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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2년6월20일 수요저녁 요한복음3장1-16 거듭남의 의미

그리운시냇가 2012. 6. 21. 12:29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에 가장 열심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스스로 가장 성실한 예배자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 라는 국회와 같은 조직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공회의원 이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의원이 되려면 우리나라 국회의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도덕성과 종교성과 지성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 아니냐” 라고 말씀합니다.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사회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하던 사회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나자 마자 “너는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거듭난다” 라는 말입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부패하면 정치가들이 “거듭나겠습니다” 라고 고백 합니다. 교육계가 부패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사람들이 교육가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광고하면서도 “다시 거듭난 자동차”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하도 보편화되다 보니까 “거듭난다” 말의 진짜 의미가 퇴색 되었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통용되는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난다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새로워져야 한다” “개혁되어야 한다” 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 새로운 탄생의 의미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거듭 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것은 “위로부터 태어난다”(born from above)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듯이 저 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나는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탄생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거듭남의 중요성을 니고데모에게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7절에도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계속해서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관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합니다. 오늘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born again NASB, NIV)라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위로부터의 출생을 말합니다. 이 말을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한자말로 '중생'(重生)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개념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거듭난다'는 말을 당시에 예수님에게 나와서 질문한 니고데모도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요, 유대의 관원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는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말씀 하시자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개념을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로 이해해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는 엉뚱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실 거듭난다고 하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는 말씀과 3절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는 말씀과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다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을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로 대치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물과 성령으로부터” 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생각 하기를 물은 외적인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적인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성경을 보면 물과 성령을 나타내는 단어에 전치사가 물에만 붙어있고 성령에는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이 서로 같은 개념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물은 성령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물은 깨끗이 씻는 역할을 하듯이 성령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눅3:16)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라고 (막1:8) 증거 했습니다.

 

더불어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 라고 증거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이 말씀은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오순절날에 보내신 그 성령님으로 인하여 거듭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는 것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주와 능력이나 이성으로는 절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시고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로 8절을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육체적으로 태어난 육신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이요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일이 이상하지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다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7절로 8절을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을 설명할 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의 움직임을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같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겉으로는 그 변화를 볼수 없지만 속사람이 변했기에 그의 삶이 변하게 된다는 내용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 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적인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옵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고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이 오고, 성경이 이해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새생명을 주셨기에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생명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술과 담배도 끊어지고 세상을 멀리하게 됩니다.

 

휴스턴에 있는 서울침례교회의 박광우 집사님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유회사의 북미 판매책임자로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거듭난 후에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거듭난 그해에 그 분이 회사에서 승진 발령을 받아서 북미 책임자에서 국제 판매 담당자가 되어서 해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광우집사님은 더 높은 지위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그 직분을 그만두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의 무보수 비서가 되어서 그 교회의 행정과 사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냥 회사에 그대로 있었으면 땅도 안밟고 다닐 정도로 높은 지위에 대우를 받을텐데 그걸 다 포기하고 교회에서 식사시간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면서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까지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그대로 생활에 적용하여 생활이 변합니다.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후에 니고데모는 변화된 사람이 됩니다. 나중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죽이지 말라고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신 후에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헌신 하게 됩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한 일중에 가장 잘 한 일은 비록 밤이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로 볼 때, 예수님을 찾아가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의 지위와 명예로 볼때 심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비록 밤일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기에 그는 영생에로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평소에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표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저렇게 놀라운 표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내 문제도 해결해 주실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그에게 역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드디어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영원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2011년 11월 1일 조선일보 위클리 비즈에 “최철규의 소통 리더십” 이라는 섹션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후반 10분을 남긴 상태에서 포항 스틸러스팀이 1대 0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별 탈 없이 그대로만 시간이 흘러가면 포항 스틸러스의 승리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선수 교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체돼 나가는 포항 스틸러스의 선수가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운동장 밖으로 걸어나가자 포항의 선수들이 “빨리빨리 나가!”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상대팀 선수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포항이 시간을 끌고 시간을 지체하면 자기들에게 유리한데, 오히려 자기팀 선수들이 자기팀 교체 선수에게 빨리 뛰어서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니 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항 선수들은 게임을 하면서 비 정상적인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기고 있든, 비기고 있든, 지고 있든간에 경기를 하다가 넘어져서 그라운드에 쓰러진 선수는 용수철처럼 다시 얼른 일어 납니다. 그런가 하면 후배 선수가 심판 판정에 항의하면 고참 선수들이 달려와서 항의 하지 말라고 막습니다. 코너킥이나, 프리킥 상황이 되면 공을 놓자마자 바로 킥에 들어가서 공을 찹니다.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 시간끌기나 백 패스나 후방으로 공 돌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이 이처럼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된 이유는 2008년도에 부임한 김태만사장 때문입니다. 김태만 사장은 포항 선수들에게 “스틸러스 웨이”라는 독특한 선수 평가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김태만사장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K리그를 재미있게 보면서 즐길수 있을까?” 를 생각 하다가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90분 축구 경기 중에 축구공이 정지해 있는 “dead time”을 줄이기로 결심을 합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는 90분 축구 경기중에 선수들이 넘어져서 쓰러져 있는 시간이나 선수 교체시간 등 경기가 멈추어진 시간, 즉 데드 타임이 평균 32분 인데 우리나라의 K리그는 평균 43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K리그는 불필요한 시간 끌기가 많았고, 그것이 게임의 박진감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알고 김태만사장은 포항 선수들에게 빨리빨리 경기를 시키기 위해서 포항스틸러스팀의 제도를 바꿨습니다.

 

게임에 이겼을 때 보너스로 지급되던 승리 수당을 없애고 대신 빠르고 매너 있는 경기를 하면 출전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빠르고 매너 있는 경기에 대한 평가는 코치, 스카우터, 경기지원 팀장으로 구성된 “평가위원단”이 맡았습니다. 평가위원단은 경기마다 데드 타임과 반칙 수 등을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속도감 있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에게만 보너스를 지급 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그 다음부터 경기를 하다가 운동장에 넘어져도 얼른 일어났고 그렇게 경기를 지체하지 않은 선수에게 많은 보너스를 제공하자 포항의 선수들이 너도 나도 부지런해지고 더 열심히 뛰게된 것입니다.

 

결국 그 계획이 성공해서 김태만사장이 부임한 이듬해인 2009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은 영광의 우승을 차지하고 왕좌에 올랐습니다. 한사람의 지도자가 발휘한 지혜가 그런 변화와 영광을 얻게된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생들이 도무지 말을 안들었습니다. 잔디밭에는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도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가면서 잔디밭 한 가운데를 통과해서 지나 갔습니다. 그래서 교무처장이 총장에게 “총장님! 학생들에게 아무리 얘기해도 학생들이 도통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잔디밭으로 다니는 학생을 징계해서라도 학교 교칙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총장이 그 보고를 받은후에 교무처장에게 이런 지시를 했습니다. “잔디밭 한가운데를 뚫어서 학생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세요” 학생들이 규칙을 어기고 잔디밭으로 다니니까 학생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도록 잔디밭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길을 내라고 지시를 한 것입니다.

 

“게임의 룰”을 바꾼 이 총장은 몇 년 후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대통령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의 인생의 틀을 바꿔주셨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눈을, 영적인 눈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관심이 아니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은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고민을 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채찍을 휘두르시면서 장사하는 자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을 정화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일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일을 했다가는 당장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그런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도대체 저런 능력과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호기심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아오게만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 니고데모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한 영적인 갈급함에 대한 답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 “BORN AGAIN”을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2절에서 니고데모는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3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질문한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3절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거듭남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거듭난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것이 거듭난것은 아닙니다. 예수믿고 죄사함을 받고도 여전히 세속적인 삶을 살고 죄가운데 빠져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변했다고 해서 그것이 거듭난것은 아닙니다. 신분만 변했지 삶이 변하지 않는것은 거듭난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개종했다고 해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개종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교를 기독교로 바꿨어도 그것을 거듭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 것이지 거듭남 자체는 아닙니다.

 

캐나다 토론토의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말하기를 “개종하기는 했지만 거듭나지 못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거듭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계적인 전도자 T.L. 오스본 목사님은 말씀 하시기를 “한 사람이 거듭났다는 것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아서 새로워진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12절로 13절은 거듭난것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은죄를 다시는 반복해서 짓지 아니하는 상태로 변화된 것을 하나님께로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더 이상 과거에 짓던 죄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끊었으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술을 끊었으면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여자를 끊었으면 다시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서 난 자의 특징이 요한일서 3장 10절로 11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깨닳은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믿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다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새생명이 하나님이 주시는 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씨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닭은 꼬끼오 하고 고양이는 야옹하고 개는 멍멍 하면서 짖어댑니다. 이런 것을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닭에게는 닭의 씨가 있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씨가 있고, 개에게는 태어나서부터 개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와 말을 지켜보면 소는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 뒷 다리부터 일어섭니다. 그런데 말은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 앞 다리부터 일어섭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의 씨가 들어 있고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말 씨가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믿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서 거듭나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의 본성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받기 전 까지는 세상죄를 지으면서 살지만 하나님의 씨를 받은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상태요 이것이 거룩의 상태입니다” 라고 오스왈드 목사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씨를 받는 일이요 새 생명을 받는 일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건은 다메섹사건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건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사건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임하시면 내가 지금까지 살던 과거와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보다 예배드리는 것을 더 기뻐하고, 동네 사람들 만나서 노닥거리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놀러 다니고 골프치러 다니고 낙시하러 다니고 영화보러 다니는 것보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성경보는 것을 더 좋아하고, 노래방 가서 세상 노래 부르는 것보다 찬송 부르고 복음성가 부르는것을 더 좋아하고, 돈 버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가족들 친척들 만나는 것보다 목사님 만나는 것과 권사님들 집사님들 만나서 함께 동행하는 것이 더 좋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어도 하나님만 생각하면 감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 고마워서 충성을 다짐하게 되고 이전에 행하던 죄를 다시는 짓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이요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가 있어서 광산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담당자에게 허락을 받고 모자를 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광산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광산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광산안으로 들어가서 있다 보니까 옷이 온통 검정으로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산 안에서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깊은 광산속에 한쪽 바위옆에 하얀 꽃이 피어서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 깊은 광산 안에서 어떻게 저렇게 하얀 꽃이 자랄 수 있을까? 하고 놀래서 다가가서 그 꽃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꽃 위에 석탄가루를 뿌려 보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석탄 가루를 그 꽃 위에 뿌렸더니 신기하게도 석탄 가루가 눈송이 같이 깨끗한 그 꽃을 더럽히지 못하고 그냥 꽃 위에서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꽃이 더럽혀 지지 않았습니다.

 

그 꽃은 더러운것이 가까이 와서 묻어도 더러운것을 밀어내는 신기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연꽃잎파리에 물이 떨어지면 또르르 물이 굴러내리듯이 그렇게 석탄 가루가 미끄러져 내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나에게 다가 왔을때 그 죄를 그냥 미끄러져서 떠나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한 목사님이 광주에서 부흥집회를 했는데 한 집사님 댁에서 머무셨습니다. 두 부부가 집사님 이었는데 그런데 여자 집사님은 열심히 집회에 참석 하는데 남자 집사님은 집회에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 집사님이 목사님과 아침 식사도 같이 하면서도 집회에는 참석을 안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저녁에도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째날 저녁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나를 집사님 집에서 자게 하면서 집사님이 집회에 빠지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은혜 받으면 안 됩니다!”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무슨 말씀입니까?” 했더니

 

“목사님 저는 사업을 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다보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 지 좋은 말로 해서는 돈을 안 줍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가 그런 사람에게 쌍소리도 해야되고 때로는 깡패짓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대금을 회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은혜를 받으면 제가 욕도 못하고 깡패짓도 못할텐데 그러면 사업을 해서 돈을 벌기는 어렵습니다. 만약에 제가 목사님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면 저는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하더랍니다.

 

거듭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거듭나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려면 성령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아이를 낳을 때 아이는 하나도 힘을 쓰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죽을 힘을 다 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가만히 있으면서 생명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애쓰고 힘써서 도와 주셔야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하는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 오직 어머니만 의지 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전적으로 어머니만 의지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실것을 믿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50일 동안 회개하면서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영국 최고의 설교가 “죠지 휫필드” 목사님이 오늘 본문으로 자기 교회에서 300번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매주 새신자가 오니까 수시로 설교 시간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어느날 설교가 지루하게 느껴진 성도 한 명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같은 설교를 자꾸만 반복 하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당신이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받고 거듭난 성도는 어떤 설교를 해도 지루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야기 듣고 또 들어도 절대로 지겹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설교 가지고 따지고 비판하고 이렇쿵 저렇쿵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와 함께 오래 동행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더불어 거듭나서 살아간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가서 살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영성을 가진 사람과 성령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각자 자기의 영성을 가진 그대로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플로리다의 빌리 류터(Billy Lewter)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자기 아버지에 대한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그렇지 않아도 가난해서 겨우 겨우 먹고 살았는데 1930년대에 미국을 쉽쓸었던 대 공황 때 완전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삼 남매는 구세군 급식소에서 주는 양식으로 겨우 겨우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도박에 미쳐서 부모님이 유산으로 물려준 땅과 집과 재산을 다 날리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여섯 살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는데 아버지는 도박을 하기 위해서 도둑질을 했고 경찰서를 드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 했다가 미수에 그쳤을때 연락이 와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에게 함께 교회에 나갈 것을 애원했습니다. 어느 날 기적이 벌어 졌습니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갔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아버지가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쓰레기 인간이 거듭나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2년 안에 성경 말씀, 5백구절을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동네에 있는 유치장과, 교도소와, 병원에 가서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과거를 잘 알고있는 빌리 류터 목사님은 “그것은 기적 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 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셨기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성도가 가게를 시작해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게에서 일하는 한 직원에게 교회를 다니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 거리다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전에는 교회학교 교사도 하면서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수년 전에 그렇게도 믿음좋은 이모가 새벽예배를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보고 회의에 빠져서 그때부터 자기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 두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왜 그렇게 충성스럽게 믿음생활을 하시는 이모를 사고로 죽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형제에게 “죽는 것이 꼭 불행한것 만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반드시 죽음이 찾아 오는데 죽음이 불행이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게 중요 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유관순은 스무살이 갓 넘은 나이에 죽었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여인이 되었고 보성에서 여대생들을 배에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네명을 강간하고 바다에 빠뜨려 죽인 70세의 노인은 나이가 70살이 되도록 오래 살았지만 그 노인은 저주받을 일을 해서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것 처럼 오래 산다고 해서 복받은 것이 아니고 사람은 그 영혼이 거듭나서 변화 되어야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가 깊이 생각에 잠기더랍니다.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젼혀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꼭 살아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살아야 행복한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일찍 다가오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 나는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죽음이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면 순교도 할 수 있고 어떤일로 죽는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을 위해서 죽는다면 죽음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죽습니다.

 

이어령교수님의 딸 김민아목사님은 죽기 일주일 전까지 티비에 나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죽음이 와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은 오래 살거나 무엇을 소유 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제 잠시 쉬면서 TV를 보는데 이시대 최고의 작가 박범신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신춘문예 당선후에 지금까지 40년 동안에 베스트 셀러를 수 없이 써낸 유명한 작가입니다. 요즘은 “은교”라는 파격적인 소설을 써서 또 다시 유명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문학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최고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박범신작가는 고등학교때 두 번, 대학시절에 한번 그리고 장성해서 한번, 그렇게 네 번이나 자살을 시도 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한창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0년대에 아이를 셋을 낳고 훌륭한 가장으로 인기 정상에 올라 있었는데 그때 면도칼로 손목을 그어서 자살을 시도 했습니다.

 

정상의 자리에서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가슴이 아파서 자살을 시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가진 꿈과 비젼과 목표를 다 이루었는데도 자기를 가로막고 서 있는 알수없는 담벼락 같은것이 자기를 괴롭혔기에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게도 힘들었던 가난도 다 사라지고 자기를 어렵게 했던 모든 환경이 좋은 환경으로 바뀌고 부족함이 없는데도 50년 동안 끊임없이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그 알수없는 무거운 담벼락이 자기를 가로막고 있어서 회의에 빠질때마다 자살을 시도 했다고 그는 고백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그 무거운 담벼락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게 바로 사탄마귀가 가져다준 좌절이요 허무요 우울증이요 회의에 빠지게 하는 더럽고 악한 귀신의 장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니까 세상적으로 아무리 똑똑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상의 자리에 있어도 하루 아침에 회의에 빠져서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박범신씨가 고백한 내용중에 또한가지 기억에 남는 고백은 “사람은 목표 성취를 통해서 행복하기는 어렵다!” 라는 고백과 더불어 “나는 아직도 종종 좌초해 있을때가 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분이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는 무지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알고도 해결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박범신씨가 “자살은 잘못된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한마디를 더했는데 “먼 훗날 나는 내 자신을 이기면서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실수와 자살로 인한 문제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해서 빚어진 일이기에 자기 자신을 이기면서 살기를 원한다는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이기면서 사는일이 내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내 자신을 이기면서 살지 마귀가 사로잡고 있는 내 자신을 누가 이기면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귀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아무리 많이해서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으니까 자살로 인생을 끝내서 세상에 물의를 빚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모릅니다. 그래서 “To do”와 “To be”중에 “To do” 즉 자꾸 무엇을 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니까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우리가 “To be”즉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 합니다. 사람들은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우리의 모습이 변해야 참된 행복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뿐입니다. 마음이 변하고 거듭나야 도둑질을 그만둘수가 있습니다. 변화나 새로운 삶이나 행복은 결국 “존재”의 문제이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자기가 가진 것은 충분합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지위도 훌륭 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행복감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고 부족함이 없는데도 그 영혼에는 갈증이 채워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는 이야기를 보면 그도 역시 “To do”의 문제 때문에 고민한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 놀래서 예수님에게 와서 그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To be”의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끝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하시는데 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너에게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니고데모가 무지했던 부분입니다. 이것이 그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육적인 지식으로나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네가 아는 지식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객관적 사실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깨닳음을 얻게된 니고데모는 비로소 자기가 몰랐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서 비로소 새사람이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지위를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로 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처형 하자고 했을때 니고데모는 결사 반대 하면서 예수님을 변호했고(요7장51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셨을때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장례를 친히 주도하면서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 드렸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거듭난 제자로서 믿음의 향기를 발한 사람으로 2000년동안 그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니고데모가 기득권을 주장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살았으면 그는 잘먹고 잘 살았겠지만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2000년동안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체면을 버리고 밤중에라도 자기의 고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생을 얻고 주님이 주시는 명예와 존귀함을 얻고 예수님을 섬기는 귀한일에 쓰임받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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