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엽집사님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느라 수고하신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주 금요일날 남해요양병원에가서 박덕엽집사님을 뵈온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임종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사님의 손을 붙들고 "집사님! 예수님을 붙잡고 천국에 들어가셔서 영생복락을 누리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드린지 삼일만에 집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소천하신날 장례식장에 다녀왔는데 밤새도록 잠이 오질 않아서 박덕엽집사님의 사진을 찾아 보면서 집사님의 모습을 살펴 보다가 교회 카페에 집사님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평소에는 주일 오후에 사진을 올리는데 그날은 집사님의 사진을 보다가 사진을 카페에 올렸습니다.
화요일날 화장장에서 예배를 드리기전에 저는 "하나님! 박덕엽집사님께서 한알의 밀알이 되셔서 집사님 가족들 모두가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린후에 유족들에게 온맘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박덕엽집사님의 장례예배를 드리면서, 집사님이 90세가 넘은 나이에,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인생의 황혼기에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을 받은 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덕엽집사님을 전도하신 정봉임권사님은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으시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박덕엽집사님은 주일을 열심히 사모하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주일에는 자녀들도 찾아오고 또 주일에는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푸짐한 점심식사도 나누면서 지내셨기에 주일을 좋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집사님댁으로 심방을 가면 집사님은 신이나서 좋아하셨습니다. 심방가서 예배를 드리면 집사님은 찬송가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제가 부르는 찬송을 큰소리로 열심히 따라 부르셨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박덕엽집사님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아셨습니다.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셨기에 집사님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님들을 만나는것을 좋아 하셨습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모습으로 지내시고 계실때도 병원에 찾아가서 “집사님! 김목사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정신이 번쩍 드셔서 기뻐하시고 웃으시면서 "짖꿎어라! 짖꿎어라"라고 하시면서 세 번이나 깨어나셨습니다. 집사님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영이 살아계셨기에 주의 종의 방문을 기뻐하시고 의식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정삼아 집사님도 남해병원에 입원해서 의사도 포기하고 돌아가실때가 되어서 자녀들이 다 모여서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데 제가 가서 “집사님! 김목삽니다!” 하고 인사를 했더니 의식이 없이 사경을 헤메시던 집사님이 벌떡 일어나셔서 그길로 회복이 되셔서 2년을 건강하게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모천에 사시던 정삼아집사님도 저를 정말 좋아 하셨습니다. 제가 가기만 하면 좋아서 맨발로 뛰어나오셔서 맞이해 주실정도로 좋아 하셨습니다. 정삼아집사님은 저희 부부가 심방을 가기만 하면 자녀들이 보내주신 생선 과자 음료수등을 싸 주셨습니다.
중간에 교회가 분리되는 바람에 제가 정삼아 집사님의 장례식을 집례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정삼아 집사님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면서 사셨기에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다가 천국으로 가신 것을 믿습니다.
구원받아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하고 잘살고 소원을 다 이루고 산다해도 구원받지 못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면 그런 사람이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금번에 박덕엽집사님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한가지 아쉬운 일이 있었습니다. 화장장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모든 유족들과 가족들이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하기 직전에 맨 앞에 앉아 계시던 나이가 지긋이 든 한 어르신께서 슬그머니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예배시간에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신 그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천재일우의 기회를 노쳤기에 생명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셨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쉬웠습니다.
화장장에 계셨던 40여명의 박덕엽집사님의 자녀들과 가족들은 일생일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예배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시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수 있다는 복음을 들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기회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기에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박덕엽집사님의 아들 김종연성도님과 아내 박옥순성도님께서 장례식을 마치고 교회로 오셔서 50만원의 감사헌금을 올려주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느라 경비가 많이 지출되었을텐데 저희 교회에 귀한 사랑으로 많은 감사헌금을 올려주신 김종연성도님과 형제들 그리고 가족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김종연성도님은 자기 가문과 가족들은 모두다 불교 신자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파일이 되면 모두 다 절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박덕엽집사님의 가족은 집사님이 아니었으면 죽을때까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평생에 한번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 좋은 기회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가신 그 어르신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아서 천국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어려워도 사는게 힘들어도 구원받은 사람은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새벽에 히브리서 13장을 살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13장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라고 증거 합니다.
세상에서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타락한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인류 최초의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그 성읍을 명명했습니다. 그 성이 에녹성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받은 에녹과 이름은 똑같지만 그 에녹보다 훨씬 수백년전 사람이 에녹입니다.
에녹성이 건축된 이후에 인류의 역사는 성을 건설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역사로 발전됩니다.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신시가지 건설로 이어지고, 혁신도시로 계속해서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도시 몰락사”입니다. 가인이 세운 최초의 에녹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고대시대의 유명한 성읍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베, 니느웨, 바벨론같은 성들은 당대에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 성읍들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천년 영화를 자랑하던 우리나라의 경주도 넓은 시가지에 백만인구의 엄청난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울산이 경주보다 커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천년고도 경주는 지금 울산의 위성도시로 변했습니다.
요즈음은 도시가스로 난방과 취사를 하지만 옛날의 경주는 집들을 그을리지 않기 위해서 즉 도시 환경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취사는 오직 숯만 사용하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융성했던 경주의 부귀영화가 퇴색한지 벌써 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라고 증거한 것입니다(고전7:31)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증거 합니다. 그날에는 이 세상의 모든 도시와 성읍들과 하늘도 불에 타서 사라지고 우주 만물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땅과 집과 세상에 치심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를 위해서 지어진 예루살렘성전도 여러 번 파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이 수 십 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성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전을 구경하면서 수선을 떨었습니다. “선생님 저 건물좀 보세요 저 돌들 좀 보세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건물과 땅과 재물을 귀하게 여깁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영혼까지 팔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이 땅에 영구한 도성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 집착하면서 살아가지만 그게 다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시편49편11절에 보면 “저희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생각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는도다” 라고 증거 합니다.
이사야서5장8절에도 보면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증거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너나 할것없이 악착같이 땅과 토지를 구해서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하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수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나, 생각이 동일합니다. 오직 땅과 집과 재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이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장차 올 도성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땅에 속한 것들을 소망으로 삼지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서 거부가 되었지만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했다”(히11:9)라고 증거 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는 자들은 텐트를 치고 살면서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성읍이 주는 모든 안락과 좋은 집이 주는 편리와 재물이 주는 행복을 보류하고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참된 신앙의 순례자들입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이 영광을 누리는 곳입닏.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풍부했기에 좋은 집을 짓고 살수 있는데도 장막에 거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천성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역시 복받은 부자 였지만 그들 또한 인생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나그네로서의 삶의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믿는 성도가 믿음이 떨어지면 하나님은 시험을 주십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구나”라는 깨우침을 갖도록 시련을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철석같이 믿었던 자녀가 시험에 들어서 타락하는가 하면 의지하던 재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하늘처럼 믿고 살았던 남편이 떠나가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시험은, 이 세상에는 믿을만한 사람이나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꿈을 좌절시키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혀서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도 세상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의미에서 그런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가 너무 세상것에만 치심하면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들을 떨어뜨려서 날 수 있는 훈련을 시키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한 쉼터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립니다.
지상의 보금자리에 집착하거나 땅의 것만 신뢰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뒤 흔듦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드시고 또 신뢰했던 관계들이 흔들리게 되면 “아하 내가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만 의지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것을 흔드시는 구나, 안되겠다 내가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이 소망이요 내가 바라볼 영구한 도성은 하나님밖에 없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나폴레옹이 어느 날 밤 진영을 순시하러 나왔을 때에 한 보초병이 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보초병은 너무 피곤해서 졸다가 그만 무기를 떨어뜨리고 졸았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무기를 대신들고 그 보초병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얼마후에 졸던 보초병이 깨어나서 자기 손에 있던 무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 놀래서 두리번 거리는데 나폴레옹이 뒤에 섰다가 보초병에서 무기를 건네 주면서 “이봐! 너 한 사람이 보초를 제대로 서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수도 있어! 정신차리고 보초를 서게 이번만은 용서해 줄 터이니 다시는 졸지 말게!”하고 엄하게 훈계를 한 후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폴레옹이 세계를 지배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 데에는 탁월한 지도력도 있었지만 낮고 천한 병사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주는 훌륭한 인품도 있었기에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 보초병은 보초를 서다가 큰 실수를 했기에 죽을줄 알았는데 나폴레옹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바람에 너무나 감격해서 나폴레옹의 충복이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작심하고 충성된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자기의 충정심을 고백한 후에 나폴레옹 곁에서 근무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나폴레옹은 그 병사의 부탁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평소에나 전쟁통에나 언제 어디서나 나폴레옹 옆에서 그림자처럼 밀착 수행을 하면서 나폴레옹을 지켰습니다.
한번은 전쟁통에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는 암살팀이 깊은밤에 습격을 했는데 이 병사가 예민하게 미리 눈치를 채고 대처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큰 위기를 모면 했습니다. 이 병사는 끝까지 목숨을 바쳐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은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 용서받고 살아난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도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심판받아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죄인인 나를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심인곤장로님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님이셨습니다. 청교도 시인인 밀턴에 대한 강의로 유명한 분입니다. 김동길교수님과 김찬국 목사님은 심인곤장로님의 제자입니다. 두분이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심인곤 장로님을 꼽고 있습니다.
심인곤 장로님은 일제시대때 평안북도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의 교사로 재직 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심인곤장로님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에 일본 천황의 신사에 절할 수 없다”라고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심인곤장로님은 교사직에서 파면 되었습니다.
심인곤장로님은 파면된 그 다음날부터 학교 앞에서 신기료장수를 했습니다. 헌신을 기워주고 신발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신기료장수”라고 합니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또 하교할 때 그 분을 보면서 “아, 저 분이 어제까지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신데 신사참배를 안한다고 파면을 당하셨대 그래서 저렇게 신발고치는 일을 하시는거래!”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심인곤장로님을 보면서 신앙양심의 중요성과 애국심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심인곤 장로님은 교사로서 교단에 서 있을 때보다 신기료장수로 교문 앞에서 신발을 고치면서 더 많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일본경찰이 장로님을 죽이려고 하자 천안의 광덕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김동길목사님과 김찬국 목사님이 심인곤장로님을 찾아가서 장로님이 써 놓으신 원고들을 가져다가 책을 한 권 냈습니다. 1981년 6월달에 그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책에 영적인 깨닳음을 가진 사람만이 고백할수 있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인생관과 불신자의 인생관이 다르고, 자연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자연관과 불신자의 자연관이 다르고, 사회는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회관과 불신자의 사회관이 다르고, 출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출생관과 불신자의 출생관이 다르고, 결혼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결혼관과 불신자의 결혼관이 다르고, 사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망관과 불신자의 사망관이 다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신자가 되었다
신자의 가치관과 불신자의 가치관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평범하게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면 불신자와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따질 때 그 사람의 학벌, 가문, 건강, 재산, 연봉, 재능, 외모 등을 가지고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십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만이 가지는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본문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증거 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 이었다"라고 증거 합니다. 3절에서는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는 5절과 같이 변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도다”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과 약함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바꾸실 만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가 이사야서에 증거 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41:2-3) 그리고 “너는 나의 보배요 존귀한 자요 나의 영광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31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니카라과 출신의 복음 성가 가수 “토니 멜렌데즈”(Tony Melendez)는 임신 중에 어머니가 복용한 약물로 인해서 양 팔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양팔이 없는 그는 16세 때부터 발가락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한 때 사제(신부)가 되려 했지만 두 팔이 없다는 장애로 인해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10년동안 열심히 기타를 배워서 지금은 기타리스트, 작곡가, 가수가 되어서 40여 개국을 순방하면서 연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토니 멜렌데즈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그는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인생이 수학문제처럼 풀리지 않자 그는 인생의 허무를 이길 수가 없어서 중이 되어 절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스님은 울진군 원남면에 있는 절에서 지냈는데 선생님 자격이 있는 것을 알게된 군청에서 그를 선생님이 오기를 꺼려하는 학교에 선생님으로 봉직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이지만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날 교회에서 스님이 선생님으로 재직하는 그 학교를 빌려서 수련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를 인도하신 목사님이 스님에게 “스님! 당신은 장차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되실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김성화스님은 화가나서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머리깍고 스님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되받아 쳤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국장이 되었고 우리나라대표로 불교국가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되어서 점점 높은지위에 올라가다 보니까 불교계가 썩어도 너무나 썩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속인들이 기를 받으려고 은밀하게 절을 찾아왔고, 어떤 유명한 중은 마치 애인을 둔 것처럼 수 많은 여자 무속인들을 거느리면서 그들과 은밀하게 육체관계를 가지면서 지내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화스님은 순수하고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워보겠다고 작정하고 한 독지가와 함께 새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키는 간수에게 목탁과 불경을 들여보내 달라고 해서 감옥안에서 불경을 읽으면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감옥안에 있는 도서관의 간수에게 불교서적을 신청을 했는데 간수가 성경책과 더불어 일본 스님이 개종해서 기독교를 믿은 간증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대출담당간수에게 야단을 치면서 왜 내가 대출한 책을 안가져오고 기독교 서적을 가져왔냐고 했더니 대출담당이 기독교에도 진리가 있으니까 스님도 한번 읽어 보세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좋다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폈는데 누가복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시는 기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그저 숙명의 문제로 운명의 문제로 다루었는데 예수님이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을 보면서 종교의 문제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경에는 어떤 과부가 외아들을 키우다가 죽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외아들이 죽었는데 그 과부는 죽은 외아들을 안고 부처님을 찾아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아래 마을로 내려가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아서 그런 가문에서 가져온 물 한 사발을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아들이 곧 살아나게 된다”라고 대답을 해 주더랍니다.
과부는 기뻐서 동네를 다니면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았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돌아온 과부에게 부처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성화스님은 다시 마태복음부터 차례로 성경을 읽어 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지면서 자기가 그렇게도 찾고자 했던 진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랍니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무덤이 없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로 했고 결국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스님복을 벗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김성화목사님은 제가 다닌 사당동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일년 선배입니다. 그분은 “극락의 불나비”라는 간증집과 더불어 여러권의 간증집을 내서 허무하게 죽어 가는 불교신도들에게 열심히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탈북자가 북한에서 탈출해서 중국에서 숨어 지내다가 베트남을 거쳐서 드디어 한국에 왔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와서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을 받으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나는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는 순간 그동안 겪었던 수 많은 고생의 여정들이 눈앞을 지나가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밤에 잘때오 주민등록증을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잠이 오질 않아서 다시 불을 켜고 주민등록증을 바라보면서 내 얼굴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잠을 잤습니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주민등록증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목숨 걸고 두만강 건너 중국을 통과하고 베트남을 거쳐서 한국에 온 사람은 주민등록증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옥불에 들어갈 내가 예수믿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고 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것을 깨닳은 사람은 감격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8절로9절에 보면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사탄마귀가 이끄는대로 살았습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죄짓는 것 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만 쌓는 일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진노만 쌓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죄인을 나를 붙들어서 죄의 불가운데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오늘본문 4절로 6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증거 합니다.
얼마전에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사에 비행기를 타러 갔다가 비행기의 좌석이 없어서 쫓겨난 사람때문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비행기에 앉아 있다가 승무원이 내리라고 했더니 안내리고 버티니까 승무원들이 강제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피가 터지고 난장판이 되어서 세계가 떠들썩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눌나라에 자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믿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리를 예비해 주시고 그 자리에 앉혀 주신다고 오늘 본문 6절은 증거 합니다. 하늘 영광보좌에 내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마다 무서운 담이 있습니다. 그 담을 헐어야 참사람이 되고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전에 건국대학교 3학년 학생이 지하철에서 묻지 마 폭행을 당했습니다. 밤 11시 40분에 건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탔다가 취객 두 명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매를 맞고 코뼈가 함몰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리스의 보컬 이은미씨는 새벽 2시에 귀가하다가 남자 친구 조 모씨가 휘두른 흉기에 65차례나 찔려 사망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조 모씨는 이은미씨가 헤어지자고 한 것이 격분해서 그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탄마귀가 자리잡고 있기에 여기저기서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고 중학교에서는 선생님을 개패듯 패고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을 죽이고 친구간에도 죽이고 그리고 선후배간에도 강제로 옷을 다 벗겨서 때리고 강간하고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일을 해야하는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면 무조건 선한 일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위하여 선하게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의 나팔이 되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가장 선한 일입니다.
심리학자들은 4가지 조건에 의해서 친해지고 친구가 된다고 말을 합니다.
첫째가 근접(proximity)입니다. 사람들은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곳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과 친해진다고 말합니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집니다.
둘째는 유사성(simlarity)입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됩니다. 학교나 이웃들을 조사해 보니까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더랍니다. 성격,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학교 동문, 같은 지역 출신 등 공통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더욱 친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보상(rewardingness)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살고 늘 접촉해도 모두가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다든지 계속 칭찬을 한다던지 도와준다든지 하면서 보상을 주면 그런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외모(physical attractivess)입니다. 성격이나 지능과는 상관없이 오직 상대의 용모에 따라 호감을 가지고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남녀에게 여러번 댄스파티를 열어서 누구와 친해지는지를 조사 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선택하는데 외모가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더랍니다.
그것을 후광 효과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좋은 점을 보게되면 모든 것을 다 좋게 보는 것이 후광 효과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에게는 심리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고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그사람과만 어울립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배타적이 됩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상대는 적으로 삼아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동종의식의 잘못되면 패거리 의식을 가지게 되고, 지역주의와, 이기주의로 발전합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은 국주주의로 발전해서 그릇된 민족주의나, 혈통 우월주의가 됩니다. 이런사상이 강해지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라고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있었고 헬라인들은 헬라인들 나름대로 자기들은 문화민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기민족 외에 다른 민족을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지옥불의 연료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을 당해도 산모를 도와주는 것은 율법을 위배한다고 생각해서 안도와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하거나 유대인 처녀가 이방인 청년과 결혼하면 그 유대인 청년과 처녀를 죽여서 장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정도로 이방인을 싫어하고 또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미워 했습니다.
헬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온 세계를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습니다. 헬라인은 지성인이요 철학자로 생각하고 그 외 나머지민족은 무식한 문맹인과, 야만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하나되고 화목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담(partition-wall)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구분하고 그 담벽에 "이곳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죽임을 당한다" 라고 써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벽을 쌓아놓고 서로 적대시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 담을 예수님이 허셨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담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나누는 담이요 모든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는 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막힌 담, 인종과 인종끼리 막힌 담, 사람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 지역과 지역의 막힌 담, 남녀의 막힌 담,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막힌 담, 자유인과 노예의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주셨습니다.
남과 북에도 높은 철책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최전방 휴전선 GOP에 가면 남쪽에도 철책이 높이 서 있고, 북쪽에도 철책이 높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고 철저하게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지척간에 순찰을 돌고 주시하다가 교전이 벌어지면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막힌 담은 눈에 보이는 철책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 속에 허물 수 없는 막힌 담이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이런 막힌 담은 정치권에서도 여와 야, 이념의 장에서 진보와 보수, 삶의 공간에서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높은 담을 쌓고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도 담이있고 부부간에도 크고 작은 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직장에도 사회 공동체 안에도 그리고 교회 안에도 막힌 담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막힌 담들 때문에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불행한 마음으로 지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담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담입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으로 표현 했습니다. 휘장을 쳐 놓은 하나님의 지성소는 대제사장도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때 대제사장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이 휘장은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막힌 담이 되었습니다.
이 막힌 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없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지옥을 향해 간 것입니다.
오늘본문 에베소서 2장 16절을 다시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힌 담을 허셨다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이와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51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모든 담을 헐어 버리고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면서 삽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치유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말씀을 배움으로 참 소망과 구원의 길을 발견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계급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익공동체도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족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정같이 포근해야 합니다. 가족처럼, 한 식구처럼 한 시대를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교회를 만들고 또 선한일을 위하여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포도나무 > 포도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7년5월3일 수요저녁 에베소서4장25-32 선한 은혜를 끼치며 삽시다 (0) | 2017.05.04 |
---|---|
[스크랩] 2017년4월23일 주일낮 디도3장10-11 신천지 이단을 멀리하라 (0) | 2017.04.30 |
[스크랩] 2017년4월23일 주일낮 역대상4장 9-10절 야베스가 받은 축복 (0) | 2017.04.23 |
[스크랩] 2017년4월19일 수요저녁 히브리서7장11-28절 영원한 대 제사장 에수그리스도 (0) | 2017.04.20 |
[스크랩] 2017년4월16일 부활주일 누가복음24장13-35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0) | 2017.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