로움을 이렇게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고백을 들은 후에, 밤마다 혹은 기도할 때 마다, 자신의 복잡한 심경과 마리아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고백하기도 하고, 항의하기도 하고, 그리고 억울해서 통곡하며 울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착한 사람처럼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옛날에 억울하고 분해서 하나님께 저주의 기도를 드렸던 다윗처럼, 요셉도 역시 되어진 사건을 하나님앞에 토로 하면서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급기야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응답은 거저 온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긴긴 밤을 분노와 씨름하고, 또 통곡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 사이에서 우리는 그와같은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수 있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에게 참을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 분노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하나님앞에 달려와서 한나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요셉처럼 한나처럼, 야곱처럼, 절체 절명의 사건 앞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일이 우리가 해야할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라도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내힘으로 해결할수 없는 일들을 만났을 때 특히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냄비뚜껑 솥뚜겅 집어 던지지 말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통곡하면서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배려하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받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