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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7년4월19일 수요저녁 히브리서7장11-28절 영원한 대 제사장 에수그리스도

그리운시냇가 2017. 4. 20. 13:47


오늘 김란심집사님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김란심집사님께서 그동안 마늘공장을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드디어 좋은 직장으로 영전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기다기다렸더니 주일도 성수 할 수 있고 또 차량까지 제공해 주실수 있는 오너를 만나서 새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란심집사님께서 새로 시작하는 직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남해세광교회의 첨병이 되어서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농번기라서 마늘쫑을 뽑느라고 힘들고 지친 고재준집사님이 안나오는줄 알았는데 집사님이 나와서 자기 자리에 앉으니까 왼쪽줄이 꽉 찬것 같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주일과 수요예배는 끅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윤철기장로님께서 셈모에 사시는 작은어머니를 섬기느라 오셔서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시고 저녁예배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오늘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구약의 제사장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는 가장 어려운 성경중에 하나입니다. 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율법과 새언약을 비교해서 풀이한 성경이기에 히브리서가 여렵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사직과 제사장 그리고 새 언약과 새 중보자되신 예수님을 잘 풀어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본래 제사장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또 제사직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레위지파에서 하나님이 세운 대제사장 뿐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이 세워지기 전에 세움받은 성경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 제사장에 관한 정보는 창세기(14:17-20)와 시편(110:4)에만 나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7:1)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복을 빈 제사장”(7:1)입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자기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공합니다.(14:20)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제사장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7:2-3)


멜기세덱이 예수님과 동일한 이유는 첫째로 그는 의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이름을 분석하면 의의 왕입니다. “멜렉은 왕이라는 뜻이고 세덱은 히브리발음으로 체덱으로 읽는데 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평강의 왕입니다. “살렘은 히브리어인데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평화의 왕이요 예수님도 평화의 왕입니다.


셋째로 그는 시작이 없어서 항상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를 통하여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시대에 어떻게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었습니까?


경은 궁금하기 짝이없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의 출생이나 족보나 삶에 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세워진 과정도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멜기세덱 제사장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예 처음부터 제사장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항상 왕 같은 제사장으로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 앞쪽에 기록된 히브리서74절로 10절에 보면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위대한) 제사장인지를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레위인은 레위지파의 최고 어른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18:21,24,26) 그런데 레위지파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그것도 노략물 중 좋은 것을 그에게 드렸습니다.


멜기세덱의 권위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높고 또 율법이나 종족을 초월했습니다. 본래 축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6-7).


대제사장 멜기세덱이 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오직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바라보는 모든 땅을 너에게 주리라 내가 그땅에서 너에게 자녀를 주리라 그 자손이 별과같이 많아 지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 지리라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땅이 자기 자손의 땅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손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많아 질 것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첩이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통해서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질것과 이삭을 통해서 모든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17살쯤 되었을대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삭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불태워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언제는 이삭이 약속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제와서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불태워 제사를 드리라니요? 난 못합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원망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 내용이 히브리서 1117절로 19절에 자세하게 증거 됩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7-19)


이 말씀에 아주 이상하고 신기한 말씀이 소개 됩니다. 아브라함은 까마득한 옛날에, 지금부터 4000년전에 죽은자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때에 이삭을 죽여서 번제 제물로 바치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도로 살려주실 것을 확신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진 부활신앙이요 복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입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제사장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와같이 큰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레위 제사장은 죽지만 멜기세덱은 죽지않고 계속 살아서 직무를 수행한다고 오늘본문 8절은 증거 합니다. 이와같이 멜기세덱제사장은 죽음을 초월해서 항상 직무를 수행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구약시대에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따라 중보제사를 담당할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짐승제사를 드림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세 율법의 대들보가 제사 직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서 구원을 받지 못하자 하나님은 옛 제사 직분을 폐하고 새 제사장을 세워서 구원을 이루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13-14) 율법을 초월한 제사장, 즉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초월한 제사장을 세우셨다면 율법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을 중심으로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레위 지파는 폐지될 계명의 법에 근거해서 혈통과 족보를 따라 제사장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따라서(16),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17)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영생과 천국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15년전에 제가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 장교였던 던바(John Dunbar) 중위가 서부 개척지 최전방에 위치한 작은 요새로 발령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그는 거기서 인디언 수우족(Sioux)과 점점 가까워지게 됩니다.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이라는 영화 제목은 바로 그 수우족이 던바중위에게 지어 준 인디언식 이름입니다.


던바 중위는, 인디언부족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인디언부족과 어울려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디언 부족중에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인디언 수우족에 끌려가서 길러진 백인여자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 라는 백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던바중위는 그녀를 통해서 수우족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어느 날 던바 중위는 그녀에게, 그녀를 키워준 인디언 양아버지인 새 차기”(Kicking Bird)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물어 봅니다. 그러자 인디언부족에게 끌려가서 자라난 백인여자인,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는 아주 어릴 때 자기가 배웠던 영어를 기억해 냅니다. 그래서 자기를 키워준 인디언 양 아버지는 “holy man”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제서야 던바 중위는 인디언부족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새 차기”(Kicking Bird)가 바로 그 수우족의 사제(priest), 즉 제사장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영화가 좀 더 진행되면서 던바 중위는 백인여자였던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와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어렸을 때 끌려와서 인디언제사장 밑에서 자라난 그녀는 처녀가 되자 인디언 수우족의 거친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성적으로 학대를 당하면서 힘들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남편이 이웃 부족과의 전쟁중에 죽자 백인여자인 주먹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는 인디언마을에 와서 지내는 백인남자인 던바중위를 좋아하게 됩니다.


런데 어느날 제사장의 아내인 검정색 숄”(Black Shawl)이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알고서 두 사람을 결혼시켜 주려고 제사장 남편과 의논을 합니다.


제사장의 아내 검정색 숄”(Black Shawl)은 제사장 남편인 새 차기”(Kicking Bird)에게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그러니 두 사람을 결혼시켜 주도록 합시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아내인 검정색 숄의”(Black Shawl)의 말을 들은 제사장 새 차기”(Kicking Bird)두 사람이 행복 할 수 있을까?”하고 의심쩍은 눈으로 물어봅니다.


그러자 아내인 검정색 숄”(Black Shawl)은 제사장 남편 새 차기”(Kicking Bird)에게 당신이 사제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어요라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남편인 새 차기”(Kicking Bird)가 비록 부족민들 앞에서는 특별한 영적인 기운을 가진 성스러운 사람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마치 모든 미래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척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곁에서 늘 함께 살아가는 아내의 눈에는 제사장 남편 새차기”(Kicking Bird)가 실상은 보통 사람”(ordinary man)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신이 비록 사제 일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짤라서 말을 한 것입니다.


비단 인디언 부족 뿐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볼때 각 나라와 민족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디언부족의 제사장이었던 새 차기”(Kicking Bird)와 같은 사제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일을 감당한 사제들도 제사장 새차기의 아내 검정색 숄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사제들도 본질적으로는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박수, 영매나 혹은 사제나 제사장등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영적 능력을 발휘해서 하나님과 계속해서 교통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참 제사장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수 있는 대제사장입니다. 오늘본문 히브리서 7장은 구약의 제사장신약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압도적으로 우월하신 제사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고 또 사람의 죄를 씻어주는 역할을 대행한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직을 수행 했습니다. 제사장이 어떻게 임명되고,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고, 어떤 제사를 집례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내용이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은 철두철미하게 율법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제사장의 직분을 규정하기 이전에 희한한 한 제사장이 나타나서 율법의 원칙을 뛰어넘는 일을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본문 히브리서715절에 나오는 멜기세덱제사장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통에 붙잡혀간 롯을 구해오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아브라함은 시날 왕을 비롯한 다섯 왕의 연합군들을 물리치고 롯을 구해낸 후에 개선장군처럼 귀향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을 맞이했던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멜기세덱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지파의 조상인 레위가 태어나기도 전에, 즉 아론이 첫 제사장이 되기 훨씬 전에 제사장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서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났다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과 같이 아주 특별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16절은 이와같은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멜기세덱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했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따라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 임명된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아예 처음부터 율법을 초월해서 대제사장이 되신 특별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제사장이 되셨습니까? 그 해답이 16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예수님은 무궁한 생명즉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고 증거 합니다.


언뜻 들으면 참 이상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사장으로 임명이 되려면, 법적인 근거나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예수님은 법적 권위대신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잘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셨다면, 제사장들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대제사장이라 해도,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기에 율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대법관들이 법관 중에서는 가장 높고 훌륭한 법관이지만, 그러나 그들 역시 대한민국의 법 아래 있는 법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최고 권위를 가진 대법관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오직 법을 해석하고 법을 적용시킬 뿐이지, 그 법을 임의로 바꿀 권위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대제사장이라면 율법이 정죄하는 죄인을 특별 사면시켜 주거나 율법이 저주한 죄인에게 영생이나 구원을 거저 베풀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초월한 대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압도하는 능력을 가진 제사장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궁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이 임명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 저주를 선포해서 사망선고를 내린 자나 죄로 인하여 지옥불에 들어갈 자에게도 영생과 구원을 선포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대제사장입니다.


“U.S. 오픈이나 “‘윔블던 대회같은 세계적인 테니스 대회를 보면, 매 경기마다 중앙의 높은 심판석에 경기를 주관하는 주심이 앉아 있습니다. 그 외에 베이스라인이나 서비스라인에 떨어지는 공을 판정하는 선심들이 따로 서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공의 인과 아웃”(in-out)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선심이 판정을 내리고 ”(call)을 합니다. 하지만 주심은, 자기가 볼 때 선심의 판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오버룰”(overrule)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오버룰이란 선심이 내린 판정을 번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러명의 심판이 있을지라도 주심이 모든 선심들 위에 있는 최고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판정권을 주심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심이 아무리 또는 아웃했더라도 주심이 오버룰을 선언하기만 하면 주심의 판정이 절대적인 권위로 판정이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의사가 당신은 의학적으로 살기는 틀렸습니다! 우리가 정밀검사와 CT촬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신은 더 이상 살지 못합니다! 당신은 짧으면 3개월을살고 많이 살면 6개월 살 것입니다!” 라고 선고해도


예수님께서 아니다 너는 산다! 내가 명하노니 살아라!”라고 선고하시면 어떤 죽을병에 걸렸어도 회복되어서 살고 또 귀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대학병원의 의사들과 경희한방병원 의사들이 모여서 만든 양한병원의 원장이신 최서영원장님은 유명한 종합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을 고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최서영원장님이 기독교방송에 나와서 간증을 하는데 현대의학으로 도저이 고칠 수 없는 다 죽어가는 환자가 오기만 하면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환자들을 고치는데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고 확신을 주신 환자는 다 고침을 받고 살아서 나갔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의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께서 너는 살아라!” 라고 명령 하시기만 하면 죽을병에 걸린자도 살아나는 기적이 지금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죄를 받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계명을 못 지키면 지옥불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 끌고가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의 판정대로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나 꼼짝없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율법의 공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이미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버룰로 처리해 버리십니다. 나는 분명히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믿었으니 의인이다라고 선포하시면 지옥형벌을 받아야할 내가 영생의 특사가 되어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의와 구원을 선포하시면 율법이 나에게 내렸던 정죄의 판정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이 사라집니다. 오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무죄 선고만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합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예수님께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 근거한 대제사장이 되셨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기도 죄인이니까 먼저 자기 죄를 위한 속죄제부터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단번에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신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본래 죄인을 위한 중보자가 되려면 아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아무 벌도 없이 그냥 용서해 주실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문제를 명료하게 해결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를 희생제물로 대신 드려서 모든 죄인의 대속을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소나 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을 자신의 주 업무로 삼았던 제사장이 자기 자신의 몸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속죄제를 드린다는 것을 일반 제사장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기상천외한 속죄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사역을 단번에 끝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얼마나 엄청난 사랑의 대 제사장이요 믿음직한 대제사장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약점을 가진 사람에 불과한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죄와 상관없이 무흠하시고 하늘보다 높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자기 몸을 속죄제물로 대신 죽으셨기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위대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하신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제쳐놓고 사람을 중보자로 받들어 섬기는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오늘날 세상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무슨 영력 있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중보기도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마리아를 성모로 추앙하면서 자기의 중보자로 받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똑같이 육신의 몸을입고 원죄의 본성까지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던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 마리아가 어떻게 남편과 달리 자기 혼자만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로 중보자가 되어서 추앙이 됩니까?


더 나아가서 천주교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교황을 아예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정말 점입가경입니다.


세계사를 조금만 제대로 배워봐도 역대 교황들이 얼마나 추악한 일들을 자행하고 수 많은 의인들과 착한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 이었는지는 삼척동자도 알수가 있습니다. 교황들 중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권력욕과 물욕과 색욕에만 빠졌던 외식자들이 많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 죄인들을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린 중보자되신 예수님의 자리에 대신 앉혀 놓고 숭배합니다. 교황은 죄가 없다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합니다.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그런 인간 중보자들이 어떻게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의 선과 의와 공로만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천주교에서는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면 신부가 대신 죄를 사해 줍니다. 어떻게 신부가 죄를 사해 줍니까?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 밖에는 중보자가 없습니다. 죄인인 마리아도 교황도 신부도 절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는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11:23-26)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기 12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방금읽은 성경을 보면 모세가 부귀영화를 누리던 궁중생활을 포기하고, 왕될 것을 거절하고, 그 모든 것을 박차고 나와서 고난을 받은 것은 1200년 후에 오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모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1200년 전부터 믿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성도는 이미 2000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장차 1200년 후에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1200후에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다시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환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면 안됩니다.


전에 어떤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목사님! 이렇게 살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지금은 믿음도 없고 봉사도 안하고 나태한 모습으로 사는데 이러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나? 하는게 제일 걱정이예요!”하면서 영적인 고민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분이 진짜 훌륭한 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말던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던 말던 나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만 바라보고 살겠다그런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빠가 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나이가 다섯살입니다. 아빠가 아들을 안고 뽀뽀를 하면서 아빠 돌아올 때까지 엄마 말 잘 들어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은 아빠 언제 돌아와?” 하고 물었습니다.


아빠는 6월달에 출타해서 10월 말에 돌아오는데 아들은 아직 날짜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할까?” 하다가 저 밖에 있는 나뭇잎이 울긋불긋하게 변하면 아빠가 돌아올거야!”라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아들은 시간만 나면 창밖에 있는 나뭇잎을 내다 보았습니다. 드디어 10월달이 되자 나뭇잎에 단풍이 들어서 울긋불긋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 신난다! 아빠가 돌아오실때가 되었다!”하고 좋아서 뛰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재림의 시기와 징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고, 전쟁이 있고, 그리고 음란이 가득하고 죄가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지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면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때가 지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정확한 재림날짜는 몰라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은 평균 열 세살에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중학교 일학년이면 이미 다 성경험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6학년때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아이가 20입니다. 중학교때 40% 고등학생때 80%가 처녀성을 잃어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타락해서 음란이 판치고 세상은 사랑이 식어져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 라고 바울사도는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천국에서 살 것이기에 천국에서 상 받을 것만 생각하면서 산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무디목사님도 재림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나는 설교 할 때마다 내 설교가 끝나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캠벨 몰간도 나는 매일 밤 오늘이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신학자요 전도자인 R. A. 토레이목사님도 고백하기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진리는 성경의 진리 중에 가장 귀중한 진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진리를 깨닳았을 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속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온갖 고난을 당할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기에 모든 고난을 참았습니다! 에수님의 재림신앙은 나의 사역에 가장 큰 원동력 이었습니다!”


장로교의 강력한 전도자 윌버 채프만내가 매 주일마다 주님의 재림을 설교하는 이유는 재림신앙이 가장 귀중하고 중요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만 실상은 하루 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죽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기에 죽어도 소망이 있고 또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삶을 계수하시고 심판하실 것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주님이 오시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면 됩니다. 죽어서 주님앞에 간다면 주님으로부터 상급과 칭찬받을 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날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칭찬을 해 주시면 더 바랄게 없을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다윗목사야! 수고 많았다! 내가 네 수고를 내가 안다! 핍박과 환란을 잘 참고 견뎌셔 믿음좋은 권사들과 남해세광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충성된 성도들과 힘을 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를 많이 썼구나! 수고했다 이제 너는 내 옆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면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도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면 믿음생활을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못된종아 너는 예수믿고 못된짓만 하다가 왔으니 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서 슬피울며 이를 갈면서 지낼지어다라는 선언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셔서 재림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늘영광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만 따라가면 하늘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충성하다가 천국에서 영광중에 예수님의 환영을 받고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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