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이 소개 됩니다. 천지 창조부터 사람을 만드신 일까지 모두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기적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시대는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보내지 않으려고 할 때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열가지 재앙의 기적과 더불어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까지 맛나를 내려서 먹여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서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굶지않고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정복전쟁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진 일이나 그 외에도 사사시대와 선지자의 시대에도 수 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알리시려고 이방종교와의 사투(死鬪)가 벌어진 현장에서 불로 임재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 하시고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이방 종교의 신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려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한 사건부터 예수님이 부활숭천 하신 일들도 기적중에 기적들 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신 후에 다시 성령강림 사건을 서두로 초대교회에는 기적이 계속됩니다. 그 기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을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 많은 기적중에 최고의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영광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됩니다.
성경에는 기적을 여러 가지 다양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먼저 “기사와 표적”입니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행7:36)
두번째는 “표적”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12:38)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13:17)
네 번째는 “기이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26)
다섯번째는 “권능”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마11:20)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의 기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히13:8)
오늘 본문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사건이 소개 됩니다. 작년에 이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다시한번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사건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다시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갑니다. 남자만 오천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가지 합하면 이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냥 돌려 보내면 지쳐서 기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셨습니다. 종종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넘어뜨리려는 시험이 아니라 “테스트”의 시험입니다. 즉 우리 믿음의 정도나 반응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시험 당사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곤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러나 시험을 잘 통과하면 더 큰 은혜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주신 시험은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가지고 행하신 시험이기에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했을 때도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진짜로 취할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하도 이삭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니까 아브라함의 순종을 테스트 해 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정신을 차리고 그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자기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칼로 이삭을 내리치려는 순간에 하나님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말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변에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여호와이레 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기에 “여호와이레” 라는 유명한 말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그것이 설령 우리의 잘못과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얻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시험이 와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라고 증거 한 것처럼 종국에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정욕과 나의 잘못 때문에 사탄마귀에게 미혹을 당해서 벌어진 시험이라면 그런 일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던전 테스트의 시험 앞에서 빌립은 재빨리 계산을 했습니다. 빌립이 번개같이 계산해서 내 놓은 답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라는 답이었습니다. 한사람당 2000원짜리 떡을 한 개씩 사준다 해도 1000만원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충분히 계산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비유에서도 망대를 세우려면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우다 그만두고 망신만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1만이고 상대방이 2만의 병력이면 계산을 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빨리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합리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빌립의 계산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빌립이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엄청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중요한 절대상수를 빠뜨렸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는 일에는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절대상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한편 빌립과 달리 안드레는 다른 답을 내 놓았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 사람들속으로 들어가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양식입니다.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작은 물고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아이의 도시락이기에 아주 적은 분량입니다. 안드레가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8-9)
안드레가 그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온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 작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는 불신의 말을 달았기에 안드레도 100점 만점은 받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적은 것이라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왔기에 80점은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을 받으시고 수십 수백 배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을 작은 것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남해세광교회 건축은 30배의 축복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김예슬집사님이 아들 하성이를 낳으면서 나라에서 받은 300만원과 직장에서 유아휴직으로 인해서 받은 300만원과 남편 윤기원집사님이 들어놓은 적금400만원을 모아서 1000만원을 건축헌금으로 드렸기에 그 헌금이 종잣돈이 되어서 건축이 시작 되었습니다.
천만원을 가지고 건축을 시작 했는데 3억원의 건축이 이루어 졌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건축헌금이라고는 한푼도 저금해 놓은 것이 없었는데 한 부부의 헌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주의 종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성도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그리고 남해세광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까지 힘을 합쳐서 이렇게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같이 가난한 시골교회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이룰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남해세광교회를 사랑하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30배의 기적입니다.
건축을 위해서 헌신하신 여러분들은 이땅에서 60배의 축복을 받을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100배의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작은 헌신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작은 헌신으로 섬기면 그것들이 모아져서 큰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것도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오신 예수님 한분의 헌신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무명의 시골 목동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진거라고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가난한 모세를 통해서 위대한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자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헌신은 작은 헌신같지만 그러나 그 귀한 사역 속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독일의 한 시골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의 교실에 들어가서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그게 교장선생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교장선생님은 “이 소년들 중에 장차 어떤 인물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늘 인사를 하자 아이들이 교장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 했습니다. 그런데 그 초등학생들 중에 마르틴 루터가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장선생님의 인사를 받을때마다 “나도 저렇게 겸손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자!”라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세계를 변화시킨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두고 축사하신 후에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비결이 10절과 11절에 증거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세가지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앉다” “축사하다” “나누다”입니다. 기적은 앉아 있을 때 임했습니다. 여기서 “앉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열심히 돌아 다닙니다. 그러다가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 때문에 상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분노하는 일들도 생깁니다.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주님을 향해서 집중할 수 없습니다. 바쁘고 불안하고 초초한 마음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앉아서 주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께 집중할 때 비로소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니까 앉으라는 말은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 기적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는 축사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라는 작은 것을 보시고도 무시하거나 왜 이런 것을 가져왔냐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놓고 하나님께 축사했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9절)
주님이 기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나사로도 살아났습니다. 축사는 감사의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가 될 때 응답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감사는 행복을 가져오고 불평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감사는 기적을 만들어내지만 불평은 저주를 불러옵니다.
얼마전에 권옥란권사님의 큰 아드님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가 큰아드님을 위해서 새벽마다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권사님의 큰아들은 삼성맨으로 좋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저는 윤정호집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가 일본에서 있었던 유명한 사건이 생각이 났습니다.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 한 해군 장교가 고향땅에 돌아왔더니 고향 동네가 다 폐허가 되었고 자기 집도 미군의 폭격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이 사람의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지도자와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의 지도자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그만 화병이 도져서 몸에 전신마비증세가 왔습니다. 그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 원장이 상담을 하다 보니까, 그의 발병의 원인이 화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챤 이었던 원장은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식사를 할때마다 그리고 내가 주는 약을 먹을때마다 먹기 전에 감사를 한 후에 드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병이 낳을 것입니다”
전신마비가 된 그는 원장의 지시와 처방대로 식사를 할때에도 감사기도를 드렸고 약을 먹을때에도 감사하면서 약을 먹었습니다.
수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길에서 풀빵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와서 “아빠 이거 먹어”하고 풀빵을 아빠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딸이 먹여주는 풀빵을 받아 먹으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을 한 후에 풀빵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전신 마비증세가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딸이 내민 풀빵 한 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 기적이 일어나서 그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나에게 베풀어진 작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면 놀라운 기적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일본에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Soda Gaichi1867~1962)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가 25세에(1893년)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 노르웨이 선박회사의 선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는 홍콩에서 지내다가 다시 대만으로 가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주색잡기에 탐닉하였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길에 쓰러져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서른 한 살이 된 그가 또 술에 취해서 추운 겨울에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는데 길을 가던 한 사람이 그를 업어다가 여관으로 데려가서 재우고 먹을 것도 사다 놓고 가는 바람에 간신히 살아 났습니다.
다음날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여관주인으로부터 듣게된 그는 이름도 모르고 헤어진 한국사람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후에 마음을 잡고 성실하게 살던 소다가이치는 6년후에 1905년에 결심했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국땅으로 오게 됩니다. 그는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일본어 교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독립협회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김규식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던 애국지사들이 감옥에서 나와서 YMCA에 모여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다가이치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상재선생은 소다가이치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을 베풀면서 노력한 끝에 그는 월남 이상재선생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고 1906년도에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서 이상재 선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일제시대때 한국 기독교를 대표했던 양심적인 신앙인중에 한분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이상재선생은 일찍이 정치에 뜻을 두고 개화파 지도자인 박정양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한 끝에 드디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는 1894년도에는 승정원의 우부승지가 되었고, 경연관 참찬관 벼슬까지 얻어서 고종황제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1881년도에는 대한제국 대표로 박정양을 수행하여 일본을 방문하고, 1887년도에는 미국까지 방문해서 서구문명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무슨일이 있어도 유교 정신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수구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1886년도에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되어서 돌아온 서재필과 윤치호가 독립협회라는 정치적 시민단체를 결성했을 때, 이상재는 그 모임에 부회장으로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모일 때마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른후에 모임을 갖자 이상재는 서재필과 윤치호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독립협회를 기독교적 시민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서재필과 윤치호의 시도에 단호하게 맞서면서 그런식으로 독립협회를 운영하면 자기는 더이상 독립협회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가 1902년도에 보수파가 꾸민 정치적 음모사건에 휘말려서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 일제는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하면서 독립협회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다시 정치범들로 잡아들여서 모두 다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신흥우, 김정식, 유성준, 홍재기, 안국선, 김린등 개화파 인사들은 모두 다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상재는 자신을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한 보수파 인사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한채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세상이 변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투옥 기간이 2년을 넘게되자 그는 절망하기 시작했고, “이러다가 영영 빛을 못보고 감옥에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밤에는 헛것을 보기도 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몸도 점점 약해 졌습니다.
그 무렵, 선교사들의 청원으로 감옥에 도서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안 도서실에는 선교사들이 넣어 준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이 비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유교 골수분자인 이상재는 처음에는 기독교 서적들에 눈길도 주지않고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곤고한 마음이 계속되던 어느날 그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드디어 성경도 읽게 됩니다.
이상재가 1887년도에 미국에 갔을 때, 통역으로 일을 했던 공사관 직원으로부터 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숙소에 돌아 오자마자 선물로 받은 성경을 “요망한 책”이라고 하면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서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때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열심히 성경을 읽던 어느날, 느부갓네살왕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상재에게 나타나셔서 호통을 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주었거늘 너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그래도 내가 네 생명을 보전하여 이곳에 두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너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노라 너는 기독교인이 되어서 헌신하라 그리고 네 민족이 진보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하라”
이상재는 꿈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깨어난 후에 크게 두려워 하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후로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닳은 그는 오직 유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했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외면한것과 더불어 믿는 사람들을 무시했던 죄를 회개 했습니다.
어느날 감옥안에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상재가 통회자복을 한 것입니다. 그는 울고 또 울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더불어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상재는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가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자기를 존경하면서 따르던 유학자들과 고관 대작들 그리고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을 겸비하여 우리나라 기독교 선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과 함께 YMCA에 모여서 제자들을 양성했고, 적극적으로 기독교 포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대만에서 한국사람의 도움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소다가이치가 1905년도에 한국에 와서 YMCA에서 일본어 선생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이상재선생이 소다가이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도에 우리나라를 지배한다는 식민지 지배 선언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독립투사들과 지도자들은 일본 사람만 봐도 경기가 날 정도로 일본사람들을 싫어할 그런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재선생은 소다가이치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상재선생의 감화를 받은 소다가이치가 예수를 믿게 됩니다. 예수를 믿은 소다가이치는 예수님의 사랑에 푹 빠져서 자기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상재 선생이 일제의 폭압에 대항해서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면서 노력할 때, 소다가이치는 YMCA일본어 교사직을 그만 두고 성경을 공부하여 일본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리고 1908년도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우에노 다끼”와 결혼을 해서 “한국사람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3·1 운동이 벌어지고 다시 105인 사건으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자 그는 한국인 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서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일본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가면서도 끝까지 한국사람들을 돕는일에 전념 했습니다.
소다가이치는 가마쿠라 고아원을 설립하고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들과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소다이가치가 30년동안 돌본 우리나라의 고아들은 2천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3년 가을에 그는 77세의 나이에 고아원을 아내에게 맡기고 원산에 있는 일본인 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면서 혼자서 목회를 했습니다.
8.15 광복을 맞이한지 2년이 지난, 1947년 10월 13일 날 그는 서울로 돌아와서 보름정도를 아내와 함께 지낸후에 부산까지 걸어 가면서 순례전도를 했습니다.
한달동안 순례전도를 마친 그는 일본전도를 결심하고 1947년 11월달에 고국인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의 회개를 외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일본은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서 무고한 한국이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일본 전역을 돌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국민적 참회와 회개를 외치고 다니던 어느날, 그는 한국의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던 아내 “우에노 다끼” 여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본에 회개의 복음 전하는 사명을 중단할 수가 없어서 아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질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땅 끝에서 끝까지 순례전도를 하느라 아내의 장례식도 마다하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죽은지 14년이 지난 1961년 5월 15일에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의 주선으로 드디어 한국을 방문하여 아내의 무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무덤앞에서 목노아 울면서 “여보! 미안하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느라 당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통곡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소다가이치가 우리나라에 세운 가마쿠라고아원은 영락교회에서 영락보린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소다가이치는 영락보린원이 마련해준 곳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날 96세로 소천해서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장사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이래 처음으로 일본인인 소다가이치에게 문화훈장을 추서 했습니다. 주요한 시인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비에 헌시를 올렸습니다.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 고향이어늘...”
소다가이치는 술병을 끼고 고주망태가 되어 홍콩과 대만에서 방황하던 망나니 였습니다. 그러나 길바닥에 쓰러져서 죽어가는 자기를 살려준 한국 사람의 은혜를 갚으려고 한국에 왔다가 이상재선생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받은 은혜를 갚되 예수님의 사랑까지 더한 은혜를 보태서 평생동안 우리나라의 고아들을 돌보고 그리고 일본에는 회개의 복음을 외치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사랑을 받은 그는 사랑을 갚아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고 악한 마수를 뻗친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다가이치를 섬기고 사랑한 이상재선생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일본사람을 사랑한 이상재 선생님의 수고가 이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질투와 갈등은 떠나고 주님의 사랑으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이와같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원천이요 행복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배고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앞에 놓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서 5000명이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은 나눌때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아무리 나누어주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넘쳐나서 모두가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사건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한번 더 살펴보고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물은 빌립입니다. 에수님께서 빌립에게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해서 물으시자 빌립은 즉각적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금씩 떡을 나누어 준다해도 약 200데나리온의 엄청난 돈이 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빌립은 계산이 상당히 빠른 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신 이유는 계산하라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당장 200데나리온의 거금도 없지만 설령 돈이 있다해도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떡을 구할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빌립을 계산적인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계산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헌금을 하면 나는 어떤 복을 받는가? 라는 식으로 계산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계산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망한 사람의 대표주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우리나라로 하면 경상도 사람입니다. 경상도 남쪽 지방에 살던 유다가 북쪽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기로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출세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장관 자리 하나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천국과 지옥 이야기만 하시니까 식상 했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은 죽는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라다녀봐야 별 소득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인기와 명예와 한자리까지 차지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잽싸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들에게 은삼십개를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고 보니까 심장이 요동을 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 없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넘긴 것은 너무나 큰 죄를 지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결국 인간적인 계산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가룟 유다는 지옥불에 들어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 총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다가 심문을 했지만 아무리 취조해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형선도를 내릴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인간적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예수를 풀어주었을 때의 유익과,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때의 유익중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이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인간적인 계산으로 행한 잘못된 편결 때문에 2,000년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겁한 지도자 어그러진 지도자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또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쳤기에 빌라도도 가룟유다와 함께 뜨거운 지옥불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계산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생활을 하면 말씀대로 복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인물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빌립과 달랐던 점은 빌립처럼 가만히 앉아서 계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벌떡 일어나서 무리속을 헤메면서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급기야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열심히 일은 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떡은 가져와놓고 “이 작은 것이 이 많은 사람을 먹이는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라고 믿음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9절)
교회에서도 열심히 일은 하면서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온갖 기적이 선물로 주어지는데도 예수님의 구원도 못믿고 병고치는 기적도 못믿고 기도하면서도 이런 기도가 이루어 지겠나? 하면서 의심하고 세상에서 살면서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안드레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사실 안드레는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게되었을 때 그 아들을 고치는 능력도 몸소 체험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된 중풍병자를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고치시는 사건도 목격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레는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만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주신 주님은 지금도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 어린 아이는 자기가 먹어야할 도시락을 주님께 드린 귀한 아이입니다. 많은 무리들 중에는 분명히 이 아이 외에도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 외에는 아무도 자기것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은혜를 받고 병고침을 받고 말씀을 들으려고 극성을 부렸지만 예수님에게 물한병 사과 하나 드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막상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을 때에는 아무도 자기것을 내 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서글픈 현실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은 좋지만 섬기는 일에는 나몰라라 합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은 자기것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자기는 굶을지라도 예수님께 드리고자 하는 작은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헌신이 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옛날에는 벼 이삭 하나에 낱알이 한 100개 안팎이 달렸습니다. 적게는 80개, 많게는 120개쯤 됐습니다.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에서도 한 이삭에 한 180개쯤 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전공학에서는 이삭 하나에서 500개는 문제없고, 한 1000개정도 열리게 할 수도 있답니다.
인간의 능력이 이런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떡 다섯 덩이로 5000명이 아니라 50만 명도 먹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허허벌판 모래사막에서 무슨 농사를 짓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새벽마다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 하나님은 매일 250만 명에게 40년동안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빵 한 덩어리로도 2500만명을 먹이고 1200광주리가 남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IMF가 터졌을 때 고사리 손들이 찢은 돼지 저금통, 할머니들이 뽑은 금가락지가 금모으기 운동에 나왔습니다. 그 돈을 합쳐 봐야 얼마나 됐겠습니까? 그러나 그 나눔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온 국민이 다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격하시고 감동하셔서 우리나라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헌금궤에 엽전 두 냥 넣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시면서 이 과부가 제일 많이 넣었다고 칭찬 하셨습니다. 양적으로는 가장 적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이해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배고플 때는 배만 부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부르고 나면 또 다른 욕심을 가집니다. 이것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심성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도무지 자족할 줄을 모릅니다. 군중들이 배부르고 나니까 배를 두드리면서 이제는 세상 권세에 대한 욕망을 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야로 믿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떡을 먹고 감격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떡에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천국에 있는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무리들을 만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라고 교훈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진정한 나눔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를 붙들어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건 욕심입니다. 나눔을 모르는 소유의 욕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만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필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만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대단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병든 생각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어린아이가 보잘 것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5000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에 남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도 관계됩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19-20)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은 나타나게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은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모든 기적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적의 세계로,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상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과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과학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과학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기적을 체험하고 신비를 체험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는 한 사람밖에 못먹는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5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다”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물위로는 절대로 걸을 수 없다! 물보다 무거운 것은 물속에 가라앉는다”라는 주장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까 물 위를 걸었습니다.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이것이 과학의 주장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의사가 선고한 불치병을 예수님은 고쳐 주실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십니다. 홍해바다도 갈라집니다.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고등학교 450명중에서 꼴등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성적도 나쁘고 가정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 시험이나 쳐보자 하고 시험을 쳤는데 역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서 삼수까지 했는데 세 번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 했습니다. 그는 열등감 투성이였습니다. 군대에서도 고문관처럼 따돌림을 받고 구박덩어리로 지냈습니다. 세상 일이 도무지 하는 일마다 힘들고 어렵자 이 사람이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군종장교가 찾아와서 커피와 쵸코파이를 주면서 군생활이 얼마나 힘드냐고 하면서 위로를 했습니다. 군종장교가 시간을 내서 주일날 교회를 한번 나와 보라고 초대를 했는데 군생활중에 처음으로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준 은혜가 고마워서 이 사람이 주일날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난생처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왜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울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부터 주일마다 교회에 갔는데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닳았고 나중에는 새벽기도까지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공부를 못해서 늘 꼴등을 했지만 이젠 저도 공부를 하고 싶어요 도와 주세요”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암기력이 생기더니 한번 읽거나 한번 들으면 그대로 기억이 되면서 암기에 탁월한 재능이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제대를 한 후에 두 달동안 공부하고 수능시험을 치렀는데 책을 보는 것마다 다 암기가 되니까 문제와 답까지 다 완벽하게 외워서 두달 공부 했는데 수석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늘 수석만 했습니다.
마치 원종수권사가 꼴등을 맴돌다가 갑자기 기억력이 빼어나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한 것처럼 이사람도 대학 내내 수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하루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87년도에 실시한 제23회 기술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특허 법률사무소를 창업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현석 변리사입니다.
그는 장로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선교와 구제에도 힘쓰면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기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기묘자(奇妙者Wonderful)라고 증거 했습니다.
기묘자는 히브리어로 “펠레”(פֶּ֫לֶא) 인데, “경이로운 분” “불가사의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초월적인 능력과 권능을 가진 분으로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기묘자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능력과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중에 들림받아서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생명의 근원이요 전능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병도 치료받고 문제도 해결받고 영생의 확신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늘 체험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포도나무 > 포도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7년2월1일수요저녁 요한시록3장14-22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교훈 (0) | 2017.02.02 |
---|---|
[스크랩] 2016년10월2일 주일낮 요한복음12장1-8 섬기는 자의 행복 (0) | 2016.10.02 |
[스크랩] 2016년8월28일주일낮시편40편1-5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0) | 2016.08.28 |
[스크랩] 2016년8월18일 누가복음23장39-43 구원받은 강도 (0) | 2016.08.21 |
[스크랩] 2016년8월17수저녁에베소서5장15-21 자세히 주의하여 (0) | 201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