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보면 자격기준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대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취직을 하려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스펙을 쌓으려고 밤낮없이 공부합니다. 토익점수도 높여야 하고, 자원봉사 경력도 쌓아야 하고,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하고, 시험도 잘 봐야 합니다.
키도 최소한 170cm는 넘어야 하고, 여자들은 얼굴도 예뻐야 합니다. 기업들이나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찾기에 사람들이 직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그런식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외로운 사람,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모여들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네를 지나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제일 먼저 제자들을 부르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받은 고향이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북쪽의 다메섹이나 동쪽의 데가볼리 지방에서 갈릴리나 유대로 들어오거나 다시 나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는 지나가는 무역상이나 행인들에게서 세금을 받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세관으로 가셔서 세관서 일하고 있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세금을 징수하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본래 레위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이름입니다. 레위는 믿음의 족장인 야곱의 셋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레위와 레위 자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지파와 더불어 레위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세관에서 일하던 레위는 그와 정 반대 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보통 수입의 약 28%를 세금으로 바쳤습니다. 정부에 내는 기본 세금으로는 곡물을 거두면 1/10을 세금으로 바쳤고 과일은 1/5을 바쳤습니다. 그 외에도 모든 수입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주민세에 해당하는 성인남녀의 인두세를 바쳤고, 도로 통행료에 해당하는 국도 통행세를 바쳤고, 그리고 오늘날의 부가세에 해당하는 물품세와, 자동차세와 비슷한 우마차세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금을 걷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유대를 점령하여 지배하던 로마 당국은 자기들이 직접 세금을 걷지 않고, 현지인들 중에서 세금징수관을 세워서 세금을 징수하는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이 세금 징수관들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세리입니다.
세금 징수관 제도는 로마가 다스리는 모든 나라에서 시행되었습니다. 각 나라마다 세금 징수관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스 파시안”은 이스라엘에서 살던 고위층 세리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유대 지역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는 공을 세운 끝에, 로마 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해서 나중에는 네로 황제에 이어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가 됩니다. 이 사람은 심지어 “소변세”까지 제정해서 소변을 볼 때도 세금을 거둘 정도로 지독한 황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도 세리 출신입니다. 그는 쥴리어스 시저가(Julius Caesar)가 폼페이 장군을 물리치고 로마의 황제가 되자 재빨리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총 세리장에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후에는 유대나라 분봉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어쨌든 세리의 사명은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고 남는 부분은 세리 개인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금착취를 하게 되었고 세금을 내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세리는 동족의 피를 빨아서 로마에 바치는 매국노로 여겨 졌습니다.
특히 세관에 앉은 세리들은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든 물품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에 돈이 될만한 물품에는 빠짐 없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동족들에게도 농사를 짓던지 장사를 하던지 무슨일을 하든지 세금을 거둬 들였습니다.
만일 제 때에 세금을 내지 못하면, 비싼 이자를 물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리대금업까지 곁들여서 했던 것입니다. 세금을 내야 할 사람이 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들은 폭력배를 동원해서 세금을 받아냈습니다.
그 당시의 세리들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악하고 추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절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수 없고, 각 마을에 있는 회당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세리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 세리는 정직하지 못하고 늘상 죄만 짓는 사람들 이었기에 그들은 증언할 자격도 얻지 못했습니다. 세리는 죄인 중에 가장 질이 나쁜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 일지라도 세리들을 죄인, 창녀, 또는 이방인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와 마주치길 꺼렸습니다. 한마디로 세리는 상종해서는 안될 죄인이요 악인들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향하여 “자기의 영혼을 팔아먹은 사탄마귀”라는 저주스러운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가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죄인의 대명사인 레위를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시면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본래 사람의 존재감은 그 사람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 집니다. 내가 늘 만나는 사람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끄러운 일을 해서 비난을 받는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아무리 선량해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마찬가지로 평소에 레위를 찾아오던 사람들은 두 말 할것도 없이 세리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상종도 안하는 레위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위대하신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찾아 오셨을 때 레위는 너무나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순간 레위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로 얼룩진 자기를 부르셨을 때 레위는 전기에 감전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레위는 자기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예수님께 기꺼이 순종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순간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마태로 거듭났습니다. 이 레위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후에 자기를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의 이름을 “레위”에서 “마태”로 바꾸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들과 연합한다”라는 뜻입니다. 레위의 부모가 레위를 낳고서 “너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행복하게 살아라” 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인 “레위”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부터 타락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 돈만 생긴다면 무슨짓이든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팔아먹고, 민족도 팔아먹는 매국노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과 연합하여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만보면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레위는 연합은 커녕 외톨이 신세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오직 같은 직업을 가진 친구 세리들과 창기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마태를 찾아오신 사건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리마태를 천하에 불한당이요 악질이요 상종못할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고 마태를 불러주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세리마태가 회개하고 거듭나면 훌륭한 제자가 될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은 마태가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매국노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귀한 사명을 감당할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예수님이 레위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내발로 걸어서 예수님께 나왔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님을 모를 때,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본래 구원의 역사도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낮고 천한 베들레헴의 마굿간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문을 열어 놓으신 후에 수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죄인으로 방황할 때, 내가 지옥으로 가고 있을때, 누군가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어서 내가 교회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실족해서 교회를 떠났을때도 예수님은 늘 나를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을 두드리시면서 “너는 왜 나에게 오지 않느냐? 빨리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때에 내가 마음문을 열고 주님께 나아오면 다시 큰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쪽에 보면 예수님의 집회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집회에 오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자리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그는 세리야!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자격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도 없어! 그런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해! 지옥이나 가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얼룩진 마태를 찾아가셨고 그를 부르셨고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전에 SBS TV에서 특이한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51세인 윤미랑씨가 자기보다 서른 여덟 살이나 연상인 89세의 김용운 할아버지와 부부로 살고 있는 내용을 보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한번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이 때가 잔뜩 낀 한복을 입고 있었고, 집에는 할아버지가 사용한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서 온통 폐기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명문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었고, 지금도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여자가 십 년이나 할아버지를 죽어라고 따라다닌 후에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허락을 해서 혼인신고를 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이 여자를 미친 여자로 취급했습니다. 기자가 자초지종을 알라 보려고 이 여자의 언니에게 연락을 했는데 언니는 두말않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물어 보았는데 어머니는 딸이 꼴도 보기 싫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딸이 서른 여덟살이나 연상인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사니까 그때부터 딸이 미쳤다고 다시는 꼴도 보지 않고 지내온 것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이 워낙 특이한 사람이다 보니까 부모도 형제도 동네 사람들도 그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도 자기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잘 생기고 돈 잘 버는 멋진 남편과 살고 있다면 가족들의 반응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딸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고, 가족들도 모두 그 여자를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거지같은 할아버지와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었기에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그 여자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만나주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녀가 그 거지 할아버지를 섬기고 사랑하면서 사는데는 그마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한가지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남편과 결혼해서 살때에 그 삶은 지옥 그 자체 였습니다. 첫 남편과 사는 동안에 저는 남편에게 비참한 대우를 받았고 저는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제가 아무런 소망 없이 하루 하루를 고통중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의 상처를 보듬어 준 분이 바로 이 할아버지 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 남편과 이혼한 후에 이 할아버지를 선택 했습니다.
절망의 때에 고난의 때에 유일하게 자기를 위로해 준 그 할아버지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이혼한 후에 10년이나 나이든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그 할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그 할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제가 선택한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윤미랑씨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사랑은 그 할아버지의 위로와 사랑보다 수천배 수만배 크고 넓은 사랑입니다. 인생이 힘들 때 잠시동안 자기를 위로해 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평생토록 그 할아버지를 섬기면서 산다면, 하물며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시마다 때마다 위로와 사랑과 일용할 양식과 온갖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얼마다 더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나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를 벌렸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동족 여러분 이제 당신들이 나와 연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따돌리고 소외시켜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세리마태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마태입니다! 나는 이제 누구보다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태도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부자 관원이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기가 가진 많은 돈 때문에 머뭇 머뭇 거리다가 그냥 가 버렸습니다. 부자청년은 자기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구원의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당장 순종했습니다. 누가복음5장 28절에 보면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자기가 있었던 자리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제자가 된 사람이 네 명인데 그들은 어부입니다. 물론 그들도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든지 수틀리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들은 한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다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그 자리를 떠나면,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줄을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단호하게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돈과 권세가 그의 전부였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마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 갔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오늘본문 15절에 나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마태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태의 친구들과 많은 죄인들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의 세관에는 마태 외에도 많은 세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 예컨대 장부를 기록하는 사람들과, 짐을 검사하고 들고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주먹을 쓰는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 할 때 이 모든 사람들도 초대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는 그 어떤 잔치보다 행복한 잔치였습니다. 이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있는 마태의 모습입니다. 마태가 베푼 잔치는 마치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 졌습니다. 그 잔치를 시기질투하는 사람들이 잔치를 훼방한 것입니다. 그 훼방꾼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이었습니다.
오늘본문 16절에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라고 비판했습니다.
바리새파 서기관은 성경에 능통한 박사들입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율법학자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계명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인을 가까이 하면 부정탄다고 생각해서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옳은 일을 하시는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라고 비판만 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환자복 입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도 너나 할것없이 모두 다 영적으로 병자들이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드러나지 않고 발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 감옥에 가지 않을 사람이 없고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형제를 그릇 판단하고 도덕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단좌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누구든지 한번 이라도 “저런 미련한놈! 저런 바보천치같은놈”이라고 말을 한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믿는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예수 믿을 사람을 못믿게 하거나, 나 때문에 실족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일을 행한 사람도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개같이 산 사람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지옥불에 들어간다고(계22;15) 성경은 증거 합니다.
살인한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낙태 수술은 살인죄입니다. 낙태수술 한사람은 지옥불입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도 지옥에 갑니다. 간음한 사람도 지옥에 갑니다.
우리가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에 내가 지은 모든 죄들이 드러나서 재판을 받는다면 감옥에 들어가서 수십년 수백년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세상에서 뿐 아니라 죽어서는 다 지옥에 가야 마땅 합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왔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닌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감추고 마치 의인인척 하면서 사는 죄인이 있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사는 죄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에게는 구원의 축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하고 나아오는 사람들은 무슨죄를 지었던지 이혼을 했던지 불륜을 저질렀던지 심지어 사람을 죽였다 해도 다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구원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통의 속담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의사는 병든 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출15:26 말씀처럼,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는 죄인들과 병자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종종 전도를 해 보면 “나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못갑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더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몸이 더럽기 때문에 몸을 씻기 위해서 갑니다. 죄가 많아서 교회에 못가겠다는 말은 더러워서 목욕탕에 못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쁘다, 못됬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당연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목욕탕입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치료를 받으로 가고, 목욕탕에는 때가 많은 더러운 사람이 가는 것처럼, 교회는 더러운 죄인이 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했고, 영적으로도 건강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만 했지, 세리와 죄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을 구원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하에서 목사님들을 모아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나치정권에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일에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니묄러 목사님은 결국 비밀경찰인 게쉬타포에 의해서 체포를 당했고 감옥에 갇혀서 8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1945년 세계 제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니묄러 목사님은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억울하게 8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니 얼마나 울분이 쌓였겠습니까? 그런데 전쟁이 끝난후에 니묄러 목사님은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니묄러 목사님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이렇습니다. 어느날 감옥에서 출소한 목사님이 하루는 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다음날 부터 똑 같은 꿈을 계속해서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받을 차례를 기다리는데 니묄러 목사님도 그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탄식하는 목소리로 호소를 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이제 심판이 끝나면 지옥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니묄러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누군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니묄러 목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기절 초풍을 했습니다. 그동안 자기는 히틀러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유태인도 600만을 학살하고 동족들도 수없이 죽이고 크리스챤들도 죽이고 독일을 파멸로 몰고간 히틀러가 미워서 조직적으로 대항해서 항거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까 자기가 목사로서 히틀러를 위해서 진정 어린 마음으로 그를 위해서 한 번도 기도를 한적이 없었습니다. 또 목사로서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 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니묄러 목사님은 똑같은 꿈을 일곱 번 꾸었는데 마지막 일곱번째 꿈을 꾸고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한적이 있느냐? 너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을 해본적이 있느냐? 히틀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했느냐? 왜 그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 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께서 니묄러 목사님에게 질책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니묄러 목사님은 마치 바리새인이 레위를 비판만 하고 미워한 것처럼, 자기도 히틀러를 미워하고 비판만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꿈에서 깬 니묄러 목사님은 “그렇구나!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목사님이 참회하는 심정으로 자기가 경험한 사건을 책으로 써서 독일사회 뿐 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자기들만 의롭다고 믿었기에 세리 마태가 베푼 잔칫자리에는 참석하지도 않았고 비판과 정죄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태가 베푼 잔칫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벌이신 천국의 혼인잔치 자리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지옥불에 들어가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통중에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바라새인 이었지만 회개한 바울사도는 디모데전서 1장15절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말씀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회개하고 중생한 후에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었던 바울사도는, 여전히 자기의 정체성은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자기가 무슨 큰 죄를 많이 지어서 죄인중에 괴수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볼 때 한시라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영적 비참함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닳았기에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게 엎드릴줄 알았던 바울사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풍성하게 받고 살았습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후에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도가 된 것입니다. 죄인이요, 세리요,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던 사람이 교회에서 가장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부름받은 후에 오직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마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자세히 살펴서,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의 사건을 기록 했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일은, 마태복음이라는 위대한 성경을 쓴 마태가 자기가 쓴 마태복음에 단 한번도 자기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만백성에게 널리 전하고자 했습니다. 후대 사람이 책 제목에 마태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 마태복음이 누가 썼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마태는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겸손했기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닳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큰 일을 해도 절대로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 모든 소유와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신분의 변화와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구원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만큼 내가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서 어떤 물건들이 고가에 경매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물건이 아무리 평범한 물건이라도 유명인이 사용하던 물건이면 엄청난 가격이 매겨집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용하던 나무 골프채는 17만달러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약 2억 원에 팔렸습니다. 나폴레옹이 쓰던 낡아빠진 칫솔은 3천4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타던 고물 자동차는 15만 달러, 1억 7천만 원에 팔렸습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사용하던 가짜 진주 목걸이는 21만 1천 5백 달러, 약 2억 7천 5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중국 송나라때 제작되었고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친필 사인이 기록된 가야금 “쑹스젠이”(松石間意)는 233억 원에 팔렸습니다.
오슨 웰스가 받은 오스카 트로피는 이랜드의 박성수회장이 10억원에 샀습니다. 트로피 제작비는 10만원 밖에 안들었는데 유명인사가 받은 트로피라서 10억원이나 호가한 것입니다.
이런 물건들은 물건 자체가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누가 소장했던 소유물인가에 따라서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소유물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 말씀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어주고 새 생명을 얻은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지나간 과거에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지금은 참으로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마태와 같이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서 지옥불에 들어갈 인생인데 주님 은혜로 존귀하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사랑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사랑과 구원의 원천이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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