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진숙권사님께서 김윤숙집사님과 함께 교회로 오셨습니다. 김윤숙집사님이 남해에 오셔서 이진숙권사님을 만나려고 밭으로 갔더니 밭에서 마늘을 뽑던 이진숙권사님이 자기를 보더니 마늘을 들고 춤을 추더랍니다.
뜨거운 땡볕에서 마늘을 뽑다가 사람을 만나면 힘들고 피곤해서 왜 왔나 하고 짜증이 날텐데 이진숙권사님은 아랑곳 하지않고 춤을 추면서 자기를 맞이하더랍니다. 그래서 김윤숙집사님이 춤을 추는 권사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면 어떻게 힘들고 피곤한 상황에서 춤을 추겠냐고 하면서 이진숙권사님을 칭찬 하셨습니다.
김윤숙집사님은 사업상 광양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렀는데 오실때 맛있는 술빵을 손수 만들어 오셔서 저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시면서 다섯 손가락의 뜻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손가락 다섯개는 오만명의 어린이들에게 한달에 만원씩 오년동안 도와주자는 캠페인의 뜻이 담겨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영어에 패러독스(Paradox)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역설”이라고 번역합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는 “모순”(矛盾)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창 모(矛) 자와 방패 순(盾) 자를 쓰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가 파는 창과 방패를 선전하면서 “이 창은 아주 예리해서 어떤 방패라도 다 뚫을 수 있습니다”라고 선전을 했고 그리고 방패를 선전할 때는 “이 방패는 너무 튼튼해서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합니다”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있던 한 노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면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자 상인이 아무 대답도 못하더랍니다.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을 모순, 또는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태복음10장16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특히 뱀과 비둘기라는 두 이미지는 정말 안 어울립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 때,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요 아주 순결한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한편 뱀은 약아 빠지고 간사하고 음흉한 동물입니다.
성경에도 비둘기는 순수한 동물로 나타나고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3:1)라고 증거 합니다. 뱀은 하와를 꾀어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만든 사탄의 상징적인 동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짐승이 뱀입니다. 그 뱀은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만들었던 악한 짐승입니다. 그리고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로와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같이 뱀과 비둘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두가지를 함께 닮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게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이 말씀하신 “지혜”와 “순결”도 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은, 지혜롭지 못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나쁜사람들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지혜로우면 너무 약아 빠져서 순진하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을 하면서, 너희가 전도할 때 반드시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다면, 즉 뱀이 상징하는 지혜는 있는데 비둘기가 상징하는 순결함이 없다면 반쪽짜리 신앙인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뭔가 자기들과는 다른 인격과 성품을 가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칭찬받는 성품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처럼 간사하고 악한모습의 뱀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은 악의 상징으로 여겨진 뱀의 모습이 아니라 뱀이가진 긍정적인 이미지와 장점을 주제로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뱀은 누구나 다 질색하는 동물이지만 그러나 뱀도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애완동물 중에 별별 동물을 다 키웁니다. 개나 고양이뿐 아니라 이구아나, 뱀, 고슴도치까지 키웁니다. 제 딸아이가 가장 키우기를 원하는 동물이 뱀입니다. 어쩌다가 제 딸아이가 뱀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하여튼 제 딸아이는 동물원에 가면 뱀 우리에서 떠날줄 모릅니다.
딸아이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에게 “아빠 뱀을 키우고 싶어요 뱀을 사주세요” 할 정도로 뱀을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윤정아 뱀은 악의 상징이란다 뱀은 안된다” 했더니 “아빠 뱀도 하나님이 창조했잖아요”합니다.
그런데 결혼한 딸아이의 집에 가 보니까 뱀은 자기 딸아이들이 싫어해서 안키우고 고슴도치 두 마리를 가져다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고많은 애완동물중에 고슴도치를 좋아하는 딸아이를 보면 참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전도할 때 뱀처럼 지혜롭게 전도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뱀에게는 도대체 어떤 지혜가 있길래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까?
먼저 뱀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잘 대처해서 어려움을 모면합니다. 동물 중에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신속하게 도피하는 짐승이 뱀이라고 합니다. 뱀은 언제든지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몸을 숨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뱀은 위험한 일을 만나면 신중한 분별력이 있어서 자기가 처한 위험 속에서 능란하고 신속하게 빠져 나가는 기민하고 민첩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뱀은 생명 보존의 지혜가 어느 동물 보다 뛰어 납니다.
옛말에 “집을 지키던 구렁이가 집을 떠나면 그 집안은 망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뱀이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 자연 재해나 재앙에 대해서 동물적 감각이 더욱 발달되었기 때문에 둥지에서 속히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다 보니까 뱀이 그 집에서 나간후에 어떤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고서 뱀이 집을 떠나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뱀은 어려움을 빨리 예견하여 회피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과 더불어 제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위협과 협박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서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훼방하는 악한 무리들과, 교회를 해하려는 이단들로부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본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격언으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전승인 미드라쉬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내게 대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리고 무슨일이 벌어져도 순결함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복음 전파의 승리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으로 비유 하셨습니다. 양은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습니다. 양은 아무 무기가 없어서 정말 무기력합니다. 양은 목자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이와같이 순진하고 착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이리 떼들이 우글대는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그들에게 잡혀 먹히거나 짓밟힐수가 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곧 험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전도자가 편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끌려가서 매를 맞기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을 파송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꼭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은 심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험한 곳으로 제자들을 보내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비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것입니다.
후배 목사의 간증입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매복 작전을 나가서 매복을 하는데 큰 독사 한 마리가 지나가더랍니다. 같은 내무반의 상병이 그 독사를 잡아서 반합에 넣어두었다가 작전이 끝난후에 돌아와서 경월소주 댓병짜리 한병을 사서 뱀을 그 소주병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술을 소대장을 주었더니 소대장이 입이 찢어지더랍니다.
그런데 소대장은 그 뱀술을 중대장에게 주었고 중대장은 또 대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대대장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누가 이 뱀을 잡았냐고 수소문을 하더니 그 뱀을 잡아서 술을 담아올린 사병이 칭찬을 받고 3박4일동안 포상휴가를 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와같이 뱀을 좋아 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아담과 이브가 한국사람이었다면 뱀에게 유혹을 받지 않고 오히려 뱀을 잡아서 술을 담그던지 뱀을 잡아서 구워 먹었을 거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순결하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멍청하게 당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삶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손해 보지 않는 민족이라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더군다나, 노벨상의 30%가 소수민족인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최고 명문대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에서 유대인 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25-30%를 웃돌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미국 내 400명의 대재벌 가운데 유대인이 전체의 23%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 변호사의 15%가 유대인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이토록 자기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땅에서, 영향력을 발휘 하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라고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살아도 복을 받고 죽어도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고많은 짐승중에 뱀을 본받으라고 하니까 모두가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 뱀은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땅군과 더불어 뱀을 정력제로 먹는 사람들 뿐입니다. 뱀은 징그럽고 생긴것도 혐오스럽게 생겼습니다. 뱀은 발도 없고 손도 없습니다. 그냥 나무뿌리 같이 길다랗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뱀에게도 장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팔다리가 있는데도 헤엄을 못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팔다리가 있어도 나무에 못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뱀은 팔다리가 없는데도 물에 던져 놓으면 헤엄도 잘 치고, 나무에도 쑥쑥 잘 올라갑니다. 그래서 뱀은 굉장히 적응성이 뛰어난 동물입니다. 한마디로 뱀은 아주 유연하고 어떤 환경에든지 잘 적응합니다.
예수님은 이런점을 본받게 하려고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비록 양과 같이 연약하지만 그러나 뱀과 같이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뼈가 있지만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뱀은 잘 드러나지 않게 행동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해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하늘의 비밀을 전하고 싶어서 불같이 뜨거운 복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때는 상대방을 품을 수 있고 먼저 그들의 심경을 헤아릴줄 아는 유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할때는 목에 힘을주고 뻣뻣한 자세로 말하거나 너무 강하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마음문을 열지 않습니다. 뱀처럼 뼈가 있지만 부드럽고 유연하게 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뱀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급하지도 않습니다. 앞뒤를 재면서 지혜롭게 이동합니다. 그리고 뱀은 뒤로 가지 않습니다. 오직 앞으로만 전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뱀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배웁니다. 뒤엣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갑니다. 부정이 아니라 긍정입니다
전에 국회 청문회를 할 때 보건 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된 유시민 의원이 청문회에 나와서 많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는 두뇌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균형 잡힌 생각과 통합적인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쟁점이 된 것 중에 하나는 종교문제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종교기관이란, 정신적 안정을 주고, 단기간에 사람을 마취시켜서 안정시켜 주는 댓가로 헌금을 받는 서비스업이다. 그리고 교회는 민중을 무지하게 만든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치 공산주의를 제창한 칼 마르크스가,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 “종교는 아편이며, 민중을 무지하게 만든다”라고 하면서 모든 교회를 부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것처럼 그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이북의 교회를 파괴하고 수많은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의 동포들은 공산주의 학정에 시달리고, 수많은 이북의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거기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 있는 것이 우리 나라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게다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혜택을 주도록 하는 곳이 보건 복지부인데 그런 중요한 부서에 임명된 사람이 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악하게 이야기를 했으니 그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고도 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유대인의 특징은, 절대 긍정입니다. 신앙도 긍정입니다. 믿음은 긍정입니다. 지혜는 긍정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할 때 아무렇게나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전도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를 만나자마자 부정적인 말을 막 늘어놓으면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약장사가 약을 파는데 “여러분 아주 좋은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은 만병통치약과 같습니다. 이 약은 암에 특효 성분을 가진 약입니다 이 약을 먹으면 항암효과가 있어서 어떤 암이든지 팍팍 치료가 됩니다. 약효는 이미 검증이 된 약입니다”하면서 장점을 먼저 이야기 하고나서
나중에 “그러나 이 약에도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임산부가 드시면 식욕이 떨어지고 머리가 빠질수도 있고 소화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선전을 해야지,
처음부터 “이 약은 항암치료제로 좋은 약인데 이 약을 먹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이 약을 먹으면 머리도 빠지고 소화도 안되고 두통도 생기고 눈이 어질어질해집니다 그러나 먹으면 효과를 볼수가 있습니다” 하면서 부정적인 말부터 늘어 놓으면 약이 아무리 효능이 좋은 약이라도 사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지혜롭게 전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자 마자 “예수 안믿으면 지옥갑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그때부터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좆아가야 합니다. 헌금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감사헌금도 해야 하고 생일날에는 생일헌금을 하고 부활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때는 특별감사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믿다보면 그게 다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제사 지내면 지옥갑니다. 불교는 우상숭배입니다. 불교 믿으면 지옥갑니다. 술 담배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런식으로 전도를 하면 예수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먼저믿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후에 받은 축복과 더불어 우리의 삶속에 일어난 좋은 일들과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먼저 하고 그리고 마음문이 열리면 예수님을 소개 하면서 구원의 축복과 천국의 축복을 같이 누리면서 살자고 이야기를 해야 지혜로운 전도입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전도하면서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19-27)
바울사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과 접촉점을 찾아서 적응하는 유연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상황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와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주의자처럼 다가갔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언행심사를 가졌기에 오해도 받았지만 그러나 최종목표는 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기에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신 결정적인 또 한가지 이유는 허물을 벗는 뱀의 특성 때문입니다. 뱀은 일년에 한번씩 스스로 허물을 벗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게 되면 뱀의 비늘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뱀은 결국 죽고 맙니다. 그래서 뱀은 때가되면 바위에 머리를 비비면서 괴롭고 아파도 열심히 비벼서 온 몸의 허물을 벗습니다. 마
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벗어버려야 할 허물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끊지 못하는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런 습관들을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고질적인 습관과 굳어진 마음과, 기쁨과 감동이 사라진 마음은, 새롭게 거듭나야만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파옹구우”(破甕救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한발의 피해가 심해서 집집마다 엄청나게 큰 장독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래서 비가올 때 그 독에 물을 받아놓습니다. 그리고 비가 안올 때, 그 독에 있는 물을 퍼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독을 드려다 보다가 그만 한 아이가 독에 빠졌습니다. 아이는 독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죽어 갔습니다. 친구들이 난리를 치면서 “독에 사람이 빠졌어요 도와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다 논밭에 일하러 나가서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물속에 빠져서 죽어 갑니다. 그런데 그때 사마천이라는 아이가 큰 돌멩이를 가져와서 힘껏 독에 던져서 독을 깨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독이 와장창 깨지면서 물속에 빠진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독을 깨뜨릴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다들 친구가 독에 빠져 죽는다고 아우성만 쳤지 독을 깨뜨릴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이 독을 깨뜨려서 친구를 구하는 지혜를 발휘했기에 비록 비싼 독은 깨졌지만 사람이 살았기에 그 사건을 두고 “파옹구우”(破甕救友)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지지 않는 내 자아를 깨뜨리고 죄악의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나를 건져내려면 나를 둘러싸고있는 죄의 독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 삶을 감싸고 있는 악한 습관들과 마귀가 뿌린 악한 생각들과 온갖 유혹들을 깨뜨리고 거기서 나와야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뱀은 절대로 큰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낮은 자세로 기어 다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만나보면 빈 깡통처럼 시끄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만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바로 혼자서 떠드는 사람입니다. 말은 혼자서 다 하는데 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계속해서 반복하니까 함께한 사람들은 식상해서 피곤만 쌓여갑니다.
예수님은, 믿는 제자들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하려고, 너희는 뱀처럼 조용하고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면서 뱀에게서 그런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도는 말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 못해도 그 속에 낮아진 마음이 있고 겸손한 섬김이 있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더불어서 뱀은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무늬와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뱀가죽으로 지갑도 만들고 핸드백도 만듭니다. 뱀가죽의 부드러움이나 색깔의 아름다운 조화는, 소가죽이나 양가죽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래서 뱀가죽으로 만든 지갑이나 핸드백 또는 신발이나 부츠등은 아주 비싼값에 팔리는 것입니다.
뱀에게도 이와같이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점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믿음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징그러운 뱀가죽으로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속에있는 징그럽고 더러운 것들을 다 뽑아낸 후에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이 가득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어서 신기한 것은 징그러운 뱀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가운데 뱀이 제일 깨끗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돈 빌려 쓰고 돈도 잘 갚지 않고, 빌려가서 떼어먹고, 그런 사람이 전도하면 “너나 믿어라 나는 안 믿을란다”하고 외면합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나가서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네에서 도무지 덕을 세우지 못하고 밤낮 욕만 먹으면서도 사람들만 만나면 예수 믿으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릴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동네 전체가 구원의 길이 막혀 버립니다.
본래 뱀은 간교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다. 주님은 간교한 뱀처럼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혜로운 것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다면, 즉 뱀이 상징하는 지혜는 있는데 비둘기가 상징하는 순결함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잔머리 신앙인”이 됩니다. 너무 영악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손해를 안 봅니다.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면서 성공과 출세와 이득만 추구합니다.
그런데 잔머리를 굴리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손해는 안 볼지 몰라도 신앙은 절대로 안자랍니다. 그래서 잔머리만 굴리면서 봉사도 하지않고 헌신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복을 받지 못합니다. 잔머리 굴리는 신앙인은 평생가도 감격과 은혜가 없습니다.
한편 비둘기만 있고 뱀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즉 순결과 순수함만 있고 뱀 같은 지혜가 없으면 이리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단에 빠지거나 실족하게 됩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해서 가르치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아빠는 뭐하는 분이시니?” 한 아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합니다. “예,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에요.” 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우리 아빠는 의사에요.” 또 한 아이도 “우리 아빤 대학 교수님이에요”
그런데 유독 한 아이만 시무룩하게 대답을 합니다. “네 아빠는 뭐 하는 분이시니?” “우리 아빠는요” 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가 “사람은 착해요”합니다. 이 아이의 이야기는 왠지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장들이 가정을 이끌어가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대임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 아빠는 사람은 착해요.” 라는 말은 칭찬입니까? 아닙니까?
아마도 이 아이가 대답한 그 말의 의미는 “우리 아빠는 착한 분이고, 참 좋은 분이에요”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아빠는 착하지만 무능한 사람이에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아빠는 착하고 순해 빠지기만 했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빠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기만 해서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것처럼, 우리도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순결하고 순수하기만 하면 이 험한 세상에서 악한 자들에게 잡아 먹히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수가 없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곳에 죄가 침투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력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제는 아주 의도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려는 단체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가 올바로 서지 못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 노릇을 못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소리는 기꺼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손한 생각과 악의적인 태도로 우리 기독교를 깎아 내리면서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람들의 언행심사는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하는 늑대와 같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전에 SBS 방송국에서 SBS 스페셜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4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습니다. 특정한 방송 이름을 거명해서 유감입니다만 그래도 할 이야기는 해야겠습니다.
이 4부작은 종교와 종교를 화해하고 수용한다고 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송은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기독교를 매도하고 이슬람교를 일방적으로 좋게 묘사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는 것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혼합해서 신화화시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슬람교의 무함마드(마호멧)와 같은 종교인일 뿐인데 후대사람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신의 아들로, 구원자로 만든 것이다”라는 내용을 보도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에 수 많은 종교가 있는데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방송을 한적이 없습니다. 감히, 우리가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을 아주 별볼일없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폄훼한 그들의 악한 의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국만 그런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방송들이 기독교의 비리나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불교나 천주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분량의 내용을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우리 기독교신앙을 비방하고, 매도하고 말살하려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런때에 우리는 그저 순수하고 착하게 앉아서 “그러려니” 하고 참고만 있어야 합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천지 이단이 전국에서 난리입니다. 신천지 이단이 서울과 전라도와 경상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미 서울과 호남 그리고 부산 등지의 큰 교회에서는 수백 명씩 신천지에 넘어가서 교회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신천지가 왜 그렇게 악하냐 하면, 수 많은 이단중에 신천지가 가장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새 신자를 가장해서 교회에 침투합니다. 전에 다른 건전한 교회를 다녔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심지어 가짜 이름까지 써가면서 자신을 속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물량공세로 사람들을 매수한 후에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로, 순수한 성도들을 현혹해서 신천지로 넘어가게 만듭니다.
그들은 “정말 은혜로운 성경공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데려가서 신천지 무료성경신학원에 다니게 하면서 포섭을 합니다.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들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고 “모략”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정당화 합니다.
게다가 패거리로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사귄후에 은근히 교회 목사를 비방하고, 거짓말과 중상모략을 해서 목사를 쫓아내고 자기네 쪽 신천지 목회자를 청빙해서 교회를 통째로 먹어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을 그들은 “산 옮기기”라고 말을합니다.
어쩌다가 신천지 신자임이 발각되면 목사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면서 신천지를 끊고 앞으로 바로 믿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게 다 거짓 눈물이요, 거짓 회개입니다.
그리고 종종 목사가 근거도 없이 자기를 신천지라고 매도했다고 하면서 목사를 세상 법정에 고발해서 교회를 시험에 빠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천지는 아주 악한 거짓말장이요 뻔뻔한 자들입니다.
사탄이나 악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교회를 파괴하는 그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안믿는 사람들은 전도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망쳐놓는 악한 사탄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우리를 삼키려는 이리가 많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자들(벧전 5:8)이 널려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못된 짓도 거리낌없이 행하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
래서 이런 마귀사단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비둘기 같은 순수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뱀처럼 지혜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단이나 적대세력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꾸미는 일들을 보면 아주 치밀하고 조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지혜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으로 무조건 용서만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시험에 들게하는 악한 자들은 단호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로와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드렸는데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좀 더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철장 권세도 아니고,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가지고 나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둘기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나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들어갔던 새중에 정결한 새입니다. 또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새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로 드려진 새입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순결한 성도의 상징입니다.
성령님도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은, 죄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순전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도 죄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그 거룩하심을 유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타협하면 세상의 동류는 될 수 있어도, 복음의 승리자는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불의와 죄의 미혹에 빠져 타락한 자들이 많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은 비둘기를 우리에 넣어가지고 가서 본부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비둘기 다리에 편지를 써서 날려 보냈습니다. 그러면 비둘기가 그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때로는 승전보의 기쁜 소식을 전했고 때로는 패전의 슬픈 소식도 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둘기가 기쁜소식과 나쁜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나쁜 소식도 전해야 합니다.
이어서 비둘기는 성부, 성자, 성령중에 성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강대상에 포도송이나 십자가, 또는 비둘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새겨 놓았습니다.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은,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도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비둘기는 성령하나님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악령은 더럽고 추하고 음란하고 죄를 짓게하는 나쁜 영이지만, 성령님은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능력의 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받은 베드로가 대중 설교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한 번 설교했을 때 회개하고 돌아온자가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무식한 어부가 설교를 잘한 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아무리 유창한 설교를 해도 성령님의 임재가 없으면 지식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런 설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자 산헤드린 공회는 바짝 긴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베드로를 잡아다가 공회에 세웠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고관 대작들이 다 참석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문중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심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 앞에 오그라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공회원들 앞에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행4:8) 라고 하면서 또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 하나도 떨지 않고 오히려 공회원들을 꾸짖으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과 성도들은 언제나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전도하는 현장에서 채워졌습니다. 핍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했습니다.
그들이 언제 성령이 충만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힘 있게 전할 때, 바로 그때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나가서 전하기 시작하면 저절로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전도를 했는데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를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전도할 대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담대하게 다가가서 성령님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주눅 든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권세를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 전도에 있어서 태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누가 핍박을 하지는 않습니다. 전도하기에 가장 좋인 시절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었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울러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요 온유함의 상징입니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모든 공공문서와 공무원의 임명장, 그리고 대통령이 외국 정부의 수반에게 보내는 통신문과 미국주화, 우표, 여권, 기념물 등에는 “대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대문장을 보면 한 가운데에 독수리가 있는데, 왼손에는 올리브가지를 쥐고 있고, 오른쪽손에는 13개의 화살을 쥐고 있습니다. 올리브가지는 평화를 상징하고 화살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의 질서에는 제국주의적이고 세계 패권주의적인 상징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의 상징은 월계수 잎과 비둘기밖에 없습니다. 비둘기가 월계수잎을 물고 있는 장면은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면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상징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계가 추구하는 방향은 오직 평화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평화가 임했습니다. 비둘기는 전 세계 모든나라가 좋아하는 새입니다. 비둘기는 순결하고 평화를 상징하고 온유함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자세가 아니라 평화롭고 온유하고 온순한 자세로 전도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강퍅하고 고집불통으로 전도를 한다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기만 하고 순결하지 않은 자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 순결하기만 하고 지혜롭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속임을 당하든지 이용을 당하든지 잡혀먹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순결이 동시에 잘 조화를 이루어야 온전한 성도가 되고 온전한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지혜롭고 순결한 복음 전도자로 사명을 잘 감당했구나”라는 칭찬을 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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