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집사님의 할머니, 김인지권사님께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월요일날 소천하셔서 오늘 장례를 마쳤습니다.
어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김인지권사님을 마지막 뵈온 이야기를 간증을 드렸습니다.
김인지권사님이 우리교회의 권사님은 아니지만 김예슬집사님을 통해서 교제를 시작한 분이기에 두 세달에 한번씩 과일과 두유등을 사다 드리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두달전에 권사님을 찾아 갔더니 권사님이 마침 집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권사님을 뵙는 순간에 권사님의 모습에서 왠지 세상을 초월한 모습이 느껴 졌습니다. 그래서 얼마 못사시겠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제 집사람에게 “권사님께서 두세달 밖에 못사시겠는데!”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두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설교중에 "김인지권사님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 가장 잘한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일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권사님이 예수를 믿었기에 자손들이 하나님께로 나올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은일은 잘한 일이지만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항상 좋은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었어도 인생을 살다보면 원치않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합니다.
1972년도에 춘천역에 있는 파출소장 열 살짜리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공권력에 대항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체포 기간을 정한후에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범인을 잡지 못하면 수사기관의 책임자들을 문책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체포 명령 기간을 하루 전에 범인이 체포가 되었습니다. 범인은 뜻 밖 에도 목사님이었습니다. 정원섭목사님은 한신대학을 졸업하고 춘천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운영이 되질 않자 동네에서 사모님이 만화방을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사모님이 만화방을 보고 밤에는 목사님이 만화방을 보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파출소장 딸이 강간을 당하고 살해된 후에 목사님이 경찰에 연행이 되었습니다. 경찰은 파출소장딸이 피해를 당한 주변에서 발견된 몽당연필, 검은 빗, 만화방 쿠폰 등을 제시하면서 목사님에게 죄를 추궁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나는 그런일은 하지도 않았다고 펄펄 뛰면서 부인했습니다 목사님은 대머리에 가까운 스포츠 머리여서 빗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쿠폰도 자기만화방에서 발행한게 아니라 다른 만화방의 쿠폰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자기가 한게 아니라고 강경하게 주장을 했지만 경찰은 정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목사님을 데려다가 물고문과 폭행을 자행 했습니다. 그래서 잡혀간지 3일 만에 정 목사님은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서 할수없이 자기가 했다고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신학대학은 몰라도 한신대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대학입니다. 사회문제의 개혁과 정의를 가장 많이 부르짖고 데모도 잘하고 국가의 부정과 사회의 잘못을 단호하게 응징하는 사회정의구현 대학입니다.
학교의 전통과 위상으로 봐도 한신대학 출신이 그런일을 할리는 만무합니다. 적어도 한신대학에 들어간 분들은 세상을 바꾸고싶은 정의감과 의분이 많은 분들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신대학 출신이 스캔달을 일으키거나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고문과 폭행은 결국 정목사님으로부터 거짓자백을 받아내고야 맙니다. 정 목사님은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경찰의 폭행 때문에 거짓자백을 했다고 증언 했지만 재판부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조작 사건 이후에 정 목사님과 가족의 인생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목사님이 강간·살인범으로 몰리자 동네 사람들이 목사님의 가족들을 멸시천대했고 결국 사모님과 네 자녀들은 핍박과 설움을 견디다 못해서 춘천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모님은 자식들을 데리고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강
간·살인범으로 형이 확정된 목사님은 1972년도부터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정목사님은 억울하고 분한마음에 화병이 나서 교도소안에서 시비가 끊이질 않았고, 수치심과 모멸감에 빠져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했습니다.
춘천교도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어 지내던 어느날 자살소동을 벌인일이 매스컴에 보도되자, 우리나라 대학생선교회의 대부요, 신학대학원의 선배이면서 스승이신 김준곤목사님이 찾아가셔서 “정목사! 죽지마라, 죽으면 진짜 범죄자가 된다! 윤리교사를 했던 자네가 어찌 그런일을 했겠는가? 반드시 살아서 나와라!”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의 충고를 들은 정원섭목사님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고 모범수가 되어서 악착같이 수감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감옥안에 들어온 죄수들을 섬기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죄수들이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목사님은 드디어 15년만인 1987년 12월 24일 광주교도소를 나오게 됩니다. 성탄절 특사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기다려준 사모님과 자녀들과 만나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출소한 이후에 충절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하시다가 법원에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래서 재조사를 2번다시하고 여섯번의 재판이 열린 끝에 드디어 2011년 10월달에 대법원은 정목사님에게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고문 같은 가혹 행위로 강제적 자백을 했다면, 검사의 조사 단계에서도 같은 심리 상태가 계속되어서 동일한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라고 판결했습니다.
39년 만에 억울한 죄목을 벗어던진 정원섭 목사님은 무죄를 선고받은 후에 “나를 고문한 사람들을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서 재심을 신청한 것입니다. 이제 누명을 벗었으니 나를 고문하고 감옥에 보낸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억울한 옥살이에 지치고 힘들어서 자살을 기도했을 때 광주교도소를 찾아와서 “억울하면 반드시 살아남아서 자네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회개시켜야 하네”라고 말씀해 주신 김준곤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가 바로 정원섭목사님의 스토리를 각색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유채림작가가 쓴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라는 소설도 정원섭목사님의 사건을 책으로 썼다고 합니다. 소설가 유채림씨는 한국신학대학교를 나왔는데 정원석목사님의 후배입니다.
정목사님이 겪은 고통의 시간은 그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시대에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조작된 수사로 인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정목사님이 대변하게 하려고 그런 아픔을 겪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신대학민주동문회(김현주회장)는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의 북(book) 콘서트를 개최해서 목사님의 억울한 인생을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런 부정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일은 정원섭 목사님이 “1987년 12월달에 출소를 했는데 스승이요 정신적인 지주였던 김준곤목사님이 한달후에 1월달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마지막 가시는 길을 못본 것이 가장 가슴아팠다고 정목사님은 고백을 하셨습니다.
올해 83세인 정원섭목사님은 자기와 같은 억울한 피해자를 돕기위해서 “코리아이노센스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나같은 사람이 필요해서 감옥에 보내서 감옥을 경험하게 하신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씀 하시면서 앞으로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겠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쉬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바쁘게 일을 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을 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이 OECD 34개 회원국 중에 멕시코에 이어서 두 번째입니다. OECD 국가들의 평균노동시간이 연 1770시간인데 우리나라는 400시간이나 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균 하루에 8시간 반 정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휴가시간은 평균수치가 나오질 않습니다. 대부분이 휴가가 없다는 통계입니다. 그런가 하면 휴가를 3일 받아도 어디로 갈까를 정하는데 하루를 소진한다고 합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이어령씨가 쓴 “신한국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새로운 시대의 한국인과, 옛날 전통적인 한국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한국인과 새 시대의 한국인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속도감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옛 한국인은 기다림에 익숙한 인내의 세대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한국인은 빨리빨리세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 세대와 라면 세대로 구분합니다. 옛날에는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나 혹은 자녀들을 위해서 어머니들은 밥을 지어서 아랫목에 묻어 놓고 기다리지만 오늘날은 라면끓여먹으면 되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조급하고 독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김소월의 시 중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라는 시가 있었는데. 요즘은 이 시가 “엄마야 누나야 간편 살자”라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감의 세상에서 점점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휴식과 안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랫더니 제자들이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귀신을 내쫓았고, 수많은 병자들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온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큰 역사를 예수님에게 보고를 합니다. 제자들이 흥분하고 기뻐서 예수님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 30절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제자들은 낱낱이 고했다 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아마 열 두 제자는 신이나서 보고했고 서로 앞다투어서 중간에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채면서 자기 얘기를 하느라 바빴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파송을 받고 나갈때에는 지팡이 하나, 입고 있는 옷 한 벌, 신고 있는 신발이 그들이 소유한 전부였습니다. 그 외에 가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전대에는 동전 한 닢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손을 얹으면 귀신이 쫓겨갔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먹을 것과 머무를 곳이 제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사도들에게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감격과 성취감은 아마도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정도의 실적을 냈으면 이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후속조치를 내리는 게 당연합니다. “얘들아! 이제 바야흐로 우리의 시대가 왔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파송하기 위해서 큰 훈련원과 사무실을 짓고, 우리의 조직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고, 이 일을 위해서 더 많은 후원자들을 모집하자!” 이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후속조치는 그게 아니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였습니다. 물론 그 동안 수고했으니까 쉬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31절을 보면 오고 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휴식이 필요한 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쉬어야 다시 사명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일만하면 탈진이 되고 병이 납니다. 그래서 쉼은 우리의 영성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푹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과 영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쉬시면서, 안식하면서 창조를 돌아보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지를 창조하실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지구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태양은 얼마나 더 큽니까? 태양은 지구의 109배입니다. 지구를 백아홉개를 더해놓은 크기가 태양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태양을 중심으로한 은하계에는 4000억개의 지구같은 별들이 있는데 그 외에도 천억개의 별들을 가진 은하계가 천억개가 더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상상이 안갈 것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바닷가의 모래숫자보다 은하계의 별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도 엿새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셨습니다. 왜 쉬셨습니까? 그 이유는, 돌아봄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한 단계 한단계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 창조를 완료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라고 증거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다녀 오는데 성도님들이 정평관집사님의 아버지 정효범성도님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평관집사님의 아버지 정효범성도님이 제금날 때 빈손으로 나오셔서 새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부지런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지 나중에는 동네에서 땅을 가장 많이 장만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부지런한 사람의 대명사 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저마다 땀 흘려서 인생을 살아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길을 잠시 쉬면서 돌아 볼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카고에 휘튼 대학에서 기독교 문학을 가르치는 라이켄 박사는 “본래 창조는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기능적 우주로만 창조한게 아니라 심미적 우주로 지으셨습니다”라는 중요한 고백을 했습니다.
심미적 우주(Artistic Univers)란 아름다운 우주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살기에 편리한 곳으로만 지으신게 아니라 아름답게 지으셨기에 지구도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고 여름 바다에는 해일이 넘치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고, 겨울에는 백설이 대지를 덮는데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도 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창조된 우주를 보시면서 즐기시려고 아름답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보고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자연입니다.
산에 가보면 산의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스위스에 갔을 때 케이블카를 타고 몽블랑산 중턱에 올라가서 눈 덮인 온 천지를 둘러 보니까 정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바람은 하나님의 호흡처럼 느껴졌고, 굽이굽이 흘러 내리는 시냇물은 하나님이 흘려 보내는 생수와 같고 푸른 들판의 꽃들과 잡초들조차 하나님이 공들여서 놓으시는 자수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 아름다운 자연속에 있으면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이 됩니다.
이슬라엘 성지순례 때에도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깊은 광야로 들어갔더니 광야의 깊은 골짜기와 들판의 야생의 풍경들도 또 다른 하나님의 작품이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무채색과 황색 물감을 잔뜩 머금고 후 불어서 그려낸 그림처럼, 광야는 적요하고 광막했지만 또 다른 거친 아름다움을 자아 냈습니다.
거기서도 주님은 오묘한 손길로 모래톱을 만드시고, 사막을 만드셔서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어린왕자의 샘물을 사막 깊은곳에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가득하고,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은 이 세상을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평범하고 단조롭게 만드셔서 우리가 살아가기에 행복하도록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속에 있는 그 자체가 휴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는 새벽 세시에 잠이 깨서 호숫가로 나갔는데 밤하늘과 호수가 어루러져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바다위를 예수님이 걸어 가셨겠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감개가 무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조각하시고 세심하게 배려하신 하늘과 더불어 밤하늘에 하나님께서 수 놓아둔 별들을 바라보면서, 다윗이 하늘을 바라보고 “여호와 우리주여 주의이름이 어찌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양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속에 있다보면 하나님의 서정적인 마음을 알게되고 또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휴식은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참된 휴식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쉬면서 가만히 있는 것은 시간 낭비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도 쉬지않고 죽어라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엿새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어야 건강하고 힘있게 살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쉬지않고 일만하면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식과 여유는 낭비가 아닙니다. 휴식과 여유는 성취를 돌아보고 더 나아가서, 미래를 준비하는 바탕이 됩니다.
신기한 것은 여행을 가보면,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어떤 ‘구상’이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미래에 대한 방향이 보입니다. 그래서 여행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테레사는 기차여행을 하다가 캘커타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박용규목사님은 어머니집에 갔다가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등산을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사명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영광의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다가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에스겔은 그발강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산 바다 강 들판등 모든곳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재 충전받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더불어서 인간이 휴식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쉬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1)라고 증거 합니다.
제자들은, 전도 보고 하랴, 군중들을 상대하랴, 음식도 먹지 못하고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식사도 거른채로 과로하면 탈진하고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그래서 새롭게 힘을 얻으려면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새롭게 일하시기 위해서 쉬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7절에 보면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쉬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쉬어 평안하였다” 라고증거합니다. 영어로는 “God refreshed ”라고 번역했습니다.(KJV) “하나님께서도 새롭게 기분전환을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새로워짐(refresh)의 필요가 있으셨다면, 하물며 피조물인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새로워짐이 필요하겠습니까?
미국의 심리학자 로렌스 콜버그는 아주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조용한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책을 잔뜩 끼고 있다가,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 책을 고의로 떨어뜨렸습니다. 책을 왕창 떨어뜨리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의 50%이상이 책을 떨어뜨린 사람(심리학자)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음 날 똑같은 실험을 하는데, 똑같은 실험을 하기에 앞서서, 도서관에 양해를 구하고 도서관 바로 바깥에 잔디 깎는 기계를 작동시켰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부르릉~따다다다” 하면서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제처럼 똑같이 1시간 간격으로 책을 떨어뜨렸는데 지나가면서 도와준 사람들이 10%미만이었다고 합니다. 잔디 깎는 기계의 시끄러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유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굉장히 바쁘게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바빠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를 아셨고, 홀로 있을 때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중들과 만나서 바쁘게 지내시다가도 한 순간 다시 조용한 침묵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산에도 가시고 들판을 거니시고 밤에는 동산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몸과 마음을 새롭게(refresh)하신 것을 알게됩니다. 예수님도 종종 몸과 마음을 새롭게(refresh)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쉬는 것(refresh)도 기술이고, 삶의 일부임을 알게 됩니다.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 합니다. 물론 허구한날 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열심히 일한후에 휴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 자기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적한 곳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환경의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분위기를 좀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한적한 곳이라고 해서 휴식이 되고, 복잡한 곳이라고 해서 휴식이 안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생활리듬을 창조적으로 바꿔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캉스”라는 프랑스어는 라틴어 “바칸테”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변화”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휴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짜 휴식은 일상의 삶을 떠나서 쉬는게 진짜 휴식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친정집엘 가고, 남자들은 낙시를 가고, 아니면 부부동반해서 제주도나 동남아 여행을 가는것도 도움이 되고, 아니면 기도원이나 바닷가 또는 휴양림이나 계곡같은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는 바하의 음악을 듣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가곡을 듣는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사들조차도 때로는 분위기를 바꿔서 긴장을 풀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정말 휴식을 취하고 싶으시면, 딸집에 가서 일주일을 지내던지 아니면 분위기를 바꿔서 새로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환경도 바꿔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 자체로도 휴식이 됩니다.
그런데 휴식 시간은 길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생했으니 푹 쉬어라! 한달동안 쉬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잠깐 쉬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오래 쉬면 아예 쉬고 싶어지고 게을러 집니다. 주님의 법칙은 엿새동안은 일하고 하루 쉬고, 그리고 6년 동안 기경(起耕)했다가 한 해는 묵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러시아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생산성을 높이려고 열흘 일하고 하루를 쉬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세 번만 쉬게 한것입니다. 그 결과 오히려 주 6일 일했을 때 보다 생산성이 더 낮아졌습니다.
또 다른 실험도 했습니다. 푹 쉬게 한 다음에 일을 시키면 더 효율적일까 싶어서 주 5일간만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6일 일한 것보다 현저하게 생산성이 떨어지더랍니다.
유럽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는 분명 잘못된 제도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주 5일제가 되면서 세상은 더욱 타락해지고 범죄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끝으로, 진정한 휴식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식을 취하되 주님을 떠난 휴식은 휴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쉴때도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여행을 갔다고 술마시고 나태해 져서는 안됩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너희들 역시 나를 떠나서는 참된 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휴식을 해도 마음이 불편하거나 죄를 짓는 휴식이라면 더 힘든일만 생기게 됩니다. 그런 휴식은 참된 휴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딸집에 가도 마음으로 축복기도를 하고, 기회를 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여행을 가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엿봅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면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만난 그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을 만날수만 있다면 땅 끝에 가도 그 여행은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됩니다.
세계일주를 하면서 브라질에 가서 임화자권사님의 아들과 딸을 만났는데 그때 제가 정평관집사님의 아버지께서 구원받은 간증을 했더니 권사님의 며느리 이화선집사님이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저도 당장 한국에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도해야 겠어요!”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시면 부모님을 구원하는 일을 제가 도와 드릴테니까 저에게 전화 하세요!” 하고는 돌아와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화선집사님이 정말 보름후에 한국에 오셔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집사람과 같이 중곡동에 사시는 이화선집사님의 부모님의 집으로 찾아가서 아버지 이상림성도님과 어머니 김정순성도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시켜 드렸습니다.
한번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성령께서 저에게 “일하는 저 여직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어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교회 나가시죠?” 했더니 “안나가는데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매님을 무척 사랑하시는데 왜 교회를 안나가세요?”했더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자매가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말을 못하고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자매님이 다시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거예요! 꼭 하나님께 돌아가세요!”했더니 인사를 꾸벅 하면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행하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허물많고 죄많은 사람들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언제 어디서나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전에 제 집사람이 미국에 갔을 때, 제가 혼자서 봉우 바닷가로 운동을 가는데 한 할머니가 밭에서 콩밭을 매다가 잠시 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할머니! 콩밭 매느라 수고가 많으시네요! 연세가 얼마나 되셨어요?”했더니
“올해 89세 입니다”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셨네요! 저는 남양회관 옆에 있는 남해세광교회 목사입니다! 할머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실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교회는 못오셔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했더니
할머니가 “내 아들 둘이 서울에서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에서 건축한다니까 큰아들이 집에와서 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어요! 아버지가 그걸 알고 화가나서 아들들과 원수가 졌지요 아버지가 다시는 집에 오지도 말라고 해서 아버지와 담을 쌓고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갔어요 작은아버지도 그 이후에 우리집안에서는 아무도 교회에 못간다고 선포를 해서 우리집안은 절대로 교회에 못간답니다”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할머니! 참 훌륭한 아들을 두셨네요! 아버지는 땅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다고 속이 상하셨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큰아들에게 큰 복을 주실겁니다! 두고 보세요! 할머니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지만 예수님을 안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지금 제가 예수님을 영접시켜 드릴테니까 저를 따라서 해보세요!” 했더니 이 할머니가 제가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영접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시켜 드리고 간절하게 기도를 해 드렸더니 눈물이 글썽글썽 합니다.
그 후에 몇달후에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그 할머니는 지금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 할머니의 아들이 하나님께 헌신한 그 헌신을 기쁘게 보시고 어머니를 구원시켜 주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습니다. 뿌린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멍에를 풀어주시고 참된 안식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깁슨목사님은 “참된 안식은 주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도 하시지만 주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요, 영원한 쉼터입니다.
이름난 휴양지나 해변도 휴식처와 안식처가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넓고 큰 품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안식처요 쉼터입니다.
아무쪼록 이 무더운 여름에 주님과 함께 평안한 휴식과 휴가를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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