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김안순집사님이 필리핀에 단기선교를 다녀 오셨습니다. 날마다 하루도 쉴날이 없이 일하는 집사님이 특별히 시간을 내서 단기선교를 다녀 오셨습니다.
집사님은 매일 일과가 끝난후에 선교지에서 있을 공연을 위해서 장구를 치면서 수개월간 연습을 했습니다. 집사님이 필리핀에서 선교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 주셨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선교봉사를 위해서 애쓰신 김안순집사님과 일행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요즘 최예진집사님이 전도의 사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저에게 “목사님! 화로구이 사장님 전언미언니를 전도해야 겠어요” 합니다.
그래서 언니를 잘 알아요? 했더니 전에 같은직장에서 일을 했어요 그 언니가 한번은 저에게 “예수 믿으면 행복해 지냐? 내가 보니까 너희 교회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을 보니까 참 행복해 보인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집사님이 “전언미언니를 기도제목에 넣고 기도하고 있어요” 합니다.
그런데 어제 박예본성도님이 와서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화로구이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사장님이신 전언미사장님께서 오셔서 수발을 해 주셨습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전언미사장님께서 딸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켜 주셨습니다.
딸이 중학교 2학년인데 키도 크고 엄마를 닮아서 아주 미인입니다. 아현양은 전에 최예진집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한번 일면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현양과 대화를 나눈후에 “내일 우리교회에 한번 오면 좋겠는데 한번 교회 와 볼래?” 하고 초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현양이 오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요즘 중학생때 교회에 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중학생때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정말 친한 친구가 조르고 졸라도 교회를 안가는때가 중학생때입니다. 그런데 아현양이 교회에 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현양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아현양을 초대하셨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예본성도님이 오랬만에 예배에 동참했습니다. 박예본성도님은 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의 병원에서 일년 남짓동안 입원해 계셨는데 그때 병원비 지출이 많아서 많은 빚을 졌습니다.
박예본성도님은 그 빚을 갚으려고 이런 방법 저런방법으로 애를 쓰다가 오히려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한번은 인생을 포기 할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시기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예본성도님이 빚을 다 갚고나면 남해로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줄 믿습니다. 저는 박예본성도님을 “4차원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딸”이라고 명명 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특별한 지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독톡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박예본성도님이 모든 짐을 벗고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게 쓰임 받을줄 믿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예본성도님이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새롭게 시작할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기는 최예진집사님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할 수는 없지만 두분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일에 귀하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두분이 의기투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참된 마음으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참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아주 드물기에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주시려고 그런 성도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있는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들의 예배 장소가 옳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서로 싸우면서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마음이 불안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들이 남 유다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다가 맘이 변해서 유다에 정착해 버리면 점점 자기백성을 뺏기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왕은 자기나라 백성들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성전에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북이스라엘땅 그리심 산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지었으니 이제는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가지말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라” 그래서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백년동안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 혼혈정책을 실시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바벨론 남자들과 앗수르 남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여자들을 취해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 이민정책을 실행한 지역이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여자들은 바벨론남자들과 앗수르 남자들과 강제로 결혼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혼혈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통을 따라 그리심산의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통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장소도 각각 자기들이 드리는 장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심산 예배를 주장하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이단의 특징은 막연히 복을 빈다는 것입니다. “이분에게 빌면 이분이 우리에게 복을 줄거야” 라고 생각 하면서 무조건 절하고 비는 것이 우상숭배나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을 가진 분인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배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늘 은혜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좋으신 하나님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던 사람들이 점점 율법에 얽매여서 자기 의로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또는 죄를 지은 사람을 가차없이 정죄했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가장 완악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발각된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인 율법에는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만열면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세리와 죄인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생각 하기를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편이니, 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앞으로 끌고가서 예수가 어떻게 판결하나 보자”하고는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살려주라고 두둔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간음한 여자와 예수님을 함께 돌로 쳐 죽일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죽이라고 판결하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외쳐왔던 죄인들을 위한 복음은 빛을 잃게 됩니다. 게다가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해서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돌로치라”라는 명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간음한 여인의 죄를 정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간음죄를 당장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큰 은혜를 받고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정죄보다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과 용서의 큰 은혜를 입었기에 예수님을 만난후에 회개하고 성화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영화 “식스 센스”에서 보면 정신과 의사 브루스 윌리스가 자기 환자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는 하지만 환자들과 필요한만큼 거리를 둡니다. 병원 외에서는 절대로 자기 환자를 만나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한편 목사들은 사생활을 완전히 노출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성도는 양이지 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 중에는 귀신 들렸다가 떠나간 사람도 있고, 강도였다가 회개한 사람도 있고, 별의별 무서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도 멀리한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기꺼이 만나 주셨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특별히 사람의 내면적인 문제, 죄의 문제, 회심, 믿음,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종이를 다루다가 손을 벨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을 다루다가 상처를 받고 또 베임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실 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서 전도하신 적도 많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서 만나 주셨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던 사회입니다. 누가 찾아와서 신앙에 대해서 말하려고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가능 하지만,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찾아와서 원치않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나중에는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전도했고, 사도 바울도 동일한 방법으로 전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안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사적인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강요할 수가 있나?” 라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전도를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도는 참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거나 또는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신앙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가게에서 마주치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담대하게 전도 한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녀를 구원하는 사건이 증거 됩니다. 사마리아여인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에게는 남자가 가진 사심이나 흑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 부담을 갖게되는 이유는, “사심이 개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인간끼리의 대화에는 사심이 개입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말 거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요즘 시대에는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오해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여자 쪽에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예뻐서 말을 거는 거 아니야? 나에게 작업거는거 아니야?”하면서 불신하는 마음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대 남자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할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흥분합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면 시끄러워지고, 교회에 오면 시끄러운 이유는 흥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분한 상황에서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에 제가 김예슬전도사님과 최예진집사님이 교회 청소를 하는데 농담을 몇마디 했다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어서 마음이 편칠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제 농담이 "성추행" 운운하는 말로 와전된 것을 알고 제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월요일부터 3일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농담 몇마디가 그렇게 불편한 상황으로 진전될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도 용서 하셨습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본성과 악한 죄성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간음한 여인을 돌로칠 자격이 있느냐?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그동안 무슨짓을 하고 살아 왔느냐?”라고 하시면서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흥분이든,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이든, 그것을 최소화하고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이 최대한 드러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드러내고 떠들어 대면서 정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배를 은혜스럽게 드리려고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습니다. 찬양대와 오케스트라와 세련된 안내위원들을 준비합니다. 리허설도 하면서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마음을 쓰다가 정작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짓을 할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면 아무리 멋진 예배라도 그 예배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찬양을 하는데 마지막 찬양의 반주기를 눌렀더니 반주기가 너무 빨라서 제가 찬양반주기의 속도를 줄였습니다.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 하면서 늘상 해오던 일입니다. 그런데 드럼을 치던 전도사님이 갑자기 드럼을 안치고 찬송을 안불러서 저는 찬송을 혼자 부르면서 “왜 전도사님이 찬송을 안부르나?”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드러머는 리드보컬이 하는대로 따라오면 됩니다. 찬양 리더가 빨리 부르면 빨리 따라오고 리더가 천천이 부르면 천천이 따라오면 됩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면 그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 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가 하고있는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예배를 드리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때는 하나님앞에서 절대로 경망스런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령으로 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성령으로" 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성령충만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감정으로 드리거나 내 맘대로 드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기쁘던지 슬프던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을 따라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이 예배를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찬양하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고 성령을 따라 헌금하고 성령 충만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마태복음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말로는 청산유수처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기 욕심과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은 진심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진정으로 예배 드리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올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성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요,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는 것이요, 성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 할 수 있도록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씻어 주셨기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에서 예배의 클라이 막스는 설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중에 설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냥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빌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절을 몇 번 했느냐? 얼마나 거창하게 차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또 진리를 알게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큰 교회에서 한 장로님이 임종이 다가와서 담임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죽는 것을 엄청 두려워 했습니다. 그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수 십 년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사실 한 번도 설교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수첩을 꺼내서 목사님 설교를 적는척 하고 제 사업에 대한 일들을 메모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헌금은 드렸지만 막상 죽음이 다가오고 하나님앞에 가려고 하니까 심히 두렵습니다. 목사님 저는 구원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장로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면서 임종을 맞이하세요!”라고 권면을 드린후에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드렸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이 임했습니다.
수십년동안 교회 다녔어도 설교를 듣지않고 내멋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지난 수요일날 노에스더전도사님의 천국지옥 간증을 보았습니다. 에수 믿었어도 엉터리로 예배 드리고 자기 영광만 구하고 섬김받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사람들과 우상을 숭배한 사람들은 시뻘겋게 달궈진 큰 가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그 뜨거운 가마속에서 소리 소리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뻘겋게 달궈진 가마속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설교만 시작되면 조는 성도, 설교를 안 듣고 주보를 읽거나, 성경을 읽거나 다른 생각을 하다가 설교가 끝날 때쯤 정신이 돌아오는 성도가 있습니다. 왜 이런일이 벌어집니까? 그 해답이 고린도후서 4장4절에 있습니다.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한 사탄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데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은 이 세상신 즉 사탄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진리되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에 말씀을 통해서 진리가 충만해집니다.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때 헤르만헷세의 데미안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지난주에 처음온 새신자 정유리양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유리양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명깊게 읽은 데미안을 선물하려고 준비해 놓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소련의 유명한 작가 “솔제니친”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솔제니친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다 흩어져서 고생 고생 하면서 살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살길이 없고 소망도 없어졌습니다.
솔제니친이 낙심해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자기 옆에 누군가가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 앞에 흰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있는 솔제니친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절망과 고통중에 죽어가고 있었던 솔제니친이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 하는데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힘이 솟아나기 시작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신기한 기쁨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평생 작가로 살아가면서 책을 쓰는 기쁨과 즐거움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신비로운 평강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건강도 회복되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암을 치료 받았습니다.
암을 치료받은 솔제니친은 그때부터 담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체제를 비판하는 글도 썼습니다. “너희들이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너희 정권을 바꾸고 경제 구조를 바꿔야 소련이 살 수 있다”라고 소련의 개혁에 대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 때문입니다.
솔제니친이 이런 책을 자꾸 쓰니까 스탈린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매일 열 두 시간씩 중노동을 하면서 지냈고 종종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가 포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문과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전 세계 인권위원회에서 소련에 솔제니친에 대한 인권탄압을 중지하라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일 년 만에 그 수용소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한 끝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이 충만해서 소설을 썼고 그의 소설은 낙심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도 예수님을 믿은후에 세계 최고의 소설들을 썼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책을 통해서 전 세계 수 천만명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기독교 신앙이 담긴 단편들은 연극무대에 올려졌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서 지금도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내 자녀들에게도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를 내 마음대로 부모 마음대로 조종하고 윽박지르면서 키우는 것은 옳은일이 아닙니다. 내 자녀에게 어떤 달란트가 있는지를 끝없이 살피고 밝혀내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발견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이 세상에서 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십니다. 기도만 하면 100% 응답이 옵니다. 그래서 3000명 교인들이 문제만 생기면 그 권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권사님에게도 한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막내 아들이 지금까지 교회를 등지고 지내고 있습니다. 권사님이 그 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지만 아직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 아들은 권사님의 마지막 기도제목입니다.
이 아들은 음악의 천재입니다.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권사님은 이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못하게 했습니다. 아들은 음악을 좋아해서 피아노도 잘치고 기타도 잘치고 작곡도 잘하고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데도 권사님은 남자가 음악은 해서 뭐하냐고 하면서 음악을 못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권사님이 믿음은 좋았지만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그러나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아들이 음악을 하도록 밀어 주었다면 그는 지금쯤 우리나라 최고의 음악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자녀가 가진 달란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뜻대로 아들을 강요 했기에 아들의 달란트는 아쉽게도 묵혀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톨스토이가 작은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목사가 되었다면 톨스토이는 러시아 시골 구석박지에서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로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글 쓰는 달란트를 발견하고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전 세계 250개 나라에 영감있는 소설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복이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첫째는 예배입니다. 둘째는 열심히 전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예배중에 깨닫고 예배중에 회개하고 예배중에 사명을 발견하고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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