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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7년 3월5일주일낮 창세기50장16-17요셉의 용서와 사랑

그리운시냇가 2017. 3. 5. 16:00


오늘은 용서와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들은 다음부터입니다. 저도 청소년 시절에 요셉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복형제들과의 갈등과 고통으로 인해서 사춘기와 청소년시절을 힘들게 지냈습니다. 마음속에는 미움과 증오가 자랐고 매사에 모든일이 섭섭함과 슬픔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나와 마음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 제 인생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교회에서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 졌습니다. 나와 비슷한 청소년기의 아픔이 있었던 요셉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아픔과 상처를 이길뿐 아니라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품고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배우면서 저의 신앙과 인생도 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요셉의 스토리는 어렸을때부터 교회에서 배워 온 이야기였지만 어느날 저에게 다시 들려온 요셉의 이야기는 상처받은 제 마음에 시원한 성령의 생수가 되어서 모든 상처와 아픔을 씻겨주고 그리고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깨닳은 그 이후부터 저는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사랑함으로서 모든 가족들을 구원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기도와 사랑의 헌신이 가족과 친족들의 구원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대조를 섬기는 유교 전통가문인 저희 가문을 예수님의 가문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문 전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요셉 한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서 부모님을 비롯한 70명의 집안 식구들을 다 구원함으로서 복받은 하나님의 가문이 된것처럼 저희 가문도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제 신앙의 멘토요 또한 존경하는 신앙의 모델입니다. 요셉은 고난의 시간에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때에도 언젠가는 이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고 간증이 될 때가 있을거야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딕 티비츠(Dick Tibbits)라는 심리학자는 기도와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용서할수 있습니다. 기도와 용서는 당신의 삶을 슬픔에서 행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특히 용서는 당신을 치료하는 명약이 됩니다


용서는 나의 아픔이 씻겨지는 치료제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들의 가족과 아버지를 초대해서 부족함이 없도록 선대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혹시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요셉에게 먼저 서신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요셉을 찾아가서 요셉앞에 무릎을 꿇고 빕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창세기 50장입니다.


15절 이하를 다시 읽겠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15-21)


아버지가 죽자 혹시라도 요셉이 자기들에게 원수를 갚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 떨던 형들이 요셉에게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자 요셉은 울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자기는 이미 오래전에 형들을 다 용서했고 또 혼신의 힘을 다해서 형님들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데 아직도 자기를 못믿고 혹시라도 보복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는 형들이 안타까와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형님들! 두려워 하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돌볼 뿐 아니라 형님들의 자녀들까지 다 책임지고 기르겠습니다!”(50:19-21)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은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살다보면 속상한 일, 억울한 일, 모욕을 당한 일로 인해서 밤 잠을 자지 못 하는 때가 있습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루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상처를 받으면 잠을 못 이루게 됩니다. 그런때에 내 영혼의 상처와 더불어 내 마음속에 쌓여있는 인생의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제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구 소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운전수가 실수로 부잣집 아들을 치어서 죽였습니다.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감옥에 넣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보상금을 원합니까?


아버지는 재판장에게 나는 부자라 돈이 필요없습니다! 내 아들을 죽인 이 사람을 아들처럼 죽여 주십시오그래서 판사는 그 사람을 아들처럼 죽이라는 판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운전수를 길에 눕혀 놓고 자동차로 치어 죽였습니다. 용서가 없는 곳은 살벌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리스터 웰본이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 살인했습니다. 그는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집행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교도소에 밥 맥얼리스트라는 교도관이 있었는데 그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사형언도를 받은 리스터를 찾아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듣던 말던 밥 맥얼리스트는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와 사랑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일 찾아가서 성경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도관 밥 맥얼리스트가 살인자 리스터의 감옥방을 방문했는데 웰본이 교도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드디어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밥 멕얼리스트는 그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날부터 같이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리스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는 어린 시절에 외롭게 자랐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면서 지냈습니다. 나중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갔습니다. 술과 마약에 빠져서 범죄를 저지르다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은 리스터는 어느 날 교도관에게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자기가 살해한 여자의 가족들을 생각하니까 너무나 미안하고 괴로워서 잠이 오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은 생겼지만 자기가 죽인 그 가족들에게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 너무나 괴로워서 힘들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죽은 여자의 가족들을 만나서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을 한지 며칠후에 리스터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살해한 여자의 오빠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죽은 여인의 오빠는 리스터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서 분노와 미움과 증오가 가득해서 살던 어느날 죽은 여동생의 친구가 찾아와서 교회에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평소에 잘 알고있던 여동생 친구가 찾아와서 교회에 가자고 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나섰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자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여동생을 죽인 리스터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리스터는 감옥에서 회개하고 죽은 여동생의 오빠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리스터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스터에게 내가 내 여동생을 죽인 당신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리스터는 그 편지를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후에 죽은 여동생의 오빠는 자기를 전도한 여동생 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날 오빠 부부는 리스터를 면회하러 갔습니다. 리스터는 사형 집행이 결정되어서 머지않아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빠 부부가 리스터를 만나서 화해를 했습니다. 그 후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리스터는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용광로입니다. 모든 아픔과 상처를 녹여주는 용광로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면 새하늘과 새땅을 경험하게 됩니다.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습니다. 밀양 이라는 영화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고나서 웬지 마음이 편칠 않았습니다.


요즘 고의적으로 기독교를 폄훼하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밀양이라는 영화를 본 후에 이 영화도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만든 영화구나!” 라는 생각에 영화를 보고나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밀양이라는 영화를 심도있게 해석한 글을 읽은 후에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밀양이라는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서른 세 살 나이의 여주인공 신애가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갑니다. 거기서 그녀는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더 큰 비극이 찾아옵니다. 어린 아들이 유괴를 당한 것입니다. 유괴범은 돈을 노리고 신애의 아들을 납치했습니다. 아들이 납치당한 이유는 신애가 돈이 많다고 떠들어 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유괴를 당한 것입니다.


유괴범이 돈을 요구했지만 신애가 줄 돈이 없다고 하자 유괴범은 아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죽어서 돌아온 아들을 보게된 신애는 통곡하면서 울고 또 웁니다.


그렇게 절망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신애는 어느날 약국을 운영하는 동네 권사님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그녀는 아들 생각이나서 서러운 마음으로 목 놓아 웁니다. 그때 목사님이 통곡하는 신애에게 다가가서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애가 은혜를 받고 새출발을 합니다. 그녀는 어느날 자기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 평안이 임했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고 간증을 하면서 자기에게 닥친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녀는 매주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고 성도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가서 찬양도 하고 노방전도에도 열심을 냅니다. 그녀는 이제 누가 봐도 은혜받은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감옥에서 형을 살고있는 범인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그녀가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범인에게 면회를 간다고 하자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축하해 줍니다.


그녀는 교도소로 가서 면회실에서 범인을 만났습니다. 신애는 범인에게 자기는 하나님을 믿은후에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아들을 죽인 당신도 용서하려고 찾아 왔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인 범인이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당신이 나를 죽도록 미워할 줄만 알았는데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참 놀랍고 감사합니다! 사실은 나도 감옥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회개했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마음이 너무나 평안합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애는 범인에게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그래서 마음이 평안하다고요?” 화가 난 신애는 벌떡 일어나서 면회실을 뛰쳐 나옵니다. 그녀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주차장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실신을 합니다.


자기가 범인을 용서하러 왔는데, 용서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범인이 이미 자기는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뻔뻔스러운 태도로 나는 평안하다고 하니까 신애가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에 신애는 완전히 다른 여자로 변해 갑니다. 예배시간에 모두가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신애만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찬송도 부르지 않고 기도도 하지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드리러 교회에 와서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미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댑니다.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신애를 위해서 구역식구들이 모여서 그녀를 위해서 합심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신애는 구역식구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그 집에 돌을 던져서 유리창을 깨뜨립니다. 그녀는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갑니다. 나중에는 교회도 안나갑니다.


어느날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그녀는 레코드가게에 가서 음반을 훔쳐서 그 음반을 가지고 야외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가서 그 음반을 크게 틀어놓고 야외예배를 조롱하고 훼방합니다.


더 기가막힌 일은 자기를 전도한 약사의 남편이 교회의 장로님인데 그 장로님을 유혹해서 그 장로님과 함께 공원에서 정사를 벌입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면도칼로 자기팔의 동맥을 자릅니다.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미수에 그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얼마후에 퇴원을 합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그녀는 미장원에 들러서 머리를 자릅니다. 그런데 하필 자기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가 자기 아들을 납치해서 죽인 범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미용실을 박차고 나와서 자기집 마당에 앉아서 거울을 앞에 놓고 가위로 자기 머리를 싹둑 싹둑 잘라버립니다. 영화는 그렇게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집 마당을 비추면서 끝이 납니다.


저는 이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이 영화는 기독교를 훼방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조롱하려고 만든 영화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분이 이 영화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서 이 영화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는 신애와 범인이 서로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구원과 용서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애도 범인도 둘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애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고 자기가 지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용서를 고백했습니다. 신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고백했고 범인도 자기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두 사람 모두 다 구원을 받고 또 용서를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구원과 용서라는 기독교의 진리와는 전혀 반대로, 해피엔딩이 아니라 완전 교회를 조롱하는 듯이 종결되고 주인공도 비참한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기독교인이 위선자로 비춰집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빛좋은 개살구처럼 의미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신애와 범인은 두사람 다 구원과 용서를 고백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새출발을 한 신애는 결국 타락으로 끝이나고 아들을 죽인 범인은 예수믿고 죄사함을 받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위선자요 역겨운 사람처럼 여겨 집니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구원과 용서는 진정한 구원과 용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먼저 주인공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심입니다. 밀양으로 이사온 신애는 어느날 동네 여자들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허풍을 떱니다. “나는 좋은 땅을 사려고 해요!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보다는 목 좋은 땅에 투자하는 것이 낳으니까요!”하고 거드럭 거립니다.


신애가 동네 사람들에게 그런 허풍을 떤 이유는 돈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까봐서 돈 많은 사람처럼 보여야 새로운 터전에서 무시를 당하지 않고 살 수가 있기에 그런 허세를 떤 것입니다.


신애의 거짓말이 거기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돈도 없으면서 복덕방 주인을 불러서 여기 저기 땅을 보러 돌아 다닙니다.


그런데 그 동네의 웅변학원 원장이 술을 마시다가 신애가 허풍떠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음흉하고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신애가 돈이 많은 줄 알고 어느날 자기가 운영하는 웅변학원에 다니는 신애의 아들을 유괴합니다. 그리고 신애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돈을 송금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애는 유괴범에게 돈이 없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유괴범은 자기 얼굴을 알고있는 신애의 아들을 죽입니다. 결국 신애의 아들이 죽은 것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입니다.


두 번째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는 신애의 신앙적 허영과 허울입니다. 신애의 영적인 허영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계속됩니다. 신애는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면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깨닳은 것이 아닙니다. 걷으로만 그렇게 보인 것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애는 범인과 교인들에게 자기가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훌륭한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범인을 만나서 용서하면 범인이 자기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자기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허영심은 가진 것이 없는데도 가진 것이 많은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허영심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에도 영적인 허영심이 담긴 용서가 있습니다. 신애는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싶은 영적 허영심이 있었습니다.


진짜 제대로된 신앙을 가졌다면, 그냥 하나님 앞에서 범인을 용서하면 되지 구태여 면회까지 가서 범인을 만나서 용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범인을 면회가겠다고 하자 카센터 사장인 송강호씨는 그녀에게 구태여 면회를 갈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냥 용서하면 되죠!”하고 말을 합니다. 오히려 예수믿지 않는 그가 예수믿는 신애보다 더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신애는 범인을 만나서 용서하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애는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범인을 찾아가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신애가 그 말을 하자 범인은 신애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말을 합니다. 신애는 자기가 범인을 용서하면 범인이 고마워서 감격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그와 반대로 이미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서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하나님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실신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녀의 용서는 진짜 용서가 아니라 가짜 용서, 즉 보여주기위한 퍼포먼스식 용서였습니다. 그후에 그녀가 어떻게 됩니까? 그때부터 신애는 아주 악한 여자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동네 방네 다니면서 교회를 욕합니다. 목사님을 욕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전도한 약국권사님의 남편 장로님을 유혹해서 야외에서 장로와 정사를 벌입니다. 그녀는 자기를 덮친 장로 밑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비웃듯이 하나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보여? 이게 보이냐고?”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녀는 빗나간 신앙으로 하나님을 욕하고 교회를 훼방하는 훼방꾼이 됩니다. 그래서 개판을 치면서 행동합니다. 완전 막가파식으로 행동합니다. 예수믿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면서도 벌건 대낮에 장로를 유혹해서 보란 듯이 정사를 벌이고 갈수록 타락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녀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녀는 참된 용서를 배운게 아닙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진심으로 용서 한것도 아니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의 딸이 자기의 머리를 자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서 미용실을 박차고 나오는 것도 용서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허영심이 가득한 신앙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안드는 일이 생기니까 막가파식으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송강호씨의 말대로 구태여 교도소에 면회를 가지말고 그냥 마음으로 용서하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녀가 언젠가는 정말 범인을 용서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교도소에 다녀온 이후에 신애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지냅니다. 그러다가 횡단보도에서 하마터면 사람을 칠 뻔 했습니다. 그때 신애가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건널목을 지나가다가 신애의 급정거에 놀랜 부부는 신애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봐! 사람을 치어서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되는거야? 운전 똑바로해!”


이 대사에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다음에 미안하다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살인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는다 쳐도, 죽임을 당한 피해자는 어떻게 면죄를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생각 해서라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나 죄인은 최소한 죽은 피해자 앞에서 겸손한 참회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개 바로 용서받은 죄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들을 납치해서 죽인 범인은, 남편죽고 아들까지 죽어서 고통중에 살아온 신애 앞에서 참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커녕 너무나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마음이 더없이 평안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이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너무나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용서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기가 막혀서 치를 떨면서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다가 교도소 마당에서 실신한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이 죄책감 하나없이 당당하게 나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한 것 때문에 신애는 화가나서 하나님을 떠났고 타락했고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사람을 죽신 살인자는 은혜 덕분에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죄인의 손에 죽거나 피해를 입은 가족들은 상처를 받아서 절망합니다. 그래서 밀양이라는 영화는 기독교가 가져야할 중요한 자세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죄를 지었던지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을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놓고도 아들의 엄마에게 뻔뻔스럽게 나는 이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자유합니다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된 사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해도 나 때문에 고통당한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피해자 앞에서 영원히 죄인의 심정으로 참회하면서 용서와 회개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에 구원받아서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앞에 서기만 하면 항상 머리가 조아려 집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머리가 조아려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 해도 나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살고 또 상대방을 만났을 때에도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상대방의 상처가 아물어 지는 것입니다.


잘못해 놓고도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니까 상관없어하면서 상처를 준 상대방앞에서 교만하게 행동한다면 그런 사람은 마치 신애에게 상처를 준 범인처럼 똑같은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앤드류" (Andrew)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교회는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죄로 인한 희생자에 대해서는 간과해왔다! 교회가 죄를 지은 죄인의 회개와 변화에 대해서는 축하하고 치하하고 높여주면서, 한편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남긴 죄의 결과로 인해서 희생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억울해 하고 통곡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했다!”


이런일로 인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은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은 더욱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하지않는 살인자의 교만 때문에 신애는 타락했고 또 기독교가 총체적으로 조롱을 받는 것으로 결론지어진 영화입니다.


살인을 저질러 놓고도 나는 예수믿고 죄사함 받았다고 거드럭 거리는 사람 때문에 상대방이 큰 상처를 받고 하나님을 떠나는 결과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상처를 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 앞에서는 더욱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용서도 받을수 있고 또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밀양(密陽)은 동네 이름입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을 해석하면 햇살이 비치는 비밀한 세계 속에 감추어진 동네입니다. 즉 밀양(密陽)비밀한 은총의 햇살”(Secret Sunshine) 이 비추이는 동네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는 안타깝게도 이 밀양이 가진 축복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그녀가 밀양의 비밀을 깨닫고, 영화도 해피엔딩으로 마쳤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론을 맺습니다. 신애가 가진 신앙의 오류는 용서의 주체가 자기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용서의 궁극적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실 사람은 죄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궁극적인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용서 하려면 중심으로 용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를 배워서 실천할 뿐입니다.


원수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축복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셨다면 신애도 그를 진심으로 용서해야만 했습니다. 신애는 용서하지 못했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었기에 패가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 골로새서 313절에 보면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6:14-15)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와 사랑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보물섬남해세광교회
글쓴이 : 행복을 주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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