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행복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 했습니다. 첫째는 “일거리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무슨일을 하던지 할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공감이 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며칠전에 제 집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에 보니까 한 남자가 직장에서 실직해서 전전긍긍 하다가 한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주저않아 있을게 아니라 뭔가를 해보자” 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복장을 사서 수퍼맨과 똑같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서 교통정리도 하고 경찰들과 함께 방법대원 일도 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갈때도 수퍼맨 복장으로 다닙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때도 수퍼맨 복장으로 같이 갑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점점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그의 컨셉은 수퍼맨처럼 “할 수 있다! 능력있는 사람이 될수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퍼맨복장으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지냈더니 하루는 자동차를 파는 회사의 사장님이 그에게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습니까?”하고 제안을 해서 그는 자동차를 파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아주 훌륭한 직장인으로 거듭나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실직해서 낙심해 있을 때 용기를 가지고 긍정적인 자세로 수퍼맨옷을입고 노력한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임마누엘칸트는 “소망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절망속에 있어도 미래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랑받는게 아닐지라도, 누군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일이” 에서 수퍼맨 다음에 또 한분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2년동안 당나귀 두 마리를 끌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키는 할아버지 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당나귀를 사서 당나귀 위에 개를 태우고 날마다 당나귀를 끌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아내가 간호사였는데 교통사고로 다쳐서 19년동안 방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소대변을 다 받아내면서 지냈습니다. 할아버지는 바깥구경 한번 못하고 방에서 살아가는 아내를 위해서 나귀를 두 마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나귀를 끌고 다니면서 2년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나귀의 훈련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리어카를 만들어서 리어카에 푹신한 이불과 스치로폼으로 팔 받침대까지 만들어서 드디어 아내를 업어다가 그 리어카에 앉히고 나귀가 마차를 끌게해서 아내의 평생의 소원인 바다를 보러 갑니다. 할아버지는 전신불구자가된 아내를 사랑하는일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과연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옳았구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정력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 만으로도 인생이 행복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랑받는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논하라면 에베소교회를 따라갈 수 가 없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어떤 교회보다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사랑이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음사랑”은 “아가페 프로토스”인데 삶의 우선순위와 근본을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그것은 사랑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사랑은 근본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처음만난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그 사랑의 비중이 너무 커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게 없습니다.
인간적인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사랑에 미치면 부모님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야! 그사람 돈도 없고 직업도 신통치 않은데 왜 그런걸 사귀냐! 안된다!”라고 말을 해도 하나도 귀에 안 들립니다.
사랑하나면 그만입니다. 사랑에 미쳐서 보이는게 없습니다. 둘이 도망가서 가난하게 살망정 부모님의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눈먼 사랑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기에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합니다.
또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부족함을 다 덮어줍니다. 실수해도 잘못해도 다 좋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자체가 모든 것을 받아주고 참아 냅니다. 그래서 행복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고 전재산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을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안다! 너희의 수고도 알고 인내도 알고 견디는 것도 안다!”라고 하면서 에베소교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이 식어진 사람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일은 하지만 사랑이 없기에 원망과 불평이 점점 많아 집니다.
전도학에 보면 통계학적으로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중에 일년 6개월된 사람이 제일 전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가장 전도를 안하는 사람은 예수 믿은지 10년 된 사람입니다.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점점 전도를 안하고 오래 믿을수록 더욱 전도를 안 하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일로 갈등이 생기고 그래서 교회 나가는 것도 재미가 없고 안나가자니 지옥에 갈것같고 그래서 미지근한 마음으로 사랑이 식어진 모습으로 습관적인 신앙이 됩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은혜를 깨닳았을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바울사도의고백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라고 고백하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지근해 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가면 갈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믿음과 봉사위에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피를 쏟아 붇는 제사가 관제입니다. “내 피를 다 주님께 쏟아 붓고 또 너희 성도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다 희생해도 나는 행복하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성도들에게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일곱교회 중에 책망을 받지 않은 훌륭한 교회입니다. 서머나는 당시에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지금도 20만명이 살고 있는데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서머나는 2000년 동안 거룩한 신앙을 이어오는 모범적인 도시입니다.
서머나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된 데에는 폴리갑감독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 바로 폴리갑감독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유대교인들의 음모와 투고로 인해서 결국 로마 총독이 그를 화형으로 처형하게 됩니다.
화형식을 치르기 위해서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폴리갑을 그 위에 묶어놓은후에 로마총독이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사실 로마총독이 볼 때는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86세의 어른을 화형에 처한다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로마 황제를 존경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만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면 다른 곳에 가서 조용히 여생을 살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예수님은 86년 동안 한번도 나를 부인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폴리갑은 불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은 모든 것 보다 위에 있습니다. 살던지 죽던지 손해를 보던지 수치를 당하던지 그런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설교준비를 하는데 “다니엘 휘틀”이라는 사람에 대한 간증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휘틀은 청년때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북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투입된 지 얼마 안 돼서 포탄을 맞고 오른 팔이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야전병원에 후송되어 병상에서 고통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그는 병상에서 군에 입대할 때 어머니가 주신 작은 성경책을 꺼내서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간호사가 그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저 옆 병동 텐트에서 소년 병사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소년병사를 위해서 기도를 좀 해주시겠어요?”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간호사는 틈만 나면 성경을 보는 그가 신앙좋은 청년인줄 알고 기도부탁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 휘틀은 그 청을 거절 했습니다. 다니엘 휘틀은 한번도 기도를 해본적이 없습니다. 교회에 가본적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교회에 가자고 늘 이야기를 했지만 끝내 교회에 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른팔이 날라가고 절망에 빠지자 비로소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을 꺼내서 읽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아직 남에게 기도를 해 줄만한 신앙도 없고 또 기도도 해본적이 없기에 간호사의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간호사가 부탁을 하고 돌아간 후에 마음속에 자꾸만 “네가 어떻게 그런 부탁을 거절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한번 못해준단 말이냐?”라는 책망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다니엘휘틀은 다시 성경을 편 후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열심히 찾아본 후에 용기를 내서 사경을 헤매는 소년 병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소년 병사의 침대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회개 기도가 나와서 울면서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년병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통중에 괴로워하던 소년병사가 다니엘휘틀의 기도가 끝나자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평안이 가득하더니 다음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엘휘틀은 고통중에 일그러진 얼굴로 있던 소년병사가 자기가 기도한 후에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평화가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받으시고 저 소년병사를 구원해 주셨구나”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급기야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는 비록 한쪽 팔은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해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찬송시를 쓰게 됩니다. 그가 쓴 찬송시가 바로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다같이 그 찬송을 불러보겠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셨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군에서 제대한 다니엘 휘틀은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포탄에 날아간 팔이 아프고 저리고 심히 불편한 가운데 통증이 계속 되었습니다.
통증이 계속되던 어느날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가 고통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쓴 찬송시가 407장입니다. 이 찬송시에 딸이 작곡을 해서 찬송이 완성 됩니다. 그 찬송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구주와 함게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맘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 주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다니엘휘틀은 짤려나간 팔에 고통이 계속 되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앙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소개 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가지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이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요즘은 잘 구별이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상도 갈수록 충격적입니다.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 속옷에 짧은 속치마를 입고 다닙니다. “란제리 룩”(lingerie look) 이라는 패션입니다. 집 안에서 입는 잠옷인지 외출복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믿음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믿음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주님의 제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 모호합니다. 정체성은 변치않는 참모습을 말합니다. 아무리 생활이 변하고 유행이 변해도 변치않는 참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뜨거운 교회입니다. 뜨거운 교회는 성령의 기름이 준비된 교회요, 성령의 불이 타 오르는 교회입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일에 힘쓰고, 기도에 힘쓰고, 예배에 감격과 감동이 있고, 열정으로 찬양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입니다.
본래 기독교는 뜨거운 종교요 사죄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지닌 종교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함으로서 행복을 누리는 종교요, 진리를 깨닳은 기쁨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종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떼어주시는 떡을 받아 먹을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눅24:32) 그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지근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도 식어지고 봉사도 식어지고 사랑도 식어집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도 마음이 미지근해 졌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삐딱해지면 사랑이 식어 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징계 하셨습니다. 재앙과 환란과 시험과 질병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주님은 나태해진 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오늘 19절에 보면 주님은 그들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하되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합니다. 차가운 것은 이성적이고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율법적이고 논리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뜨거운 신앙은 영적이고 성령 충만한 신앙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가지던지 아니면 성령충만한 뜨거운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것은 토하여 내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음식도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은 소독도 되고, 세균도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것은 조금만 두어도 금방 부패하고, 썩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차가운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니까 얼마나 뜨거운지 온 세계를 품고 전도를 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신앙이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누구보다도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기독교를 박해하고 선교사를 때리고 괴롭혔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뜨거운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잉사는 비행기만 만들어서 전세계에 팝니다. 이것저것을 하지 않습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거나 컴퓨터를 만들어 팔지 않습니다. 포드자동차 회사는 자동차만 만듭니다, 코카콜라는 콜라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 저것 다 손을대고 다 하다보면 결국 나중에 하나가 망하면 다 같이 망합니다.
애들도 너무나 많이 배워서 문제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만능선수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언제 써 먹을지 모르니까 태권도도 배우고, 미술, 피아노, 웅변, 수영, 스케이트, 발레, 탭댄스, 서예, 컴퓨터등 온갖것을 다 배우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나중에는 하나도 써먹지 못합니다. 한가지 일에 전념해야 전문가가 될수 있습니다.
주님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무기력해진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문을 두드리셨습니다.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열심과 사랑과 기도와 봉사가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찾아가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열심과 사랑과 기도와 봉사가 식어버린 성도를 찾아가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방탕하고 타락한 길을 갈 때도 찾아오셔서 “너는 언제까지 거기에 있겠느냐 돌아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성도에게 찾아가셔서 “언제까지 그렇게 싸우면서 살려느냐 이제 화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 오셔서 문을 두드리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안믿는 사람도 찾아가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제발 이제 나를 믿고 나에게 돌아와라 그러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로마의 황제나 히틀러는 막가파식으로, 자기 마음먹은대로 어디든지 쳐들어 갔습니다. 유럽전역과 그리스땅 고린도, 터키의 에베소, 이스라엘등 어디든지 다 무력으로 쳐들어가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으로 쳐들어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면서 마음문을 열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10년이고 20년이고 문밖에서 두드리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마음문을 두드리는데도 십년 이십년 삼십년 오십년동안 끝까지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마음문을 열 때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루디아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들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행16:14) 그녀는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집 문도 열어서 바울사도를 영접했습니다.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4,15).
루디아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기집을 예배의 처소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교회가 됩니다. 그녀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요한 삼서에 나오는 가이오도 예수믿고 자기 집을 열어 나그네와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예수믿은 후에 자기집을 열어 나그네와 형제들을 영접하여 대접하다가 자기집을 열어서 교회로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문을 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기에 마음문을 닫고 집 문도 꽁꽁 닫아놓고 삽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도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문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3:20)
예수님이 문밖에서 두드릴 때 문을 여는 교회와 성도는 복을 받습니다. 문을 열면 가정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고 천국까지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데 끝내 문을 열지 아니하고 마음의 문을 닫으면 은혜와 축복의 문이 닫히고 결국 천국 문도 닫혀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한국초대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가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존귀하고 귀하신 분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두드리면서 기다리고만 계시니 이상한 귀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문을열고 들어 갈 수 있는데도 안들어 가시고 그저 문만 두드리고 계시니 이상한 귀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존귀하신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괴이한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사람의 주인되신 존귀하신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괴이한 주인이요, 또한 복주시는 내 인생의 주인이 오셔서 마음문을 두드리는데도 마음의 문을 굳게닫고 도무지 열어주질 않으니 그런 사람이 “괴이한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길선주목사님은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환영하라!”라고 선포 하셨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음문을 열라고 설교를 하자 흐르는 시냇물 같은 은혜가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길선주목사님이 기도를 시작하자 감동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들 “아이고 아이고!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통회자복했고 모두가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날 많은 병자가 성령을 받고 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날 죄인을 잡으러 왔던 순사가 회개했고,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몰래 교회에 왔던 중이 개종했고, 신부도 은혜를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선주목사님에게 주었고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1500명의 성도들이 모두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떠나면 불의와 죄와 방탕한 길로 갑니다. 그러면 지옥밖에는 갈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빠지지 아니하면 술에 빠지든지 음란에 빠지든지 죄악에 빠져서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16%가 알콜 중독자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남녀 학생 가릴 것 없이 하루에 소주로하면 세병, 맥주로 하면 다섯병이상을 마시는 사람이 대학생의 16%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통계입니다. 우리민족이 건강한 민족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본래 라오디게아는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에 안티오커스 2세가 자기 아내인 라오디게아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도시의 반경 100리 정도가 다 목화밭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조 공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화려한 옷을 입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때는 옷은 화려한데 모두 다 벌거벗고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옷은 입었지만 속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더럽고 추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본문 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것과 가난한것과 눈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보혈의 옷, 세마포옷을 입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부요함을 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세상의 부요함을 주겠다고 시험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세상의 부요함을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마귀는 파우스트에게도 속삭였고 교황 인노센트에게도 다가와서 속삭였습니다.
13세기에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세상의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어느날 교황은 자기 앞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세고 있었습니다. 마침 유명한 신학자 아퀴나스가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아퀴나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아퀴나스!,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 말을 들은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교황님 옳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고백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가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팔 복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증거 합니다(고후8:9).
기독교는 물질적인 부요함 대신에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지상의 부요함 보다는 하늘의 부요함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지만 부자는 지옥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가난할 때 천국의 부요함을 사모하게 되고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영적인 부요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가난과 궁핍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나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라고 선언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의 이름을 “대빈”이라고 지었습니다. “크게 가난한 사람이 되라”라는 뜻입니다. 크게 가난할 때 크게 부요해지는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도 돈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부요해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부요하게 된 라오디게아교회는 오히려 “곤고해졌고 가련해졌고 가난해졌고 눈이 멀게 되었고 벌거벗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와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너희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의 불로 연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피로 씻음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의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회개하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첫번째 죄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죄입니다. 이 죄를 해결하려면 은혜를 새롭게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두 번째 죄는 세상의 부요함에 빠진 죄입니다. 이 죄를 해결하려면 책망과 징계를 받아 회개하므로 영적인 부요함을 되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 죄는 마음이 닫혀진 죄입니다. 이 죄를 해결받으려면 마음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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