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날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개가 계속 쉬지않고 짖어서 무슨일인가 하고 나가 보았더니 다솔이 집 안에 커다란 독사 한 마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독사는 짖어대는 다솔이를 향해서 온 몸을 꽃꽂이 세우고 공격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다솔이는 제가 나가니까 원군이 왔다고 좋아서 개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 뱀을 물려고 짖어 댔습니다. 뱀에게 물리면 당장 죽을텐데 그것도 모르고 개집으로 달겨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다솔이의 줄을 잡아 당겨서 다솔이를 저만치 옮겨놓고 감을 딸 때 쓰는 잠자리채를 가져와서 개집안에 있는 독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독사가 쉽게 잡히질 않아서 한참동안 애를 쓴 끝에 독사가 개집을 빼져나오길래 막대기로 뱀을 때려잡았습니다.
제가 뱀을 잡고난 후에 주님의 가르침이 떠 올랐습니다. 집에 누가 들어와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마귀가 내 안에 들어와 있으면 마귀짓만 하면서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시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와 계시면 영생을 얻지만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지옥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오직 예수님이 결정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재물과 권세와 명예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강과 건강과 선한 인격을 가졌다면 그것도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내 생명을 걸고라도 꼭 얻어야 합니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집트의 왕들은 피라밋을 건설 했습니다. 수 많은 노예를 동원해서 무덤인 피라밋을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의 왕들이 피라밋을 만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진시황은 조선땅에 동자를 보내서 금강산까지 뒤지면서 영원히 늙지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해 오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화려하고 웅장한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아방궁이 완성되자 진시황은 아방궁과 똑같은 궁궐을 땅 속에 지었습니다. 진시황이 땅속에 아방궁을 지은 이유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명나라의 황제도 자기의 왕궁을 본따서 지하에왕궁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땅 속에 왕의 보좌와 왕비의 보좌, 그리고 어둠을 밝혀줄 기름이 가득차 있는 큰 항아리와 등잔을 예비하고 먹을 양식도 지하왕궁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입구는 철저하게 막고 흙으로 덮어서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지하 왕궁에서 지하 세계를 통치하면서 영원히 살려고 그런일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많은 왕들이 이런 일들을 한 이유는, 죽어서도 그런 권세를 영원히 누리고 싶어서 그런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밖에는 천국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힌두교인들은 자기의 몸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쇠사슬로 몸을 묶고, 불 가운데로 뛰어 다니면서 영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성철스님은 15년 동안 바깥 세상에는 전혀 나가지 않고, 동구불출이라는 고행을 하면서 지내고 그리고 10년 동안 한번도 등을 바닥에 대지 않는 장좌불와라는 고행을 했지만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라고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아무리 오랬동안 요가나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비워도 영생은 얻지 못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계명과 율법으로도 정결함을 받지 못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3장20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라고 증거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유일한 이름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릴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돈도 귀하고, 지식도 귀하지만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참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원죄는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죄입니다.(롬5:12). 사람은 누구나 조상들의 죄를 유전받아서 태어나기에 원죄를 가진 죄인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내 스스로 짓는 고범죄(故犯罪)가 있습니다. 이 죄는 자범죄라고도 합니다.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르는 죄입니다. 성경은 이 죄를 “고의로 지은 죄”(시19:13)라고 번역 했습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죄를 품고 사는 사람은 늘 불안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갈등과 파탄으로 치닫는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아울러 오늘날 모든 현대인들은 너나 할것없이 빚을 안고 살아갑니다. 도시인들은 집을 장만하느라 빚을 지고 농촌에서는 농사짓느라 농기계를 사거나 또는 다양한 종류의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게는 카드 빚에서부터 거액 융자에 이르기까지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사채까지 얻어쓰고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가운데 쯫기면서 사는 이유가 바로 빚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가난은 속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수가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사람이 가난해지면 비굴해 지기도 합니다.
제가 명지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창 친구가 명지여자 고등학교의 체육선생님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어서 저에게 함을 져 달라고 부탁을 해서 여고의 동료 교사 두사람과 함께 셋이서 함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세사람이 함을 팔았는데 함 값으로 3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빚을 얻어서 집을 장만했기에 매달 융자받은 빚을 갚느라 쩔쩔 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돈 10만원이 아쉬웠던 터라 저는 함값으로 받은 그 30만원을 세 사람이 나누어 갖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고에서 온 두 선생님은 그 돈을 나누어 갖지 말고 결혼하는 친구의 선물을 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우겨서 돈을 나누어 갖자고 고집을 했고 결국 저는 10만원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건은 제 일생에 두고 두고 부끄러운 사건으로 지금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후에 어쩌다가 길에서, 함께 함을 지고갔던 여고에 근무하던 그 선생님들을 만나면, 저는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빚에 허덕이고 가난에 쪼달리면 이와같이 체면도 인격도 내 팽개치고 돈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저는 그때 체험 했습니다.
결혼한 그 동창친구는 수년후에 제가 근무하는 남고의 체육선생님으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와 명지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를 했습니다.
저는 어느날 그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봐 친구야! 내가 함을 팔러간날 말이야!, 그때 내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서 함값으로 받은 30만원을 세사람이 나눠갖자고 우겨서 10만원을 내가 가져왔어, 두 선생님은 너의 선물을 사자고 했는데 내가 그때 너무나 어려워서 10만원을 달라고 해서 가져왔어,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미안하다!” 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는 저에게
“그랬어? 그럴수도 있지 뭐! 신경쓸 것 없어! 다 지나간건데 괜히 쓸데없는걸 가지고 마음쓰지마”하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 친구에게 고해성사를 한 저는 그 일에 대해서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은 교감선생님이 되어서 학교를 잘 이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종종 서울에 갈때마다,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그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만, 저는 그 당시에 함값 10만원을 가져온 일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지금까지도 선뜻 그 친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그 사건을 다 잊어 버렸겠지만 그러나 저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뜨거워져서 “내가 왜 그런짓을 했을까?” 하면서 자책에 빠지곤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수치를 무릅쓰고 안면몰수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빚이 무거운 짐이되면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전에 34살 먹은 엄마가 세 아이들을 데리고 14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집을 나간뒤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이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8살난 아들이 엘리베이터에 타고있던 아주머니에게 “아줌마 우리엄마가 우리를 죽이려고해요! 살려주세요!”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엄마가 왜 너희들을 죽여?, 너희들이 엄마 말을 잘 들으면 되지!, 엄마 말 잘 들어라”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습니다.
알고보니까 아이들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 이 여자는 남편이 집을 나간후에 친정에서 돈을 갖다 쓰다가 나중에는 카드빚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카드빚이 3000만원이 넘어가자 계속 독촉을 받으면서 힘들어 했습니다.
아이들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만원씩 빌려서 썼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돈을 빌리지도 못하고 지내는데 8살난 아들이 학교에서 단체로 수영장엘 가게 되었는데 회비 7000원을 못내는 바람에 아이가 울면서 학교에 안간다고 떼를 쓰자 엄마는 차라리 이렇게 사는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죽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14층으로 올라가서 먼저 아들을 던져서 떨어뜨려 죽이고 그리고 다시 다섯 살난 딸아이를 던지고 그리고 세 살난 딸아이를 안고 뛰어 내려 죽었습니다.
그 외에도 경기도 용인에서 살던 회사원 조 모씨는 아내가 집을 나간후에 카드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해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와 3살배기 아들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칼로 손목을 그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유서를 써 놓았는데 “어머니께 아들을 맡겨 고생을 끼치느니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써 놓고 죽었습니다.
전북 완주에서는 승용차 안에서 일가족 4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자식들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이씨 부부는 주식으로 1억7000만원을 잃고 비관하여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빚쟁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빚을 질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파산하면 재산도 사라지고, 가정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사회에서는 신용 불량자로 낙인이 찍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게다가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을 성경은 죄인이요 악한자라고 증거 합니다. “사악한 자는 빌리고 갚지 아니하나 의로운 자는 긍휼을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그래서 돈 때문에 죄인이 되면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에 할수만 있으면 빚을지지 말아야 합니다.
돈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의 빚을 지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그 죄의 빚을 해결하기 전 까지는 악인이요,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빚진 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채주의 종이 됩니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다스리고 빌리는 자는 빌려주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잠언22:7)
이것은 구원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죄의 종의 신분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죄의 채무(빚)는 해결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세상에는 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로마서3:10) 라고 증거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의 채무를 해결할수 없기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엄청난 죄를 짓고 살면서 지옥불로 가고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 마태복음 18장 21절로 35절의 말씀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이 신하는 임금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달란트는 24조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이 신하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빚을 졌을까를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이 신하는 나라의 재정을 맡아서 일을 하다가 임금에게 큰 손해를 입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그 신하에게 “너는 네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는 울면서 임금님에게 잘못했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갑자기 이 신하가 측은하게 여겨져서 “좋다 너는 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서 빚을 몽땅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 신하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동안은 빚만 생각하면 잠도 안오고 밥맛도 없고 “이제 인생 끝났구나!” 라고 생각 하면서 밤마다 잠도 못자고 시달렸는데 그 엄청난 빚에서 자유케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신하가 기뻐서 집으로 가는데, 길에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꾸어가고 갚지 않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은 우리 돈으로 500만원쯤 됩니다.
그런데 이 신하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목을잡고 “지금 당장 빚을 갚으라 안갚으면 감옥에 쳐 넣겠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돈은 자기가 임금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껌값도 안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자기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진 사람의 목을 잡고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쳐 넣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엎드려서 빌면서 “내가 갚겠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그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마18:29-30)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임금이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격분합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임금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2-33)
결국 임금은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신하는 감옥에서 평생을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게 누구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임금님은 예수님입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도 나가서 작은 빚을 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큰소리를 치다가 안 갚는다고 그사람을 감옥에 쳐 넣은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엄청난 죄인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요, 일거수 일투족 모든삶이 죄로 얼룩졌습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우리가 죄값으로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마땅한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의 본래의 뜻은 “내가 빚을 다 갚았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하나님앞에서 지은 모든 죄를 다 갚았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난 죄의 빚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네 죄의 빚을 다 탕감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엄청난 죄를 탕감받은 우리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의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엄청난 용서를 망각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가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때 설교를 들으면서 가장 은혜를 받은 예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예화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나갔을 때 상대 후보인 스탠턴은 링컨에게 말 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스탠턴은 유세 연설을 하면서 “여러분 고릴라를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뽑을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오리지날 고릴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링컨을 비하하면서 욕한 말입니다. 링턴이 턱수염을 기르고 다니니까 링컨을 고릴라로 비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 후에 내각을 조직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장관 자리에 자기를 고릴라라고 욕을 하고다닌 스탠턴을 임명 했습니다. 참모들은 펄펄 뛰면서 링컨에게 “각하를 폄훼하고 악담하면서 조롱한 사람을 어떻게 국방부장관에 임명할 수가 있습니까?”하면서 화가나서 물었습니다.
그때 링컨이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들 말이 맞네! 그 사람은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적이었지! 그렇지만 이제 그가 요직에 앉았으니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닐세! 적이 없어진것만 해도 좋은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부터 그가 나를 돕는 사람이 되었으니 내 일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그것도 좋은 일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 했으니 우리는 서로가 복을 받게 될걸세!”
정말 대인다운 행동입니다. 복수하면 복수를 당하는 자와 함께 망합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용서한것처럼 너희도 남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일본은 절대로 용서할수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도 만들어 졌습니다. 어느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 10명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런데 낙하산이 일곱개 밖에 없었습니다. 세사람은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때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데 희생정신이 강한 미국사람이 일어나더니 “내가 낙하산없이 희생하겠습니다! 미국 만세” 하고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자 신사인 영국사람이 나도 질세라 일어나더니 “영국만세”하고는 뛰어 내려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로 한국 사람이 나오더니 “대한민국만세” 하더니 자기가 뛰어내린게 아니라 일본 사람을 발로 뻥 차서 일본사람이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일본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가 만들어 졌습니다.
어떤 외국 사람이 한국의 역사를 공부한 후에 결론을 내리기를 “한국 역사는 恨의 역사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서도 한을 가지고 있고, 중국과 소련과 북한에 대해서도 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을 품고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제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것이 아니라 맺힌 한은 풀고,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웰링톤 제독이 어느날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한 병사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를 좋은 병사로 만들려고 노력 했지만 너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징계도 해보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너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이제 너는 살 자격이 없으니 죽음으로서 네 죄를 씻어라! 이 병사를 데리고 나가서 총살하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의 중대장이 웰링턴 제독에게 달려와서 “제독님! 부디 한번만 제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제독님! 저 친구를 용서해 본적은 없지 않습니까? 부디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 병사가 달라질 것입니다” 진지하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중대장의 탄원에 감동을 받은 웰링톤 제독이 그 병사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병사가 완전히 달라져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골3:13절에 보면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증거 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 아들로 삼고 사랑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라고 고백하고 순교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군병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4:32절에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증거 합니다.
사람은 상대적입니다. 나를 사랑하거나 나에게 유익을 준 사람에게는 사랑의 감정을 갖게되고, 나를 미워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게 감정입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는 용서가 잘 안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이 용서하라고 하셨기에 미워도 용서한다고 말해야 할때가 있고, 미워 죽겠는데도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위선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선적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기에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죠(Joe)라는 늙은 노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예인 죠는 워낙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을 했기에 주인의 신뢰를 받았고 주인은 무슨일을 하던지 노예인 죠와 의논해서 했습니다. 주인은 점점 부자가 되어서 노예를 몇 명 더 사려고 노예시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주인은 죠에게 어떤 노예를 살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죠는 많은 노예들 중에 늙고 야윈 흑인 노예를 주목하고는 “주인님, 저 노예를 사시지요”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주인은 그 노예를 보더니 “이보게 죠 저 노예는 너무 늙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저기 원기왕성하고 젊은 노예가 있는데 저 건강한 노예를 사지, 왜 하필 늙은 노예를 사자는 건가?”
그러자 죠는 “주인님 제가 특별히 부탁 드립니다. 저 노예를 사 주십시요”하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할수없이 늙은 노예를 사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죠는 늙은 노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었습니다. 어느날 주인이 죠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혹시 그 노인이 자네 아버지아닌가? 아니면 가까운 친척인가?”
“아닙니다 주인님!” “저 노인은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유괴해서 지금 주인님께 팔아먹은 자입니다. 그는 제 인생을 망치고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주인님과 함께 시장에 간날, 저는 평생의 원수인 저 노인을 만났습니다. 저는 피가 끓어 올랐습니다. “내가 부모형제와 헤어져서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게 바로 저자 때문이 아니던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저는 당장 쫓아가서 저 노인의 목을졸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이 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가 그 일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놀래서 마음을 추스르고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하고는 주인님께 저 늙은 노예를 사달라고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보게 죠 나도 자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싶네! 이번주일 부터는 나도 자네가 나가는 교회로 같이 나가겠네”하더니 그길로 주인도 죠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왕 루이 12세가 왕좌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는 많은 정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적들은 루이 12세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루이 12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때 루이12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자기의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고 극도의 불안함 속에서 지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이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살생부를 만들었는데, 왕이 그 명단을 보면서 이름 하나 하나에 왕이 직접 빨간 색깔로 십자가를 그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러니 살생부에 자기 이름이 올랐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밤잠을 못자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지내다가, 결국 파리를 벗어나서 시골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망간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루이 12세가 자기를 반대한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정식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처형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선포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살생부에 적힌 이름위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이유는 왕이 크리스챤이었기에 자기를 반대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각 사람의 이름위에 빨간 십자가를 그리면서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백성들을 사랑한 루이 12세는 결국 “국민의 아버지”(프랑스어:Père Du Peuple) 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얽히고 설킨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전에 영등포역에서 역무원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열차운용팀장으로 일하던 김행균씨(42)가 근무지에서 보니까 서울역을 출발해서 부산으로 가는 새마을호 열차가 영등포역에 진입하고 있는데 10살쯤 된 어린이가 철로근처에서 노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어린이를 들어서 플랫홈 안쪽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서 선로로 넘어졌고 때마침 진입하는 열차에 치이면서 발목이 짤려나갔습니다. 김씨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와 부모는 김씨덕에 목숨을 구했으면서도 철도공무원의 안위를 묻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않고 사고가 난 그 기차를 타고 그대로 떠나버렸습니다.
철도당국은 어린이와 그 보호자가 부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간 것으로 보고, 사고 열차가 종점인 부산역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차례 안내방송을 했지만 끝내 문제의 부모와 어린이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철도 공무원의 살신성인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과 같은 희생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희생으로 아들의 목숨을 건진 어머니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가 버렸으니 참 비정한 사람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던진 직원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발목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는데도 이 어머니는 아들만 데리고 기차를 타고 사라졌습니다.
그 어머니는 정말 사람의 탈을 쓴 철면피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사건이 당장 보도가 되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간 그 어머니를 혹독하게 비난을 하면서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목사님이 그 어머니의 입장에서 글을 써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도망간 그 어머니는 자기가 아이를 잘 간수 하지 못해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기에 질책이 두려워서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세간에 아들과 자기의 얼굴이 알려진다면, 한국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아들과 자기가 평생동안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워서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사건이 나자마자 나라가 들썩이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도망 갔다고 비정한 엄마와 아들이라는 보도가 났으니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 세상의 돌팔매를 맞으면서 나타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나타나서 용서를 빌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혹시 발목을 잘린 철도공무원이 보상을 요구하거나 또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되면 가족 모두가 큰 고통을 겪게될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면 당연히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상대방이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얼굴을 들고 나타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서 어릴적에 아동학대를 당했거나 힘들고 어렵게 인생을 살면서 경직된 생활을 해 왔다면 현실에서 빨리 도피하려고 무조건 도망부터 갔을 것입니다.
도망가서 마음을 추스르고 용서를 빌고 싶어도 모든 매스컴이 그녀를 너무 심하게 악인으로 매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드 매스컴이 앞을 다투어서 아들을 데리고 도망간 그 여자를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매도 했기에 어머니는 절대로 나타날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도망간 어머니와 아들은 자기들에게 쏟아진 정죄와 비판을 가슴에 품고, 평생동안 죄책감과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글을 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라는 글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백담사로 갔습니다. 왜 백담사로 갔습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자기를 받아 주는곳이 없는데 백담사만 그를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정죄하고 미워하고 돌을 던질 때 백담사는, 불교는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미운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 내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의도적으로 용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그런 용서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내 안에서 용서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갑니다.
스탈린이 소련의 정권을 잡은 후에 가장 먼저 해결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친했던 초,중,고등학교 동창들을 찾아서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추하고 더러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피곤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도 내가 살아온 과거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필름이 있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 앞에 공개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럽고 추한 내 모습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본다면 차라리 죽는게 낳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추어진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추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지워주신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용서하시고 완전하게 폐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는 이와같이 엄청난 용서의 은혜와 축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형제가 나에게 끼친 조그만 상처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게 던진 그 말 한마디를 계속 곱씹으면서 분노합니다. 나를 무시하고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두고 두고 미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서 음란하게 사는 아내를 다시 데려다가 사랑했습니다 나가면 또 데려오고 나가면 또 데려와서 그녀를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육신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롬8:12-13)
어느 교회에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이 권사님이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중환자들을 고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서 사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사양하듯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돈을 얼마나 가져왔는지를 물어본 후에 기도를 해 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1970년도에 60억이나 되었으니 지금으로 하면 600억이 넘는 돈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돈을 모아서 빌딩도 사고 자녀들에게 사업자금도 주고 집도 사 주었습니다. 권사님은 계속해서 땅도사고 재산 늘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셨고 기도해도 병이 치유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권사님이 병이들어서 앓다가 죽었습니다.
권사님이 죽자 시신을 관속에 넣어 두었는데 미국에서 사는 아들이 귀국 할때까지 칠성판을 닫지 않고 관에 넣어서 방안에 모셔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죽자마자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왔는데 귀신들이 와서 자기를 끌고 갔습니다.
권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권사님은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줄 알았습니다. 한 교회의 권사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면서 살아왔기에 당연히 천국에 갈줄 알았는데 죽자마자 더러운 귀신들이 와서 자기를 끌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끌려갔더니 지옥입니다.
권사님은 놀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믿고 능력도 받아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면서 좋은일을 많이 했는데 왜 지옥으로 데려 가십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능력으로 장사를 했지 언제 나에게 영광을 돌렸느냐?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 권사님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지옥에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제가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하면서 울고 불고하면서 용서를 빌었더니 하나님이 살려서 돌려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관속에 넣었던 권사님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모든 가족들과 친척들이 관에서 일어난 권사님을 보고 기절 초풍을 했습니다.
다시 살아난 권사님은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서 자녀와 손자들까지 다 불러 모아 놓고, “내가 죽어서 하늘나라에는 못가고 더러운 귀신들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서 나는 지옥에 있었다! 내가 하나님께 지옥에는 갈 수 없으니 나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부르짖고 애원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내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돌아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나누어준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하여 내게로 다시 가져 오거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자식들은 다시 살아난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해서 어머니에게 받은 재산을 다 정리해서 가져 왔습니다. 권사님도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빌딩과 땅을 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충현교회의 김창인목사님을 찾아가서 70억원을 드리면서 북한선교를 위한 선교헌금으로 써 달라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기목사님을 비롯한 세 목사님을 찾아가서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신문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현신애 권사님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로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8:12-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큰 능력으로 많은 일을 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않고 자기 이름을 드러낸 일을 한 종들은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내 의를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린 아들이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습니다.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이번 주에 방 청소한 값 1000원, 엄마 심부름 하느라 가게에 다녀온 값 500원,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에 동생을 돌봐준 값 1000원, 쓰레기를 내다버린 값 500원, 숙제 잘한 값 3000원, 거실 청소하고 걸레질 한 값 4000원, 전부 합쳐 10000원”
엄마는 종이를 내밀고 내심 기대에 차서 자기를 쳐다보는 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들이 건네준 종이 뒤에다가 이렇게 적어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너를 힘들게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있었던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세워가면서 간호해주고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먹이고 입히고 키워준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어도 참고 일하면서 새벽기도한 값 무료, 네가 죽을때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너를 돌봐주고 사랑해 주는 모든 값도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무료”
아들이 엄마가 써준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눈물이 글썽해서 “엄마 사랑해요”하면서 엄마를 와락 끌어 앉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종이를 가져오더니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 내가 엄마에게 진 빚이 참 많네요 그런데 엄마가 그 많은 빚을 다 갚아 주셔서 고마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보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탕감해 주었다”는 말씀은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우리가 지은 자범죄나, 원죄를 우리의 힘으로는 일평생 갚아도 그 죄의 값을 치룰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값으로 받을 것은 심판과, 멸망과 지옥 형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사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모든 죄값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죄의 은총을 받은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위에서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죄를 보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분노하고 비판하다 보니까 어느새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 버립니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간 것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비판과 정죄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일단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고 분노하게 되면 내 마음에서 평화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가 나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용서, 변함없는 용서가 참된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우리말 가운데 “삼 세 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삼 세 번, 운동 경기를 해도 삼세 번입니다.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에도 셋을 외쳐 아이들이 일어납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우리를 깨울 때 “야! 학교 갈 시간 다 됐다, 일어나라” 그런데 피곤한 우리는 바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통보를 합니다. “셋 셀 동안 일어나, 안일어나면 혼난다! 하나 둘 셋!”
우리는 셋이란 숫자를 한계 숫자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한계 숫자도 세 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랍비들은 형제가 잘못하여 회개하면 세 번까지는 봐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세 번을 뛰어 넘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용서하는 것도 힘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겠다고 하니 이거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22절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사백 구십 번입니다. 사백 구십 번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끝까지 용서하고 용납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속에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매일 거듭 용서해 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상처받은 마음으로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더 이상 상처받은 과거의 내용으로 설교를 하지말자!” 하고는 2015년 2월22일 주일 설교를 우리교회 카페에 올리면서 이전에 설교한 3년치 설교를 몽땅 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한 목사님이 우리교회 카페에 댓글을 올렸습니다. 목사님! 이전의 설교를 다 삭제 하셨네요 내용도 좋고 좋은 예화가 많아서 무척 도움이 되었는데 아쉽습니다. 라는 댓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 죄송합니다..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출발을 하려고요...”라는 댓글을 올렸습니다.
저도 그 주옥같은 설교를 삭제할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친구인 오동윤교수님도 왜 설교를 삭제 했냐고 하면서 저에게 책망을 했습니다. 가끔 지나간 설교를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냥 두지 그랬냐고 저에게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에 저에게 비 인격적으로 행동한 그분을 용서해야 겠다는 결단으로 그동안 4년동안 올린 설교를 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설교중에 그분의 실책과 잘못을 지적한 설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용서가 되었습니까? 지나간 과거의 상처가 다 씻겨 졌을까요? 아닙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저도 모르게 지나간 과거의 일이 또 다시 나쁜 교훈의 예화로 등장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용서를 했다해도 과거에 상처받은 일들이 마치 김일성 머리 때리기처럼 나도 모르게 또다시 튀어 올라오기에 주님은 이른번씩 일곱 번이라도 계속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생각나면 생각날 때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삶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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