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난주간에 고난스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고난스러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도 엠마오의 길로 가는 제자처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고 행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왜 좋으신 주님이십니까? 내 삶에 위기와 시험과 환난이 올 때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럽을 방문 중인 교황이 파리 시내를 돌아보는데 갑자기 앞자리에 앉아서 경치도 보고 또 오랬만에 운전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사에게 “여보게! 오늘은 내가 운전을 좀 하면서 구경을 하고 싶은데 내가 드라이브를 해도 되겠나?”
기사는 간곡하게 부탁하는 교황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교황에게 핸들을 맡기고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교황 옆자리에 앉은 비서는 긴장을 하면서 교황이 운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그만 빨간불에 신호등을 위반해서 경찰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교황을 본 경찰관이 난감한 얼굴로 본부에 연락해서 경찰서장을 연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경찰서장이 전화를 받자 경찰은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속도위반 차량을 잡았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기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파리 경찰서장이 “혹시 또 국회의원이야?” “아닙니다! 더 중요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럼 누구야! 혹시 국회의장이야?”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은 것 같습니다”
“답답해진 서장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럼 대통령이야? 대통령이 몰래 순방나왔다가 걸린거야?”
그러자 경찰관이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교황을 운전기사로 부리고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국회의원, 국회의장, 대통령, 교황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죄와 사망권세와 사탄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은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살아나신 날입니다. 우리모두 부활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전에 제가 하루살이와 메뚜기 이야기를 소개 했습니다. 부활절에 아주 적절한 예화입니다. 하루살이가 메뚜기하고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다가 저녁이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그러자 하루밖에 못살고 죽는 하루살이는 메뚜기에게 “내일이 뭔데?”하고 물었습니다. 다음 날 하루살이가 죽고 없자 메뚜기는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개구리를 친구로 사귀어서 놀았습니다.
메뚜기가 개구리와 놀다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메뚜기는 가을에 죽습니다. 겨울을 나지 못합니다. 메뚜기와 놀던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기 전에 메뚜기에게 “메뚜기야, 겨울이 지나고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메뚜기는 개구리에게 “내년이 뭔데?” 하고 물었습니다.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모르는게 인생입니다. 메뚜기처럼 내년을 모르는게 인생입니다.
사람들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모르고 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어제 김안순집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요즘 월요일마다 선교훈련을 받으러 사천으로 가는데 사천에 갈 때 마다 김안순집사님이 보고 싶어서 지난주에는 김안순집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못 만나고 어제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은 아들 김종민성도님과 함께 늘 우리교회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와서 설교도 보고 또 우리교회의 소식을 보고 계셨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의 아들 김종민성도님이 설교를 읽고 댓글을 올려 주셔서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은 김연아집사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김연아집사님이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면서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안순집사님에게 “집사남! 이제는 돌아가신 김연아집사님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천국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소망이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죽어도 천국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믿으면 영원한 결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조선시대때 세종대왕을 도와서 훈민정음과 한글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선비, 성삼문은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에 의해서 모진 고문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전에 이런 시를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또 위대한 일을 했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믿은 사람은 죽어도 행복합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처칠수상은 “나는 천국에 가서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았기에 천국에 가서도 그림을 그리겠다는 소망을 품고 죽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인 에디슨은 우리가 쓰는 전기와 영사기, 전축등 1000여가지가 넘는 생활 필수품을 발명했습니다. 에디슨은 예수님을 잘 믿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에디슨이 임종할 때 에디슨은 아내의 손을 붙잡고 “여보 천국이 보인다! 천국이 너무나 아름답다!” 라고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어느날 금술좋은 부부집사님이 같이 살다가 남편집사님이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아내집사님은 죽어가는 남편집사님 옆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여보 당신 없이 난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해요!” 그러자 남편집사님이 아내의 손을 붙잡고 “여보 나는 당신보다 조금 일찍 천국에 가는거야! 그러니 예수 잘 믿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되쟎아 걱정마!” 라고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날 신문에서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독일의 시인 괴테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하고 처량한 인생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영
국의 유명한 로지 경의 아들이 세계 제 1차 대전때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서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내가 죽더라도 이곳에 오지 마세요 나는 나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 품안에 안겨 있을 겁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이것이 부활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1683년도에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윌리암 럿셀”경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정적들의 모함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럿셀경은 자기가 차고 있던 비싼 보석팔찌를 빼서 동석한 의사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죽으면 나는 곧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싼 팔찌는 천국에서 필요 없습니다 당신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부활의 영광을 아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동행하면서도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죽자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소망을 잃어버린 이유가 오늘 본문 15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5-16)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증거 합니다.
영어로 “Love”는 사랑 입니다. “Like”는 좋아한다 입니다. 사랑한다는 단어와 좋아한다는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등산가는 산을 사랑합니다. 금이나 은을 캐는 광산가는 산을 사랑하기 보다는 산을 좋아합니다. 등산가는 산을 사랑하기에 산을 아끼고 쓰레기도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가지고 옵니다. 산을 잘 가꿉니다.
그러나 광산가는, 산에서 금을 캐고 나면, 파헤친 산을 냉정하게 버리고 떠납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후에 끝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이 묻힌곳을 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예수님의 시체에, 방부제를 넣으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시신에 방부제라도 바르려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좋아하기만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죽고 시험이 오자, 다들 도망가 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대충 좋아하다가 시험이 오면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좋아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간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 대충 좋아하기만 하면 좋을때는 모든 것을 함께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시험이 올 때 헤어지거나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사랑하지 않고 그냥 좋아하기만 하면, 목사가 열심히 일할 때는 마음을 같이해서 돕지만, 목사가 쓰러지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들 외면하고 버립니다. 그래서 좋아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낙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가고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있던 베드로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떨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제자들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찾아가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내가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와야 믿어집니다. 예수를 믿는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문을 열어 주셔야 예수님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예배에 동참한 저와 여러분은 이미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삶도 부활합니다. 인생 전체가 부활합니다.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냈던 “척 콜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후에 감옥 선교회를 만들고 수 많은 죄수들을 구원시켰습니다.
그가 쓴 책중에 “누가 하나님을 대변할 것인가?”(Who speaks for GOD)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실화를 소개 했습니다.
인디애나주에서 대법관으로 시무하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중된 사람이 먼저 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늦게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예수님 때문에 날마다 감격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한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피고는 죄질이 아주나쁜 “해리팔머” 라는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악독한 방법으로 강도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판사인 트레이저가 그가 쓴 반성문을 읽다 보니까 그는 재판을 받기위해서 구치소에 수감된 일년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판사인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회개한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상적인 판결로 하면 그는 10년 정도의 형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트레이저 판사는 기도한 후에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회개한 그에게 파격적으로 1년 형을 언도 했습니다.
그러자 매스컴과 사람들이 트레이저 판사가 부당한 판결을 했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래서 매스컴과, 법원 내부에서까지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부당한 재판을 재조사하는 검사 위원회가 열렸습니다.
트레이저판사는 예상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대법관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년 후에 해리팔머가 교도소에서 형을 마치고 나오는날 판사직에서 물러난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그를 마중나갔습니다. 해리팔머가 교도소문을 열고 나오자 트레이저는 다가가서 해리팔머를 끌어 안았습니다.
해리팔머는 눈물을 흘리면서 트레이져 판사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판사님! 사직을 하면서까지 저에게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해리팔머는 자기를 구해주고 해고당한 트레이져 판사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 너무나 죄송해서 “저에게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죄송합니다”라고 되뇌이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트레이져 판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까지라니요! 예수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한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우린 형제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해리팔머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판사님 이제부터는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트레이저 판사는 “당연히 그래야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가 잘 살아야 하지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해리팔머는 그후에 개과천선해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필요까지는 없었을텐데 저를 위해서 그런 고난을 당하시다니요” 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사람은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는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숫자를 셀 때 여자를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때에도 남자의 숫자만 계수한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여자는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법정에서도 여자의 증언은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증언만이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장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누군가가 조작하려고 작정했다면 절대로 여자가 먼저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남자의 증언만을 인정하던 시대 였습니다. 그래서 남자제자가 예수님을 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여자였다고 증거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의 성인물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는 만화가게를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만화는 아무런 교육적인 가치가 없는 해로운 서적으로 여겼기에 부모님들이 만화가게에 가서 만화를 보는 것을 엄하게 규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화를 좋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쩌다가 세뱃돈을 받거나 용돈이 생기면 기회는 이때다 하고 만화가게로 달려 갔습니다. 만화가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되면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어른들이 만화를 해롭다고 여긴 이유는 만화의 황당무계함 때문입니다. 특히 만화에는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황당무계한 스토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이야기가 만화에만 나오는게 아닙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위대한 성경책에도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국회의원이요 유대교 골수분자였던 바울사도가 기독교를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바울사도는 180도 변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됩니다.
바울사도가 멀리 그리이스의 아테네에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전하면서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이야기를 하자 그리스 사람들은 바울사도를 기롱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한심한 말을 한다고 무시하고 조롱한 것입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서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그저 존경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면 굳이 목숨을 내놓고 부활을 증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동안 가르쳐주신 진리 만으로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고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설령 부활이 없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 만으로도 얼마든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최 우선적으로 전한 이유는 부활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밝힌 사람은 “슐리만”이라는 독일사람입니다.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슐리만은 어렸을 때 부터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트로이 전쟁이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만은 사업가로 성공한 후에 트로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리에서 고고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으로 가서 발굴을 시작한 끝에 드디어 트로이성의 유적을 발굴합니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중심인물인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이 살았던 그리스의 미케네성도 발굴합니다.
그가 트로이의 성터와 미케네성을 발굴하기 전 까지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이 신화라고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성터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인 기록들이 줄줄이 나오자 비로소 트로이 전쟁이 실화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분별하는 기준은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역사적인 증거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특히 법조인들은 누구보다도 증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법정에서는 백만가지 추론보다 직접 본 한 사람의 증언이 더 위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의 증언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을 글로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철학이나 교리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수난과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에 관한 증언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1절에 보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 사건도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때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희망으로 가득 찼지만 예수님이 죽은 지금은 절망에 빠져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나라에 지상 천국을 세우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세우는 일을 능히 해내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동안 엄청난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어이없게도 맥없이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낙심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보면 참 이상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예수님과 3년동안 동행한 제자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얼굴만 보고도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아니 예수님의 음성만 들어도 알아 차렸어야 하는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몇시간을 이야기를 하면서 가면서도 자기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는 분이 예수님인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죽었으니 다 끝났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은 예수님을 통한 출세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기만 하면 로마 군인들을 다 몰아낼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오면 나도 한자리 차지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으니 기대했던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리요 핵심사역인 십자가와 부활을 몰랐습니다.
또 한가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오늘 본문 16절에 증거 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가리워진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떠나면 꼴도보기 싫습니다. 마음이 떠나면 마주치기도 싫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는데도 예수님이 죽자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곁에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17절과 같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슬픔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슬프면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죽고 싶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근심 염려에 매이거나 슬프거나 세상 정욕에 빠지면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많은 찬송을 부르고,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을 예수님께 드렸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을 잊을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그들의 눈이 가리워진 이유는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글로바에게 질문을 하시면서 잘못된 기독론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본문 19절에 보면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낙심해서 고향으로 가고있는 두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라고 글로바에게 물었습니다.
글로바는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선지자중에 한사람이라고 생각한 이 견해는 당시 대중들의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눅9:19).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글로바도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습니다”(21)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오셨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나라만 해방시키러 오신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자기들이 누릴 행복의 조건들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죽자 “이젠 모든 게 다 끝났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오로지 나와 내 가족만 잘 되기 위해서, 또는 내 교회와 내 나라만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묶어둔다면 신앙은 독선이 되고, 아집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계 모든 사람의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 복음화를 이룰수가 있습니다.
어제 도미니카공화국에 선교사로 가셨던 윤철기장로님 께서 오셨습니다. 오늘도 주일예배에 동참하셔서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윤철기장로님의 아들 목사님께서 5년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윤장로님 부부도 2년6개월전에 아드님이 선교사로 가 계시는 도미니카로 가셔서 함께 돕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장로님은 2년 6개월만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한국에 오셨다가 남해를 방문하시면서 우리교회에 오셨습니다.
윤철기장로님은 권옥란권사님의 시동생이십니다. 7순이 넘어서 선교지에 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장로님과 권사님은 선교사역을 하느라 애쓰는 아들 선교사님 가족들을 돕기 위해서 선교지로 가셨습니다.
나이든 두분이 선교지로 간다니까 여기 저기서 그 나이에 무슨 선교지를 가느냐고 말리는 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교는 나이와 국적에 상환없이 죽기를 각오하고 감당해야하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선교지에서 죽으면 최고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면 예수님이 다 책임져 주시고 금생과 내생에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저 내가 원하는 복이나 내려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또 세계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세주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인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축복기도를 통해서 가리어진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놓고 감사 기도를 하신후에 떡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오늘 본문 30절로 31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라고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이 갑자기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기도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행9:18) 라고 증거 합니다.
사울은 그동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비늘이 눈에 덮여 있었기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먼저 내 눈을 가리우고 있는 비늘을 벗겨내야 합니다. 내 눈의 비늘을 벗기는 방법이 바로 안수기도요 축복기도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축복기도는 목사님의 축복기도를 통해서 대체됩니다. 목사님이 축복 기도를 할 때 “아멘”으로 받으면 복이 됩니다. 성찬식때나 임직식때나 예배때나 심방때나 음식을 먹을때나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축복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예배시간에도 헌금봉헌시간에 드리는 축복기도와, 예배 끝에 드리는 축복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월간고신 4월호에 국회도서관장 이은철 장로님의 인터뷰기사가 실렸습니다. 국회도서관장이면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와 명예가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이은철장로님은 자기가 이런 복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신앙 때문이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이장로님은 거창읍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흥사경회가 열리면 이장로님의 아버지 장로님이 강사목사님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숙식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장로님은 어려서부터 강사목사님들의 축복기도를 많이 받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자기 집에서 주무시고 식사를 할 때 마다 축복기도를 해 주셨는데 그 축복기도가 이루어 졌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본래 국회도서관장 자리는 중요한 정치인들이나 대부분 야당국회의원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장로님은 애당초 정치적으로 높은 사람에 대한 연줄도 없었고 도서관장 후보로 이름도 오르지 못했는데 뜻밖에 자기에게 그런 자리가 주어져서 놀랐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주의 종의 축복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증거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약점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뜨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점점 냉랭해 집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성령의 감동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을 받고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풀어 주시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즉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33절로 35절에 보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말은 소망을 품고 성전으로 올라 갔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자기입니다. 때로 절망과 어둠과 낙심이 와도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입니다. 인생의 소망이 사라져도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영적인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을 캐는 채석장에서 인부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넣어서 폭파 준비를 마치고 모든 인부들이 대피한 후에 수십미터나 되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들 폭파될 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그 폭파 현장에 3살짜리 아기가 마당에서 걷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밥을 배달하러온 엄마가 애를 업고 왔는데 잠시 풀어놓은 사이에 이 아이가 폭파현장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면 잠시후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집니다.
인부들은 그 아이를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빨리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그 아기는 오히려 재미있다고 방긋 방긋 웃으면서 돌아 다닙니다.
그때 아기 엄마가 달려왔습니다. 아기 엄마는 아기에게 가면 안된다는 인부들의 소리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달려가면 아기와 엄마가 둘다 죽습니다.
무릎을 끓은 엄마는 아기를 향하여 두 팔을 크고 벌리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가야! 이리와라!” 그러자 아기는 엄마에게 달려왔습니다. 아기가 품에 안기자마자 엄마는 대피소로 뛰어들었고, 뛰어들자마자 다이너마이트는 꽝 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환란많고 위험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은 사탄마귀가 삼킬자를 찾으려고 발악을 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죽이려고 발악을 합니다.
세월호사건으로 사람들을 죽인것도 사탄마귀의 훼방입니다. 천안함사건으로 사람들을 죽인것도 배후에 사탄마귀가 있습니다. 전쟁과 시리아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또 묻지마 살인으로 아무나 칼로 죽이는 것도 사탄마귀의 장난입니다.
강남역 근처 노래방에서 놀다가 화장실에서 만난 여자를 칼로 죽인 김씨가 어제 30년 감옥형을 판정 받았습니다.
16살난 여자 중학생 아이가 8살난 초등학생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서 칼로 죽이고 손을 잘라서 봉투에 넣어서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사탄마귀가 마지막때에 발악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디든지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운전을 해 보면 운전하는 사람의 상당수가 정신나간 사람들 같습니다. 자기 차선으로 안가고 제멋대로 운전을 합니다. 차만 타고 나가면 남해읍엘 가든지 진교를 가든지 진주를 가던지 열명중에 세명정도는 난폭운전과 엉터리운전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 놓은것처럼 언제 어디서 문제가 터질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도와 주실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여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계신 예수님 품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가 낙심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즉 교회는 제자들이 그랬듯이 주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는 자리요 사명을 받는 자리요 충성해야할 자리입니다.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성령의 불을 받고 새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에 오면 기쁨이 넘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을 먹어도 기쁩니다.
인간의 최대 발명품은 불입니다. 불로 인하여 역사가 발전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성령의 불이 붙음으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낙심한 분들은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엠마오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장로님, 선교사님들도, 성가대, 교회학교, 남선교회 여선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던 분들에게도 엠마오의 길로 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내려가는 절망의 길로 찾아오십니다.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 문이 닫혀서 슬퍼하는 우리에게 찾아 오십니다.
수술을 앞둔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겁을 내게 됩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해서 뼈를 자르기도 하고 몸을 째고 살을 떼어 내는데 겁이 안 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수술을 앞둔 사람들은 “내가 다시 살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습니다.
저는 수술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사람은 수술실안에는 따라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들 밖에 있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목사도 성도도 다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술받는 수술실안에 함께 들으가서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만 붙잡으세요!”
예수님은 내가 감옥에 가면 감옥에도 함께 들어가 주십니다. 아무도 따라갈수 없는 곳에 예수님은 함께 해 주십니다.
살다보면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증거가 보입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소망을 품게 됩니다.
힘이없고 낙심해서 우울증에 걸려도 주님이 오셔서 새힘을 주시고 다시 봉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화가 났어도 다시 풀어주시고 온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용서를 빌고 사과할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얼마전에 한 집사님의 고백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서 속이 상하고 힘든일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자기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기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남편에게 가서 남편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울면서 용서를 빌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집사님은 큰 복을 받아 마땅하네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으니 하나님이 집사님에게 복을 주시고 집사님을 높여 주시겠네요! 하나님! 이 집사님에게 영육간에 큰 축복을 내려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이 집사님이 큰복을 받게 해 달라고 선포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면, 겸손 할 수 있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큰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임종을 많이 보았고, 시체도 많이 만져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한시간 정도만 지나면 시신이 싸늘해져 갑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자식이든, 부모든, 남편이든, 아내든 생명이 끊어진 피부는 금방 차가와 집니다. 그래서 시신을 만지면 섬뜩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떠나가면 냉냉해 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견딜수 없는 은혜가 역사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주후 3세기 중반에 로마황제 “발레리안”이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서 그 일을 수행했던 로마 부대장이 “히폴리투스”였습니다.
어느날 그가 “성 로렌스”를 고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 로렌스를 고문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를 고문하면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지만 고문이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평안한 얼굴이 됩니다.
쇠가달린 채찍으로 때릴때는 살이 찢겨 나가면서 고성을 지르고 불인두로 지지면 악을쓰면서 소리를 지르지만 고문이 끝나면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안해 집니다.
하루 이틀 고문을 하면서 히폴리투스는 고문하는 자기는 점점 마음이 불편하고, 고문을 당하는 성 로렌스는 갈수록 평안한 것을 보게 됩니다.
히폴리투스는 점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히폴리투스가 영안이 열려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고문을 당하는 성 로렌스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놀래서 충격을 받고 고민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히폴리투스가 기독교인이 된 것을 알게된 발레리안황제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래서 히폴리투스는 사지가 묶인 채로 말이 잡아당겨서 찢겨 죽었습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서 "예수님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란이 와도 평안을 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입니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시련과 장애물을 많이 겪은 동물일수록 훨씬 더 건강하고 수명도 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험실에서 쥐를 길러 보면, 잘 먹이고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내게 한 쥐는 몸이 약하고 병에도 잘 걸리고 수명도 짧다고 합니다. 쥐 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에 텔레비전에서 태국의 코끼리들이 중노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코끼리에게 아주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코끼리 한 마리가 트럭 몇 대분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일하는 코끼리들이 밀림에 사는 코끼리들보다 10년은 더 장수한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않고 사는 코끼리들은 병들어서 일찍 죽지만 고생스럽게 일하고 긴장속에서 사는 코끼리는 훨씬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잘먹고 잘살다가 죽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태어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이웃을 구원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낙심해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가슴이 뜨거워져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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