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날마다 수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미운생각, 고마운생각등 하루종일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살아 갑니다.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이 제작한 불후의 명작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불로 떨어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을 조각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국과 지옥 둘중에 한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천국과 지옥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일만 하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믿고 선하게 산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받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나안땅에 가까이 갔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땅으로 보냈습니다. 40일동안 정탐하고 돌아오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명이 40일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2명중에 10명은 가나안땅은 절대로 들어갈수 없는 땅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땅은 우리가 들어갈수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라고 증거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5) 라고 증거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믿음없이 바라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에 믿음대로 됩니다.
똑같이 울어도 정말 슬퍼서 우는 것과 가식으로 우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조선 연산군때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디. 김해 마을에 부임한 원님 집 옆에서 어느 날 곡소리가 났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죽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원님이 시체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샅샅이 조사를 했는데 죽을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죽은 원인을 찾지 못하자 부인이 울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왜 나를 의심하십니까? 저희 부부가 금실이 좋았던 것은 이웃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님은 시체를 반듯하게 눕혀놓고 배와 가슴을 누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꼽에서 쇠꼬챙이가 올라 왔습니다. 아내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알고보니 그 여자는 남편몰래 만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짜고 자기 남편을 죽인 것입니다. 자고 있을 때 쇠꼬챙이를 배꼽에 박아서 죽였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삼일동안 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님이 밤에 가만히 들어 보니까 아내인 여자가 곡을 하는 데 곡소리는 나는데 슬픔이 하나도 묻어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조사를 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붙잡혔고 간통한 남자까지 둘다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사람의 말을 듣고 밤새도록 울면서 “장관을 따로 세워서 지도자를 삼자” “모세를 따르지 말자” “애급으로 돌아가자”라고 원망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후수아와 갈렙은 오직 믿음의 말만 선포 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7-9)
봉천동 풍성한 교회의 설진일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 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기만 하면 100일안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세 아들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네 번째로 낳은 아들이 100일이 되어가자 또 죽어 갔습니다. 그 때 동네의 목사님이 아버지를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런 집안의 저주가 사라진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내에게 “여보!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갑시다!” 아내는 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자는 데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앞마당에서 회오리 바람이 세 번 강하게 불더니 밖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꿈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아침에 목사님을 찾아가서 꿈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이 “회오리바람이 세 번 날라간 것은 세 아들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었으니 재앙은 끝났습니다 걱정 마세요”하고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네 번째 아들은 고침받았고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그 후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더 낳아서 아들넷에 딸 하나를 키웠습니다. 네 아들은 모두 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울에서, 하나는 인천에서, 하나는 일본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도 다 예수님을 믿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가문에 흐르는 모든 재앙은 사라졌고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출애굽 1세대중에 유일하게 가나안땅에 들어 갔습니다. 왜냐하면 두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우리는 안된다 틀렸다 어렵다 못간다 라고 고백한 10명의 정탐꾼들과 더불어 밤새도록 울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원망불평한 사람들은 하나도 가나안땅에 못들어 갔습니다.
전에 제가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대학 신약학 교수님의 간증을 소개 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채플 시간에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음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교수의 별명을 “찬송 음치교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교수님이 예배시간에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음정도 틀리고 박자도 틀리고 엉터리로 불렀지만 열심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지난 날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요즘은 왜 그렇게 찬송을 열심히 부르시나요?” 교수님은 꿈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느날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는데 천국에 도착해서 천국문을 노크 했더니 베드로가 나와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더군!
그래서 “나는 어렸을때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지금은 신학대학 교수입니다!”라고 했더니 베드로가 천국 기록부를 들쳐 보더니 “공부는 많이 해서 아는 건 많은 데,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기록이 전혀 없군요! 천국은 지식이 많은 신학 박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많이 올려드린 사람을 원합니다! 다시 가서 찬송을 많이 부르고 오시오!” 그리고는 천국 문이 꽝 닫혀 버렸지!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네! 그래서 내가 비록 음치지만 크게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네!”
하나님은 찬송을 못해도 음치라도 찬송 부르는 것을 기뻐 하십니다. “나는 찬송을 못해 음치야!” 하면서 찬송을 안부르면 천국문 앞에서 쫓겨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잘 못 불러도 믿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믿음으로 전도하고 믿음으로 섬기고 믿음으로 사랑하면 큰 축복이 임합니다.
어제 심방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주차장에 세워놓은 승합차의 바퀴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제 집사람에게 살살 운전을 해 보라고 시키고 바퀴를 들여다 보았더니 타이어에 못이 밖혀 있습니다.
두주 전에도 못이 박혀서 빵꼬를 때웠는데 또 못이 박히니까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차 세대를 운행해도 일년에 한번 빵꼬가 날까 말까 한데 한달에 세 번 빵꼬를 때우게 되니까 누가 못된짓을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무슨 큰 일이 생기면 이 생각 저생각에 잠이 안옵니다. 아무리 생각을 멈추려 해도 생각이 멈추어 지지가 않습니다.
사실 생각 만큼 빠른 것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미국에도 다녀오고 유럽이나 캐나다 아프리카도 순식간에 갑니다. 달나라도 우주도 마음 먹은대로 갑니다.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도 들어가고,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훔쳐 보기도 합니다. 생각으로는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생각을 따라 움직입니다. 육신은 생각을 따라갑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교회에 가야지!” 라는 생각이 강하면 교회에 가지만 만약에 “오늘은 골프치러 가야지!”라는 생각이 강하면 골프장으로 갑니다. 그래서 생각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를 가져오고 생각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을 가져 오게 됩니다.
초신자들을 위해서 가수 이야기를 다시 소개 합니다. 가수 100명을 대상으로 그 가수의 히트곡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사했는데 신기하게도 91명의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에 나오는 가사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별견했습니다.
특히 요절한 가수들은 하나같이 죽음과 연관된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던 윤심덕씨는(1897-1926)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30세에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1957년도에 산장의 여인 이라는 노래를 부른 권혜경씨(1931-2008)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하는 “산장의 여인”이라는 노래를 부른후에 그 가사의 내용처럼 60년대 말에 위암과 자궁암에 걸려 외롭게 요양을 하다가 말년에는 충북 청원의 깊은 산골의 산장에서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하게 혼자서 죽었습니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송춘희씨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절에서 지내다가 불교 포교사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본래 기독교 신자 였습니다.큰 아버지가 교회를 세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를 부른 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전국 각처의 절에서는 행사만 있으면 그녀를 초대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큰 절에서 초대하면 엄청난 돈을 주고 또 잘해 주니까 그녀는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녀는 지옥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
“흑점”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양미란은 그 노래를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흑점”이라는 노래에는 “태양의 흑점처럼 어두운 내 가슴”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흑점인 암에 의해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배호는(1942-1971) 많은 히트곡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는데 항상 슬픈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의 히트곡은 “돌아가는 삼각지”입니다. 그 노래처럼 그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인 “마지막 잎새”의 가사는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처럼 사라지네”라는 노랫말처럼 그는 “마지막 잎새”가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중가요 작곡가들의 모임인 “노랫말연구회”에서도 비슷한 발표를 했습니다.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일찍 죽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걸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좋은 가사의 노래를 불러서 덕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조미미씨는 서른다섯살까지 결혼을 못하다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치면서 재일교포가 바다를 건너와서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송대관집사님은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자기 노래처럼 쨍하고 해가 떠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거쳐서 음반회사에서 청소를 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가 부른 노래처럼 인생에 큰 서광이 비치고 최고의 트롯트 가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른 윤항기장로님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윤복희씨와 함께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처럼 그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되었고 신학대학까지 세워서 예음음악신학교 총장이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보통 3,000번에서 5,000번이나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노래만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노래에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실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 노래는 히트를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고, 인생이 그 노래의 가사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부르면 내 감정도 슬픔에 도취되고 그러다보면 삶이 슬픔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대로 기쁜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부를 때도 기쁘지만 일상의 삶도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이런 비밀을 깨닳은 가수 박재란 씨는 고백 하기를 “가수는 자기가 가장 히트한 곡 대로 인생이 진행 됩니다”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이고 마음이고 그사람의 영혼입니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과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과거에 뿌린 말의 씨앗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 뿌리는 나의 말의 씨앗이 장래의 나를 만듭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생을 결정짓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합니다. 그래서 12지파 가운데 한 사람 씩 12명의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땅을 샅샅이 조사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정탐한 땅에 대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열 두명 중에 10명은 그 땅을 악평을 하면서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그땅에 도저히 들어갈수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 정 반대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똑 같은 현장을 보고나서 두 그룹이 완전히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보고를 기뻐 하셨습니다. 믿음의 신앙고백을 기쁘게 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큰 복을 받게 됩니다.
반면 부정적인 보고를 한 열명의 정탐꾼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 같이 원망 불평하면서 울고 불고 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생각의 차이와 신앙고백의 차이가 그들의 운명을 갈라 놓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항상 형통하지 많은 않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생기고 자녀들에게도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병도 날때가 있고 이런 저런 갈등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때에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좋은 결과를 주실거야!” 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복이 옵니다.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믿음의 사람중에 한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이 어린 나이에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 갔으니 얼마나 괴롭고 상처가 컸겠습니까? 아마도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오고 감옥까지 가서 고생하게 만든 형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겠다는 생각에 잠을 못잤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이 생각 날 때 마다 “이 원수같은 형들! 어디 두고보자 내가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은 그 형들을 원수로 생각한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형들을 만났을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서 내가 애굽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미리 나를 애굽에 보내신 것입니다. 형들이 나를 애굽에 팔아 넘긴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게 요셉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요셉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요셉이 원수를 갚겠다고 산에 올라가서 밤낮 무술을 배우면서 칼을 갈고 이를 갈면서 지냈다면 그런 영광스런 자리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집니다. 다윗을 다윗되게 한 사람은 원수 사울왕입니다. 다윗은 도망을 다니다가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두 차례나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습니다! 지금 사울왕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라고 건의를 했지만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에게 “아니다 죽이면 안된다 살려야 우리들이 산다”라고 고백하면서 사울왕을 살려보냈습니다.
다윗은 악한 사울왕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손수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더 복을 받고 더 은혜안에 살게 된다고 믿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새벽기도 올때 일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일어나기가 힘들지만 새벽기도를 하면 내가 복을 받고 내 가족들도 복을 받고 우리 교회도 복을 받고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는 길이니 내가 힘을 내서 기도하자” 하고 열심을 품고 새벽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위인이 별 게 아닙니다.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사람이 위인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기차를 타러 가는데 시간이 늦어서 죽어라고 뛰어가서 간신히 기차에 올라 탔습니다. 그런데 올라 타다가 그만 신발 한짝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자기의 남은 한쪽 신발을 벗어서 밖으로 던졌습니다.
먼저 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아니 한 짝이라도 신고 가야지 왜 남은 신발 한짝을 버립니까?“하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신발이 한짝만 남으면 나도 소용없고 신발 한짝을 줏은 사람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남은 한짝을 던져 놓으면 누군가가 두 짝을 주워서 신게 되니까 그게 더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생각의 차이입니다. 우리도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의심의 생각을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고, 원망의 생각을 감사의 생각으로 바꾸면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원망 불평의 가라지를 뿌리지 못합니다.
신발 회사에서 시장조사를 하려고 아프리카로 두 명의 직원을 파견했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사람이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보니까 사람들이 거의 다 맨발로 다녔습니다.
돌아온 두 사람이 따로 따로 보고서를 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다 맨발로 다닙니다.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신발을 신지 않고 사는 문화에 젖어 있기에 이곳에서 신발을 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지역을 알아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은 정 반대의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다 맨발로 다닙니다.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신발을 팔면 엄청난 신발매상을 올릴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신발을 신게 한다면 우리 회사는 대박입니다”
똑 같은 환경을 보고나서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큰 인물은 생각이 큰 사람입니다. 쪼잔한 사람은 생각부터 쪼잔합니다. 믿음도 통이 커야 합니다. 통 크게 믿으면 하나님도 통 크게 주시고 쩨쩨하게 믿으면 하나님도 쩨쩨하게 주십니다. 한 번 따라 합시다. “통 크게 믿으면 통 크게 주시고, 쩨쩨하게 믿으면 쩨쩨하게 주신다” 좀 큰 생각을 하고 살면 작은 것은 그냥 넘어갑니다.
생존율 5%의 말기 암에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은 수명이 6개월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똑같은 암인데도 2개월 만에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2개월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12개월을 사는 사람은 열심히 투병을 해서 완치가 됩니다.
그러니까 암에 걸렸을 때 그때 생각이 중요합니다. 나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급속하게 암이 퍼져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 라고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치료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 통계의 범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통계의 범위를 벗어난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상식의 사람이 아니요 운명의 사람도 아닙니다. 운명을 바꾸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런던에서 보스톤을 향해 가는 여객선 배에 한 중년 부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보스톤으로 시집간 딸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배가 대서양 한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면서 이젠 죽었구나 하고 다들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중년 부인은 너무나 침착했습니다. 폭풍으로 인해서 다들 안달을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데 그녀는 혼란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행이 거친 풍랑이 물러가고 배는 보스톤에 도착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서 보스턴에 도착했다고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감격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하는 동안에 거친 풍랑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은 그 중년 여인을 지켜본 선장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어떻게 그렇게 큰 풍랑 중에도 눈하나 깜짝 하지않고 평안하게 지낼수가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 부인이 조용히 웃으면서 “저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습니다. 큰 딸은 지금부터 3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딸은 여기 보스턴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두 딸 모두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만약에 제가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침몰해서 바다에 빠져 죽는다면 저는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은 딸을 천국에서 만나기에 죽어도 행복합니다.
혹시 배가 안전하게 보스톤에 도착하면 사랑스런 둘 째 딸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생각했기에 풍랑이 일어도 요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탐꾼들의 보고는 10대 2입니다. 열명을 부정적이고 두명만 긍정적입니다.
오늘날은 다수결의 사회입니다. 무조건 다수결이 이깁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수도 반장도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보시고 결정해 주십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승리합니다. 사람이 많다고 다 되는게 아닙니다.
열명의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라는 갈렙의 말은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거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땅 백성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열명 정탐꾼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달겨 들었다고 오늘 본문 10절은 증거 합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셨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 내용이 28절에 나옵니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우리가 대화하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를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한 그대로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불평하면서 한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내용이 오늘본문 민수기14장 2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들이 말한대로 너희는 모두다 광야에 엎드러져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아직 어려서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스무살 아래의 청년들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자기들이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 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과 하는 모든 말을 다 들으십니다.
어제 새벽기도때 말씀드린 것처럼 말라기서 3장16절에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사람들이 피차 말하는 소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장에서는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들이 고통 중에 내뱉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고 증거 합니다. (출2:24-2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시고 우리가 고통 중에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면 새벽잠을 깨우고 와서 기도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도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하는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귀에 들린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잘해야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땅까지 가는데 40년이 걸립니다. 한달이면 넉넉히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을 방황하면서 헤멨습니다. 40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걸렸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도 넉달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40년이나 걸렸으니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왜? 40년이나 걸렸습니까?”
사람들 대부분은 40년 걸린 이유를 “이스라엘의 불신앙’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뺑뺑 돌다가 죽게 만드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 해석은 옳습니다. 그러나 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의 역사요, 부도덕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근성을 다 아시면서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들의 죄에 진노하셔서 40년간 뺑뺑이를 돌렸다는 것은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그 또한가지 이유는 세대교체입니다. 세대교체가 되는데 40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길 새로운 세대가 준비되는데, 40년이 필요했습니다.
4백년 동안 애굽에서 세속문화에 동화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헤매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심판이요 둘째는 교육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심판하셨습니까? 그것은 기성세대, 즉 불신의 애굽세대를 향해서 심판의 칼을 내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앙으로 원망불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절시키는 일들을 계속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일세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4백년동안 애굽에서 살다보니까 모두 다 애굽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압니다. 믿기는 믿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냄새가 하나도 안납니다. 입만열면 원망과 불평, 의심과 불신, 반항과 거역밖에 없습니다
4백년전에 그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갈때는 이런 영적 질병들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형제들 모두가 서로 용서했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감격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중심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종살이 노예살이를 하면서 남은 것은 원망 불평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에 들어가서 정신병에 걸리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수 백 만명의 민족으로 번성했지만, 믿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4백년동안 사는 동안에 그들중에는 선지자도, 랍비도, 예언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도 없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신앙의 족적을 남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숫자적으로만 부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속적인 믿음으로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면 믿음도 강하고 싸움에도 강한 군사들이 필요했습니다. 가나안땅에는 일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정탐하고온 10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한 것처럼 그들을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 대장부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네피림은 신장이 장대한 종족을 말합니다. 그들은 부도덕했고 죄성도 강했습니다. 그런 백성들과 싸워서 이기고 또 그들의 문화에 물들지 않으려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담대한 용맹과 더불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백성들이 필요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에 그들의 야성(野性)은 약해질대로 약해 졌습니다. 그들의 시조(始組)인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수천리 먼길을 오직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간 개척자입니다.
아브라함은 불타는 개척 정신으로 나아간 신앙의 선각자입니다. 야곱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정도로 삶에 치열했던 야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에 개척자 정신과, 치열한 삶의 정신이 무디어 졌습니다.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투정이나 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마치 새장 속에서 길들여진 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약해빠진 정신과 원망불평만 하는 믿음으로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봤자 네피림의 밥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40년이 걸린 것입니다.
옛날에 백제의 계백장군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쳐들어오는 신라군을 맞이해서 황산벌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계백장군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 손으로 모두다 죽였습니다.
계백장군은 그 마지막 싸움에서 자기가 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장수가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야 진짜 장수입니다.
계백장군은 자기가 전투에서 패배하면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이 수모와 겁탈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와 자녀들이 적군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가족들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의 타락한 문화와 우상숭배와 원망불평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이적을 직접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하고도 도무지 거듭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망이 없는 기성세대를, 광야에서 자기 손으로 죽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민수기14장 26절로 3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기성세대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홍해바다 앞에서,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그들이 보여준 행태가 너무나도 한심할 정도로 불신앙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과 기적과 이적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의 믿음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불신했고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원망불평만 가득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망없는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1세대를 멸절시킨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그릇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새롭게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애굽의 세속문화에 물들지 않은 세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이 가득한 기성세대와 함께 있으면 당연히 물이 들게 됩니다.
좋은 것은 전염이 늦지만, 나쁜 것은 급속도로 전염이 됩니다. 믿음없는 기성세대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지도자로 군림하면 그들의 악한 영향력이 자손들에게 유전이 됩니다. 그들중에 남자들은 이미 애굽의 여인들과 몸을 섞었고 또 여인들은 애굽의 남성들과 몸을 섞었기에 순수한 혈통도 사라졌고 또 순수한 믿음도 상실했습니다.
그런 믿음없는 사람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음란한 가나안 족속들과 쉽게 동조되고 혼합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가나안의 세속문화에 물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 남겨놓고 나머지 출애굽 1세대 200만명을 모조리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기성세대의 악한 영향력과, 불신앙을 뿌리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뺑뺑이를 돈 후에야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 40년은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의 세월이었지만 한편 광야 40여년은 새로운 세대를 키워내는 훈련과 연단의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적과 맛나를 공급하시고 또 직접 자기를 계시하시면서 출애굽 2세들을 교육시켰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인도를 배웠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배웠습니다. 반석에서 나는 물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손수 그들의 교사가 되셨고, 선지자가 되셨고, 랍비가 되셔서, 새로운 세대를 키워나갔습니다. 광야에서의 교육이 끝나자 그들은 요단강에서 졸업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새로운 세대의 주인공들은 여호수아 갈렙과 함께 법궤를 앞세우고 물이 펄펄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 갔습니다. 그때 그들은 넘치는 물을 두려워 하지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발을 내딛어서 요단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40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홍해바다 앞에서 울고 불고 하면서 원망하던 불신앙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큰 믿음과 담대함으로 요단강을 건너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 시험을 통과하고 드디어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정복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동안 손수 그들을 다듬으시고 가르치셔서 새로운 신앙을 갖춘 세대교체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출애굽 1세대 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두사람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라고 민수기14장24절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신세대를 키워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1세기의 한국교회와 자녀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또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원망불평으로 얼룩진 출애굽 1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살고, 그리고 새롭게 연단되어서 가나안땅을 정복한 출애굽 2세대처럼 살아서 마지막 때에 영적 전쟁에 승리하는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포도나무 > 포도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8년3월11일주일낮마태복음5장1-12 천국 (0) | 2018.03.12 |
---|---|
[스크랩] 2018년3월7일수요저녁 여호수아8장1-2절 두려워 하지 말라 (0) | 2018.03.09 |
[스크랩] 2018년1월21일주일낮 로마서13장1-15절 소망의 하나님과 선교 (0) | 2018.01.21 |
[스크랩] 2018년1월17일수요저녁 계3장7-11이기는 자는 하나님성전의 기둥이 되리니 (0) | 2018.01.17 |
[스크랩] 2018년1월14일고후5장13-21절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 (0) | 2018.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