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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년1월17일 주일낮 호세아2장1-13 위대한 사랑

그리운시냇가 2016. 1. 17. 16:03

 

지난주에는 특별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먼저 목요일날 저녁에 신년축복 대 심방예배를 마쳤습니다. 점심때에는 금음구역 성도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저녁에는 최원산성도님이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식사후에는 이진숙권사님이 콩고물 팥빙수집에서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콩고물 팥빙수집 앞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한 중년 아저씨가 저에게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내리는 차에 남해세광교회 싸인이 붙은걸 보고 목사님 이십니까?”하면서 안부를 물으셨고 저는 예 남해세광교회 목사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나서 한 10분동안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그 인상좋은 중년 아저씨는 콩고물 팥빙수집의 사장님 이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할 때 철강자재를 대교철강에서 가져다 썼는데 대교철강의 사장님이 바로 그 분의 아드님 이었습니다.

 

이분이 저에게 목사님! 우리 딸이 대교철강에서 근무합니다하시길래 제가 종종 대교철강에 갔는데 사무실에 아름다운 사무원이 두분 계시던데요?” 했더니 그중에 하나가 제 딸아이입니다. 지금 딸아이가 있을겁니다 하시면서 저를 데리고 대교철강으로 가서 따님을 인사를 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분은 존함이 박범석사장님 이셨습니다. 남해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남해에서 다니시고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에 원양어선을 타면서 일등 항해사로 일을 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는 남해에 와서 건축업도 하고 축산업도하고 콩고물팥빙수집도 운영하고 작년부터는 남해유배문학관옆에있는 서울건재상도 운영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박범석사장님을 만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제가 남해에서 12년동안 사는 동안에 교회 싸인이 붙은 차를 타기도 하고, 승용차를 타기도 했는데 언제 어디서나 한번도 저에게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늘상 사람을 만나면 제가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박범석사장님께서 저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장님은 제가 남해에서 사는 동안에 저에게 먼저 말을 건넨 첫 분이십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마침 그날 김상철성도님과 강둘자집사님이 분당에 있는 병원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남해로 오는 중이어서 제가 두분을 마중을 나가서 모시고와서 박범석사장님과 인사를 나눈후에 집으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박범석사장님은 올해 나이가 62세 이신데도 남해읍 해양 초등학교 근처 구역의 조기 축구회 회장을 맡아서 열심히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며 남해군 탁구 선수로서 탁구에도 열정을 보이셨습니다. 배를 타는 동안에 배안에서 열심히 탁구를 했더니 택구실력이 선수에 버금가는 실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박사장님은 이동에 있는 농협기술센터에서 귀농인들에게 실시하는 축산 경영을 위한 교육도 받으셨고 또 농업교육도 받으셨다고 합니다. 무려 2년동안이나 교육을 받으신 것입니다. 박범석사장님은 남다른 열정으로 많은 일들에 도전해서 개척자의 정신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김상철성도님이 대화중에 저희 교회 소개를 하면서 우리교회는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많은 교회인데 목사님이 지극정성으로 어르신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저는 남해에 있는 여러 교회를 다니다가 남해세광교회에 와서야 비로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박범석사장님께서 내가 쌀농사도 짓는데 아주 맛있는 쌀을 친히 경작해서 먹고 있습니다, 내가 찹쌀을 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읍에 가서 박범석사장님께서 친히 농사를 지은 찹쌀 20키로를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그 찹쌀을 넣어서 밥을 했습니다.

 

제가 박사장님에게 교회를 다니시냐고 물었더니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와 우리 남해세광교회에 쌀을 선물해 주신 박범석사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한분은 어제 토요일날 만났습니다. 어제 이진숙권사님께서 청소를 하러 오셨는데 부산에서 오신 한 중년부인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요 딸도 절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오신 성도님은 성암이 김은숙성도님인데 이진숙권사님과는 30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었습니다.

 

김은숙성도님은 인상이 참 아름답고 성품이 인자하셨습니다, 초면인데도 오래 전부터 알아오던 분처럼 친근하게 느껴 졌습니다.

 

마침 교회 청소시간이라 김은숙성도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잠시동안 대화를 나눈후에 이진숙권사님의 제안으로 김은숙성도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제가 기도를 해 드리려고 가족들의 이름을 물어 보다가 김은숙성도님은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고 딸은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남편은 담낭암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김은숙성도님의 가족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비록 종교는 다르고 섬기는 신도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제가 어제 김은숙성도님을 위해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김은숙성도님의 인품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진숙권사님이 30년 전에 김은숙성도님을 만났을 때, 그 당시에 이진숙권사님은 정말 잘나가던 마나님 이었습니다. 부잣집에서 떵떵거리면서 살던 귀티나는 귀부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집도 없고 돈도없고 그 어느것 하나도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여인입니다.

 

사람이 잘살다가 가난해 지고 빈털터리가 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친구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주변에서 맴돌던 사람들이 다 떠나갑니다. 그래서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진숙권사님이 남편과 사별하고 이제는 별볼일 없는 촌부가 되어서 시골 구석박지에서 이름없이 빛도없이 살아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진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 이진숙권사님을 만나기 위해서 수백리 먼길을 차를 타고 와서 그것도 산 위에 있는 시골집에서 집사님과 함께 이틀이나 동거동락하고 그리고 밭에가서 시금치도 캐주시고, 토요일에는 김은숙성도님이 이진숙권사님과 함께 교회에 오셔서 교회 청소까지 해주고 가셨습니다.

 

저는 김은숙성도님을 만난후에 오늘은 부처님의 자비를 가진 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가진 우리보다 승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예수 믿는 사람이 친구따라 절에 가서 절 청소를 도와주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예수믿는 성도는 절에가면 뭐 이런 우상의 산당을 지어놓고 우상숭배를 하고있어!” 하면서 넋두리만 하지 절에 들어가서 봉사하고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김은숙성도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 이면서도 처음 온 교회에서 걸레를 들고 일일이 장의자를 닦으면서 이진숙권사님과 함께 교회 청소를 같이 해 주셨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지난주에 만난 이 두 분을 곰곰이 생각 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예수믿는 우리가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보다 더 낳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를 믿으시는 박범석사장님은, 우리 교회가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당장 내가 쌀을 목사님께 선물하겠습니다하시더니 맛있는 찹살을 20키로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김은숙성도님은 처음온 교회에서 손수 걸레를 들고 예배당 청소를 하면서 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이 동해서 ! 이분에게 내가 쌀 20키로를 드려야겠구나하고 쌀 20키로를 처음보는 분에게 드려본 분이 계십니까?

 

친구따라 절이나 다른 종교의 사원에 가서 청소를 같이 해 주신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종교적 신념과 믿음이 투철하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불교신자던 이슬람교 신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무조건 도와주고 살려내고 봐야 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저는 통일교를 믿는 박범석사장님과 더불어 독실한 불교 신자인 김은숙성도님을 보고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기독교는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이어서 점점 세상에서 외면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지만, 그러나 세상을 향한 구제와 봉사와 섬김은 오히려 다른 종교를 섬기는 분들을 통해서 배워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새벽시간에 호세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강해 하다가 이런 놀라운 말씀을 새벽에 나오시는 성도들만 듣는 것이 안타까와서 오늘 주일날 한번 더 호세아서를 보기로 했습니다.

 

호세아가 살던 당시의 북 이스라엘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사치와 방탕에 빠져서 지냈습니다. 백성들은 산과 계곡에 우상의 산당을 지어놓고 거기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면서(3:15) 술과 방탕에 젖었습니다.

 

아모스서 3장에 보면 북 이스라엘의 타락상이 소개 됩니다. 그들은 다메섹에서 수입한 비단 방석을 깔아 놓고 상아 침상에 뒹굴며, 식탁에는 살진 송아지와 어린양고기의 진미를 먹고, 거문고를 타면서 헛된 노래를 부르고, 대접에 술을 부어 마시며 곳곳마다 산당의 제단 옆에 아름다운 비단이불을 펴고 그 위에 누워 음란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런때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계시가 순종하기 어려운 계시입니다. 성경 66권 가운데에서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많은 성경이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호세아의 결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결혼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되 음란한 창녀를 취하여 결혼을 하고, 그리고 자식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은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배필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들어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불행 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주의 종이 어떻게 음란한 창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가 있습니까? 심지어 자식까지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시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행동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이사야선지자도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말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옷을 벗고 팬티만 걸치고, 신발도 벗은채로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습니다.(20:3)

 

예레미야는 베띠를 사서 허리에 동였다가 그 띠를 유브라데 강 바위틈에 감추는 일을 했고(13:1-7) 에스겔은 좌로 누워서 390일을 지내고 다시 우로 누워서 40일을 지냈습니다(4:5-6)

 

에스겔은 또 대낮에 행구를 챙겨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이사를 했습니다.(12:3)

 

그런데 호세아는 그보다 더 힘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창녀로 살고있던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고멜은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둘째는 딸을 낳았는데 로루하마입니다. 셋째는 아들인데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었습니다. 첫째 아들 이스르엘의 뜻은 흩어버렸다라는 뜻이고 둘째 딸 로루하마의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라는 뜻이고 셋째아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아무리 못났어도 이름많은 좋게 지으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낳은 자식은 하나같이 저주스러운 이름입니다. 세 자녀의 이름을 오늘날 말로 번역하면 망국, 배신, 저주받은 아이,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으면 비웃고 조롱하기에 딱 좋은 이름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별난 이름들이 많습니다. 남자아이 이름이 신중이 인데 성이 임씨입니다. 이름이 임신중입니다. 차행순집사님 손녀딸이 세나입니다. 그와 비슷한 여자 아이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새네입니다. 그런데 성이 김씨입니다. “김새네입니다.

 

우리나라 호적에 등록된 이름중에 웃음 거리가 될만한 이름이 많습니다. 성은 강씨인데 이름이 아지입니다. “강아지입니다. 성은 고씨인데 이름은 양이입니다. “고양이입니다.

 

그 외에도 정식으로 호적에 등록된 이름으로, 이강도, 지애미, 안 녕, 박비듬, 어 흥, 방귀남, 방귀녀, 김개년, 방국봉(방구뽕), 피바다, 하지마, 김그만, 지자랑, 피해자, 조약돌, 마진가, 권태기, 신난다, 경운기, 석을년, 조진년, 오지게, 천방울, 자위왕, 설사국, 김만두, 왕변태, 하지마, 강간자, 마 음, 구여운, 오재롱, 김내일, 엄청나, 목소리, 동사개(똥사개) 김생선, 변기통, 변태랑, 조까치 이맹똥, 오육칠, 박시개,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도 당시에는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될 만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을 이렇게 멸시 천대거리로 지었습니까? 그것은 호세아의 자녀들과 호세아의 집을 조롱거리로 삼은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멸시거리와 조롱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음으로서 세상의 멸시 천대를 받고 조롱의 대상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한 우상인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겼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라, 너희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라라고 오늘 본문 호세아서22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애정행각을 하는 음란행위를 말합니다. 유방 사이의 음행을 제하라는 말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음란을 말합니다.

 

여자는 함부로 유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마음이 동한 남자에게만 유방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방사이의 음행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행동하는 음행을 말합니다.

 

고멜은 가난뱅이 목사남편과 결혼해서 세 자녀들을 낳고 함께 살다가 어느날 부자인 재력가 남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고멜을 유혹하자 고멜은 그 남자를 따라갑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서23절에 보면 그 남자가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을 준다고 하니까 그를 따라갔다고 증거 합니다.

 

이 고멜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습니다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바알 신당에 갖다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과 은과 귀고리와 패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바알 신당에 갖다 바쳤습니다. 남편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아내에게 주었는데 아내가 그 돈으로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면 그 남편은 화가나서 아내를 쫓아내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바알과 함께 놀아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호세아서 29절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준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준 것이며 그들이 바알신에게 가져간 은과 금도 내가 준 것이니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도로 찾겠노라그들이 연애하는 자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음란죄를 지은 이스라엘이 수치를 당할 것을 선포 하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의 비참한 말로가 오늘 본문 호세아서 23절과 6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사는 땅은 메마르게 될 것이요 그들로 하여금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이 가는 길을 가시로 막을 것이요 이스라엘 앞에 담을 쌓아 그들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찾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도 또 한번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집을 나간 고멜은 정부와 살다가 정부로부터 버림을 당해서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고 또 다시 창녀가 됩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집을 나간후에 세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는 또 고멜을 찾아가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 전과같이 그녀를 사랑하라라고 호세아서41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시 그녀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드려서 그녀가 팔려간 창부의 대금을 지불하고 그녀를 데려 옵니다. 이와같이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타락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별명이 사랑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녀가 되어서 살고있는고멜을 다시 데려오게 하신 이유는 호세아의 가정의 비극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가르치려고 그런 일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너나 할것없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지옥불로 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문명국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하루에 9,077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282명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설령 안다해도 아버지와 상관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입니다. 하루에 평균 5,900쌍이 결혼하는데 그 중에 1년안에 1,900쌍이 이혼을 하고 3년이 지나면 2700쌍이 이혼을 합니다. 하루에 2,740명의 아이들이 가출하고, 하루에 평균 69,000명의 십대들이 성병에 감염됩니다. 강간은 매 8분마다 일어나고, 살인은 매 27분마다 일어나고, 강도는 매 130초마다 일어나고 자동차는 매 33초마다 한 대씩 도둑을 맞습니다. 그리고 매일 2,740명의 10대 소녀들이 임신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대학교수가 가정문제를 연구했는데 가정이 불행해진 원인의 75퍼센트가 십계명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기에 불행해 졌다고 조사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바드 대학의 피티릿 소로킨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예수믿는 부부는, 10분의 1도 이혼을 하지 않는 것으로 통계 조사를 보고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주님을 그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만 유지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행복이 증가되지만 예수님을 안모시면 은혜와 축복에서 멀어집니다. 사랑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첫째로 만약에사랑이 있습니다.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용돈 줄께”, “당신이 성공하면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저하고 결혼을 약속해 주시면 술 담배도 끊고 당신만 사랑할께요이런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로 때문에사랑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한테 잘 해주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성격이 좋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이것을 계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어떤 조건을 가졌든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무조건적인 불구하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잘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날마다 변덕을 부리는 데도 불구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배신과 미움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않는 불멸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절입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이 성경구절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라는 단어입니다. “다시”(again) “그녀가 너를 배신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가출하여 허랑 방탕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너는 또 다시 그녀를 데려와서 그녀를 사랑하고 같이 살라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말씀에 순종 합니다. 사실 고멜이 제발로 찾아와서 제발 나를 좀 다시 받아 주세요하고 통사정을 해도 받아줄가 말까 한 고멜을 위해서 은 30세겔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하고 그녀를 다시 사왔습니다.

 

호세아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고멜은 꼴도보기 싫은 여자입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결국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이 고멜입니다. 자녀들을 헌신짝처럼 내 팽개치고 달아난 여인입니다. 집을 나가서 이남자 저남자를 만나서 온갖 음란한 짓을 다 저지르면서 지낸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을 은 30세겔을 주고 다시 데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그녀를 전과같이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사랑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고멜은 나를 예표합니다. 세상에서 방탕하고 타락한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내 멋대로 살면서 더러워진 고멜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건포도 떡을 즐긴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가운데 살고 우상숭배와 더러운 잡신들과 조상신들을 섬기면서 살았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 다시 세상의 쾌락에 빠지고, 내가 하고 싶은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도 하나님이 또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또 구원해 주실 테니까 기왕에 사는 것 좀 즐기면서 살면 안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공의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실 때에는 그 사람이 어떤 죄악 가운데 살았던지 어떤 상태에 있었든지 차별하지 않고 무조건 불러서 죄사함을 주시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선택을 받은 후에는 더 이상 옛날에 살던 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처음에 부르실 때에는 지나간 과거를 전혀 묻지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부르시지만, 부름받은 이후에는 조건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성과 조건성이 공존합니다. 먼저 무조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실때는 신분이나 배경, 빈부 여하를 막론하고 어떤 죄인도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죄인을 부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조건성이라는 말은 일단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선택한 후에 다른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그래, 잘한다! 네 맘대로 한번 해봐라 원없이 우상숭배를 해봐라 내가 또 용서하고 내가 너를 사랑할께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따라가고 음란에 빠져 범죄 할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제발 돌아오라고 간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안돌아오면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악이 창성하면 암몬을 불러서 치시고 앗수르를 일으켜서 치시고 바벨론을 일으켜서 치시고 메데와 바사를 불러다가 심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쭐이 날때마다 고난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과 공의로 사랑하십니다. 고멜이 세상에서 방탕한 삶을 살면서 온갖 죄를 저지르다가 노예가 되자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서 은 30세겔을 지불하고 고멜을 데려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냥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밖혀서 물과 피를 다 흘려 주심으로 내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랑을 해도 댓가를 치르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즐기다가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은Enjoy일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댓가를 치르거나 희생은 하지 않으면서 사랑만 받으려고 하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희생이 있어야 행복이 유지 됩니다. 교회도 나라사랑도 마찬가지로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행복하고 나라도 든든이 서 갑니다.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의 영광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희생과 구속의 은총 때문에 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절로 19절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여기서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mption인데 댓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저와 여러분을 사서 천국에 들여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값은 예수님의 피값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고통의 값으로 내가 죄사함받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댓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놓으셨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한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인데 왕정시대에서 가장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41절로 2절에서 이렇게 고백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뒤이음이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인애와 사랑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63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호소했는데 하나님을 알자는 말은 단순하게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자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에서 이 말씀을 배우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호세아가 고백한 이 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인데 이 말은 여자가 남자를 만나서 하나가 될 때, 즉 부부관계를 표현할 때 쓴 단어라고 배웠습니다.

 

남녀가 사귀면 처음에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알아 갑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맞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손을 잡고 뽀뽀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사랑이 깊어져서 마음문이 열리면 서로를 받아드리게되고 드디어 결혼 하면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온몸 구석 구석을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두사람이 한몸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알자라는 단어가 바로 남녀가 하나되어 서로를 알게 될 때 사용하는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 듯이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거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성도가 되어야 참 성도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중신애비가 찾아와서 그남자 키도키고 남자답고 참 좋아 보여 한번 사귀어봐하면서 소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것과, 내가 직접 그 남자를 만나서 데이트를 하면서 사귀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일날만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 성도와, 날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성도와는 천양지차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선지자에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전에 남편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다섯 살과 세 살 된 두 아들을 키우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혼자서 가정을 꾸려나가느라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공장 안의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일을 했습니다.

 

어느날 두 아이들은 엄마 몰래 밖으로 나갔습니다. 공장 옆에는 철길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거기서 조약돌을 들고 놀았습니다.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누군가로부터 애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뛰어 나가보니까, 철길에서 두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달려가면서 얘들아 기차가 온다. 기차가 온다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공장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서 철길로 뛰어 갔습니다. 엄마는 두 아들을 집어 내 동댕이치다시피 철길 밖으로 내던졌지만 엄마는 기차에 치여 죽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장례를 치른후에 두 아들들을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두 아들이 다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 자기들이 태어난 곳을 찾아와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공장에 다니던 분이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아들에게 엄마가 죽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두 아들은 비로소 엄마가 자기들을 구하려고 철길에 뛰어들어 죽은 사실을 알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우리를 살리려고 철길에 뛰어들었다가 돌아 가셨군요 엄마 고마워요

 

두 아들은 동네 분들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갔고 나중에 그 무덤에 묘비를 세웠습니다. “어머니, 우리를 구하려고 자기몸을 희생안 어머니 여기에 잠드셨습니다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는 일은 어느 부모나 할수 있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희생은 이수현학생의 희생입니다. 이수현학생은 고려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도쿄의 신오쿠보역에서 전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마침 전철이 들어온다는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는데 한 술취한 사람이 철로로 떨어졌습니다.

 

이수현학생은 무조건 전철에 뛰어들어서 술취한 사람을 구해 냈지만 자기는 달려오는 전철을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일본은 우리나라와 늘 감정이 좋지 않은 나라입니다. 원수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수현학생은 원수나라의 중년 남자가 술에 취해서 철로에 떨어졌는데도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서 위급한 상황에 놓인 취객을 구해 내고 자기는 전철에 부딪혀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을 구한 엄마의 희생도 고귀 하지만 정말 고귀한 희생은 이수현학생의 희생입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아니 우리와는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의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찾아 보니까 이수현군이 얼마나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은지 정말 아까운 인재 하나가 세상을 떠났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타까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같은 죄인을 구원 하시려고 친히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중에 왕이십니다. 그런 위대하신 예수님이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으니 그 사랑은 온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데려올 때 속전을 치르고 고멜을 데려온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한 생명의 속전을 치르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엄청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사랑을 받은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서 살다가 결국 창녀가 된 고멜을 다시 찾아온 후에 고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3:3)

 

호세아는 창녀가 되어 비참하게 살고있는 고멜을 찾아가서 엄청난 값을 치르고 그녀를 데려온 후에 여보 이제는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삽시다! 더 이상 다른 남자를 좇아가지 말고, 바람도 피우지 말아요! 나도 당신만 사랑할께요!”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그동안 고멜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호세아는 고멜을 때려 죽여도 분이 안풀릴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끝까지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람만 바라보고 살고, 땅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또다시 다가오셔서 이제부터 너는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 내가 너의 모든죄를 다 용서해 주었으니 제발 나와 같이 동행하자! 이제부터는 오직 나만 바라보고 새롭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신년축복 대심방예배를 드리는데 올해 80세가 되신 정금순집사님이 놀라운 간증을 하셨습니다. 방학때 손주들이 와서 수련회에 가자고 해서 손주들과 함께 교회에서 하는 수련회에 갔는데 매년 갈때마다 수련회에서 예수님의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이라는 영화를 보여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 영화를 세 번이나 보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금순집사님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밖히는 영화를 보는데 예수님이 너무나 심하게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이 너무나 처참해서 차마 눈을 뜨고 볼수가 없었다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이 시골 구석박지에서 사는 할머니집사님이 그런 신앙깊은 영화를 세 번이나 보셨다는 말에 제가 놀랐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쇳조각이 달린 채찍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고 십자가에 목밖힌 수난은 내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신 수난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기에 내가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피값으로 사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 내가 사는 것이요 또한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받은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천국에 다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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